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며칠 전 아주 혁혁한 공을 세웠더군?”
갈렌 왕자는 음흉한 얼굴로 내 주윌 빙글빙글 맴돌았다. 독한 술냄새가 그를 따라 내 주윌 맴돌았다.
“사소한 일이었습니다. 그저 황금 은행을 습격해 온 적들을 막아 냈을 뿐입니다.”
“뭐라? 그 말은 별것도 아닌 공으로도 국왕 전하께서 백작위를 내렸다는 건가?”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사죄드리지요.”
“흐흐…. 방금 그건 용서해 주지. 난 관대하니까. 하지만 앞으로 조심하라고.”
“…….”
갈렌은 괜한 말꼬투릴 잡으며 시비를 걸어왔다. 녀석의 말투를 살펴보곤 확신했다.
‘이 새끼 안 취했네.’
소설에 나오는 갈렌 왕자는 술이 상당히 셌다. 고작 독주 한 병으로 취할 놈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술에 취한 척하면서 미친 짓 한 번 해 보겠다는 건데.
“그나저나. 황금 은행에 있었다고?”
“…예, 전하. 때마침 황금 은행에 볼일이 있었던 터라.”
“볼일이라… 무슨 볼일?”
“황금 은행과 간단한 거래를 하나 하고 싶은 게 있었을 뿐입니다.”
“흐음… 거래……. 황금 은행이랑 말이지.”
갈렌은 뭔갈 꾸미고 있는 듯 계속해서 말꼬릴 붙잡고 늘어졌다. 주위를 맴돌던 녀석의 발걸음이 멈췄다.
“참으로 묘한 시기로군. 그저 간단한 거래를 하려던 차에 황금 은행이 습격을 당했다라…….”
“그렇습니다. 귀빈실에 머문 다른 귀족들처럼 우연히 벌어진 일이지요.”
“…하하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우연? 물론 다른 귀족들만 놓고 봤을 땐 충분히 우연하게 일어날 일이지.
“…….”
“하지만.”
갈렌은 품속에서 새하얀 양피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가 든 양피지는 자잘한 글귀들로 가득했다. 연회장에 있던 이들의 이목은 어느새 갈렌 왕자와 나에게로 쏠려 있었다.
“그중에 흑마법사와 연관되었던 자가 있었다면?”
“…예?”
“물론 어디까지나 용의선상에 있던 자지만, 흑마법사들과 엮여 있던 놈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녀석은 들고 있던 양피지를 내 앞에 내던졌다.
그건 과거 임페라 백작령에서 발생한 시귀폭 사건에 대한 조사 보고서였다.
이건 이미 끝난 일이다. 시귀폭 사건을 일으킨 흑마법사 로물루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처형당했다.
로물루에게 사건을 의뢰한 건 베네르 백작. 녀석은 내 손에 죽고 모든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그런 사건에 대한 이야길 지금 꺼낼 근거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사고 범주에 있을 때의 이야기다.
팔락.
갈렌 왕자가 던진 양피지엔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미친 망나니 귀족 놈이 몰래 흑마법에 손을 댔다가 제 영지에까지 사고를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한 가지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 내용이었다.
내 손으로 로물루를 잡아 바치고 베네르 백작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사실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내용이기도 했다.
“…이미 베네르 백작이 독단적으로 꾸민 일로 정리됐다 알고 있습니다만.”
“하지만 말이지……. 아무래도 의심을 떨쳐 낼 수가 없어서 말이야. 지난 참극의 유력 용의자가 또 사건의 중심지에서 나타나다니? 안 그런가?”
“…….”
“덕분에 이런 생각까지 들더군! 이 모든 게 그 망할 용의자가 꾸민 자작극이 아닐까 하고 말이야!”
“지나친 억측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억측? 네놈에겐 이게 그저 억측으로만 보이나!”
콰악!
갈렌 왕자의 손아귀가 내 멱살을 잡아챘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다른 귀족들도 뻔히 보는 연회장 한복판에서 이런 미친 짓을 벌이다니.
“크흐흐……!”
놈은 날 거칠게 밀쳐냈다.
“물론 억울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
갈렌은 손을 툭툭 털곤 흰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하여 나 아이소테르의 후계자 갈렌 왕자의 이름으로 명한다. 오늘 이 시간부로 이안 임페라에 대한 이단 심문을 재시작한다.”
“그, 그런……!”
잠자코 듣고 있던 프리아나가 잠자코 듣다못해 자릴 박차고 일어섰다.
난 한쪽 팔로 녀석의 어깨를 내리누르곤 작게 속삭였다.
‘경거망동 하지 마라. 그게 저놈이 원하는 거다.’
‘하오나 공자 전하! 이런 말도 안 되는 처사가 어디 있습니까!’
‘왕가 모독죄로 즉결 처분당하고 싶지 않다면 잠자코 있어라.’
