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70화 (70/222)

70화

어두컴컴한 방 안.

갈렌 왕자는 그 안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연회에서 신나게 깽판치고 돌아온 갈렌 왕자에게 내려진 국왕의 칩거령이었다.

“젠장!”

똑똑.

굳게 잠겨 있던 문 너머로 누군가 그를 찾아왔다.

“누구냐!”

“접니다. 왕자 전하.”

“…재상?”

사실상 에런골드의 입이자 손발이나 다름없는 두아트리스 재상.

왕자는 재상이라면 자신에게 내려진 칩거령을 어떻게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 그래! 어서 들어오거라!”

“그럼.”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남자가 들어섰다.

문 밖엔 왕자를 철통같이 지키는 적갑의 기사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깊게 눌러쓴 그들의 투구 사이로 보이는 두 눈에선 왕가를 향한 맹목적인 충성심이 느껴졌다.

저들이 바로 아이소테르 왕가를 수호하는 적갑 기사단.

수십에 달하는 수였지만, 단순히 대가리 수만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니였다.

전원 랭크 5 이상으로 이루어진 왕가의 단단한 방패이자 날카로운 검이었다.

이들이 받은 명령은 어떤 일이 있다 할지라도 갈렌 왕자를 내보내지 않는 것.

에런골드에게서 직접 내려온 명령이었기에 갈렌 왕자는 얌전히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재상! 대체 왜 아버지께서 내게 이런 명령을 내리신 거지?”

“…정말 모르셔서 하시는 질문이십니까?”

다소 불손한 말투였지만 지금 급한 건 왕자였지 재상이 아니었다.

“내가 임페라 가문의 그 망나니 놈을 조지려 하던 건 모두 왕국을 위해서였고! 아버지께서도 그리 생각하시지 않았나! 임페라 가문의 몰락을 시작으로 귀족들 간 전쟁이 계속될 거라고!”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지요.”

“뭐가 다른가! 그놈 따라 제 아비까지 엮어 처형시키기만 하면! 그깟 깡촌의 백작가문 쯤은 한순간에 날아가 버릴 텐데!”

“…귀족이 스스로 몰락하는 것과 왕가에 미움을 사 몰락하는 게 같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 그건…….”

“귀족들은 제 안위밖에 생각 못하는 놈들입니다. 갑작스레 등장한 백작. 저들끼리 싸움을 일으키기엔 충분하겠지요.”

“으음…….”

“가만히 내버려두기만 했다면, 저들끼리 잇속을 따지려 편을 가르고 싸움이 일어났을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왕자님께서 그리 적나라하게 적의를 드러내셨으니… 아마 그런 기대는 힘들겠지요.”

“그런…….”

“아무튼 당분간은 이리 침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습니다. 국왕 전하의 명령이니까요.”

“…….”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왕자님.”

재상은 볼일 다 보곤 왕자의 침실에서 빠져나왔다.

갈렌은 그런 재상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아이소테르의 초고수 망나니 갈렌 왕자. 녀석의 등장은 잠잠했던 내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황금 은행 습격 사건은 벌써 잊혀진 지 오래다. 이미 내 머릿속은 어떻게 더 강해질지에 대한 걸로 가득 찼다.

“끄응…….”

방법은 많다.

주인공 디아 제니스가 마주할 기연을 가로채도 되고. 아쉽게 명을 달리한 인재들을 그러모아도 된다.

하지만 이는 쓸 만한 방법임과 동시에 위험한 발상이기도 했다.

단순히 임페라 가문이 몰락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소설의 줄거리가 크게 뒤틀렸다.

수년 뒤에 일어나야 할 황금 은행 습격 사건이 앞당겨졌고, 앞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는 완전히 미지수였다.

이는 곧 내가 아는 소설의 줄거리가 쓸모없어질지도 모르는 일.

가능하면 소설의 줄거릴 크게 해치지 않는 선에서 강해질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흐음…….”

머릿속이 복잡해지던 차에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소설의 줄거릴 해치지 않으면서, 획기적으로 강해질 수 있는 방법.

소설 속 묘사를 떠올려본다면 확실하진 않지만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그래. 그거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짤랑. 짤랑.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종을 두 번 울렸다. 이내 하얀 머리칼을 흩날리며 이슬린이 방으로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백작님?”

“후후, 백작이지. 그래.”

딱히 그걸 들으려고 이슬린을 부른 건 아니었다만 그래도 좋긴 좋았다.

맨날 공자님 소리만 듣다가 백작 소릴 듣는 게 기분 안 좋을 리가 있나.

“말씀하세요.”

“지금 당장 엔델로 광산으로 간다. 이스바르트한테도 볼일이 있으니 준비해 놓으라 일러 두고.”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이슬린은 고갤 꾸벅 숙이곤 방을 빠져나갔다.

그런 그녀의 머리 한켠엔 황금 은행에서 선물로 준 하얀 리본 머리핀이 꽂혀 있었다. 다행히 꽤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이슬린은 예전처럼 차분한 상태로 되돌아와 있었다.

테라리움에서 꽤나 겁먹은 듯했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그나저나 이상하단 말이지. 그때 갈렌 왕자를 만났을 땐 왜 그렇게 놀란 거지?’

