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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67화 (67/222)

67화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우리 일행은 이내 테라리움 내성에 도달했다. 거기서 우린 하얀 겉껍질에 둘러싸인 성 내부라 믿기 어려운 풍경을 마주했다.

내성 곳곳에 위치한 과일 농원에선 산뜻한 초록빛을 띄우며 익어 가고 있었고, 그 위론 따사로운 햇살이 포근하게 내려쬈다.

천장엔 아래에선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그마한 구멍이 송송 뚫려 있었다.

이를 통해 빛이 내려오는 것 같았다.

주위론 지하수를 끌어올려 만든 수로까지 파여 작물들이 자라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과실을 거두고 남은 풀떼기는 따로 수레에 담아 어디론가 가져가는 모습도 보였다.

아마 가축의 여물로 쓰려는 듯했다.

퀴퀴한 냄새가 나진 않았지만 가축을 기를 축사도 내성 한켠에 마련되어 있을 테니까.

소설 속에선 이런 말까지 나왔다.

‘테라리움은 외부로부터 철저한 고립 상황에서도 반년은 버틸 수 있다.’

테라리움에 사는 사람 입이 한두 개도 아니고, 반년은 좀 억지가 아닌가 했는데, 대충 돌아가는 구조를 보아하니 1년은 거뜬히 버티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정말로 없는 게 없군.”

“저도 처음 들렀을 땐 놀라긴 했습니다. 저희 가문 영지에선 이런 건 꿈도 못 꿨으니 말입니다.”

“그래?”

프리아나는 옛 기억이 떠오르는지 잘 아는 것처럼 한마디 거들었다.

이슬린도 그런 그의 말에 수긍하듯 고갤 끄덕였다.

“아직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두 번째 관문 너머엔 정말로 별게 다 있죠.”

“흠…….”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이슬린을 쳐다봤지만 녀석은 모르는 척 고갤 돌렸다.

확실히 왕국의 수도답게 일반 영지들과는 비교 자체가 민망했다.

다 쓰러져 가는 임페라 백작령에 비하면 개미와 코끼리 수준의 차이였다.

잠시 수로를 따라 힘차게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구경하다 보니 두 번째 관문을 지나쳤다.

미리 언질이 있었는지 마차를 보자마자 관문을 열어젖혔다.

이슬린의 말대로 두 번째 관문 너머는 하나의 도시처럼 꾸며져 있었다.

황금 은행의 은행 구역 못지않게 빽빽하게 자리 잡은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던 와중에 큼지막하게 자리 잡은 두 건물에 눈이 밟혔다.

뾰족하게 솟은 첨탑 한 채와 콜로세움마냥 둥그렇게 지어진 건물이었다.

프리아나는 추억에 젖은 눈빛으로 첨탑을 바라봤다. 첨탑 안에선 앳된 목소리의 기합이 이따금씩 터져 나왔다.

“저게 제니스 기사 학교인가?”

“음… 제가 나온 제니스 기사 학교는 맞습니다. 원형은 여기 말고 다른 데에 있지만요.”

“그랬지.”

정확히 말하면 테라리움 내부에 위치한 첨탑은 제니스 기사 학교가 아니다.

제니스 기사 학교의 전신은 옛 카잔 제국의 영역에 위치해 있으니까.

카잔 제국이 멸망하고 제니스 기사 학교 또한 해체의 수순에 놓였다.

하지만 훌륭한 무력 양성소를 하루아침에 해체해 버리긴 아까웠던지라, 연합은 이를 잘게 나눠 각 나라에 나눠 가지게 됐다.

‘간단히 말하면 저건 체인점 같은 거지. 본점은 다른 데에 있고.’

첨탑의 맞은편에 위치한 건물은 라티스 마법 학교.

제니스에 비하면 영향력이 조금 밀리긴 하지만 이 또한 실력 있는 마법 학교다.

덕분에 라티스도 해체가 아니라 잘게 나뉘어 흩뿌려지게 됐다.

두 양성소의 전신은 모두 카잔 제국에 위치해 있었다.

새삼스레 제국이 얼마나 강성했는지 느껴지는 대목이다.

기사 학교도 한 번 구경해 보고 싶기는 했지만, 난 귀족이다. 귀족들 간 정쟁에선 사소한 행동 하나로도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그런 와중에 왕국의 사교 파티에 참석하러 온 귀족이 기사 양성소에 들린다? 호사가들 사이에선 마음대로 부풀려지기 딱 좋은 짓이다.

‘나중에 보러 올 기회가 생기겠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사교 파티가 열리기로 한 제 1 연회장에 도착했다.

“오셨군요!”

연회장에 도착하자마자 깔끔한 정장 차림의 남성이 반갑게 맞이했다. 삐져나온 수염 한 톨 없이 멀끔하게 정리된 얼굴에서 그의 성격이 대강 짐작 갔다.

