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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73화 (73/222)

73화

바로 그때, 낯선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하긴 어려웠지만 힘이 잔뜩 쇄약해진 상태란 건 알 수 있었다.

“흐음, 말을 할 수 있었나?”

“네? 무슨 말씀이시죠?”

“…나만 들리는 건가?”

[…그래. 보아하니 네 녀석이 우두머리인 것 같군.]

다른 셋을 슬쩍 바라봤지만 아무래도 나만 들리는 것 같았다. 텔레파시의 일종인 듯했다.

“내 이름은 이안 임페라. 이곳 엔델로 광산의 주인이다. 너는 누구지?”

[…모르는 이름이군. 게다가 손에 있는 그건…….]

녀석은 눈을 감은 채로도 용케 주변 상황을 보고 있는 듯이 말했다.

주윌 두리번거리자 수조 위에 동그란 점 같은 게 보였다.

“저걸로 보는 건가?”

난 동그란 점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딱히 수긍하는 말은 없었지만 맞는 것 같았다. 난 녀석에게 왼쪽 손활짝 핀 채로 보여 줬다.

“이게 뭔지는 너도 알겠지?”

[…그래. ‘그걸’ 하고 있는 걸 보면……. 우린 실패했군.]

“그렇지.”

[다른 곳도 마찬가지인가?]

“…그래. 모두 실패다.”

[…….]

녀석은 충격이라도 먹었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모습에 괜히 마음 한켠이 안쓰러워졌다. 자신이 살던 세상이 멸망했다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니까.

사실 지금껏 상대해 온 놈들은 골렘이 아니다.

스스로의 의지 없이 돌아다니는 껍데기라는 점에선 동일하지만, 사람과 똑같은 살점과 피로 이루어진 녀석들이다.

하지만 이 녀석들에겐 가장 중요한 ‘혼’이란 게 없다.

‘고대인들이 혼을 저장하는 용도로 쓰일 ‘그릇’ 같은 거였지.’

먼 과거, 대재앙이 하나 나타났다.

고대인의 종말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대사건. 때문에 고대인들은 수많은 대책을 세웠다.

재앙을 막기 위한 거성도 만들어 보고, 고대인을 지킬 수호자도 만들어 봤다.

여기 엔델로 광산 지하에 숨겨진 보고도 그런 것들 중에 하나다.

만에 하나 종말을 막을 수 없을 경우엔 자신들의 혼을 빼내어 이곳에 잠든 껍데기들에 옮기자면서.

여기 수조 안에 들어 있는 녀석도 결국 그릇 중에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소설 속 고대인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사라졌고, 혼을 옮기겠다는 거창한 계획도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네 녀석들이 살던 시간대랑은… 적어도 수만 년은 떨어진 상태지.”

[…….]

“덕분에 남은 사람들 손엔 ‘이거’가 박혔고.”

어깨를 으쓱하며 왼손을 펼쳐 보였다. 여전히 수조 안의 녀석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부탁이 하나 있다.]

“부탁?”

갑작스런 녀석의 제안에 고갤 갸웃했다.

“미안하지만 복수 같은 건 불가능하다. 나도 내 코가 석 자인 상황이거든.”

[프흐흐… 침입자들에게 그런 걸 부탁할 정도로 글러 먹은 놈은 아니다. 그저 버튼 하나만 눌러 줬으면 하는 것뿐이다.]

“버튼이라.”

[아래에 보이는 붉은 버튼이다.]

“…용도는?”

[…….]

녀석에게 되묻자 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용도는 그가 말 안 해도 대충 짐작이 갔다.

고대인들의 혼을 옮기겠다던 거창한 계획은 실패했다. 그럼 이곳을 지키던 녀석의 임무도 끝이 났다는 의미기도 했다.

[부탁한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녀석이 짧게 덧붙였다. 착잡한 마음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붉은 버튼 위로 손을 올렸다.

달칵.

부르륵!

붉은 버튼을 누르자 수조 안에서 공기방울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주위에 있던 이들이 놀라 눈치를 살폈지만 난 가만히 수조 안의 녀석을 응시했다.

[보답으로 ‘도구’는 그대로 내버려두겠다.]

“고맙군.”

[…나야말로.]

짧은 대답을 끝으로 수조 안에 들어 있던 녀석이 녹아내려 사라졌다.

이내 가득 차 있던 액체가 밑으로 쏟아지며 수조가 깨끗이 비워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그냥… 이번에도 별일 아니다…….”

달칵!

수조가 모두 비워지자 뭉툭한 기계 태엽 소리가 들려왔다.

깨끗이 비워진 수조 바닥에서 상자 하나가 나타났다. 저게 녀석이 말한 ‘도구’ 같았다.

‘다행이군.’

다행히 별 문제 없이 찾으러 온 물건들을 얻었다.

