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메르헨은 자신의 초상화 앞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지난날 깡촌에서 올라온 한 귀족 청년과의 거래 때문이었다.
거래는 간단했다. 빚을 약간 탕감해 주는 대가로 자그마한 돌멩이 하날 받는 것.
거무튀튀한 회색빛 돌멩이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신의 영역에 도전한 마법사 오베론의 유물.
해석에만 성공한다면 파급력이 어마어마할 것이란 건 누구보다도 메르헨이 잘 알았다.
단순한 거래였지만 그 뒤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문이 너무나도 많았다.
어째서 오베론의 유산을 그가 가지고 있었는지, 깡촌에 망나니로 알려져 있던 그가 유산의 가치를 어떻게 알았는지.
나쁘지 않은 거래였지만 메르헨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랜 기간 돈을 만져 온 그였기에 왠지 모를 찜찜함이 그의 가슴께에 어렸다.
루디스는 그런 원로의 의중을 아는 듯 걱정스런 눈빛을 보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렇다네. 설령 아이소테르의 미움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말일세. 도라스를 구한 영웅을 모른 체한다는 건 말이 안 될 일이지.”
“원로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해해 주니 고맙네.”
“그럼, 다시 부르실 때까지 나가 있겠습니다.”
“아. 내 정신이 없었군. 피해 복구에 이만저만 바쁜 게 아닐 텐데. 자리로 돌아가 보게.”
“네, 원로님.”
루디스가 문을 닫고 나가자 두툼한 문짝 위로 룬 문양이 떠올랐다.
둥그런 바탕에 거북이의 등갑 형태를 띤 룬 문양. 외부의 침입을 철저히 막는 최상위급 결계였다.
이 결계는 연합에서 내려온 마법 랭크 7의 대마법사가 설치한 결계.
덕분에 습격 사건이 있고 나서도 원로들의 방만큼은 결계 파괴로부터 안전했다.
그 외에도 따로 랭크 6의 마법사들이 긴급 파견에 나왔으니, 아마 황금 은행에서 대금고 다음으로 안전한 건 이곳 원로들의 개인실이라 해도 모자람 없었다.
“후.”
메르헨은 푹신한 의자에 몸을 맡겼다.
기분 좋은 안락함이 피부를 타고 느껴졌지만 왠지 불편한 마음은 위로받지 못했다.
“…….”
오베론의 유산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는 앞으로의 계획을 머리에 그려 나갔다.
어느 마탑과 계약을 하고, 무슨 행동을 취할지 여러 가능성이 가지를 펼쳤다.
탁.
오베론의 유산을 잠시 내려놓았다.
“…어엇?”
그런 그의 눈앞에 있어선 안 될 게 존재했다.
메르헨 본인 말고는 그 누구도 있어선 안 될 자리.
그럼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메르헨의 앞에 앉아 있었다.
“그걸 어쩔 생각이지?”
“…허억!”
난생처음 보는 얼굴의 외부인이 메르헨을 마주하고 앉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누, 누구… 커헉…….”
동시에 메르헨은 폐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눈앞의 침입자가 누군지 떠올려 보려 애썼지만 머릿속은 맘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마치 이글거리는 태양을 마주하고 있는 듯 침입자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잠깐이라도 고갤 들었다간 두 눈뿐만 아니라 뇌까지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인식 저해 마법?’
대상의 사고를 잠시 정지시키는 마법. 하지만 이토록 강렬한 인식 저해 마법은 듣지도 겪어 보지도 못했다.
최상급 결계도 아무런 낌새 없이 뚫은 자였으니 얼마나 높은 경지에 있을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그건 지금 나와선 안 되는 물건이야.”
“어억…….”
“미안하군. 끔찍한 경험을 하게 해서.”
파삭.
순간 메르헨의 신체가 아지랑이 피듯 사라졌다.
자잘한 육편을 남긴 것도 아닌 물이 증발해 사라지듯 그의 몸은 흔적도 남지 않았다.
침입자는 텅 빈 메르헨의 빈자리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벌컥.
“원로님?”
“무슨 일인가.”
“잠시 후, 저녁에 원로원 소집이 생겼습니다.”
“그런가. 으음. 잘 알겠네. 내 늦지 않게 참석하도록 하지.”
“예. 그럼 준비토록 하겠습니다.”
경비병은 아무런 이상한 낌새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경비병의 눈앞엔 메르헨이 서 있었다.
외모, 말투, 심지어 눈가의 주름 하나하나마저도 메르헨이었다. 아마 돌아가신 메르헨의 어머니였어도 눈치 못 챘을 정도였다
침입자는 메르헨의 모습을 한 채로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하네.”
* * *
해가 채 뜨지도 않은 이른 아침.
황금 은행 습격 사건에 대한 소식은 발 빠르게 대륙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는 도라스의 이웃 왕국이자 연합의 일원인 아이소테르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거대한 휘장이 양옆으로 줄지어 늘어선 거대한 공동.