“이번 파티에서 손님분들을 대접하게 된 제4시종장 헤이즐 윈스턴입니다. 임페라 가문에서 오신 이안 공자님. 맞으신가요?”

“그렇다만.”

“하하! 불한당 무리를 격파하신 공자님의 존안을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럼…….”

견과류를 좋아할 것 같은 이 남자는 곁에 있던 시종들을 향해 가볍게 눈짓했다.

곧바로 시종들은 마차에 실려 있던 짐을 챙겨 옮기기 시작했다.

짐을 옮기는 시종들은 타고 온 마차(魔車)를 신기한 듯 쳐다봤다.

하지만 이내 제 할 일에 집중했다.

“멋진 마차로군요.”

헤이즐은 어색함을 떨쳐 내려는지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난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한 번 피식 웃고 말았다.

헤이즐도 딱히 대답을 원치는 않았는지 푸근한 미소를 짓기만 했다.

“작위 수여식의 주인공께서 오셨으니 곧 식이 진행될 것 같습니다. 식의 순서는 여기 적어 두었으니 숙지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시종장은 뭐라 자잘하게 쓰여진 양피지 한 장을 건넸다. 그리곤 그의 안내에 따라 연회장 근처에 마련된 숙소로 이동했다.

뒤에선 뒤늦게 도착한 다른 귀족들이 줄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다들 화려한 장식을 하나씩 얹은 마차였지만 내가 타고 온 마차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애써 겉으론 덤덤한 태를 내려 애썼지만 신경 쓰여 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러다 마차에 새겨진 사자의 문양을 보곤 다시 한번 눈이 튀어나왔다.

“이, 임페라 가문에서 이런 걸 타고 왔다고?”

망나니 공자에 다 쓰러져 가는 거지 백작가. 그게 임페라 백작가를 향한 시선의 전부였다.

틀린 말은 아니다.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해도 망하기 일보 직전인 가문이었으니까.

‘이젠 아니지.’

난 신기해하는 귀족들을 향해 한 번 씨익 웃곤 자릴 떴다.

“다들 신기해하는 눈치군요.”

이슬린은 그런 귀족들의 반응을 눈치채고 있었다. 조금은 득의양양한 기세가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단순히 비싼 말을 빌려와 마차를 마련한 것과는 얘기가 달랐다.

그건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다리 찢어지는 꼴밖에 안 된다.

임페라 백작가의 사정을 뻔히 아는 다른 귀족들도 이를 잘 알 테고.

하지만 이 마차는 다르다.

애초에 상용화가 덜 돼서 돈 주고도 구하기 힘든 게 이 마차(魔車).

제아무리 돈 많은 귀족이라 할지라도 이 마차(魔車)를, 심지어 새 걸로 구해 오는 건 하늘에 별 따기였다.

‘이만하면 이제 무시당할 일은 없겠지.’

* * *

똑똑.

“공자님. 이제 곧 식이 시작됩니다.”

“알겠다.”

“혹시라도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시종은 짧게 제 할 말만 하곤 고갤 숙인 채 방을 나섰다.

테라리움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딱히 이상한 건 없었다.

입가심으로 내어 온 음료에도 이상한 건 없었고, 수상한 낌새가 느껴지는 것도 없었다.

아직까진 대부분 완벽했다.

한 가지 아쉬운점을 꼽자면…….

삐빅.

이슬린의 품 안에서 짧은 알람이 울렸다.

그녀가 품속에서 꺼낸 건 자그마한 달걀 같은 유리구슬. 통신용 마법구였다.

“…공자님. 백작님께서로부터 온 통신입니다.”

“흠…….”

임페라 백작가의 주인이자 이안 임페라의 아비. 에이먼 임페라. 그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난 착잡한 마음으로 통신용 마법구를 받아 들었다.

“예. 아버지.”

[하하! 이안! 잘 도착했느냐?]

“네. 이제 곧 식이 열릴 거라더군요.”

[흐흠. 그래. 별문제는 없는 것 같으니 다행이구나.]

“…….”

지금껏 내가 마음에 걸려 하던 게 바로 이거다.

‘에이먼이 이번 파티에 초대 받지 못했다는 거지.’

에이먼 임페라는 이번 식에 초대 받지 못했다.

표면상으론 내가 임페라 가문을 대표해서 오는데 가주까지 참석하는 건 낭비라는 이유에서였다.

말이야 그렇게 하긴 했지만 에이먼 입장에선 상당히 섭섭한 소식이었을 거다.

[바쁠 텐데 시간 빼앗게 해서 미안하구나. 조만간 얼굴 한번 봤으면 좋지 싶은데.]

“금방 찾아뵙겠습니다.”

[하핫. 이젠 제법 어른스럽게 말하는구나. 하긴 이제 너도 어른이지.]

“…….”

[알겠다. 그럼 잘 마무리하거라.]

에이먼과의 통신은 그렇게 끝났다.

부자의 대화라 하기엔 조금 짧은 감이 없지 않았다.