수조 안에 있던 녀석을 미련 없이 보내 준 탓일까. 소설 속 묘사와는 조금 달랐다.

‘소설에선 상자가 녹아내리려 했다지.’

원래 줄거리대로라면 수조를 마주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베네르 백작이었다.

수많은 사병을 사지로 내몰고 겨우 방범 시스템을 멈춘 그는 마침내 수조 안의 녀석과 마주한다.

그에게도 비슷한 제안을 했지만, 베네르 백작은 당연히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억지로 수조 안에서 녀석을 끄집어내 고대인의 비밀을 캐내려 했다.

아무런 말도 못한 채 간신히 숨만 붙어 있던 녀석을 고문하다가 결국 죽여 버리고 만다.

그 바람에 도구가 담긴 상자는 반쯤 녹아내려 정체 모를 영약 하나만 겨우 끄집어낸 걸로 묘사된다.

‘고대인의 영약.’

그게 내가 찾는 기연이었다.

고대인의 영약이라면 소설에서도 잠깐 등장만 했을 뿐 실제론 거의 쓰이질 않았으니까.

‘그런데 상자에 다른 게 뭐가 들었는지 나도 모르는데.’

원래 스토리대로라면 녹아내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어야 할 아티팩트.

자연스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달칵.

수조 위로 떠오른 상자를 꺼내 들었다.

네모반듯한 회색빛 상자는 오랜 세월에도 흠집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만큼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다는 걸 의미했다.

“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기대되는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하기사 골렘을 상대하느라 개고생까지 한데다가 다른 곳도 아니고 고대인의 보고인데 뭔가 있길 기대하는 게 당연했다.

“혹시…. 안에 뭐가 들었는지도 알고 계십니까?”

“반쯤은.”

“반 말씀이십니까?”

“일단 열어 보자고.”

상자의 정수리 부근에 위치한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회색빛 상자가 닫혀 있던 입을 벌렸다.

“…흠.”

상자 안의 내용물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팔뚝 길이 정도의 마법봉 하나와 반지 두 개. 마지막으로 소설에서 묘사되던 보랏빛 영약 하나가 들어 있었다.

“마법봉은… 자.”

난 주저 없이 마법봉을 집어 들어 이슬린에게 건넸다. 고민 한 번 없이 건네는 모습에 이슬린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이건 너 가지라고. 난 이거 하나면 되니까.”

“하, 하지만…….”

“네가 가지고 다니는 마법구보단 쓸 만할 거다. 오래되긴 했어도 고대인이 만든 아티팩트니까. 정확히는 지금 시중에 돌아다니는 아티팩트가 이놈의 아류 같은 거지.”

“그런 귀한 걸…….”

“그리고 이 반지는 이스바르트. 이 반지는 프리아나. 됐지?”

“허억…….”

시장 상인이 배추 던지는 것마냥 숭덩숭덩 넘기는 게 익숙치 않은 모양이다.

‘영약 하나만 있어서 어떻게 나누나 했는데. 다행이군.’

예정대로 영약 하나만 얻었다면 보상으로 천 골드씩 쥐어 주려 했다. 나로선 불필요한 지출이 줄었으니 이득인 셈이다.

“감사합니다! 백작 각하!”

“정말로 감사해요! 고대인의 유물을 이렇게 주시다니!”

다행히 유물을 받은 이들도 마음에 들어 했다.

“저어… 상당히 실례되는 발언입니다만… 이건 어떻게 쓰는 겁니까?”

프리아나는 반지를 받아 들곤 요리조리 살펴봤다.

푸른 구슬이 하나 박혀 있긴 했지만 외관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반지다.

이스바르트도 궁금한지 고갤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유물 활성화시키는 것도 골치 아플 텐데.’

방법을 모르는 건 아니다. 다만 지금 재료를 구하려면 상당히 귀찮아진다. 대륙 여기저기에서 끌어모아야 하는 게 한둘이 아니니까.

“일단 한 번 껴 보고 일반 아티팩트 쓰는 것처럼 써 봐.”

“으음… 알겠습니다, 백작님.”

프리아나는 반지를 왼손 새끼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잠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자 반지에 박혀 있던 푸른 보석이 반짝였다.

“오오……!”

‘활성화해 논 상태였군.’

상자를 남기고 간 녀석도 융통성이 없는 건 아닌지 유물들은 모두 활성화를 해 논 상태였다.

잠시 프리아나와 거릴 벌리자 이내 반지가 가지고 있던 힘이 드러났다.

바앙.

그러자 낮은 울림소리와 함께 반지 주위로 반투명한 막이 나타났다.

기다란 타원 모양의 막은 자그마한 방패의 모양과 흡사했다.

“방패?”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이름은… 이시스의 반지 어떤가?”

“오오! 전쟁의 여신 이시스 님 말씀이십니까? 딱 알맞은 이름인 것 같습니다!”

