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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75화 (75/222)

75화

“으음. 맛있군.”

누룽지 빛깔로 곱게 구워진 스테이크를 큼직하게 썰어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그러면서 달큰한 과일 주스까지 곁들이자 몸에 생기가 돌았다.

“…입에 맞으시니 다행입니다.”

‘그렇게 난리를 피우고도 그런 게 잘도 넘어가냐’는 말이 목구멍에 걸린 눈빛이다.

하지만 그런 눈치를 줘도 괜찮다. 단전이 생겼으니까.

“후후.”

참으려 해도 입꼬리가 치솟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혼자 히죽거리면서 밥 먹고 있는데 급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었다.

‘왔군.’

“백작님!”

“백작 전하!”

“이보게!”

임페라 가문에 딸린 가신들이 모두 한걸음에 달려왔다. 다들 내 걱정 많이 한 모양이다.

“아들아!”

“아버지?”

그런 이들 중엔 에이먼 백작도 함께해 있었다.

아들이 쓰러졌단 소식에 크라니그 산맥을 한걸음에 달려와 있었다.

하기사 에이먼에게 이안은 하나뿐 없는 아들이면서 가족이었다.

아들이 미친 망나니짓을 해도 꾹 참은 양반인데 닷새나 기절했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정말이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후후, 전 괜찮습니다.”

“…세상에! 방금 막 병상에서 일어난 녀석이 고기라니! 대체 무슨 정신인 게냐!”

에이먼은 이슬린을 다그치려 들었다. 괜히 달라는 거 줬다가 욕먹게 생긴 이슬린이 억울함에 짜증이 약간 섞인 표정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달라 그랬거든요.”

“뭐라? 그래도 그렇지…….”

“자. 보십쇼.”

귀찮은 설명 대신 왼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왼손 위로 희뿌연 숫자가 떠올랐다.

[이름 : 이안 임페라.]

랭크 : 5(검술), 5(마법)

“으응?!”

“허억!”

이를 본 에이먼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억울해하던 이슬린도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랭크 5!”

“두, 두 번째 벽을 허물으신 겁니까?”

“그래. 아까 얘기했잖아. 그리고 저번에 말하지 않았냐. 약은 쓰기 나름이라고.”

“아……! 그래서 닷새 동안 기절을…….”

프리아나는 이제야 무슨 영문인지 이해한 듯 고갤 끄덕였다. 반면 에이먼은 무슨 소린지 당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냐? 약이라니? 그건 그렇고 대체 랭크 5를 어떻게…….”

“일단 앉아서 식사나 하면서 이야기하죠. 다들 밥 먹었나?”

“아직 안 먹었습니다만…….”

“그럼 앉자고. 이슬린도 모처럼인데 같이 먹지.”

“네. 백작님.”

요리는 주방 인부들한테 맡기고 모두 한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지난 날 있었던 이야기들을 하나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황금 은행의 습격을 막은 것부터 백작위를 수여 받은 것뿐만 아니라 고대의 보고에서 얻은 기연까지 모두.

드문드문 알고 있던 사실들을 한번에 늘어놓자 다들 흥미진진한 옛 이야기라도 듣는 것마냥 귀를 쫑긋 세웠다.

“…그렇게 된 겁니다.”

“허…….”

가장 놀란 건 에이먼이었다. 맨날 놀기만 바쁘던 개망나니 아들 녀석이 이렇게까지나 일을 벌이고 다닐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대체 그런 건 모두 어디서 들은 게냐?”

“별거 아닙니다. 술 먹으면서 들었던 자잘한 소문, 가끔 읽었던 책의 한 구절, 뭐 그런 게 잘 얻어 걸린 거죠.”

“으음… 사실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되긴 하지.”

“후후.”

다행히 별다른 의심 없이 다들 내 말을 믿어 줬다.

사실 웬 멸망한 세상에서 온 영혼이 이 몸에 깃들었다는 것보단 훨씬 신빙성 가는 이야기다.

‘그건 말 못하지.’

“아무튼 일이 이렇게 됐으니. 좋은게 좋은거 아닙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검술과 마법 랭크 5를 달성했는데.”

“하하! 그렇긴 하지!”

에이먼은 아들의 성장이 마냥 기뻤다.

잘난 아들 덕에 몰락 직전까지 놓였던 가문이 다시 살아나게 됐다.

굳이 따지자면 그 아들 때문에 몰락할 뻔했지만. 그런 건 넘어 가자고.

“하오나 백작님.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프리아나가 제법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내 목표는 랭크 5 찍고 끝나는게 아니다. 남들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강한 힘. 그게 필요했다.

그리고 강한 힘이란 건, 혼자 숨기고만 있는다고 될 게 아니었다.

“당장 할 일은 정해 뒀다.”

“그게 뭐냐? 아들아.”

“대전제에 참가할 겁니다.”

대전제란 단어에 식탁 앞에 앉은 이들 가운데 일순간 적막이 맴돌았다.

“대, 대전제?”

“하오나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위험하니까 할 만한 거지.”