그 아래 길게 늘어뜨린 붉은 융단 위로 한 남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엔 금과 온갖 보석으로 장식된 휘황찬란한 옥좌가 자리했다.
아이소테르에서 단 한 사람의 절대자에게만 허용된 옥좌.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충직한 하인이 전하를 뵈옵니다.”
“…….”
덥수룩하게 자란 검은 수염에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매.
매섭게 자리 잡은 그의 눈빛은 단순히 혈통만으로 절대자의 자리에 오른 게 아님을 알려 주고 있었다.
아이소테르의 주인이자 왕국 연합의 일곱 수장 중 하날 차지한 절대자.
에런골드 2세.
그는 무심한 얼굴로 그의 하인, 두아트리스 재상을 내려다봤다.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마침내 입술을 들썩였다.
“…재밌는 일이 있었더군.”
재밌는 일.
왕국 연합의 돈줄이 날아가 버릴 뻔한 일임에도 그는 그저 재밌는 일로 취급했다.
단순히 자만심에서 비롯된 언행이 아니었다.
황금 은행이 언젠가 습격당할 것이란 예상은 이미 하고 있었던 일.
설령 황금 은행이 붕괴된다 할지라도 그에 상응하는 계책은 모두 세워 놓은 뒤다.
하지만 황금 은행은 붕괴되지도 않았고, 귀족들의 피해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에겐 그저 재밌는 일로 치부되는 걸로 족했다.
“예. 하여 앞으로 있을 계획에 차질이 있을까 염려되어 전하를 알현코자 하였사옵니다.”
“바뀌는 건 없다. 오히려 제국의 망령들이 날뛰어 준 덕에 힘을 숨길 이유도 없어졌으니.”
“그럼 그리하도록 하겠사옵니다, 전하.”
황금 은행이 습격당했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귀족들 간에 내란은 계속해서 유도될 것이다.
모든 귀족들의 힘이 빠진 그때 아이소테르의 왕권은 어느 때보다 강성하게 빛날 것이다.
에런골드만 멀쩡히 살아 있다면.
“그리고 하나 더.”
에런골드의 입꼬리가 슬쩍 들썩였다.
이를 본 두아트리스는 제 눈을 의심했다. 에런골드가 미소를 짓다니?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그가?
그는 금세 차갑게 변한 에런골드의 얼굴을 보곤 잘못 본 것일 뿐이라 생각했다.
“충직한 하인에겐 상을 내려 줘야겠지.”
* * *
하얀 대리석 타일 위로 굵은 땀방울이 떨어졌다. 금세 습기를 머금은 대리석이 짙은 회색빛을 띄었다.
“후!”
내 주변 반경 1미터는 하얀 대리석이 아니라 회색 대리석이라 해도 믿을 수준이다. 죄다 땀에 젖어 색이 변했을 정도니 말이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자 연무를 도와주던 프리아나가 수건을 건넸다.
수건으로 대충 땀을 훔치고 다시금 검을 고쳐 잡았다.
“조금 쉬었다 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왜?”
“네. 벌써 반나절째 검을 휘두르고 계시니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군요. 황금 은행 습격 이후로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러다 상처라도 벌어지시면…….”
“으음. 그렇긴 하지.”
황금 은행 습격 사건 이후 금전적인 문제는 크게 해결됐다.
메르헨과 계약서에 지장까지 찍었으니 나중에 뒤통수 맞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돈 문제가 해결됐다고 해서 팔자 늘어지게 놀 여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국왕이란 작자가 귀족들 간 전쟁을 일으키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와중에 그랬다간 순식간에 골로 간다.
‘어디 평화로운데서 유유자적하게 살기라도 했음 좋을 텐데.’
그게 제일 베스트지만 불가능한 꿈이다.
대륙 전역이 전쟁에 휘말리는데다가 마물, 산적, 도적이 삼종세트로 들끓는데, 그런 한가한 땅이 있을 리가 있나.
게다가 편히 지내려면 돈이 많아야 한다.
한적한 땅에 홀로 돈이라도 많이 싸들고 갔다간 범죄의 타겟이 되기 십상이다.
‘따지고 보면 지금이 제일 베스트지. 빚도 대부분 갚았고, 추레하지만 백작가 후계자나 되니까.’
굵직굵직한 대사건은 주인공 디아가 알아서 해결해 줄 거다. 난 깡촌에 틀어박혀 영지 하나 굳건히 지키면서 살면 장땡이다.
“삼십 분만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자고.”
“예. 따뜻한 물이라도 한잔 드시지요.”
“따뜻한 거? 더워 죽겠는데?”
“원래 연무 도중에 차가운 걸 드시면 속이 상하십니다. 휴식 중엔 따뜻한 물로 겉과 속의 균형을 만들어야 합니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해?”
“저희 가문 대대로 내려온 수련 방식입니다.”
“…그럼 그래야지.”