내가 모르는 사연이 있을 수도 있지만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사람이라면 다들 숨기고 싶은 과거쯤은 있을 테니까.

* * *

이젠 임페라 백작령의 든든한 돈줄로 자리매김한 엔델로 광산.

이스바르트에게 광산 관리직을 맡긴 지 몇 달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채광량만큼은 눈에 띄게 향상됐다.

이에 혁혁한 공을 세운 건 당연하게도 자이언트 웜이었다.

자이언트 웜을 보유한 광산과 그러지 못한 광산은 채광량에서 큰 차이를 보여 준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손으로 땅을 파는 것과 굴삭기로 땅을 파는 것만큼의 차이다.

자이언트 웜은 흙이나 돌멩이를 파먹는 데만 쓰이는 게 아니다.

갱도를 만들고 새로운 광맥을 찾아 길을 내어주면서 체내에서 분비되는 점액질로 지하 광산의 붕괴까지 막아 준다.

광산 경영에 있어 떼 놓을래야 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몬스터다.

‘이 좋은 걸 베네르 백작 놈은 왜 안 사 놓은 건지.’

물론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

자이언트 웜의 관리비용뿐만 아니라 구매 비용까지 감안해 본다면, 수지 타산이 안 맞을 때도 많다.

자이언트 웜을 사 오는 것보단 영지민들 푼돈 줘 가며 쓰는 게 훨씬 싸게 먹히니까. 나야 공짜로 얻었으니 그런 고민에선 자유로웠다.

“백작님! 오셨군요!”

엔델로 광산에 도착하자마자 이스바르트가 날 맞이했다. 이스바르트는 갈색 빛깔의 제복을 입은 채로 내게 고갤 숙였다.

새로 꺼낸 옷인지 흙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

내가 온다는 말에 허겁지겁 준비하긴 했다만 그녀의 얼굴엔 숯검댕이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고생이 많군.”

“감사합니다! 백작님! 이게 다 백작님의 은혜 덕분이에요!”

이스바르트는 거뭇거뭇한 얼굴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왠지 우스워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음? 백작님? 제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저기… 이스바르트? 잠시만.”

보다 못한 이슬린이 하얀 손수건을 하나 건넸다.

영문 모를 표정으로 손수건을 얼굴에 부비적대더니 이내 무슨 일인지 깨닫곤 얼굴이 빨개졌다.

“죄, 죄송합니다! 워낙 급히 준비한 터라…….”

“상관없다. 그건 그렇고. 다들 열심히들 일하고 있군.”

“네! 이제 인부들도 교대 근무에 적응돼서 그런지 맡은 시간만큼은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오랜만에 들린 엔델로 광산은 예전과 모습이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일하는 구조는 크게 변한 게 없었다.

장정들이 갱도로 내려가 광산을 캐 오면 어린아이들과 아낙네들이 이를 분류하고 다듬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다.

달라진 건 광산 그 자체의 구조였다.

예전엔 흙더미가 곳곳에 쌓여 있고 광산엔 파 놓은 갱도가 번잡스럽게 뚫려 있었다.

아무래도 사람 손으로 파낸 광산이다 보니 광산에 마구잡이로 구멍을 뚫고 그 길을 따라 채굴해 오는 방식이었다.

덕분에 몇몇 갱도는 틈만 나면 무너지기 일쑤인데다가 채굴량도 들쭉날쭉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마구잡이로 뚫어 놓은 갱도 입구 대부분이 틀어막혔고 큼직한 몇 개의 갱도만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 또한 자이언트 웜을 이용해 입구를 확장시키고 무너질 위험까지 줄여 놓은 상태였다.

널찍해진 갱도 입구에선 광석을 가득 실은 수레가 바삐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괜히 내가 온다고 사람들 일하던 거 다 멈추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그런 건 안 하는군.’

“어이.”

방금 막 갱도에서 올라온 광부를 불러 세웠다.

“어엇……! 네, 네! 전하!”

광부는 수레를 멈춰 세운 채로 납작 엎드렸다. 그런 그는 그대로 내버려두고 광석을 살펴봤다.

광석의 거뭇거뭇한 돌덩이 사이에 순철이 반짝거렸다.

처음 엔델로 광산에서 접한 광석은 순철의 함량이 매우 적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거에 비하면 반절도 채 되지 않는 양이었다.

수레에 가득 실린 광석들 대부분도 비슷한 상태였다.

“품질이 좋군.”

“네! 광맥을 제외하곤 모두 자이언트 웜이 해결해 준 덕분이에요. 인부들한테도 품질이 너무 낮다 싶으면 채굴하지 않도록 지시도 해 놨습니다.”

“후후.”

이러니 광산 채굴량이 늘어나지 않고 못 배기지.

난 흡족한 얼굴로 이스바르트를 바라봤다.

솔직히 이스바르트가 내 윗사람이었으면 굉장히 귀찮았을 거다. 일 잘하는 행보관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런 행보관이 내 밑에 있으면 편하기 그지없다.

“아주 잘하고 있군.”

“감사합니다! 백작님!”