대전제.

매년 봄, 이맘때쯤이면 열리는 연례행사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서로의 검무를 펼치며 친목을 다지는, 명목상으론 화기애애한 축제다.

매년 각 왕국에서 번갈아 가며 열리는 축제.

이는 각지의 귀족들이 가진 최고의 기사들을 내보내 토너먼트 형식으로 진행된다.

말이 축제지 실상은 귀족 가문들의 가진 서로의 무력을 과시하는 자리다.

또한, 이 자리엔 가문에 속하지 않은 귀족들도 출전한다. 참가 자격은 검을 다룰 줄 아는 이라면 모두 참가 가능하니까.

하지만 맨날 밭 갈고 나무 캐는 농부들이 검술을 배울 경우는 없다.

가문에 속하지 않은 이들은 십이면 십, 모두 제니스 기사학교에서 내려온 기사들이다.

기사 학교 출신의 기사와 귀족 가문 출신의 기사가 한데 모여 펼쳐지는 대련. 힘깨나 쓰는 가문에선 자신의 힘을 뽐내고, 새로운 인재를 영입할 이적 시장 느낌이 강했다.

“너도 참가해 본 적 있지?”

“그렇긴 합니다만…….”

프리아나도 몇 번 나가 본 적 있는 대회다. 그러다 마침 에런골드 2세의 눈에 띄어 왕가를 섬기는 기사가 됐었다.

“저도 한 번 우승을 해 보긴 했지만, 그땐 운이 좋아서였습니다. 때마침 세 번째 벽을 깬 이는 없었으니까요.”

세 번째 벽. 랭크 6의 괴물.

사실 랭크 6쯤 되면 대전제에 나가지 않아도 알아서 여기저기서 모셔 간다.

게다가 랭크 6이라는건 사실상 준 기사단장급. 지금 시점에선 랭크 6만 되더라도 홀로 영지 하날 박살 낼 만한 강자인 게 사실이다.

크로드가 그쯤 되는 거고.

프리아나는 이 대전제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랭크 5 사이에선 가장 강한 자인 셈이다.

“그럼 잘 됐네. 이번에도 운이 좋으면 될 테니까. 안 그래?”

“음…….”

“굳이 그렇게 무릴 할 필요가 있느냐? 랭크 5가 되었으니 이제 편히 살아도 된다 생각한다만…….”

에이먼은 아들이 걱정되는지 영 마음 내켜 하지 않았다.

대전제는 애들 장난감 목검으로 하는 대련이 아니다. 모두 날이 있는 검, 원할 경우엔 자신들이 가진 마검까지 사용하는 게 대전제다.

때문에 대전제에 나갔다가 어이없게 목숨을 잃거나 블랭크가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아닙니다. 랭크 5가 되었으니 더욱이 힘을 내보여야지요. 지금껏 우릴 얕잡아 보던 놈들한테 보여 줘야 합니다. 임페라 가문은 더 이상 어중띤 거지 백작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죠.”

“으음. 네가 그렇게까지 생각한다면 더는 말리지 않겠다. 말려도 들을 눈빛이 아니구나.”

“그리고.”

“그리고?”

“대전제가 끝나면 아버지께서도 이곳 새 저택으로 옮기시는 게 어떻습니까?”

에이먼은 옛 임페라 백작령을 계속 지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게 영 마음에 걸렸다.

저번 백작위 수여식 때도 초대 받지 못했고, 에이먼이 이안의 아버지인 이상 무시 받게 놔두고 싶진 않았다.

‘애초에 사람 자체는 착하기도 하고.’

이안의 아버지란 사실 외에도 에이먼이 그간 보여 준 행보는 꽤나 내 마음을 움직였다.

블랭크가 될 걸 뻔히 알면서 아들 대신 결투 재판에 나서려 했던 인물이다.

“…그래. 알았다. 내 나이도 있고 슬슬 혼자 있으려니 외롭던 참이더구나. 일레느도 네 얼굴 보고 싶어 했고.”

“그랬군요.”

‘그러고 보니 일레느를 본 지 꽤 됐네. 거진 1년 가까이 됐나? 그 나이대면 1년 사이에 쑥쑥 클 텐데.’

“그럼 그렇게 된 걸로 하겠습니다.”

난 접시를 깨끗이 비우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응? 벌써 다 먹은 게냐? 이제 어딜 가려고?”

“어딜 가긴요. 대전제 나가려면 준비를 해야죠.”

“저도 가겠습니다!”

프리아나가 고기를 썰어 먹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난 그런 그를 억지로 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마저 다 먹고 오라고. 오랜만에 일어난 김에 몸도 좀 풀어야 하니까.”

“예! 그럼 다 먹고 가겠습니다!”

고기를 우적우적 씹어 먹는 프리아나를 뒤로하고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 * *

“후…….”

연무장 도착하자마자 몸을 꼿꼿이 선 채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배 속 깊숙이 자리 잡은 단전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직 콩알만 한 수준의 단전이었지만 그럴수록 성장 속도는 더 빠르다.