“후후.”

프리아나는 신이 난 아이마냥 헤벌쭉 해 가지곤 좋아라 했다.

이스바르트도 이를 보고 똑같이 따라했다.

“…….”

“그건 어떤 거 같나?”

“음… 잘 모르겠어요. 딱히 뭐가 달라진 것 같지는…….”

이스바르트는 따로 변화를 못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의 팔뚝에 나 있던 작은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음? 그건 뭐지?”

“앗… 아무것도 아닙니다. 살짝 긁혔을 뿐이에요.”

“아니. 상처를 잘 살펴봐라.”

“아…….”

옅게 베어 나온 피를 훑어 내자 반질반질한 맨살이 드러났다.

상처가 사라진 걸 보니 치유 효과가 있는 듯했다.

“치유 능력이 있는 반지였군. 치유의 신이면… 마셀라의 반지라 하면 되겠군.”

“…어엇? 잠시 만요! 치유 능력이라면 설마…….”

이스바르트는 얼굴에 쓰고 있던 조막만한 가면을 떼어 냈다.

가면 밑에 갈색빛으로 자리 잡혀 있어야 할 흉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호오…….”

내 반응에 이스바르트는 얼른 수조에 얼굴을 비췄다.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가 유리 표면 너머로 그녈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그녀의 눈망울이 촉촉이 젖어 갔다. 굵은 눈방울이 새하얀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감사합니다! 저에게 이런 은혜를……!”

“애써 만든 가면이 필요 없게 됐군.”

“아, 아닙니다! 이건 평생 쓰고 다닐 겁니다.”

“굳이?”

“배, 백작 전하께서 주신 거니까요…….”

“너 알아서 해라. 당분간은 그러는 게 낫겠지.”

갑자기 흉터가 사라진 걸 보면 이상하게 여긴 할 테니까.

이스바르트는 기쁜 듯 붉게 상기된 얼굴로 다시 가면을 고쳐 썼다.

“넌 어떻게 쓰는지 알지?”

“네, 마법 랭크 보유자니까요.”

이슬린은 벌써 마법봉을 사용해 얼음창을 만들며 놀고 있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얼음 창날은 마법구를 사용할 때와는 확연한 성능 차이를 보였다.

다들 받은 유물에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남은 건 나 하나. 베네르 백작에게 주어졌어야 할 고대인의 영약만이 남았다.

“백작님, 이시스의 반지로도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히 만족합니다만… 백작님께서 고르신 유물은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안 돼.”

“아… 알겠습니다. 백작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프리아나는 굳게 입을 다문 채 고갤 끄덕였다.

주인이 말하고 싶지 않다면 더 이상 물어보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언뜻언뜻 시선이 영약에 맴도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궁금해?”

“…솔직히 그렇습니다만. 백작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참겠습니다.”

‘이거 원 눈치 주는 것도 아니고.’

프리아나라면 그 정도 고단수 화법은 쓸 줄 모른다.

그냥 진짜 궁금하지만 물어보진 않겠다는 의미겠지.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별건 아니다. 먹으면 배가 엄청 아파지는 약 같은 거지.”

“배가 아파진다……?”

“그래. 대신 아픈 만큼 강해질 수도 있고 아니면 약해질 수도 있지. 뭐든 약은 쓰기 나름이니까.”

“으음… 약학에 관해선 아는 바가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그럼 그쯤 알아 둬.”

“네. 백작님.”

각자 필요한 유물도 다 나눠 가졌겠다.

이제 이곳 엔델로 광산에 묻혀 있던 고대인의 보고는 볼일 다 봤다. 이대로 빠져나가기만 하면 된다.

“백작님, 그럼 이제 여기는 어쩌실 생각이신가요?”

지하에 자리 잡은 드넓은 공동. 내버려두자니 다른 사람들이 들어올지도 모르고, 따로 사용하자니 딱히 쓸데가 없는 곳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 관해선 걱정 붙들어 매도 된다.

난 대답 대신 이들을 이끌고 고대인의 보고에서 빠져나왔다.

[관리자… 공백 상태… 폐쇄 조치함…….]

쿠구구구…….

보고의 대문을 걸어나오자마자 잡음 잔뜩 섞인 기계음과 함께 보고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며칠 뒤면 용혈 속으로 빨려 들어가 알아서 사라질 거다.

‘남은 건 이걸 마시는 것뿐인데…….’

떨리는 눈빛으로 고대인의 영약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마시면 더럽게 아픈 복통이 찾아오는 영약. 여기 숨겨진 힘을 생각해 본다면 진짜 더럽게 아프긴 아플 거다.

‘아픈 건 싫은데…….’

하지만 어쩌겠나. 몸에 좋은 약일수록 입에 쓰다고. 강해지려면 그만큼은 감수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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