프리아나를 말린 난 다시 갈렌에게 되물었다.
“이단 심문이라고 하셨습니까.”
“크흐흐! 그래!”
이단 심문.
소설에서도 이딴 개짓거리의 용도로 많이 쓰였다.
왕국 연합법상 왕족들은 이단 심문권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대충 그럴싸한 심증만 있다면, 무고한 이들이라 할지라도 이단 심문권을 이용해 나락으로 빠뜨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원하는 죄목을 불을 때까지 고문도 서슴지 않을뿐더러 왼손을 잘라 블랭크로까지 만드는 정신 나간 심문이다.
갈렌 왕자는 그걸 노리고 있었다.
내가 알아서 없던 죄목이라도 불든가, 아니면 결백하다 버티다 손목이 잘려 블랭크로 전락해 버려라.
그중 어느 것 하나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없었다.
“…….”
난 연회장 가득 모인 다른 귀족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수십에 달하는 귀족들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억지다. 그 사실은 다른 귀족들도 다 알 터.
하지만 놈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명예니 뭐니 따지는 귀족 놈들도 결국 왕자의 비행엔 조용히 눈을 감고만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을지도 몰랐다.
내가 처형되거나 블랭크가 되면 떨어질 콩고물이 잔뜩 있을 테니까.
“하.”
여기서 순순히 잡힐 순 없었다.
자백을 끄집어내기 위한답시고 블랭크로 만들어 버릴 텐데. 그럼 끝이다.
랭크가 전부인 이 세상에서 블랭크보다 끔찍한 형벌은 없다.
그렇다면.
‘도망쳐야 하나?’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애써 백작위를 받은 게 아깝긴 하지만, 애초에 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블랭크가 돼 버릴 바엔 가문도 이름도 버리고 새로 출발하는 게 나았다.
테라리움에서 빠져나가는 것도 문제지만, 바깥으로 통하는 비밀 출구 정도는 소설에서 봐서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망할 망나니 새끼 불알이라도 한쪽 뜯고 내빼야 속이 시원할 것 같다.
츠츠츠……!
두 다리에 마나를 집중시켰다. 이대로 놈에게 달려들기만 하면……!
“멈추십시오!”
갑작스레 끼어든 목소리에 의해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두 다리에 모여 들었던 마나에 힘을 뺐다.
“지금 당장 멈추십시오! 이게 대체 무슨 추태입니까!”
갑작스레 끼어든 목소리의 주인은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중후한 음색이었다.
“아이소테르의 왕족이시란 분께서 어찌 이런 추태를 보이시는 겁니까!”
“추태?”
갈렌 왕자는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감히 왕족에게 그따위 망언을……!”
거슬리는 놈은 죄다 베어 버리겠다는 말투였지만, 남성의 얼굴을 본 갈렌은 몸이 얼음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다, 당신은……!”
하얗게 샌 턱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중년 남성. 그리 낯설지 않은 얼굴의 사내였다.
“…난 그저 이번 습격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를 심문하는 것뿐이다!”
“그럼 더더욱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이지요!”
남자는 갈렌 왕자와 내 사이를 가로막은 채 소리쳤다.
“나 듀런 가문의 가주 스림. 내 이름을 걸고 보증하겠습니다! 이분은 황금 은행 습격에 관여한 불한당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오히려 죽을 위기에 처한 이들을 돕고 역적 무리들과 혈전까지 불사하신 몸입니다! 그런 분이 이단 심문이라니요!”
“으음…….”
갈렌은 스림이란 사내의 말에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난 무릎을 꿇은 채로 스림이란 자가 누군지 떠올려 보려 애썼다.
“…아!”
황금 은행 습격이 있던 날 밤.
그땐 워낙 상황이 급해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듀런 가문의 가주 스림이라면 분명…….
“이 몸 또한 도라스 국왕 전하의 숙부로서 이단 심문에 대한 권한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생명의 은인께 해악을 가한다면, 같은 왕족으로서 가만히 있진 않을 겁니다.”
“으윽…….”
듀런 공작.
그는 아이소테르가 아닌 도라스의 왕족이다.
전대 도라스 국왕의 동생으로 지금은 듀런이란 성을 따로 하사 받아 공작의 지위를 가진 자다.
소설의 주무대가 아니기도 했고, 남의 왕국 숙부 이름까지 기억할 정도로 이안은 정세에 해박하지 않았다.
덕분에 어디선가 들어 보긴 했다만 정확히 누군진 떠올리지 못했다.
이따금 도라스 국왕의 숙부라고 나오긴 했다.
이 정신 나간 세계관 속에서 몇 안 되는 정상인이라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이 사람도 사교 파티에 초청됐었구나.’
이번 사교 파티엔 도라스의 귀족들도 몇 참석해 있었다.
모두 왕국 연합이란 이름 아래 묶여 있던 터라 가능한 일이었다.
