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62화 (62/222)

62화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짙은 어둠. 그 속에서 홀로 눈을 떴다.

“여긴…….”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찔렀고, 이내 칠흑 같던 어둠은 익숙한 풍경으로 뒤바뀌었다.

검게 죽어 버린 대지와 악취를 쉼 없이 내뱉는 독강.

지난 수개월간 마주했던 세상 속 풍경과는 전혀 딴판인 풍경이었다.

시선을 타고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지긋지긋한 기억이 떠올랐다.

풀 한 포기 남지 않은 황폐한 땅에서 처절하게 굶어 죽어 가던 끔찍한 나날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건 현실이 아니다.

내 기억 속 가장 끔찍한 기억을 다시 재생시키는 것에 불과한 허상.

“…하.”

바람 한 점 불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적막.

그 속에서 새카맣게 썩어 문드러진 대지가 솟구쳐 올라왔다.

콰드득!

요란스런 소리와 함께 흙더미가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내 한 사람의 모습을 갖춘 인형이 입을 열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곱슬거리는 붉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여자.

훗날 영겁의 기사단을 이끌 세 악몽 중의 하나, 바르카였다.

녀석은 장난기 가득 찬 눈동자로 날 응시했다.

외모만 놓고 보면 남자들 마음 들었다 놨다 할 정도로 이쁘장한 여자다.

하지만 저 녀석이 가진 성격을 떠올리자, 그리 이쁘게만 보이지만은 않았다.

그저 재미만으로 사람을 고문하고 죽이는 미친 여자다.

‘속지 마. 미친년이야.’

저 미친 여자 성격이라면 기절한 내 머리통을 짓밟은 채로 낄낄대고도 남을 녀석이다.

그나저나 나랑 인사나 나누려고 이런 수고를 감수하는 건 아닐 테고.

귀찮게 끔찍한 기억을 떠올려 보여 주는 이유는 간단했다.

가장 기억하기 싫은 악몽을 떠올려 트라우마라도 자극하려는 중이었다.

‘그런 식으로 정보를 끄집어내는 경우도 많았지.’

하지만 순순히 협조해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놈들이 날 살려 둔 유일한 이유이자 내가 가진 유일한 협상 카드.

멸망한 세상에서 읽은 이 소설의 미래에 대한 정보.

그걸 내놓는 순간 놈들이 날 살려 둘 이유는 없어진다.

크로드야 어찌어찌 운 좋게 속여 넘어갔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

눈앞의 이 미친 여자한테는 남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건 식은 죽 먹기일 테니까.

‘머릿속을 헤집는다…….’

불가능한 건 아니다.

타인의 꿈에 개입한 걸 보면 녀석이 쓰는 스킬은 ‘꿈 조작’.

서큐버스의 고유 스킬이지만 사역으로 길들인 경우엔 사역술사도 사역마의 스킬을 쓸 수 있다.

대상이 가진 가장 끔찍한 악몽을 떠올려 정신을 무너뜨리곤 정보를 빼내는 스킬.

가볍게 볼 스킬은 아니다.

소설에선 왕국 연합의 일원 하날 미쳐 버리게 만들기까지 한 스킬이다.

끝없이 반복되는 악몽 속에서 나약한 인간이 무너져 내리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니까.

“취미 한 번 고약하군.”

“고약하다니? 솔루스가 죽이려던 것까지 기껏 막아 줬더니 말이 좀 심하네.”

“…그건 고맙네.”

“…솔루스가 누군지 아는 것처럼 말하네?”

“그래 보이나?”

“호오……?”

바르카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소름 끼치는 미소를 머금었다.

마음 같아선 면상에 주먹이라도 한 번 내지르고 싶었지만, 그래 봤자 본체는 여기 없다.

내 목덜미에 칼을 겨눈 채로 언제든지 숨통을 끊을 준비를 해 놓고 있다.

섣불리 나섰다간 목이 달아나 버릴 수도 있는 상황.