쿠구구……!

단전 내에서 마나를 회전시켜 벽을 갉아 내려갔다.

조금씩 넓어질 때마다 통증이 느껴졌지만 기분 좋은 통증이었다.

“후읍.”

들이쉬고, 내쉰다.

단순한 호흡에도 전신의 마나가 생동감 있게 용솟음쳤다.

이미 랭크 시스템을 통해 마나를 다루는 데는 익숙했다.

온몸의 혈관을 따라 헤엄치던 마나가 다시 한번 단전을 파고들었다.

컨디션만 놓고 보면 옛날 몸뚱이 못지않았다. 우선은 새로워진 몸을 익힐 겸 가볍게 발을 굴렀다.

토옹. 토옹.

발에 날개라도 돋힌 듯 몸이 가볍게 하늘로 튀어 올랐다. 이어서 허공에 권격을 내질렀다.

파앙!

가볍게 내지른 주먹에도 파공성을 일으키며 듣기 좋은 울림이 퍼져 나갔다.

“…좋아.”

이번엔 검을 뽑아 들었다.

싸우려는 게 아니라 오러를 살피는 용도라 용린검은 잠시 검집에 고이 모셔 뒀다.

연무장에 마련된 연습용 철검. 날이 벼려져 있진 않았지만 오러 소드를 뽑는 데는 전혀 지장 없었다.

우웅……!

예전처럼 억지로 오러를 띠는 게 아닌, 곧고 선명한 오러가 검 주위로 자라났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한 오러 소드, 그 자체였다.

“이래야지.”

검술 랭크 5란 이런 거다. 마검으로 억지로 흉내 낸 오러 소드가 아니라 진짜 오러 소드.

기분 좋은 울림과 함께 자리 잡은 오러는 보기만 해도 미소가 띄워졌다.

푸른빛을 내뿜는 검을 쥔 채로 자세를 잡았다.

가볍게 허공을 향해 휘두를 때마다 푸른 검기가 검선을 따라 궤적을 그렸다.

직접 베는 맛을 보려 연습용 허수아비 앞에 섰다.

하룬이 직접 만든 연습용 허수아비는 마핵을 재료로 경도가 상당히 올라간 상태였다.

“…하압!”

좌에서 우로 일직선으로 뻗는 검격이 녀석에게 작렬했다.

예전 같았다면 용린검을 쓰고도 겨우 흠집 내는 게 고작이었다.

…서걱!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마검이 아닌 일반 철검임에도 허수아비의 가슴께에 깊은 흉터를 새겨 넣는 데 성공했다.

츠츠츠츠……!

움푹 파인 틈새는 이내 마핵의 마나를 빨아들이며 재생됐다.

방금 공격에 꽤나 피해가 컸는지, 정수리에 박혀 있던 마핵이 금세 빛을 잃었다.

“흐음… 이러다 마핵이 남아나질 않겠어.”

검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마핵이 박살 나는 건 나도 곤란했다.

허수아비만 상대했다간 금세 알거지 될 판이다.

“몸은 다 푸셨습니까?”

“그래.”

다행히 허수아비를 대신해 줄 사람이 돌아왔다.

검술 랭크 5이자 훗날 아이소테르의 기사단장이 되었을 기사 중에 기사.

처음 이 세상에 왔을 때 내겐 녀석도 머나먼 벽으로만 느껴졌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더 이상 마검도 뭣도 없이 정직하게 검을 나눌 수 있다.

“소화 좀 시켜 볼까?”

“후후! 네! 저도 그럴 참이었습니다!”

프리아나에게 똑같은 연습용 철검을 던졌다.

이를 손에 쥐자 금세 푸른빛의 오러가 선명하게 빛을 띠었다.

“이젠 봐줄 필요 없겠어?”

“다행이군요!”

더 이상 말이 뭐가 필요하겠나. 말 대신 두 자루의 푸른 검이 맞부딪히며 섬광을 내뿜었다.

오러 소드의 충돌에도 꿈쩍 않는 내 모습에 프리아나가 눈썹을 으쓱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 짧은 시간에 랭크 5를 달성하시다니…….”

“칭찬이나 하러 왔어?”

카앙!

양손에 쥔 검을 강하게 밀어붙이자 강한 스파크를 튀며 둘의 몸이 밀려 나갔다.

거리가 좀 벌어지자 프리아나가 자셀 잡았다.

“그럼… 저도 오늘부턴 진심으로 하겠습니다!”

“그래!”

속검의 기사 프리아나.

날카로운 발톱을 숨긴 매 한 마리가 깊숙이 들어오는 찌르기 자셀 취했다. 나도 이에 질세라 검을 모로 세웠다.

…파앙!

이내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와 함께 프리아나의 신형이 앞으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예전이었다면 겨우 눈에 담는 게 고작이었을 속도. 이젠 나름 대처까지 가능했다.

…콰앙!

두 검이 다시 한번 크게 부딪히고, 연무장엔 승자만이 홀로 서 있었다.

물론 뒤로 나자빠진 건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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