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아이소테르의 국왕 에런골드 2세.
대전쟁에 휘말려 선왕 시절까지만 해도 나라가 휘청거렸지만, 현왕의 지혜를 넘어선 무언가는 아이소테르를 왕국 연합 최고의 자리에까지 자리매김시킨 남자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걸까.’
왕의 알현실 앞에 무릎을 꿇은 재상 두아트리스.
그는 좀처럼 보기 힘든 국왕의 눈빛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매사 감정이란 느껴지지 않을 차갑기 그지없는 남자였지만 요 근래 반응이 남달랐다.
제 자식을 향해서도 따사로운 눈빛 한번 내보이지 않던 국왕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가 흥미롭게 바라보는 이는 다름 아닌 변방의 깡촌 백작가 망나니 하나.
이따금 개과천선하겠답시고 뻗대는 망나니쯤은 수 없이도 봐 왔다.
짧으면 사흘, 길면 한 달 만에 다시 미친놈마냥 개짓거릴 해 대는 게 그런 놈들이다.
‘이번 놈은 좀 다르긴 하지.’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술에 절어 사람이나 패고 다니던 망나니 중에 개망나니.
그런 작자가 불과 일 년 만에 눈부신 성장을 보였다.
그리곤 당당히 이번 대전제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아이소테르 왕국 대전제 참가자 명단]
-….
-이안 임페라.(검술 랭크 5)
솔직히 이안 임페라라는 이름을 처음 명단에서 봤을 땐 믿기지 않았다.
검술 랭크 5가 뉘집 개이름도 아니고.
랭크 5면 왕가 근위 기사단인 적갑 기사단에 이름을 들이밀 수 있는 경지다.
그걸 1년 만에 달성하고 대전제에까지 나간다?
‘흠…….’
믿기진 않았지만 믿어야 했다. 대전제 참가 명단을 허투루 기재했다간 즉시 참형이니까.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면서 죽을 놈은 없다.
에런골드는 참가자 명단을 한번 슥 훑어보곤 입을 열었다.
대전제는 일곱 왕국에서 번갈아 치러지는 대축제. 가문의 이름을 걸고 참가하기 위해선 국왕의 허가가 필요했다.
“허가하라.”
“…네, 국왕 전하.”
“흥미로운 자가 있군요. 아바마마.”
에런골드의 옆에서 이글렌 공주가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같은 명단을 하나 더 건네받았던 터라 그녀도 이안 임페라의 이름을 본 뒤였다.
“…….”
그런 그녀의 옆에 갈렌 왕자는 아무런 말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자의로 그런 건 아니다.
그에게 내려진 에런골드의 ‘침묵의 금제’ 때문이었다.
금제의 내용은 간단했다. 알현실 내에서 한 달간 절대로 입을 열지 말기만 하면 된다.
한 달간 내려져 있던 칩거령을 두아트리스가 간곡히 부탁해 가며 침묵의 금제쯤으로 끝낼 수 있었다.
“오라버니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아차! 제가 그만 실언을 했군요? 후훗.”
“…….”
갈렌은 이글렌이 못마땅한 듯 얼굴이 붉어졌지만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갈렌이 할 수 있는 건 동생을 매섭게 노려보는 것 말곤 없었다.
왕자와 공주의 신경전에도 에런골드는 딱히 관심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갈렌보단 이글렌에게 마음이 갔다.
아직 17살에 불과한 나이였지만 그녀가 공주가 아닌 왕자였다면 차기 후계자로 삼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이는 에런골드뿐만 아니라 이글렌, 두아트리스, 심지어 갈렌까지 잘 알고 있었다.
‘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년!’
“후훗.”
자신이 국왕 자리에 오르면 저년을 어떻게서든 끄집어 내리리라 다짐했다. 물론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번 대전제는 이글렌이 참석해라.”
“네, 아바마마.”
이번 대전제는 위셀란 왕국에서 열린다.
타국에서 열리는 축제에 참석한다는 건 한 나라를 대표로 나간다는 것.
이는 갈렌을 상당히 무시한 처사였다.
“…….”
갈렌은 화도 낼 수 없어서 콧김만 씩씩 내뿜었다.
이글렌을 향해 분노의 눈길을 보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에런골드가 한 번 갈렌을 흘긋 바라보자 갈렌은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리 왕자라도 국왕 앞에선 화조차 맘대로 낼 수 없었다.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이글렌은 그런 오라비의 모습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알현실에서 빠져나왔다.