‘이래서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 한다니까.’
그를 구하려고 나선 건 아니었다만, 다행히 생명의 은인까지 무시할 정도로 안면몰수인 자는 아니었다.
“이익……!”
이단 심문이 왕족의 권한인 건 갈렌뿐만 아니라 듀런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습격의 밤 두 눈 뜨고 내 싸움을 지켜본 자니 아무리 갈렌 왕자라 할지라도 억지를 부릴 순 없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갈렌 왕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철컥!
하는 수 없이 갈렌은 뽑아 들었던 검을 다시 검집에 꽂아 넣었다.
잔뜩 구겨진 놈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소한 냄새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이번… 일은……! 반드시 기억할 것이오!”
갈렌은 듀런 공작을 향해 따지듯 쏘아붙였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갈렌 왕자님.”
“…흥!”
뒤돌아서려던 갈렌은 애꿎은 프리아나한테 화풀이라도 하려는 듯 이죽거렸다.
“왕족을 버리고 이깟 놈을 새로운 주인으로 삼다니! 그런다고 뭐가 나아질 게 있다고 생각하느냐?”
“…제 선택에 후회는 없습니다.”
갈렌의 시비에도 프리아나는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괜히 시비 걸려다 오히려 프리아나의 말에 더 화만 자극받은 꼴이 돼 버렸다.
“…카악! 퉤!”
녀석은 콧바람을 내뿜으며 뒤돌아섰다. 씩씩거리며 물러나는 그의 뒤로 프리아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놈이 물러났으니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뒤끝 있는 놈이라 앞으로 내게 무슨 짓을 할지 상상도 하긴 싫지만, 블랭크나 수배자가 되는 것보단 나으니까.
“덕분에 살았습니다.”
난 갈렌 왕자에 맞서 내 편을 들어준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히려 목숨을 부지한 건 접니다. 이안 공… 아니지요. 이젠 이안 백작님이라 불러야겠군요.”
“하하…….”
그가 아니었다면 난 이대로 끌려가거나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을 거다.
뭐가 됐건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질 건 뻔했다.
사교 파티는 갈렌 왕자의 행패로 인해 유야무야 마무리됐다.
다들 본 게 있어서인지 갈렌 왕자가 연회장을 떠나고 나서도 내게 말을 걸려 하는 이는 없었다.
분위기 다 망쳐진 마당에 사교 파티랄 것도 없으니, 적당한 때를 봐서 듀런 공작과 함께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오늘 일은… 같은 왕족으로써도 민망한 일이었습니다.”
“…아닙니다.”
듀런은 자기 일인양 내게 대신 사과했다. 다른 왕족이나 귀족들도 듀런만큼 정상적이면 얼마나 좋을까.
“일단 오늘은 이쯤하고 돌아가야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듀런은 자기가 타고 온 마차에 올라타 도라스를 향해 떠나갔다.
“후…….”
콰악!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방금 왕자를 대면하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난 아직 약하다.
거지꼴에선 벗어나게 됐지만, 망나니 왕자놈의 심기를 거슬렀단 이유만으로 한순간에 몰락할 뻔했다.
지금의 내 위치는 딱 그 정도였다. 괜히 남의 심기라도 거슬렀다간 그대로 골로 갈 수도 있는 약자.
오늘은 스림 공작이 나서 준 덕에 살 수 있었지만. 앞으로도 계속 요행을 바랄 순 없었다.
‘강해져야 한다.’
나 스스로가 함부로 무시 받지 못할 힘을 키워야 한다.
“…….”
검술과 마법 랭크 4. 나쁘지 않은 수준이지만 딱 그 정도다.
앞으로의 일을 대비하기 위해선 더 많은 힘이 필요했다. 무슨 수를 쓰는 한이 있더라도.
“다, 다행입니다…….”
프리아나는 마차에 타고 나서도 진이 빠졌는지 목소리에 맥아리가 없었다.
나도 진이 빠지는 하루였던 건 마찬가지라 한숨을 푹 내쉬고 창밖을 바라봤다. 창틀 너머론 테라리움이 달빛에 희게 빛나고 있었다.
‘뭣 같은 성이라니까.’
“우윽…….”
이슬린은 속이 메스꺼운 듯 입가를 틀어막았다.
참았던 긴장이 한꺼번에 터진 탓이었다. 녀석은 잔뜩 겁먹은 생쥐 마냥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어이.”
“네? 아앗…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 있어. 역겨운 건 저 성 안에 놈들인데.”
“…….”
“이제 집에 가서 좀 쉬자고.”
하긴 이슬린도 갈렌 왕자를 처음 만나 보는 걸 테니까.
나야 귀족이니 이런저런 이유를 대 가면서 조지는 거지, 평민이면 파리 취급도 안 해 주는 게 갈렌 왕자다.
그런 무시무시한 놈을 마주했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