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쿠구구구…….
보고를 굳게 지키고 있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닫혀 있던 터라 뿌연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후우웅!
먼지 구름은 이어서 들이닥친 거센 바람에 문 너머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긴장한 빛이 역력한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파앗!
문 너머로 발을 내딛자마자 환한 불빛이 시야를 밝혔다. 지금껏 봐 왔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매끈매끈하게 다듬어진 바닥과 벽은 흡사 먼 미래 시대의 물건처럼 느껴졌다.
거기다 벽과 천장의 틈새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건 형광등의 빛과 비슷했다.
이질적인 분위기에 왠지 모를 기시감까지 느껴졌다.
마음 같아선 좀 더 살펴보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침입자… 제거…….]
“크라아아악!”
환한 복도 너머로 인간의 형태를 띤 무언가가 달려들었다.
놈은 새하얀 피부에 털 한 점 없이 민둥민둥한 살갗을 가지고 있었다.
미약하게나마 혈색이 도는 두 눈동자는 우릴 향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
사람과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생긴 놈들의 모습에 전투태세를 갖추던 이들이 움찔했다.
몬스터라면 모를까 사람을 막 베기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배, 백작님? 어쩌죠?”
“어쩌긴? 차라도 한잔하면서 수다라도 떨까?”
“어딜!”
서걱!
제일 먼저 오러를 머금은 프리아나의 검이 놈의 허리를 양단했다.
갑옷은 고사하고 벌거벗은 채로 달려든 놈은 손쉽게 베어졌다.
그대로 몸뚱이가 반 토막 난 놈은 신기하게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프리아나는 생각보다 약한 놈들의 위력에 어깰 으쓱했다.
하지만 이는 오산이었다. 이곳 고대인의 보고를 지키는 건 한 놈 한 놈의 강함이 문제가 아니다.
“뭐죠? 이놈들 생각보다 약한데요?”
“크르륵!”
“어엇!”
반 토막이 난 녀석은 그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공격하려 발버둥치고 있었다.
콰직!
놈의 머리를 발로 짓밟자 그제야 놈의 움직임이 멎었다.
피가 튀지는 않았지만 그로테스크한 광경에 이스바르트의 미간이 구겨졌다.
민둥민둥한 눈코입만 빼면 사람과 똑 닮은 녀석들이다.
자기가 사람을 죽인 건 아닌지 영 마음에 걸려 하는 눈치다.
“으윽…….”
“걱정 마라. 이놈들은… 그냥 골렘 같은 거다. 그래서 머리 중앙에 위치한 핵을 파괴할 때까지 계속 움직이는 거고.”
“그, 그렇군요!”
그렇게 말하자 다른 이들의 안색도 조금 나아졌다.
이어서 복도 너머로 비슷한 생김새의 골렘이 계속해서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크르륵!”
이렇게까지 적의를 드러내 놓고 있는 마당에 대화로 쉽게 풀어 나갈 순 없다.
모두 처치해야 하는 적들일 뿐이다.
“하압!”
이어서 쏟아진 이슬린의 얼음창이 놈들의 머릴 꿰뚫었다.
옆에서 수많은 동료들이 쓰러지고 있음에도 놈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로지 보고에 침입한 적을 쓰러트리는 것만이 삶의 이유인 듯 계속해서 우리 일행을 덮쳐 왔다.
츠츠츠……!
이들을 이곳까지 부른 건 나다.
그래 놓고 정작 당사자는 강 건너 불구경만 할 수는 없을 노릇.
용린검에 마나를 불어넣자 이를 기분 좋게 빨아들인 검 주위로 오러가 맴돌았다.
푸각!
이 골렘의 약점은 머리 가운데에 놓인 핵. 그것만 파괴하면 끝이다.
오러 소드가 미간을 꿰뚫자 분노로 가득 차 있던 골렘의 눈이 촛불 꺼지듯 힘을 잃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골렘은 셋의 협공에 쓰러져 갔다.
이슬린이 든 마법구에선 쉴 새 없이 얼음 창이 솟구쳐 올랐고 프리아나의 오러 소드는 놈들의 머리통을 분쇄했다.
그리고 이스바르트는…….
‘아. 그러고 보니 이스바르트는 빠지라 할 걸 그랬나.’
소설 속 이스바르트는 흑마법 랭크를 보유하고 있었다.
뛰어난 두뇌 말고도 개인적인 전투 기량도 높았던 터라 지금 시점에선 그녀가 비전투 인원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꼬물아! 깔고 뭉개!”
부오옹!
“케에엑?!”
후열에 서 있던 이스바르트의 외침에 자이언트 웜이 몸이 요동쳤다.
운 좋게 전열을 뚫고 뒤로 빠졌던 골렘은 자이언트 웜의 거대한 몸뚱이에 짓눌려 납작해졌다.