“…하.”
간만에 오라비를 골탕 먹여 기분은 좋았다.
하지만 그녀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에런골드는 왕위를 내려놓을 것이고, 차기 왕위는 갈렌의 자리가 된다.
공주인 그녀로선 적당한 유력 가문 귀족이나 타국의 왕자와 결혼하는 것 말곤 방도가 없었다.
다행히 어머니를 닮아 수려한 외모까지 가진 터라 벌써부터 여기저기서 혼담이 들어오기까지 했다.
다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 생각해 모두 거절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눈에 차는 남자가 없는 이유가 가장 컸다.
“흠…….”
아이소테르의 유력 가문 귀족. 아마 아이소테르에선 아드로네이 후작가의 아들 정도는 돼야 적당하지 싶다.
그녀보다 열 살 넘게 차이 나긴 했지만, 공주의 결혼에 있어선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의 머릿속에선 대전제 참가 명단에서 본 한 사내의 이름이 떠오르고 있었다.
* * *
올해 대전제는 위셀란 왕국이 담당했다.
대전쟁 이후로 한 번도 빠짐없이 거행된 터라 위셀란에선 세 번째로 맞이하는 대축제였다.
“밖이 시끄럽군.”
“그럴 수밖에요. 일곱 왕국이 한데 모이는 몇 없는 축제니까요.”
“작년엔 아이소테르에서 열렸다지?”
“네! 백작님! 제가 우승했던 대회였죠!”
프리아나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가슴을 쭉 폈다.
맨날 내 옆에 있어 체감이 그리 크진 않았지만, 지금껏 열다섯 명밖에 없는 우승자 중 한 명이다.
게다가 나이도 서른이 채 되지 않았으니 장차 크게 성장할 인재인 건 누가 봐도 고갤 끄덕일 거다.
‘그러니 기사단장까지 했겠지.’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그가 검술 랭크 7의 기사단장이 될 거란 건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았다.
사실상 오베론 같은 미친놈을 제외하곤 랭크 8이 끝이라는 게 정설.
랭크 7이란 건 그만큼 강력한 경지였다.
“프리아나.”
“네! 백작님!”
“네가 봤을 때 이번 대전제. 내가 우승할 가능성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음…….”
프리아나는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인 듯 생각에 잠겼다.
덩달아 나도 지난날 프리아나와의 대련을 떠올렸다.
녀석과 나 사이에 진심을 담은 첫 대련은 내 패배로 끝났다.
새로 얻은 단전을 실전에 써 본 건 처음이었다만, 그걸 감안해도 프리아나의 경지는 높았다.
수년간 랭크 5에 오른 채 다음 벽을 두드리고 있는 게 프리아나다.
어쩌면 자그마한 계기 하나로 랭크 6을 달성할지도 모르는 일.
그런 녀석을 콩알만 한 단전 하나 얻었다고 바로 이기는 건 자만에 가까웠다.
‘그래도 어제는 해볼 만했어.’
어제 아침. 마지막 점검이라도 해 볼 겸 프리아나와 다시금 검을 겨눴다.
결과는?
‘무승부였지.’
둘의 오러가 모두 바닥이 날 때까지 싸우다 결국엔 연습용 철검이 부러지고 말았다.
덕분에 하룬 밑에서 일하던 인부 하나가 눈물콧물 쏙 뺐다.
그가 검을 제대로 안 만든 건 아닐 거다. 연습용 철검을 가지고 수 시간 합을 나눈 우리 잘못이지.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입바른 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물어본 줄 아나?”
“하하! 당연히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프리아나는 한 번 크게 웃곤 다시 표정을 진지하게 바꿨다.
“제가 장담할 수 있는 건… 대전제에 랭크 5만 나온다면 백작님께서 지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 정돈가?”
“네. 어제 대련으로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백작님의 유래를 알 수 없는 검법와 랭크 5가 합세한다면, 동급에선 절대로 지지 않습니다.”
유래를 알 수 없다는 말은 폄하가 아니었다.
내가 쓰는 검법은 오랜 세월 기사 가문에서 내려온 검법 같은 게 아니다.
몬스터를 베고 사람을 베면서 자연스레 터득한 나만의 검법. 때문에 프리아나한테도 종잡을 수 없다는 이야길 자주 들었다.
