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1만 골드군요.”
“그렇죠.”
탁.
3원로는 돌멩이를 탁자 위에 올려놨다.
“탐이 나는 물건이군요.”
“아무래도 그렇죠.”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제가 원로란 자리에 은혜롭게 오르긴 했지만, 원로라고 모든 사항을 다룰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난 그의 말에 수긍하듯 고갤 끄덕였다. 원로라면 눈앞에 이 노인네 말고도 여섯이나 더 있으니까.
“때문에 1만 골드라는 거액을 섣불리 결정할 수도 없을 노릇이지요. 하지만 그 정도 권한도 없이 원로라는 자릴 꿰차고 있다는 건 우스운 일이겠지요.”
‘사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메르헨은 몸을 살짝 뒤로 뺀 채로 말을 멈췄다. 표정을 읽어 보려 했지만 좀체 읽히질 않았다.
“오베론 님의 유산을 해석 해낼 수 있을지 또한 의문이군요.”
“그건… 사람들 하기 나름이지요.”
“후후.”
‘이 늙은이. 여간내기가 아니네.’
벌써 알고 있는 바가 있는지 가장 중요한 맹점을 집었다.
원래의 줄거리대로라면 소설의 최종장에 이를 때까지 오베론의 술식을 해석하는 건 실패한다.
그럼 그냥 쓸데없는 돌멩이에 지나지 않는다.
돌멩이를 1만 골드에 산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하여, 분석을 위해 마탑과 계약을 맺고, 추가적인 지출까지 감안한다면, 오천 골드가 적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정도라면 제 권한 내에선 무리 없이 지출할 수 있을 테니까요.”
메르헨은 돌멩이의 가격을 눈앞에서 절반이나 후려쳤다.
‘이거 두 눈 시퍼렇게 뜨고도 코 베어 갈 놈이네.’
“그리고 하나 더.”
“하나 더?”
“임페라 가문에 걸린 남은 빚 5천 골드의 납입 기한을 늘려 드리겠습니다.”
“호오…….”
“물론 무기한으로 말이죠.”
메르헨은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콕 집어 거래를 제안했다.
무기한 대출이라는 건 파산만큼은 막을 수 있는 제안이었다.
즉, 나한테 바라 마지않던 일이란 것이다.
그의 제안에 귀가 솔깃하면서도 한편으론 의심이 갔다.
마치 내 편의를 봐주려는 거나 다름없는 제안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내 의중을 눈치챈 메르헨이 한마디 덧붙였다.
“공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는 이 이상을 드려도 모자람 없을 겁니다. 남은 채무 관계도 청산해 드리지 못해 아쉬울 정도니까요.”
예상외의 말이었지만 그의 눈빛에선 진실이 묻어 나왔다.
황금 은행은 도라스에 속한 땅이다. 메르헨은 도라스에 속한 원로다. 그런 만큼 금전적인 것 이상으로 내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
“흐음…….”
나야 손해 볼 건 없는 제안이다. 남은 5천 골드야 천천히 갚아 나가기만 하면 되는 거기도 했고.
“그럼 그리하겠습니다.”
* * *
“흐흐흐!”
참으려고 안간힘을 써 봐도 나도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 기쁘신가요?”
“당연하지! 이제부터 돈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건데!”
“후후. 그건 그렇죠.”
“공자님께서 기분 좋아 하시니 저도 기쁩니다!”
“그래! 오늘은 마음껏 기뻐해라!”
메르헨과의 거래 다음 날 간단한 사정 청취만으로 우리 일행은 자유 시간을 얻었다.
남은 건 임페라 백작령으로 돌아가는 것뿐.
모처럼 얻은 자유인만큼 오늘 하루만 황금 은행에서 유유히 여유를 만끽하기로 했다.
향한 곳은 황금 은행의 시장길.
몬스터가 풀려난 건 몬스터를 가둬 두었던 ‘금고’의 근처다.
그 바람에 피해가 가장 컸던 건 금고 건물이 위치해 있던 황금 은행 본점. 반면 민가는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다.
몬스터들이 더 퍼져 나가기 전에 싸그리 해치운 덕분이었다.
‘바르카 랭크가 생각보다 낮았던 것도 있고.’
게다가 시장길이 위치한 건 민가보다 더 외곽 쪽이다.
아침에 일어난 시장 상인들 중엔 간밤에 큰일이 있었구나, 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빚도 대부분 청산했겠다.
앞으로 천재지변이 없는 한, 거지 백작이란 타이틀은 내려놓아도 됐다.
베네르 백작의 사업장까지 고스란히 물려받았으니.
거지 백작보단 살짝 부유한 백작이라고 해도 될 지경이다.
“어서 옵쇼!”
시장길에선 상인들이 지나다니는 손님을 붙잡으려는 호객 행위가 한창이었다.