“그럼 잘한 녀석한테는 상을 줘야겠지.”

“상 말씀이신가요?”

“그래.”

난 들고 있던 광산을 내려놓곤 손을 툭툭 털었다.

“오늘 인부들은 모두 돌려보내라. 광산 주인 재량으로 정한 특별 휴일이다.”

“네? 하지만 인부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면…….”

“…당연히 오늘치 임금은 줘야겠지. 오늘 야간에 투입할 인부들도 빠짐없이 해당되는 특별 휴일이다.”

“일을 안 했는데 임금을 준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오늘 발생할 임금은 내 사비로 충당할 테니 걱정 말고.”

“아, 아닙니다! 그런 걱정을 하는 게 아니라… 일을 안 했는데 돈을 준다셔서…….”

“아.”

잠시 잊고 있었다. 여긴 일곱 살 난 애들도 광산에서 일을 시키는 지독한 세상이란 걸.

그런 세상에서 유급 휴가라니 이해하기 어려울 만했다.

“으음… 간단히 말하자면 선물 같은 거지. 자애로운 백작 나리가 내려 주시는 은혜.”

“아!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지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바르트는 따로 사람들을 불러 인부들을 해산시켰다.

처음엔 고갤 갸웃했던 이들이지만, 귀족 나으리께서 내려 주신 은혜라는 말에 다들 눈물을 글썽이며 고마워했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거 참 유급 휴가 하루 줬다고 난리네.’

“그리고 이스바르트.”

“네, 백작님.”

“너에게도 상을 줘야겠지.”

그러면서 품속에 쟁여 뒀던 아티팩트 하날 꺼내 들었다. 새하얀 상아를 깎아 만든 가면이었다.

특출 난 스킬이 붙어 있는 건 아니지만 따로 끈으로 동여맬 필요 없이 살갗에 대기만 하면 찰싹 달라붙는 가면이다.

난 한 손엔 가면을 든 채로 이스바르트의 얼굴과 가면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흐음… 이쯤이면 되겠군.”

대충 눈대중으로 크기를 가늠하곤 가면의 한 귀퉁이를 잘라 냈다. 그러자 한쪽 눈두덩일 덮을 만한 크기의 가면만이 남았다.

“한 번 써 봐라.”

“아…….”

이스바르트는 가면을 받아 들곤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나름 한 광산을 관리할 정도로 중요한 직책에 오른 여자다.

그런 여자가 얼굴을 붕대로 칭칭 감고 다닌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설마 마음에 안 드나?’

이스바르트는 소설에서도 가면을 쓰고 다닌 터라 별 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남의 치부를 건드리는 걸로 여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맘에 안 들면…….”

“정말… 감사드리옵니다, 백작님.”

이스바르트는 둘러 싸매고 있던 붕대를 천천히 풀었다.

어렸을 적 모략에 당해 갈색빛으로 물든 살갗이 그녀의 하얀 피부와 대비되어 더 안쓰러워 보였다.

착.

이스바르트가 가면을 얼굴에 얹자 피부에 찰싹 달라붙었다.

귀족들이 가면무도회를 할 때 쓰는 가면이다.

쓰고 춤을 추는 한이 있어도 안 떨어지는 거니 불편함은 없을 거다.

가면을 쓴 이스바르트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얀 피부에 상아빛 가면을 써서 그런지 꽤나 잘 어울렸다.

긴 흑발까지 더해지니 살짝은 무섭다고 해야 하나? 소설 속 이스바르트의 모습이 잠시나마 스쳐 지나갔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크흑!”

가면 너머 이스바르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렇게 좋은가?

“…죄송합니다. 백작님. 이런 걸 받아 본 건 처음이라.”

“충성스런 가신에게 이 정도는 해 줘야지.”

“감사합니다! 백작님! 이 한 몸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백작님을 위해 몸 바치겠습니다!”

“흐흐흐. 그래 준다면 고맙겠군.”

이스바르트의 어깨를 한 번 토닥여 줬다.

“그럼. 상을 줬으니 날 위해 일 좀 하나 더 해 줘야겠어.”

“네! 뭐든 말씀하세요!”

그녀는 얼른 눈가를 한 번 훔치곤 눈을 부릅떴다.

맘에 드는 표정이다.

“오늘 엔델로 광산에 온 건 한가로이 구경이나 하러 온 게 아니다. 찾는 게 있어서지.”

“찾으시는 게 있다구요?”

“그래.”

엔델로 광산만 보려 했다면 이슬린과 프리아나까지 대동하고 올 이유는 없었다.

내가 찾는 건 엔델로 광산의 지하 깊숙한 곳에 숨겨진 ‘그것’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걸 찾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이스바르트와 그녀가 다루는 자이언트 웜이었다.

“찾으시는 게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프리아나는 궁금한 듯 고갤 갸웃했다. 그도 그럴 게 여긴 철광산이지 던전이 아니다.

철광석이라면 땅에서 샘솟겠지만, 던전이 아닌 이상 아티팩트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이 소설의 마지막화만 빼고 다 읽은 나만은 알고 있었다.

“지하에 숨겨진 고대인의 보고. 오늘은 그걸 찾으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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