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74화 (74/222)

74화

“흠…….”

탁자 위에 놓인 영약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영롱한 보랏빛을 띤 액체는 겉보기엔 와인 비스무리한 맛이 날 것만 같았다.

“문제는 그게 아니란 거지.”

엔델로 광산에서 갖은 고생 끝에 얻은 영약. 소설에서 이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맛 본 건 베네르 백작 말고는 없다.

‘그러니까…….’

베네르 백작이 고대인의 보고를 찾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소설 속 줄거리상 지금으로부터 약 십여 년 후. 엔델로 광산의 채굴량이 점차 떨어지자 베네르 백작은 최심부까지 광부들을 보낸다.

당연한 일이지만, 자이언트 웜도 없이 일반 인부들로만 구성된 이들은 결국 용혈을 건드려 대참사를 불러일으키고 만다.

그럼에도 베네르 백작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인부들을 투입시키고, 거부한다면 노예로 만들거나 더러운 협박까지 일삼았다.

그러다 부서진 잔해 틈에서 발견한 게 이 고대인의 보고다.

그럼 이 보고는 또 어떻게 뚫었을까.

‘뭐 어쨌겠어. 뚫릴 때까지 계속 사람을 갈아 넣은 거지.’

무작정 대문 부수고 들어간 베네르 백작은 나처럼 침입자로 간주돼 골렘들을 상대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나야 공략법을 알았다지만, 베네르 백작이 이를 알 리가 없었다.

결국 자신의 사병 대부분을 희생하고 나서야 고대인의 보고로 진입하는 데 성공한다.

그만한 개고생을 하고서 얻은 게 고작 이 영약 하나뿐.

애초에 수조 안에 잠들어 있던 녀석을 억지로 꺼내 고문하다 일어난 일이지만.

‘그리고 나서야 영약을 먹었다지.’

애써 얻은 영약이니 다른 이들한테 실험해 볼 수도 없었다.

결국 베네르 백작은 영약 한 방울을 와인에 희석시켜 마시게 된다.

그 결과는.

‘마시고 나서 하루 종일 복통을 앓았다는 건데…….’

그리곤 영약이 썩은 거라며 불에 태워 없애 버리는 걸로 끝난다.

하지만 소설의 전체 줄거리를 아는 내겐 다르게 다가왔다.

우선 엔델로 광산에 묻혀 있던 보고의 쓰임새다.

고대인은 왜 이런 걸 만든 걸까? 대재앙을 피하려고?

그럼 고대인만 잔뜩 넣지 상자는 왜 넣은 걸까? 마치 게임에서 초보자용 아이템 세트라도 주는 것마냥 무기, 장신구 2개, 포션 하나 이런 식으로?

여기서부터 의문을 가지면 금방 알 수 있다.

애초에 상자에 들어 있던 건 한 세트다. 낯선 세상에 떨궈진 누군가를 위한 초심자 전용 세트.

무기와 장신구는 그렇다 치고, 영약까지 한 세트라는 거에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대체 영약의 쓰임새는 뭘까? 체력 회복을 위한 포션? 그건 이스바르트에게 준 마셀라의 반지를 쓰면 된다.

그렇다면?

‘강화 물약 같은 거지.’

그렇다. 이 보랏빛 영약은 초보자용 강화 물약이다. 그것도 마시면 끔찍한 복통을 유발하는 강화 물약.

그런데 왜 굳이 배가 아픈 걸까? 강화 물약이라면서?

여기선 하나 더 사전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내겐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이 세상 사람들에겐 이질적인 사전 지식.

‘고대인들에겐 랭크 시스템이 없었다.’

소설에서 묘사되던 고대인들은 손에 랭크가 적혀 있는 일 따윈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이 세상 사람들보다 멸망한 내 세상 사람들에 가까웠다.

단전이 존재하고, 마나 하트를 지녔으며 랭크가 아닌 단전의 힘으로 마법과 오러를 뽑아냈다.

“후.”

난 떨리는 마음으로 영약을 집어 들었다.

베네르 백작은 한 방울만 마셨다는데, 그럼 안 된다. 한 방에 다 마셔야지.

이슬린에겐 무슨 일이 있어도 사흘간 들어오지 말라 했으니 당분간은 나 혼자다.

복통에 몸부림치는 꼴을 다른 이들에게 보일 걱정은 없었다.

꿀꺽!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영약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쓰다기보단 역한 향이 코끝을 찔렀다. 끈적한 영약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게 느껴졌다.