백작의 유흥이라 하기엔 조금 빈약한 감이 없지 않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황금 은행의 시장길에서 흥정망정 쓸 거다.
‘대신 도박은 절대 금물이다.’
애초에 이안이 도박만 안 했으면 이 지경까지 안 왔다.
도박만큼은 절대 안 된다. 절대로.
“간밤에 무슨 일 있었대요?”
“윗길에 몬스터들이 풀려났다지 뭐예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요!”
“으이구… 그러게 몬스터들 가지고 뭔 장난질을 해 대서…….”
시장 상인들은 간밤에 있었던 사고로 입이 바빴다.
덕분에 분위기가 뒤숭숭하긴 했지만 거리에 내놓은 물건들은 변함없었다.
여태까지 가 봤던 시장 중에서는 가장 번영한 곳이었다.
물건의 양과 질 자체가 달랐다.
“호오.”
시장 거리엔 신기한 물건들이 많았다.
간단한 주전부리 간식부터 희한하게 생긴 아티팩트까지 다양했다.
거릴 돌아다니던 와중에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아침을 부실하게 먹어서 그런지 허기가 돌았다.
“뭣 좀 먹을까?”
“하오나 공자님… 이런 걸 함부로 드셨다간 위험하실 수 있습니다.”
프리아나는 의심 가득 찬 눈빛으로 좌판을 훑었다.
고작 이틀 만에 프리아나는 칭칭 싸매고 있던 붕대도 다 푼 채 예전처럼 매서운 눈빛을 쏘아 댔다.
랭크가 사기긴 사기다. 그렇게 다치고도 하루 만에 멀쩡해지다니.
“그럼 너가 한입 먹어 보고 먹음 되지 않나?”
“아! 그럼 되겠군요.”
고소한 냄새 끝에 다다른 건 넓적한 곡물 반죽 속에 뭔갈 채워 넣은 빵이었다.
기름에 자글자글 구웠다면 호떡이라 불러도 됐을 생김새다.
이 녀석은 기름이 귀해서 그런지 둥그런 화덕 위에 반죽을 굽고 있었다.
“이건 뭐지?”
“호르무라는 겁니다.”
이슬린은 호떡 비스무리한 게 뭔지 아는지 한마디 거들었다.
“호르무?”
“네. 도라스에서 자주 먹는 간식입니다. 안에는 꿀이나 설탕이 들어 있죠.”
‘호떡 맞네.’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한가 보다. 따끈따끈하고 달달하면 다 좋아하기 마련이다.
“이거 맛있나?”
“…네.”
좀처럼 자기 얘길 안 하는 이슬린이 맛있댄다. 그럼 정말로 맛있다는 거다.
“어서 옵쇼! 나으리!”
금세 눈치를 챈 주인장이 큰 소리로 인사했다.
“세 개만 줘 봐라.”
“예입! 금방 구운 놈으로 세 놈 드리겠습니다요!”
걸걸한 주인장의 말솜씨에 프리아나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지금껏 귀족만 접해 와서 그런지 시장 상인의 말투가 영 껄끄러운 눈치다.
“여기 있습니다요! 나으리! 꿀이 뜨거우니 조심해서 드셔야 합니다요!”
이내 주인장이 화덕 위에서 구워진 따끈따끈한 유사 호떡 세 개를 건넸다. 고소한 냄새에 달큰한 꿀향까지 더해지니 절로 침샘이 자극됐다.
“그럼…….”
“제가 먼저 먹어 보겠습니다!”
“…그래라.”
바삭!
프리아나가 먼저 한입 베어 물자 바삭한 소리와 함께 달콤한 향이 퍼졌다.
먼저 맛을 본 프리아나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저게 맛이 없을 리가 없다.
“…독은 없는 것 같습니다.”
녀석은 한 마디 하곤 계속해서 호르무를 베어 물었다.
행여나 꿀이 흘러내리지 않을까 입가까지 훔쳐 가며 열심히 집어 먹었다.
살짝 밉상이긴 했지만 다 날 생각해서 그러는 거라 뭐라 하려다 참았다.
바삭!
나도 한입 베어 물자 바삭한 식감이 입 전체로 퍼졌다.
동시에 달달한 꿀이 혀를 따끈하게 감쌌다. 촉촉한 호떡이 생각났지만 이것도 나쁘진 않았다. 바삭바삭한 게 씹을수록 단맛이 오래 남았다.
“맛있구만.”
“하핫! 나으리께선 이런 거 처음 먹어 보시…….”
괜히 주인장이 한마디 거들려다 프리아나의 눈초리에 입을 다물었다. 잔뜩 겁먹은 주인장은 목을 움츠린 채로 말을 더듬었다.
