77화
대전제가 진행되는 기간은 총 일주일.
첫째날에 열리는 개회식을 시작으로 마지막 날 있을 우승자를 위한 퍼레이드로 끝이 난다.
그 뒤로 열흘 정도 자잘한 축제가 있기야 하지만, 그건 이왕 먼길 행차하신 여행객들이 잠깐 여흥을 즐기기 위한 정도가 고작이다.
‘결과만 좋다면야 뭐… 며칠 정도 노는 것쯤은 괜찮겠지.’
일단은 대전제에 집중 할 때다.
대전제가 진행 될 일주일간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게 많으니까.
“백작님.”
“아. 그래. 이슬린. 무슨 일이지?”
“이번 대전제 참가자 명단을 구해 왔습니다. 속한 영지나 랭크에 대해서도 조사해 왔구요.”
“오. 그래? 역시 대단하구만.”
“…하지만 완벽한 건 아닙니다. 확실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출전자가 하나 있어서…….”
“흠.”
이슬린은 자존심이 상하기라도 한 듯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녀가 가진 정보망을 최대한 활용했는데도 알아내지 못했단 사실이 영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이슬린이 파악하지 못한 기사는 단 한 명뿐이다.
대전제 출전자라면 랭크를 최대한 숨기는 게 대부분이다.
출전자들 간에 괜한 견제를 피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 봐야 거진 랭크 5나 6이겠지만.’
그걸 한 명만 빼고 알아냈다는 건데.
마음 같아선 칭찬해 주고 싶지만 왠지 자존심 상해할 것 같아 조용히 넘어갔다.
“일단 한 번 보자구.”
“여기 있습니다.”
이슬린이 건넨 종이엔 출전자들의 명단과 세부 사항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개중에는 앞으로 있을 경기의 대진표도 있었다.
“호오.”
이번 대전제엔 15의 기사가 출전하기로 되어 있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수였다.
‘하긴. 랭크 5,6이면 크로드나 프리아나 급이라는 건데. 그런 놈들이 많진 않지.’
일단은 이들 중 랭크 6이 있는지부터 확인이 필요했다.
“어디 보자…….”
확실히 왕국 연합에서 주최하는 거라 그런지 출전자들의 출신도 다양했다.
“위셀란에서 셋, 도라스도 하나 오고……. 아이소테르에서 둘이네?”
“네. 확인된바로는 아이소테르 사절단과 같이 온 호위기사입니다.”
“오호. 왕족 호위 기사라 이거지.”
피식 웃으며 프리아나를 흘긋 바라봤다.
녀석은 은근히 신경 쓰이는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럴 거면 사절단이랑 같이 올 걸 그랬네. 상대가 어떤 놈인지 확인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사절단은 보통 대전제 일주일 전엔 출발하니까요.”
“그래. 그땐 정신 차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었지.”
사실 말이 그렇단 거지 아이소테르 왕족 녀석들이랑은 엮기고도 싶지 않았다.
에런골드 그놈이나 갈렌 왕자나 꼴뵈기 싫은 녀석들투성이니까.
그나마 이번 사절로 참가한 이글렌 공주는 좀 다르다지만…….
‘이글렌.’
소설에서도 꽤나 기억에 남았던 등장인물이다.
미친 망나니 갈렌 왕자에 비하면 그나마 에런골드의 후계자다운 녀석이었으니까.
하지만 인생이란 능력만으로 판가름되는 게 아니다.
운.
이글렌 공주는 운이 더럽게도 없었다.
‘그러니 결국엔 그런 최후를 맞이했지.’
개인적인 심성은 그리 나쁜 녀석 같진 않지만, 왕족이란 건 심성과는 별개로 귀찮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뭐가 됐건 엮여서 좋을 건 없다는 건 갈렌이나 이글렌이나 거기서 거기다.
“응?”
잠시 딴생각을 하다 놓친 게 있다.
출전자는 총 15명.
16명이 아닌 15명이다.
덕분에 딱 한 명이 부전승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건데.
“그게 나네?”
“네. 아무래도 출전자 중 유일하게 백작위를 갖고 있어 배려를 받은 듯합니다.”
“흠. 아직 지장에 잉크도 안 마르긴 했다만, 백작은 백작이긴 하지.”
덕분에 난 남들 4번 싸울 때 3번만 싸워도 됐다.
‘마침 딱이네. 1차전은 첫째 날에 열린다 했으니 시간이 좀 비겠어.’
“1차전은 부전승으로 올라가실 테니, 염두해 두어야 할 인물은 아마 셋 정도일 겁니다.”
“셋?”
“우선 첫 번째 대전 상대는 아마 이자가 될 겁니다.”
[피츠 라이트 - 아이소테르]
뭔가 술을 좋아할 것만 같은 이름의 기사.