통신용 마법구 너머로 들려오는 에이먼의 목소리에선 풀 죽은 기색이 역력했다.

‘요새 좀 뜸하긴 했지.’

나 살기 바빠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에이먼과 통 만나는 일이 적었다.

황금 은행 습격을 막고 난 다음에도 잠깐 얼굴 비춘 게 전부였다.

‘상황 좀 진정되면 에이먼도 이쪽으로 불러야지. 일레느도 잘 있는지 신경 쓰이던 참이고.’

비록 진짜 부자 관계는 아닐지라도 한 가지는 안다.

적어도 에이먼은 악인은 아니다. 그간 이안의 비행을 눈 감아 줬을지라도 악의를 품고 그런 건 아니다.

그저 서투른 아버지였을 뿐이고 이안이 상상을 초월하는 망나니 새끼여서 그런 거지.

“가자.”

“네! 공자님!”

“네, 공자님.”

옷매무새를 한 번 가다듬고 식이 열릴 연회장으로 향했다.

연회장엔 이미 온 다른 귀족들로 북적거렸다.

“크흠!”

저들끼리 품격 있는 척 수다 떨던 양반들이 날 보자마자 헛기침했다. 자연스레 우리 일행을 향해 시선이 쏠렸다.

‘뭘 봐?’

라고 할 뻔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다들 화려한 드레스니 정장이니 차려입고 있지만 조그마한 틈만 보이면 시커먼 속내를 드러낼 놈들이다.

소설에선 저마다 새로운 왕을 꿈꾸며 싸우기 바쁜 더러운 놈들.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바쳐서라도 제 몫을 챙기려 발버둥 친다.

그게 이들의 본 모습이다. 아무리 화려하게 겉을 꾸며 댄다 해도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다들 내 평판을 익히 들어서인지 따로 말 거는 이들은 없었다.

‘나야 편하고 좋지.’

북적이는 인파 틈에 섞여 시간을 보내자 연회장의 문이 활짝 열렸다. 시끌시끌하던 연회장이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붉은 융단의 시작점에 꼿꼿이 허릴 피고 나타난 남자.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연회장의 귀족들과는 격이 달랐다.

그의 가슴팍에 새겨진 늑대 한 마리.

양옆으로 쭉 째진 눈빛은 문양의 주인이 심성을 대변하기라도 하려는 듯 사납기 그지없었다.

덥수룩하게 자란 검은 수염 너머로 깊게 자리 잡은 눈매는 가슴팍에 새겨진 늑대와 비교해도 지지 않을 정도였다.

‘저자가 바로…….’

대륙에서 가장 강한 권력의 일곱 수장 중 하나.

에런골드 2세.

그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꿀꺽!

옆에서 과자를 집어먹고 있던 프리아나가 마른침을 삼켰다.

원래대로라면 프리아나의 주인이었을지도 모르는 그의 등장에 적잖이 긴장한 듯했다.

“숨 쉬어, 숨.”

“아앗… 네, 네!”

에런골드는 차분하면서도 품격이 느껴지는 걸음으로 연회실 맨 앞에 위치한 왕좌로 향했다.

“시작하지.”

그저 평범하게 걸어와 왕좌에 앉았을 뿐이었지만 그걸로 작위 수여식은 시작됐다.

애써 시종장이 건넨 양피질 읽은 게 헛수고가 됐다.

뭔 개회며, 인사냐. 쓸데없는 절차들은 없었다.

‘저 녀석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으면 된다 했지.’

일단 대충 외워 둔 대로 에런골드의 앞에 다가갔다. 붉은 융단 위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어서 에런골드를 따라 들어온 한 사내가 그간의 공을 치하하는 내용의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

잠자코 고갤 푹 숙이고 있었지만 에런골드의 따가운 눈빛이 뒤통수를 뚫고 전해졌다.

한참을 이어진 서신 낭독을 끝으로 에런골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옆으로 푹신한 손 방석 위에 자그마한 반지가 하나 놓여 있었다.

‘저걸 받는 걸로 끝난다 하던데.’

가신으로서 충성을 다짐하겠다는 증표, 맹약의 반지. 에이먼도 하나 끼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딱히 아티팩트로 제약을 걸거나 하는 건 아니다. 금과 보석으로 만들어진 비싼 반지일 뿐이다.

‘작위는 아마… 자작이나 남작이겠지?’

남작일 확률이 높았다.

자작은 격이 좀 낮긴 해도 귀족 축에 끼긴 한다.

임페라 가문에서 내려온 만큼 명예직인 남작으로 끝날 거다.

에런골드는 손 방석 위에 올려져 있던 반지를 내게 건넸다. 금으로 만들어진 반지엔 빨간 보석 하나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남작한테 주는 것치곤 좀 큰 것 같은데?’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던 찰나,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에런골드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말 한마디에 연회실에 있던 이들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조차도 내 귀를 의심할 정도였으니까.

“이안 임페라에게 백작의 작위를 수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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