‘괜한 걱정이었군.’
자이언트 웜을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도 다루는 게 능숙했다. 덕분에 골렘이 뒤로 빠져나가는 일은 없었다.
[보안 등급… 상향…….]
계속해서 수를 줄여 나가자 기계음이 한 번 더 울렸다.
전투의 소란에 파묻혀 간신히 들을 수 있는 정도였지만 똑똑히 들었다.
“그워어어억!”
잘못 들은 건 아니었는지 복도 너머로 꾸역꾸역 밀려드는 골렘들의 생김새가 조금씩 변해 갔다.
뼈만 앙상했던 팔뚝이 크게 부풀고 가슴께가 곱절은 더 두꺼워졌다.
“으윽!”
적들 가운데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이는 제일 앞에 나서서 골렘을 처치하던 프리아나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놈들 상태가 좀 달라진 것 같습니다!”
“나도 안다.”
빈껍데기에 불과한 골렘은 랭크를 보유하지 않은 이상 일반 성인 남성과 크게 차이가 없다.
새로 나타나기 시작한 덩치 큰 놈들도 힘 좀 센 남자 수준이다. 다만 그 수가 끝도 없이 밀려 들어온다는 게 문제다.
‘우선 수를 줄여야 해.’
수를 줄이려면 놈들이 태어나는 장치를 파괴해야 한다.
이곳 엔델로에 숨겨진 보고에서 가장 중요한 아티팩트이자 방어 시스템.
가급적 파괴하지 않고 가져가고 싶었지만, 끝도 없이 밀려오는 놈들을 상대로 내버려둘 순 없었다.
‘좀 아깝긴 하지만… 부숴야겠지.’
“프리아나! 숙여라!”
“…네!”
내 말에 프리아나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몸을 숙였다. 난투가 한창인 와중엔 다분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서걱!
프리아나가 만들어 준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끝없이 몰려드는 적들을 향해 뛰어올랐다.
높이 뛰어오른 채로 빽빽하게 들어선 골렘 한가운데로 몸뚱일 내던졌다.
밑으로 수많은 골렘이 날 향해 손을 뻗었다.
이대로 착지했다간 저들의 손아귀에 갈기갈기 찢겨 고깃덩이가 돼 버리고 만다.
“흐읍!”
파각!
“크웍!”
공중에 붕 뜬 채로 덩치 큰 골렘의 머리통을 한 번 더 밟고 도약했다.
그제야 골렘들 때문에 구경도 못 했던 보고 내부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땅 속에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공동. 이는 계속해서 밀려오는 골렘들로 빽빽하게 가득 차 있었다.
‘끔찍하군.’
그나마 수를 좀 줄였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였다니.
베네르 백작이 그의 사병을 모두 이끌고도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는 게 이해가 갔다.
이놈들을 다 상대하려면 끝도 없다. 놈들이 생성되는 아티팩트를 파괴해야 했다.
공동의 한쪽 끝에 커다란 유리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이물질 탓인지 내부 구조까지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유리 상자가 한 번 열릴 때마다 공동에 가득 찬 골렘이 한 마리씩 튀어나오는 건 똑똑히 보였다.
‘저거군. 이 망할 놈들의 복사기가.’
높이 떠오른 몸뚱이가 점점 추락하기 시작했다.
밑에선 덩치 큰 골렘들이 금방이라도 찢어 죽이려는 듯 날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대참사만큼은 막아야 했기에 얼른 검을 들어 유리 상자를 향해 조준했다.
“하압……!”
오른팔의 근육이 크게 부풀어 오르며 용린검이 내 손에서 떠나갔다.
오러를 머금은 푸른빛의 궤적이 뒤를 이었다. 용린검은 그대로 곧은 직선을 띄며 유리 상자를 향해 날아갔다.
…파각!
용린검은 유리 상자를 깊숙이 파고들며 요란스런 굉음을 내뿜었다.
“크워어억!”
동시에 하늘 높이 떠 있던 몸뚱이가 골렘들로 가득한 땅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두두두…….
끔찍한 린치가 가해졌지만 가죽 갑옷에 마나를 주입시킨 덕에 버틸 만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도 않아 놈들의 공격이 멎었다.
[…지지직!]
“…크웍!”
스파크 튀는 소리가 공동에 울려 퍼지자 날 신나게 밟아 대던 골렘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풀썩!
그리곤 전원 꺼진 로봇마냥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아무리 드워프 장인이 만든 가죽 갑옷을 입고 있어도 계속 맞으면 나도 아프다. 적당히 끝나서 다행이다.
“후!”
“백작님!”
뒤에서 다른 이들이 놀란 목소리로 달려왔다. 하기사 갑자기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었으니 놀랄 만했다.
“하마터면 큰일 나시는 줄 알았습니다!”