…덜컥!

순간 심장이 멎는 듯한 고통이 시작됐다.

이를 시작으로 뜨겁게 달군 바늘을 삼킨 것마냥 배 속이 요동쳤다.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폐가 짜부라졌다.

하지만 견뎌야 한다. 그리고 견딜 만했다. 예전에 한 번 느껴 본 통증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이건 단전을 만드는 영약이다.

“크아아아악!”

이젠 바늘을 넘어서 배 속을 불로 지지는 듯한 격통이 밀려왔다.

끔찍한 격통에 정신을 잃을 것 같았지만 간신히 정신줄을 붙들어 맸다.

그리곤 가부좌를 틀어 온몸의 정신을 한 점에 집중시켰다.

예전의 몸이었다면 가지고 있었을, 이안을 비롯한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배 속 깊이 자리 잡은 한 점.

그 안에 모든 정신을 그러모았다.

쿠구구……!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몸이 격하게 떨려 왔다.

동시에 단전 내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던 거대한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끄응… 예전에 했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단전을 만들어 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발할라 시스템으로 몬스터를 때려잡던 시절. 그때 당시엔 단전을 느끼는 게 큰 어려움은 아니었다.

재능이라고 해야 하나. 복부에 코딱지만 하게 자리 잡은 단전을 넓히기만 하면 됐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랭크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벽.

이 세상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불합리한 벽이 단전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를 뚫기 위한 게 바로 영약이다. 체내에 스며든 영약은 날카로운 마나의 칼날로 변해 벽을 거세게 두드려 댔다.

쿠구구구……!

“크하압……!”

몇 번이라도 정신을 잃을 뻔했지만 굳게 버텼다.

벌써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감각이 아득해져만 갔다.

하지만 그럴수록 호흡을 가다듬고 날카로운 마나의 칼날을 느꼈다.

고통을 외면하는 게 아니라 마주했다.

난 강해져야 한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멸망해 버린 옛 세상에서처럼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

“후읍……!”

그저 숨 한 번 들이마셨을 뿐인데도 목구멍이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

내쉴 때도 마찬가지였다. 식은땀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게 체내의 모든 구멍에서 흘러나왔다.

끈적하면서도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온몸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만큼 단단한 벽을 뚫고 단전이 자리 잡는 건 고통스러웠다.

…푸각!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모래성 허물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통증이 멎었다.

마침내 찾아온 안도감 탓이었을까.

난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어윽…….”

“백작님!”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은빛 머리칼에 눈이 부셨다. 그 바람에 눈을 살짝 찡그렸다.

“으윽…….”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사흘 동안 찾지 말라시더니! 닷새나 지나서 일어나시다니요!”

“…닷새?”

뜬금없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이제 보니 난 푹신한 침대 위에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아마 이슬린이 옮겨다 놓은 듯했다.

“닷새나 지난 건가.”

“정말이지. 이번엔 저도 놀랐다구요……. 매번 이상한 짓을 해도 멀쩡히 살아 계시던 분이…….”

“으음.”

이상한 짓이란 말이 거슬렸지만 이슬린의 퉁퉁 불은 눈두덩일 보고 입을 꾹 닫았다.

솔직히 나도 닷새나 걸릴 줄은 몰랐다. 소설에선 한나절 정도 복통이 있다길래 길어도 사흘이면 될 줄 알았는데.

‘가만있어 보자.’

닷새가 걸렸건 열흘이 걸렸건 그건 중요치 않다.

제일 중요한 건 성공했느냐는 거다. 얼른 침대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폐로 시원한 바람이 밀려 들어감과 동시에 지금껏 잊고 지냈던 감각이 배 속 깊은 곳에서 느껴졌다.

“…있다!”

작지만 생생하게 느껴졌다.

예전의 몸뚱이였다면 콧방귀 낄 수준의 콩알만 한 단전이었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오랜 세월 잃었던 단전의 존재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크흐흑… 있다고……. 젠장…….”

“하아…….”

이슬린이 고갤 절레절레 했지만 상관없다.

단전이 생겼으니까.

“크흐흐!”

고대인이 이런 보고를 만든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만약 그들의 계획이 성공해 고대인의 혼을 옮기는 데 성공한다면?

운 좋게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새로이 바뀐 세상에 적응 못하면 끝이다.

때문에 새로운 세상에 떨어진 고대인을 위해 아티팩트를 준비해 놓은 것이었다.