나와 같은 아이소테르 출신이었다.
“아, 아이소테르 사절단이랑 같이 왔다는 사람이군.”
동향 사람과 먼 타지에서 싸운다는 게 좀 마음에 걸리지만, 싸움은 싸움이니까.
“실력은 괜찮나?”
“네, 백작님. 그건 제가 보증합니다.”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프리아나가 대신 대답했다.
“아는 사인가?”
“저와 같은 기수로 졸업한 친구입니다. 작년 대전제 준우승자였죠.”
“준우승이라. 우승은 너였단 그 대전제 말이군.”
“뭐… 그렇습니다.”
프리아나는 멋쩍은 듯 머릴 긁적였다.
“아무튼 그런 친구니 1차전은 무난하게 이길 겁니다. 그러니 2차전은 백작님과 붙을 가능성이 높지요.”
“그렇군. 그럼 다음으로 눈여겨볼 녀석은?”
프리아나가 한 명을 가리켰다.
“이자입니다.”
[가리온 - 위셀란]
“위셀란 대표로 나온 기사입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검술 랭크는 5. 하지만 최근에 세 번째 벽을 깨부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흠…. 랭크 6이면 좀 빡셀 텐데. 뭐 그건 나중 가서 확인해 보자구.”
이제 마지막 요주의 인물 하나가 남았다.
[레니 베나트 - 프로스트 랜드]
“프로스트 랜드? 그 먼 데서?”
프로스트 랜드는 대륙 최북단에 위치한 왕국이다.
거기서 여기까지 오려면 한참은 걸릴 텐데.
“네. 아무래도 대전제 우승 상품 때문에 온 듯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먼 길 온 걸 생각하면 딱하긴 하다만, 그건 이쪽도 꽤나 눈독 들이고 있는 입장이라.
“랭크는 의심할 여지없이 6인 기사입니다. 사실상 우승 후보라고 봐야죠.”
“흠…….”
대놓고 랭크 6이라. 어지간히도 우승 상품이 가지고 싶었나 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와는 대진표 반대쪽에 있다는 거다.
붙게 된다면 결승에서나 가능할 대진운이다.
“이게 단가? 아까 뭐 확실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녀석 있다고 하지 않았나?”
“네. 위셀란의 데카드라는 가문에서 온 자입니다만… 그 외엔 아는 정보가 없습니다. 랭크도, 어디서 뭘 하던 자인지도 확인이 어렵더군요.
하지만 그자는 잘 가 봐야 준결승전에서 레니 베나트와 맞붙게 될 겁니다. 그자를 이긴다면 백작님과 붙을 수도 있겠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어렵다고 봐야죠.”
“그렇구만.”
이슬린의 말에 수긍하면서 정체 불명의 기사에 대해 살펴봤다.
[셸랑 데카드 - 위셀란]
위셀란 왕국의 데카드 가문.
이슬린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별 볼 일 없는 남작가 중 하나였다.
사실 셸랑 데카드란 기사 같은 경우는 많았다.
자신의 가문을 알리거나, 유명 가문에 스카우트되기 위해 출전하는 기사도 많았다.
아마 그런 자들처럼 이 셸랑 데카드란 자도 머나먼 시골 촌뜨기 귀족가문 출신이리라.
워낙 깡촌에 박혀 있던 가문이라 이슬린이 알아볼 수 없었던 거고.
하지만 뭔가 묘한 찜찜함이 가슴 한켠을 쿡쿡 찔렀다.
‘셸랑 데카드라. 어디선가 본 듯한 이름인데.’
“끄응…….”
그 출처를 떠올리려 미간에 골이 깊게 파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끝내 데카드란 가문에 대해서 떠올릴 순 없었다.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으신가요?”
이스바르트는 그런 내가 걱정 되는 듯 물었다.
“데카드란 가문. 들어 본 적 있나?”
“아뇨… 저도 처음 들어 봐요.”
“저도 처음 들어 봅니다.”
“…그럼 됐다. 모르는 걸 기억해 낼 순 없을 테니까.”
똥 싸고 밑 안 닦은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지금은 그런 자잘한 데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대전제가 진행되는 틈에 확인하러 가 봐야 할 곳이 있다.
“일단 이쯤하고. 슬슬 가 볼 시간이군.”
“네. 정오부터 개회식이 시작된다 했으니까요.”
“1차전은 개회식 끝나고 바로 이어진다고 했지?”
“네.”
“그럼 시간이 좀 비겠군.”
“네? 시간이 비다뇨? 어디 가실 곳이라도……?”
“그건 그때 가서 얘기하자고.”
내 말에 다들 궁금한 표정을 지었지만 지금 알려 줄 생각은 없었다.