“그래. 그 정도면 됐다.”
“감사합니다.”
랭크 5끼리 싸움에선 절대 지지 않는다.
그럼 대전운만 따라 준다면 상위 토너먼트까진 진출 가능하단 얘기였다.
아직 출전 인원까지 다 아는 건 아니라 랭크 6이 등장할지는 미지수였다.
이슬린도 나름대로 알아본다곤 했지만 타국의 귀족 가문까지 참석하는지라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히야…….”
이스바르트가 창 밖에 고갤 빼꼼히 내민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짭짤한 바닷바람에 이스바르트의 긴 흑발이 휘날렸다.
말이 끄는 마차가 아니라 그런지 이스바르트도 멀미 없이 멀쩡했다.
“바다는 처음인가?”
“…네! 백작 전하!”
“그래. 이왕 온 김에 실컷 봐둬라.”
“헤헷. 감사합니다!”
머리카락이 가끔 뺨을 건드려 거슬리긴 했지만 저토록 좋아하는데 그만두라 하기도 뭐했다.
“프리아나, 너가 이쪽에 앉아라.”
“불편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가끔은 역방향으로 달려보고 싶어서.”
별것 아니라는 듯 프리아나가 자리를 바꿨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리아나가 이스바르트를 째려보긴 했지만 창 밖에 정신이 팔려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내달린 마차는 위셀란에 도착했다.
지도상으로 아이소테르에서 남쪽으로 주욱 내려가면 나오는 왕국이다.
해상 왕국 위셀란.
위셀란은 수도가 위치한 대륙 땅와 수많은 군도로 이루어진 해상 왕국이다.
큼지막한 섬끼리는 다리로 이어져 있어 마차를 타고도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했다.
이번 대전제가 열리기로 한 곳은 대륙 땅 바로 옆에 위치한 가장 커다란 섬.
원래는 다른 지명이 있었지만 지금은 ‘기사단의 성지’라 불리는 섬이다.
대전쟁 당시 가장 많은 기사들이 이 섬에서 숨을 거둔 섬이기도 했다.
대전쟁 후, 위셀란에선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이 섬에 새로운 명칭을 내렸다.
그게 바로 기사단의 성지.
‘엄청 죽었지.’
당시 ‘위셀란의 랭크 보유자라면 모조리 죽였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위셀란의 기사단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대륙 지도를 펼치고 보면 고갤 갸웃 할지도 모른다.
옛 카잔의 영토와 위셀란은 다소 거리가 떨어져 있으니까.
카잔에서 위셀란까지 육로를 거쳐 오려면 아이소테르를 횡단해야만 가능했다.
하지만 위셀란은 해상 왕국다. 육로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카잔은 대륙을 크게 돌아 영겁의 기사단 일부를 위셀란 후방에 상륙 시켰다.
수도가 함락되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기에 어마어마한 수의 기사단이 투입됐고, 그 결과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거다. 결국 수도까지 함락됐으니 개죽음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덮으려고 성지니 뭐니 하는 거지.’
성지니 뭐니 거창하게 희생자를 추켜세우곤 있지만 그런다고 죽은 사람들이 살아 돌아오진 않는다.
죽은 이들만 억울할 뿐.
“도착했습니다, 백작님.”
마차에서 내리자 짭짤한 바닷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하늘에선 갈매기 비스무리하게 생긴 파란 새가 날개를 펄럭였다.
저 멀리 새하얀 모래 위로 파도가 넘실거리는 게, 제법 바다 휴양지 분위기도 났다.
대전제가 열리는 건 기사단의 성지 내륙.
높다랗게 자라난 등대 하날 주위로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다.
과거엔 병사들만 주둔하는 섬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렇게 일반인들도 드나들 수 있는 섬이 됐다.
오랜 평화에 사람들 인식이 느슨해진 것도 컸다.
“와아아…….”
저 멀리서 사람들의 환호성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대전제가 시작된 건 아니다.
대전제가 열리기 전 거리 공연하는 사람들일 거다.
대전제에 참가하는 건 검술 랭크 보유자로 제한되지만, 구경하는 건 일반인들도 가능하니까.
매일 농사짓기만 바쁘던 평민들에겐 귀하신 귀족 나으리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걸 볼 수 있는 귀한 행사다.
게다가 수도 바로 옆에 위치한 섬이라 구경하러 오기도 편했다.
“후.”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곤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