최대한 녀석의 성미를 건들지 않는 선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했다.

“…원하는 게 뭐지?”

“뭐겠어?”

“내가 알고 있는 정보?”

“으흐흐! 보기보다 멍청한 건 아니네?”

어린아이같이 잔뜩 신이 난 목소리다.

순박하단 점에선 같을 거다. 문제는 머리가 잔뜩 이상해진 상태로 순박하다는 거지만.

“순순히 부는 게 좋을걸? 안 그랬다간 네가 가진 최악의 기억 속에서 평생 허우적거리게 될 테니까!”

“평생은 아니겠지. 이제 곧 연합의 기사단이 들이닥칠 텐데.”

“으응? 음…. 그건 그렇네.”

바르카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슬쩍 주변 풍경을 둘러봤다.

생기랄 게 한 줌도 느껴지지 않는 을씨년스런 세상이다.

덕분에 헛구역질이 치밀긴 했지만, 그렇다고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악몽을 마주할 거라곤 나도 예상 못했다.

동료가 죽어 나가는 순간이나, 마신 아쉬타르를 마주할 때도 아니고. 그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굶어 죽어 가는 것.

그게 내가 가진 최악의 악몽이었다.

‘확실히 거지 같은 나날이긴 했다만…….’

이 악몽이 무서운 건 시간이다.

십수 개월간 무기력하게 죽어 가던 매 시간이 끔찍하긴 했지만, 황무지 자체가 끔찍했던 건 아니다.

그래서인지 최악의 악몽 위에서도 난 덤덤했다. 오히려 좀 밋밋한 감이 없지 않다.

“이게 내가 가진 최악의 기억이라는 건가?”

“…응?”

그제야 녀석은 뭔가 이상한 걸 깨닫곤 주윌 두리번거렸다.

“…뭐야? 이게 악몽이라고?”

두 눈을 부비적거리고 다시 한번 주윌 살펴봤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악몽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빈약한 황무지. 그게 다였다.

“흐….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 녀석이 가진 최악의 악몽을 떠올려야…….”

확실히 그냥 봤을 땐 별거 없다.

하지만 이런 세상에서 십수 개월간 홀로 굶어 죽는다는 건… 그 어떤 악몽보다 끔찍하다.

다행히 녀석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상함을 느낀 녀석이 허공에 손을 휘휘 저었다. 그녀가 그린 궤적을 따라 허공에 틈이 갈라지며 무언가 나타났다.

“으으…….”

틈 속에선 익숙한 얼굴이 둘 보였다.

프리아나와 이슬린.

둘은 제각기 가진 악몽 속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이, 이건 내 선택이다……. 난 후회하지 않아…….”

“저리 꺼져……. 이 망할 망나니 새끼…….”

바르카가 다시 한번 손을 휘젓자 둘의 모습은 다시 사라졌다.

“이상하네… 얘네 둘은 제대로 되는데…….”

본의 아니게 둘의 악몽을 봐 버렸다.

‘망나니 새끼가 설마 나는 아니겠지?’

조금 찜찜하긴 하지만 넘어가자.

바르카는 아직도 영문 모르겠다는 듯 눈살만 찌푸리고 있었다.

녀석이 굳이 꿈 조작으로 내 정보를 빼내려는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서큐버스는 꿈 조작 외에도 한 가지 스킬을 더 가지고 있다.

그거라면 남의 기억 빼 오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겠지만, 그만큼 리스크도 큰 스킬이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녀석은 서큐버스의 두 번째 스킬 사용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럼 억지로라도 쓰게 만들어야지.’

난 녀석이 들으라는 듯 콧방귀를 뿜었다.

쇠사슬로 묶여 있는 건 몸뚱이지 입이 아니다.

“멍청하군.”

“…뭐라고?”

고민에 빠져 있던 바르카가 내게로 고갤 돌렸다.

난 녀석의 면전에다 대고 모욕적인 말을 쏟아 냈다.