“마, 맛있으면 몇 개 더 가져가십쇼. 싸게 드리겠습니다요.”
“열 개만 줘라.”
“예입!”
큼지막한 잎사귀에 호르무 열 개를 싸 들고 나서야 시장길 구경에 나설 수 있었다. 고소하면서도 달콤한 향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열 개의 호르무를 프리아나한테 들고 있으란 의미로 건넸다. 난 그 옆에서 하나씩 빼먹으면서 북적이는 시장길을 거닐었다.
“하아…….”
그리운 기분이다. 어렸을때 엄마 따라서 이런데 자주 왔었는데.
“…….”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다니는데 이슬린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
고갤 돌려보니 여자들 하는 장신구를 늘어뜨려 놓은 좌판 앞이었다.
형형색색의 알록달록한 머리핀이나 목걸이 같은 것들이었다.
“맘에 드는 거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뭐 어때. 이왕 멀리 온 김에 하나 사면 좋지. 혹시 돈이 없나? 하나 사 줘?”
“…이런 건 너무 눈에 띕니다. 일에 지장만 줄 뿐입니다.”
“흐음…….”
솔직히 이슬린이 이런데 관심 있을 줄은 몰랐다.
말은 관심 없다는 투였지만 시선이 계속 가 있는 걸 보니 하나 갖고 싶어 하는 게 눈에 보였다.
이안 클랜을 관리하면서 메이드 일까지 하는 걸 봐서 그런지 이슬린의 개인 취향 같은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이슬린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네.’
이슬린은 소설 속에선 등장하지 않는 여자다.
프리아나뿐만 아니라 저 멀리 에이먼과 있는 일레느조차 소설에 잠깐이나마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이슬린은 지오 크리시니를 처치하면서 엉겁결에 생긴 인연. 가까이 있는데도 이슬린에 대해선 모르는 게 많았다.
지오 클랜에 들어오기 전엔 무슨 일을 했는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조차 몰랐다. 워낙 무뚝뚝한 성격이라 물어보기 껄끄럽기도 했고.
몇 번 슬쩍 물어봤지만 어물쩡 넘어가기만 할 뿐 제대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럼 이건 어떠냐.”
좌판에서 하얀 리본이 달린 머리핀을 골랐다. 너무 화려한 건 싫다 할 것 같았다.
머리색도 은발이니 하얀색 장식이면 한 듯 안 한 듯한 느낌일 거다. 보석도 아니고 리본이니 눈에 띄지도 않을 테고.
‘잠깐, 그럼 사는 의미가 없지 않나?’
머릿속으로 다른 걸 고를까 고민하려는데.
“…이거는 괜찮을 것 같군요.”
“그래? 정말로 괜찮겠어?”
“…….”
“그럼 이걸로 하지.”
하얀 리본만 달린 머리핀이라 가격도 별로 안했다.
상인의 낯빛에서 아쉬워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해 봐라.”
“…예.”
이슬린은 앞머리 한켠에 머리핀을 꽂았다. 눈에 안 띌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은발의 머릿결에 하얀색으로 포인트를 잡은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
겉으로만 보면 영락없는 이쁘장한 이십대 초반의 여성이다.
실상은 도적 클랜을 관리하면서 무서운 짓도 서슴지 않는 녀석이지만.
“어울리는구만.”
“…감사합니다, 공자님.”
“프리아나, 넌 뭐 필요한 거 없나?”
“전 이 호르무면 만족합니다.”
“뭐?”
어느새 프리아나는 들고 있던 호르무를 반절이나 처먹은 뒤였다.
그냥 들고만 있으라 한 건데 지 먹으라고 준 줄 알았나 보다. 독이 들었다니 뭐니 하더니만 혼자 다섯 장을 먹다니.
“…맛있냐?”
“그럭저럭 먹을 만하군요.”
“…그래. 맛있으면 됐다.”
그렇게 반나절 정도 시장 거릴 구경하곤 임페라 백작령으로 되돌아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후후후.”
이제 거슬릴 건 없다. 사업장도 든든하고, 빚도 해결했다.
심지어 사업장엔 드워프 장인까지 한 분 모셔다 놨으니, 앞으론 돈이 굴러 들어올 일만 남았다.
“후…….”
‘랭킹빨로 세계정복!’이 시작되는 시점까지 앞으로 3년. 그때부턴 본격적으로 세상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어중띤 준비론 혼란스러운 세상에 휘말릴 희생양만 될 뿐이다. 그때까지 준비를 해야 한다.
돈도 많이 쟁여 두고, 혼란스런 세상에서 내 영지 하나 간수할 힘은 키워 놔야 한다.
물론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일은 아닐 거다.
내겐 소설의 줄거리라는 정보가 있고, 든든한 사업장이 있으니까.
‘당분간 큰 걱정거린 없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