“괜찮다. 빨리 끝났으니 다행이지.”
“으음…. 그렇죠.”
치이익!
날 걱정하던 녀석들의 반응도 얼마 못 갔다.
주변에 잔뜩 깔려 있던 골렘의 시체들이 마치 얼음 녹듯이 휘날려 사라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이들은 영문 모르겠단 얼굴로 날 바라봤다. 대체 여긴 뭐하는 곳인지 빨리 알려 달라는 눈치다.
“별거 아니다. 제 할 일을 다 했으니 사라지는 것뿐이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그럼 그런 거겠지요.”
이슬린은 더 이상 생각하길 그만둔 듯 그냥 그러려니 했다. 다른 이들도 이내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자. 이제 챙길 건 좀 챙겨 볼까.”
난 공동을 가로질러 유리 상자가 위치한 곳으로 다가갔다. 함께 온 이들은 신기하다는 듯 공동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내 뒤를 따랐다.
[지직…….]
용린검은 유리 상자를 깊숙이 파고든 채 꽂혀 있었다. 유리 상자는 내부에 채워져 있던 전선 같은 게 밖으로 터져 나온 상태였다.
“이건 대체…….”
이슬린과 이스바르트는 섣불리 다가가진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서 유리 상자를 살펴봤다.
정체 모를 액체가 들어 있는 게 어항처럼 생겼다.
천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하얀 빛 때문인지 몰라도 뿌연 어항에선 음산하단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어항 주위로 굵은 선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지만, 용린검에 당해 박살 나 제 기능을 기대하긴 무리였다.
“쯧.”
“배, 백작님? 원래 고대인의 보고는 이런 겁니까?”
“나도 직접 와 보는 건 처음이다.”
조심스레 수조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여전히 안에 든 내용물은 보이지 않았다. 투명한 유리 창을 대충 손으로 문질렀다.
뽀득뽀득.
조금은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뿌옇던 유리창 너머로 어렴풋이 뭔가 보이기 시작했다.
[…….]
‘제대로 왔군.’
유리창 너머엔 방금까지 상대해 왔던 골렘과 똑 닮은 녀석이 몸을 웅크린 채 액체 한가운데에 떠올라 있었다.
입엔 가느다란 호스를 연결해 아래에 위치해 있던 굵은 선과 연결된 것 같았다.
“…골렘!”
프리아나는 녀석을 보자마자 얼른 검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수조 속의 녀석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됐다. 이 놈은 못 싸워. 이슬린, 이스바르트. 너희 둘도 가까이 와서 봐 봐라.”
“네에…….”
내 말에 다른 녀석들도 수조에 얼굴을 가까이 했다.
조용히 눈을 감은 수조 안의 녀석은 몸을 웅크린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까지 상대해 왔던 골렘들과는 달리 연하게 혈색이 돌고 이목구비도 비교적 제대로 달려 있었다.
방금 놈들과는 달리 영락없는 사람이었다. 이를 신기하게 관찰하던 차에 이스바르트가 고갤 갸웃했다.
“응?”
“뭐, 뭡니까?”
아직까지 경계를 풀지 않던 프리아나가 되물었다.
“이 사람… 왼손에 룬 문양이 없어요.”
“…어? 진짜네?”
뒤늦게 이를 발견한 프리아나는 어찌 된 일인지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내 입장에서야 모든 사람들 왼손에 룬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게 이상하지만.
외눈의 나라에선 양쪽 눈 다 있는 게 이상한 법이다.
거렁뱅이부터 왕족까지 누구 하나 가리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게 왼손의 룬 문양이다.
창세신께서 내려 주신 가호쯤으로 생각하는 이 룬 문양은 태초부터 가지지 않고 태어난 이는 없다.
그래서 블랭크가 더욱 차별 받는 거다.
왼손을 잃고 마나를 사용할 수 없다는 건, 창세신에게서 버림받았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으니까.
그런 세상에서 살아온 이들 입장에서 수조 안에 잠든 녀석은 이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블랭크? 아니지. 블랭크는 왼손을 잃은 자들일 텐데……. 이 사람은 왼손이 멀쩡히 달려 있고…….”
난 골똘히 생각에 잠긴 녀석들에게 다가가 한마디 했다.
“궁금한가? 여기 잠든 녀석이 뭐하는 녀석인지?”
“…네.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이 녀석이 아까 그 골렘들의 원판 같은 거지. 이 유리 상자는 원판을 복제해 내던 카피기 같은 거다. 그리고 이 녀석은 고대인을 복사한 복사품이고.”
“고, 고대인이요?”
“깊게 생각하진 마라. 이 이상 생각했다간 교황청에서 불경죄를 들이밀게 될지 모르니.”
“아……?”
프리아나는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그런대로 냅두고, 유리 상자에 박혀 있던 용린검을 뽑아 들려는데.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