“멍청하다고 했다. 아니. 멍청하단 말도 아깝군. 세상 어느 멍청이도 이딴 걸 보여 주면서 정보를 불라고 하진 않을 테니까.”

“하! 지금 도발이라도 해 보겠…….”

“도발? 그저 네 녀석이 얼마나 멍청한지 감상을 말해 본 게 전분데……. 혹시 화가 났나?”

“…….”

“그래도 생각보다 멍청하진 않네.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긴 하는 걸 보면.”

“…너, 너 입 다물어. 분명 최악의 악몽이 나와야…….”

“그래? 난 잘 모르겠는데. 솔직히 말하면 하품이 나올 지경이라서 말이야.”

“…….”

“멍ㅊ…….”

“이 자식이!”

촤르륵!

갑자기 두터운 쇠사슬이 나타나 내 몸을 칭칭 둘러맸다.

‘으윽!’

“계속 씨불이면 목을 뜯어낼거다!”

바르카가 소리치자 내 몸에 감겨 있던 쇠사슬이 강하게 움켜쥐었다.

몸이 짜부라질 것만 같은 압박감이 전신을 옥죄었다.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분명 뭔가 실수를 한 게…….”

난 온몸이 묶였음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계속해서 모욕적인 말을 쏟아 냈다.

“하긴. 멍청한 놈이니 멸망한 제국의 바짓가랑이나 붙잡고 있는 거겠지만.”

“…….”

방금까지 낄낄대던 녀석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 갔다.

그에 반해 내 입가엔 조금씩 미소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하면 넘어온다.’

난 녀석을 향한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네놈들이 이딴 개짓거릴 하고도 무사할 것 같았나? 설마 그런 것도 모를 정도로 멍청한 건 아니겠지?”

“…….”

“설마 몰랐나? 대가리 속에 들어 있는 건 뇌가 아니라 갯지렁이었나?”

“…닥쳐!”

눈에 뻔히 보이는 도발이었지만 바르카는 순순히 넘어가 줬다.

녀석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선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콰악!

얇은 손가락이 내 두 볼을 움켜쥐었다.

“너 같은 귀족 놈이 뭘 알아!”

“뭘 알긴! 네놈들이 처참하게 죽을 거란 건 알지! 이제 곧 연합의 기사단이 올 거다! 그럼 네가 자랑하는 사역 랭크 따위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걸 알게 되겠지!”

“이익……!”

“이딴 걸로 날 능욕한다고 뭐라도 될 줄 알았나? 차라리 죽이든 뭐든 해라! 이 멍청아!”

“너, 너……! 그 말 후회하게 될 거야!”

내 볼을 움켜쥔 녀석의 눈빛이 매섭게 돌변했다.

진짜 멍청한 게 맞나 보다.

크리드나 솔루스였나면 넘어가지도 않았을 도발에 이렇게 쉽게 넘어가다니.

“네가 자초한 일이다!”

바르카의 눈동자가 검게 물들었다.

그와 함께 매서운 돌풍이 녀석의 주위로 몰아쳤다.

후우우웅!

바르카의 검은 두 둔이 내 눈과 마주쳤다.

동시에 머리가 지끈거리며 정신이 아찔해지기 시작했다.

‘됐다.’

난 승리의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왜 웃고 지ㄹ…….”

바르카는 뒤늦게 내 미소를 보고 이상함을 느꼈지만, 이미 스킬은 발동된 뒤였다.

난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로 서큐버스의 두 번째 스킬에 대해 떠올렸다.

‘꿈 합성.’

이 스킬은 서큐버스가 가진 일종의 방어기재다.

문어처럼 생긴 녀석은 사람의 뒤통수에 붙어 꿈을 꾸게 하는데, 여기서 억지로 서큐버스를 뜯어냈다간 녀석이 그간 먹은 꿈과 대상의 꿈이 섞여 들어간다.

