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연회가 있기 몇 시간 전.
테라리움 내에서도 손에 꼽는 이들만 출입할 수 있는 국왕의 알현실.
그런 엄중한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발자국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쾅!
“…전하!”
경박스런 소리와 함께 문이 세차게 열렸다.
저런 짓을 하고도 멀쩡히 목숨 부지할 수 있는 건 단 두 가지 경우의 사람뿐이다. 왕 본인이거나, 왕의 자식이거나.
“그게 사실입니까!? 백작위를 수여한다니요!”
그는 다름 아닌 에런골드 2세의 하나뿐인 아들, 갈렌 왕자였다.
갈렌 왕자의 등장에 재상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는 에런골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뻐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에런골드가 그의 아들을 바라보는 눈빛은 사랑보단 혐오에 가까웠다.
그는 아무런 말없이 그의 아들을 노려봤다. 매서운 그의 눈빛에 갈렌 왕자는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러뜨렸다.
“하, 하오나… 백작이란 작위를 저에게 한 마디 말씀도 없이 결정하신다는 건…….”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구지?”
“…….”
“대답하라.”
“…전하이옵니다.”
“그럼 작위를 내리는데 권한이 있는 건 누구지? 교황청의 늙은이들인가?”
“아, 아닙니다! 그것 또한… 전하이옵니다.”
“그런데 내가 왜 너한테 이런 걸 물어야 하는 거지?”
“…….”
아이소테르 왕국의 왕자 갈렌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뺨이 불룩 솟아오르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전하…….”
지금 이 상황에서 제일 불편한 건 둘 사이에 낀 재상 두아트리스였다.
보다 못한 그가 한마디 꺼내려 했지만 에런골드의 차갑다 못해 싸늘한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나가라.”
“…예, 전하.”
갈렌은 두 눈이 붉게 충혈된 채로 알현실을 뛰쳐나갔다. 감당하게 어려울 정도의 모멸감이 그의 전신을 옥죄였다.
재상은 둘 사이에서 입을 샐쭉이 내밀고 눈치를 살폈다.
둘 사이의 알력은 수년간 왕을 보필해 온 그가 제일 잘 알았다.
‘전하께서도 항상 다그치실 필요는 없을 텐데.’
“신경 쓰지 마라. 내일 백작위 수여는 변함없이 진행한다.”
“예. 전하. 하오나 왕자님께도 전하의 계획에 대해 살짝 언질이라도 내어주시는 것이 어떨지…….”
“필요 없다. 그런 간단한 수조차 읽지 못하는 녀석이라면 모르는 편이 나을 테니.”
“…죄송하옵니다. 전하. 제가 그만 주제넘는 실언을…….”
에런골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갤 돌렸다.
문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새어 나가 갈렌 왕자도 이를 똑똑히 들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있었다.
“…….”
어째서 아비란 작자가 저리 차가운 것일까.
갈렌은 이십 평생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갈렌 왕자는 아빌 닮아서 그런지 둔재는 아니어도 범재 수준의 머리는 가지고 있었다.
마법에 대한 적성도 크게 나쁘지 않아 잘만 다듬으면 옥석이 될 인재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노력해도 에런골드가 따스한 눈빛을 내보인 적은 없었다.
벌레라도 보는 듯한 한심스런 눈빛만 내보였을 뿐.
“흐으……! 흐으……!”
갈렌은 좀처럼 분을 삭히질 못했다.
당장이라도 누군갈 찢어 죽이고만 싶었다. 또 애꿎은 시종이 죽은 채 테라리움 밖으로 내버려지게 생겼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의 분노를 사그라뜨릴 순 없었다.
그가 화내고 싶어 하는 대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에런골드 2세.
제 아비이자 이 왕국의 주인이었다. 그게 불가능한 걸 알기에 괜한 데 화풀이 하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다.
‘한심한 놈.’
에런골드의 입에서 나온 말인지, 아님 오랜 세월 아비로부터 느껴 온 열등감에 갈렌 왕자가 헛소릴 들은 건지 확실치는 않았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건 갈렌 왕자가 그렇게 들었다는거다.
“씨…팔……!”
자신을 벌레, 어쩌면 그 이하의 무언가로 바라보는 듯한 에런골드의 눈빛은 계속해서 갈렌을 괴롭혔다.
한참을 머릴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워하던 그는 이내 새로운 희생양을 떠올렸다.
이번 황금 은행 습격을 막았다던 임페라 가문의 망나니 아들 놈.