난 녀석들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는 것 대신 씨익 한 번 웃음 짓기만 했다.
* * *
콜로세움을 연상케 하는 둥그런 구조의 원형 경기장.
둥그런 객선 한쪽 끝에선 개회식 진행을 위해 단상 비스무리한 것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대전제가 기사들의 영입 시장 느낌이 강하긴 했지만, 결국엔 왕국 연합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축제 같은 거다.
덕분에 행사치레로 이것저것 하는 게 많았다.
[다음은 위셀란을 위해 희생하신 기사분들을 위한 묵념이 있겠습니다. 일동 묵념.]
빰빠밤~
“ㅈ나 지루하군.”
개회식이랍시고 사람 붙잡아 놓고 이게 뭐하는 짓이람.
맘 같아선 얼른 내빼고 싶지만 출전자들은 개회식에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백작위를 배려해서인지 자기소개 같은 낯간지러운 건 없었지만, 그래도 지루한 건 매한가지였다.
“지루하다뇨. 위셀란을 지키기 위해 한 몸 불사른 기사님들을 향한 묵념인데.”
“그래서 안 지루하다 이거야?”
“솔직히 하품 나올 것 같긴 합니다.”
“크흐흐. 그렇긴 하지.”
프리아나와 시시콜콜한 농담 따먹기가 그나마 재밌을 지경이었다.
“하암… 언제 끝나는 거야? 대체.”
“이제 각국 사절단의 인사만 하면 끝나는 걸로 기억합니다.”
[먼저 이 자리를 위해 먼 길 행차해 주신 사절단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어우. 그럼 저 인사말을 일곱 번이나 들어야 된다는 거 아냐.”
끔뻑끔뻑 감기려는 눈을 애써 붙잡고 사절단의 인사말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오늘 이 자리에 아이소테르의 이름을 대신하여 자리한 것에 무한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오.”
순서상 아이소테르 사절단이 맨 마지막이다.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아이소테르 사절단의 발언을 귀 기울여 들었다.
‘저 여자가 이글렌 공주구나.’
출전자 일행은 단상의 반대편에 자릴 하고 있어 이글렌 공주의 모습이 똑바로 눈에 들어왔다.
비록 코딱지만 하게 보이긴 했지만 이글렌 공주를 구경하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새하얀 피부에 에런골드를 똑 닮은 반짝이는 금발.
새하얀 드레스를 길게 늘어뜨린 채 아이소테르의 대표로서 축사를 올리고 있었다.
개망나니 갈렌 왕자에 비하면 천사나 다름없는 외모였다.
물론 갈렌도 외모만 놓고 본다면 잘생긴 축에 속했지만…….
‘워낙 개 같은 놈이어야지.’
사람이 미우면 멀쩡하게 생긴 놈도 못생겨 보인다 하지 않나.
그에 비하면 아직 이글렌 공주한테 악감정은 없다.
어쩌면 악감정보단 동정심이라고 해야 하나.
소설 속 이글렌 공주의 결말을 아는 입장이라 미움보단 안쓰러움이 컸다.
‘아니지. 황금 은행 습격도 막았는데, 저 여자 운명도 좀 바뀌는거 아닌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애초에 이안 임페라라는 작자가 대전제에 참가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
여기서 일어난 나비 효과가 어디까지 갈 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이상으로…….]
“어우. 끝났네.”
지루한 개회식의 끝을 알리는 멘트가 나오자마자 자릴 훌훌 털고 일어섰다.
개회식이 끝나고 오늘 하루 종일 1차전이 진행된다.
부전승을 따낸 나로선 하루를 벌은 셈이었다.
그럼 여유 있을 때 후딱 갔다 와야지.
“가실 겁니까?”
“그래.”
“그래도 상대할 출전자들의 검무는 한 번 살펴보시는 게…….”
탐색전도 싸움이다.
프리아나가 봤을 땐 상대의 실력을 가늠할 기회를 그냥 버리고 가는 게 아쉬운 듯했다.
“너가 대신 해 주면 되잖아? 그러라고 데리고 온 거니 밥값은 하라구.”
“아! 그렇군요! 그럼 한 치의 움직임도 놓치지 않고 낱낱이 파헤치겠습니다.”
사명감을 띈 프리아나의 두 눈엔 불이 들어올 지경이었다.
그것에 더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휴식을 줬다.
“너희 둘도 적당히 구경하다 심심하면 거리 공연도 즐기고 그래라.”
“네! 백작님!”
“난 오늘 저녁 늦게 들어올 것 같으니 알아서 잘 마무리하고.”
“네. 백작님.”
그렇게 난 일행들을 뒤로하고 대전제가 한창인 경기장에서 빠져나왔다.
“이제 루팅 좀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