군말 없이 프리아나가 챙겨 온 보온병에 차를 받아 마셨다. 뭔갈 탔는지 달콤쌉쌀한 게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공자님!”
“아, 이슬린.”
뜨끈한 차를 홀짝이고 있는데 저 멀리서 이슬린이 급히 달려왔다. 평소완 사뭇 다른 모습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뭔데 그러지?”
“편지가… 한 통 왔습니다.”
“편지?”
그러고 보니 이슬린의 한쪽 손에 편지 봉투가 들려 있었다.
노르스름하면서도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재질이 보통 종이봉투가 아니었다.
불길한 냄새가 폴폴 여기까지 폴폴 풍겼다.
걱정되는 마음으로 편지를 받자 이는 곧 확신이 돼 버렸다.
“아.”
편지 봉투 정가운데에 떡하니 박힌 붉은 인장. 빨간 밀랍 위로 검은 늑대 한 마리가 표독스런 눈빛을 내뿜고 있었다.
아이소테르를 상징하는 왕가의 문양. 블랙 하운드.
이는 왕이 보낸 칙서와는 결이 조금 달랐다. 인장엔 왕이 아니라 왕가의 문양이 찍혀 있었다.
즉, 국왕이 보낸 게 아니라 페레도르 가문에서 보낸 편지였다.
난 떨리는 마음으로 검은 늑대의 문양을 뜯어 냈다.
“음…….”
찬찬히 글귀를 읽어 내려갔다.
옆에선 프리아나와 이슬린이 기대 반, 걱정 반인 눈빛으로 나와 편지를 번갈아 봤다.
마침내 시선이 편지지 끝에 도달하자 프리아나가 더 이상 못 참고 입을 열었다.
“무슨 내용입니까?”
“…초대장이군.”
“초대장이요?”
“이번 습격을 막은 기념으로 성대한 파티를 열겠다는군. 아이소테르를 섬기는 귀족이 습격을 막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니까.”
“오…….”
“게다가 선물까지 준비했다는군. 파티가 열리기 전에 작위 수여식이 있을 거라고 말이야.”
내막을 모르는 이라면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거렸을 거다.
하지만 난 찝찝한 감정이 컸다.
‘작위 수여식이라.’
난 임페라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다.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에이먼을 따라 가주의 자리에 오르고 나면 백작의 작위가 내려진다.
그렇다고 그 전까지 작위도 없이 귀족이란 타이틀만 갖고 있진 않는다.
가끔 큰 공을 세운 귀족 가문의 일원들에겐 따로 작위가 내려지기도 한다.
아마 여러 사항을 고려한다면 적어도 자작의 작위는 내려지지 않을까 싶다.
“그것 참 잘 됐군요!”
프리아나는 감격에 겨운 듯 목소리가 격앙됐다. 반면 이슬린은 의심부터 하고 나섰다.
“무슨 꿍꿍이일까요?”
“꿍꿍이 말씀이십니까? 공자님을 위한 파티까지 열어 준다는데 꿍꿍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할 건 없다.
사교 파티 같은 건 왕의 명령보단 왕가의 이름으로 여는 게 보통이라는 소설 속 설정이 있긴 했었다.
귀족들이 흥청망청 노는 꼬라지에 국왕의 힘을 쓸 순 없다나 뭐라나.
다만 상대가 에런골드 2세다.
뒤에 숨어서 온갖 더러운 술수를 써 대는 망할 놈이란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흠…….”
잠시 생각해 봤지만 좀체 놈의 꿍꿍이가 뭔지 읽히질 않았다. 시커먼 능구렁이가 편지지 너머로 아른거렸다.
“…어쩌겠나. 왕가에서 내 이름으로 파티까지 열어 준다는데. 거절했다간 왕실 모독죄로 참형이야.”
“그렇긴 하죠.”
“그럼 그냥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래야지.”
지금으로선 다른 선택지가 없다. 일단은 국왕의 바람대로 움직여 줘야 했다.
“수도로 향할 준비를 해라.”
“…네. 공자님.”
“네! 공자님!”
벌써부터 준비할 걸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건 단순히 수도에 들리기만 하는 게 아니다. 귀족들이 한데 모이는 사교 파티다.
일단은 마수들을 막은 걸 축하한다는 목적의 파티다. 아이소테르뿐만 아니라 이웃 왕국에 속한 귀족들까지 모일지도 모른다.
행동거지 하나만으로도 사교계에 멸시당하는 게 귀족들의 삶.
수도로 향하는 수행원들부터 해서 신경 쓸 게 많았다. 그중 하나만이라도 다른 귀족들에게 얕보였다간 사교계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나야 그나마 좀 나은 편이지.’
애초에 기대치가 낮으면 괜한 소리도 덜 나온다.
근래에 들어 조금은 바뀐 모습을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망나니는 망나니. 크게 눈에 띌 정도로 추레한 모습만 안 보이면 괜찮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