에런골드를 향해야 할 분노의 화살은 어느 샌가 이안 임페라라는 남자에게로 향해 있었다.
* * *
‘뭐라고?’
에런골드의 말을 들은 난 그가 혹시나 실언을 한 건 아닐까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떨림 하나 없는 차분한 그의 눈빛에서 달라질 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가, 감사합니다. 전하.”
일단 주는 건 받아야 하니 에런골드가 건넨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따로 마법이라도 부여했는지 원래 내 것인양 손가락 굵기에 딱 들어맞았다.
그리곤 잠자코 에런골드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혹시 손등에 독이라도 바른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안 임페라. 오늘부로 충성스런 가신으로서 아이소테르의 영광을 위해 이 한 몸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아이소테르를 위하여!”
“아이소테르를 위하여!”
연회장에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고고하고 고지식한 귀족들이 날 위해 마련된 자리에서 왕국의 번영을 부르짖었다.
뭇 남성이라면 가슴 벅찬 관경이기에 충분했다. 적어도 난 아니지만.
귀족들은 겉으론 왕국의 이름을 연신 외쳐댔지만 이들의 눈빛만큼은 달랐다.
먹잇감을 노리는 사냥개를 떠올리는 눈빛. 이는 새로이 등장한 백작위의 귀족에게 향해 있었다.
‘이런 거였나.’
이쯤 되자 에런골드의 속셈이 대강 짐작이 갔다.
견고히 짜여진 귀족들 간에 던져진 자그마한 조약돌. 이는 오랜 세월 웅크려 있던 이들의 마음에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새로 등장한 저 망나니 녀석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지, 아니면 물어뜯어 잡아먹을 먹잇감으로 삼을지. 저마다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뒤통수 뚫리겠네.’
* * *
백작위 수여가 끝났다. 에런골드는 작위 수여식이 끝나자마자 제 볼일 다 봤다는 양 연회장을 떠났다.
왕의 눈칠 보며 잔뜩 주눅 들어 있던 귀족들은 그가 나가자마자 숨통이 트였다.
그리곤 이내 에런골드의 파격적인 행보에 입이 바쁘게 움직였다.
“전하께서 큰 결정을 하셨군요!”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백작위라니!”
마치 누구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떠들어 대는 놈들도 있는 반면, 내게 다가오는 이들도 하나 둘 나타났다.
“이안 공… 백작님! 새로이 백작위에 오르시다니! 정말 축하드립니다!”
“그나저나 오실 때 보니 아주 멋진 마차를 타고 계시던데…….”
놈들은 내 앞에서 비위라도 맞추려는지 온갖 아양을 떨어 대기 시작했다.
마차가 어떻다드니 황금 은행을 구한 구국의 영웅이라느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 똑같은 놈들이다.
베네르 백작놈한테 몰락 직전에까지 놓였을 땐 아무 말도 안 하던 놈들인 건 매한가지다.
놈들에게 난 딱 먹기 좋은 먹잇감이나 다름없었다. 베네르 백작의 영지를 그대로 흡수하면서 백작위까지 받았으니까.
나이까지 어린데다 개망나니로 명성을 떨치던 놈이었으니 아주 만만하게 보이고 있었다.
황금 은행의 습격을 막은 것도 내 옆에 있는 프리아나가 다 한 것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이놈들은 어쩐다?’
마음에 내키진 않지만 함부로 척을 질 수는 없었다.
귀족들 간 정쟁이란 그런 거니까. 그렇다고 아무 놈들한테나 친분을 쌓고 싶은 건 더더욱 아니었다.
“으음…….”
한창 고민에 빠져 있던 와중에 한 남자가 내 쪽을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손엔 바닥을 드러낸 독주가 한 병 들려 있었다.
“넌가?”
“너라니! 그게 무슨…….”
손바닥까지 싹싹 비벼가며 아양 떨던 놈은 갑작스레 등장한 불청객에게 한마디하려 했다.
하지만 이내 불청객의 정체를 알아보곤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허억!”
“뭐어? 방금 뭐라 그랬지이?”
“아, 아닙니다! 갈렌 왕자님!”
‘갈렌 왕자?’
녀석의 정체는 갈렌 왕자였다.
평시에 봤다면 멀쩡했을 법한 외모지만, 술에 절어 정상적이라고 보긴 어려운 꼴을 내보이고 있었다.