적을 처치할 무기, 상처를 치유할 치료제, 공격을 막을 방패. 마지막으로 새로운 몸에 만들 단전을 위한 영약.

베네르 백작이 영약의 쓰임새만 제대로 알았더라면 아이소테르의 판도가 바뀌었을 거다.

그도 그럴 게 영약이 쓰인 건 베네르 백작뿐이 아니니까.

‘영겁의 기사단.’

과거 카잔 제국 시절. 영겁의 기사단은 전원 랭크 6의 괴물들만 모인 기사단이었다.

크로드처럼 순전히 자신의 힘으로 벽을 넘은 이들도 많았지만, 어마어마한 숫자의 랭크 6 괴물들은 땅에서 샘솟는 게 아니다.

다른 고대인의 보고에 숨겨져 있던 영약을 이용해 대륙의 그 어떤 기사단보다 강력한 기사단을 만들고 말았다.

그럼 영약은 또 어디서 구했냐. 간단했다. 복사하면 된다.

‘나도 그럴까 생각도 해 봤지만… 아무래도 그건 힘들겠지.’

고대인의 보고에서 골렘들을 무한정 찍어 대던 아티팩트.

그건 골렘만 찍어 내는 아티팩트가 아니다. 원본에 살짝 못 미치는 수준이지만 아류작을 무한정 뽑아낼 수 있는 사기적인 성능의 아티팩트다.

활용하기에 따라 영약까지도 복사할 수 있었고, 카잔 제국의 황제는 이를 이용해 영겁의 기사단을 만들었다.

‘그러니 그렇게 세지. 미친놈들마냥.’

그건 제국이니까 가능한 일이고, 내가 그랬다간 대륙 전체의 힘이 균형이 무너진다.

뭐든 과하면 좋지 않은 법이다. 적당히 나만 쓰고 말아야지.

“후.”

단전이 생겼으니 확인해 봐야 할 게 또 있다. 떨리는 마음으로 왼손을 펼쳤다.

단전이 생겼다고 블랭크가 돼 버리거나 하는 건 아니다.

정확히 따지자면 다른 이들이 랭크 시스템으로만 랭크를 올릴 때, 단전이 있으면 단전으로도 랭크를 올릴 수 있다.

마차에 말 한 마리 달고 있던 걸 두 마리 달고 다니는 것과 다름없다. 속도는 물론이고 힘도 곱절은 세진다는 거다.

[이름 : 이안 임페라]

랭크 : 5(검술), 5(마법)

“…크하하하하! 성공이다! 드디어!”

단전까지 가세한 덕에 두 번째 벽을 허물고 말았다.

앞으로 단전을 통한 수련까지 합세한다면, 다음 벽을 허무는 건 일도 아니었다.

“또 무슨 일이시길래…….”

“무슨 일이긴! 두 번째 벽을 허물었으니 이러지!”

“네, 네? 정말요?”

“크하하! 그래! 내 당장 연무장으로…….”

쿵!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지면에 입술을 박았다.

“백작님! 닷새 동안 기절해 계시던 분이 갑자기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끄응… 아니다. 새로 변한 몸에 적응이 안 되는 것뿐이다.”

지면에 발이 닿자마자 느꼈다.

몸이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마치 온몸에 족쇄라도 단 것마냥 무거웠던 몸이 이젠 깃털처럼 가벼웠다.

단전이 뚫리며 온몸에 있던 불순물이 제거된 덕분이었다.

‘이거 원 날개라도 날고 걷는 것 같군.’

침대에서 일어나 기저귀 찬 아기마냥 뒤뚱뒤뚱 걸었다. 이를 이슬린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흐음…. 바로 연무장으로 가는 건 무리겠군.”

“그럼…….”

“밥부터 먹지.”

닷새간 꼬박 누워 있었으니 밥도 제대로 못 먹었을 거다. 그간 먹질 못한 탓인지 입 안에서 짭짤한 소금맛이 났다.

“네…. 먹기 편하신 죽으로 준비해 드리겠습니…….”

“아니. 죽은 무슨.”

“아… 그럼 설탕을 탄 물이라도……?”

“고기다. 힘이 달릴 땐 고기지.”

이슬린은 한 마디 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내 쪽에서 먼저 고갤 돌려 버리자 하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오랜만에 고기 먹을 생각에 잔뜩 신이 난 상태로 주방으로 향했다.

물론 걸음걸이는 적응이 덜 돼 갓난아기마냥 아장아장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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