세상 불만을 죄다 홀로 독차지한 듯 부리부리한 눈매는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께름칙한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코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왕자는 방금 마주한 에런골드의 아들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리 왕자라 할지라도 귀족들이 잔뜩 모인 연회장에서 내보일 몰골은 아니었다.
‘이런…….’
갈렌 왕자라면 타이밍이 좋지 않다.
“저, 저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갈렌의 등장에 내 주윌 서성이던 귀족들이 슬금슬금 달아났다.
그건 좋긴 했지만, 이건 늑대 피하려다 호랑일 만난 꼴이다.
갈렌 왕자는 가급적이면 만나고 싶지 않은 녀석이니까.
갈렌 왕자. 이 녀석은 소설 속에서 이안보다 더한 개망나니 정신병자 새끼다.
전(前) 망나니 입으로 이런 말하기 뭐하지만, 망나니에도 급이 있다.
별 볼 일 없는 놈이 혼자 깝죽거리는 게 하수, 돈 좀 있는 놈이 돈 펑펑 써 재끼면서 으스대는 게 중수, 귀족이란 작위까지 믿고 나대는 놈이 고수다.
이안은 이 중 고수에 해당했고 덕분에 임페라 가문을 몰락시킬 지경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귀족이 아니라 왕족이라면? 세상에 왕족을 제지할 사람은 왕 말곤 없다.
말 그대로 안하무인, 망나니의 천성을 타고났다면? 망나니 중에 초고수 망나니라 칭할 수 있다.
‘그게 갈렌이지.’
원래부터 망나니인 녀석은 아니었다.
에런골드의 압박감에 못 이겨 미쳐 버렸다고 해야 하나? 어찌 됐건 놈이 미친놈인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심지어 이놈은 오러 유저에 마법까지 배운 놈이라 걸핏하면 화풀이로 시종들이 죽어 나간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시종을 죽이는 미친놈이다.
그런 놈이 아이소테르 왕국의 왕자다. 에런골드에겐 갈렌 말고는 딸 하나뿐이었다.
왕국 연합법상 최우선 서열은 갈렌이 유일. 소설에서 에런골드 사후 자연스레 왕위는 갈렌에게로 돌아간다.
덕분에 아이소테르 왕국은 그 어떤 왕국보다도 빠른 속도로 몰락한다.
‘그런 미친놈이 왜 날…….’
꼴을 보아하니 뭔가 비열한 술수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었다.
연회장에서까지 이런 개망나니 꼴을 한걸 보면, 뭔가 삔또가 상해서 그런 걸 거다.
이유는 에런골드한테 욕이라도 한바가지 얻어먹어서 그런 거겠지.
“맞지이? 이번에 백작 자릴 받은 노옴…….”
“…맞습니다.”
“후후후…….”
별안간 녀석은 기분 나쁜 웃음소릴 흘렸다.
반쯤 헝클어진 그의 제복 가슴팍엔 검은 늑대 한 마리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채 상대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X팔.’
하필이면 대륙 최강의 개또라이 새끼를 만나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적당히 눈치 봐서 빠져나가는 거였는데.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렇담 최소한 물에 바짓가랑이가 젖지 않도록 해야지.
“왕자 전하.”
난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갤 숙였다.
“충직한 하인에게 아이소테르 왕가 혈통께서 무슨 볼일이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난 머릿속 기억 저편에 자리 잡은 왕실 예법을 떠올렸다.
백작위에 오르긴 했다만 그래 봤자 왕자한테 개길 깜냥이 안 된다.
이제 막 백작위를 받았다고 개겼다간 즉시 참형이다. 괜히 깝죽거리다 죽는 것보단 잠시 굽혀 줘야 하는 법이다.
넙죽 엎드린 모습에 갈렌 왕자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드리웠다.
뒤이어 옆에 있던 프리아나와 이슬린도 비슷한 자셀 취했다.
“프, 프리아나 아르난. 왕자 전하를 뵈옵니다.”
“…….”
“호오.”
갈렌 왕자는 프리아나를 발견하곤 신기한 듯 쳐다봤다.
에런골드의 직속 기사로 배속 받았던 터라 갈렌 왕자도 얼굴을 알고 있는 듯했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구운.”
“…영광이옵니다! 왕자 전하!”
“하지만 오늘 볼일이 있는 건 네놈이 아니지이.”
갈렌 왕자는 몇 방울 남지도 않은 독주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
난 묵묵히 고갤 숙인채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내가 오늘 만나러 온 건 바로 너다. 이안 임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