자의식이 강한 이라면 별 문제 없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자신의 꿈과 남의 꿈을 분간 못하는 정신병으로 자라나기까지 한다.

때문에 서큐버스를 제거할 땐 대상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식으로 조심스레 제거해야 한다.

말 그대로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거나 다름없는 스킬.

서큐버스가 쓴 스킬이라면 생판 모르는 남의 기억이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왔겠지만.

이건 바르카가 쓴 스킬이다.

파앗!

눈앞에 바르카의 기억이 스며 들어왔다.

기구한 운명이다.

어려서 대전쟁에 부모를 잃은 녀석은 도적들에게 쫓기다 몬스터의 소굴로 던져진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죽음의 위기 속에서 바르카는 사역 랭크를 익힌다.

결국 운 좋게 몬스터의 소굴에선 살아남지만, 사역 랭크는 재앙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인간들에게도 배척 받는다.

그 당시는 몬스터를 사고팔기까지 하는 지금과 인식 차이가 심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던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단체가 있었으니.

그게 카잔 황제의 복원을 꿈꾸는 이들이었다.

‘소설에서 본 그대로군.’

어디에도 속할 수 없던 그녀의 설움이 가슴 저릿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게 끝이다.

혼란한 세상에 기구한 삶을 산 이들이 한둘도 아니고.

고작해야 스물 몇 해 산 녀석의 설움은 내가 느껴온 고통에 비하면 너무나도 가벼웠다.

“으윽……?”

내 기억을 읽기 시작한 바르카가 눈을 찡그렸다.

동시에 내가 가진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수많은 동료를 잃었음에도 난 포기하지 않았다. 오로지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동료들의 죽음을 쌓아 올려 겨우 마신을 처치했지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십수 개월간 다른 생존자를 찾고 또 찾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압도적인 절망감과 고독감뿐.

그렇게 십수 개월간 난 천천히 죽어 갔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이 되어 무력하게 죽음만을 기다렸다.

까득!

지긋지긋한 악몽이 다시금 떠올랐다.

녀석이 가진 얄팍한 삶의 깊이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 이게 무슨……?”

내 양 뺨을 부여잡고 있던 손아귀에 힘이 빠져 갔다.

동시에 전신을 옥죄고 있던 쇠사슬의 힘도 약해졌다.

파악!

쇠사슬 틈으로 손을 끄집어 내 손을 뻗었다.

난 녀석의 손을 되려 강하게 붙잡았다.

“어딜 도망치려고!”

“으으! 그, 그만!”

바르카의 검은 두 눈에 눈물이 고여 갔다.

하지만 난 멈추지 않았다.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똑똑히 봐라! 그게 네가 원하던 내 기억이다!”

지난날의 기억이 빠르게 훑어 지나갔다.

마침내 기억 속 내가 소설의 첫 번째 구절을 읽어 내려가려던 찰나.

퍼엉!

무언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주윌 둘러싸고 있던 황폐한 땅이 한 줌의 재처럼 흩날렸다.

순식간에 멸망한 세상의 모습이 사라지고 방금까지 서 있던 황금 은행의 모습이 나타났다.

어두컴컴한 중앙 홀에서 감겨 있던 눈을 떴다.

“으음…….”

“키에에엑…….”

뒤통수가 질척거린다.

만져 보니 서큐버스였던 것 같은 게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나온 건가?”

황급히 주윌 둘러봤지만 주변엔 쓰러진 프리아나와 이슬린 말곤 없었다.

아마 곁에서 지켜보던 솔루스가 서큐버스를 죽이고 강제로 깨운 듯했다.

바르카는 솔루스가 얼른 들쳐 업고 도망친 것 같고.

“후…….”

다행히 죽지 않고 끝났다.

여기서 죽나 했는데, 바르카가 도발에 넘어가 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으으…….”

옆에 쓰러진 둘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아직까지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 둘은 헛소리까지 하며 절절매고 있었다.

찰싹. 찰싹.

“어이. 이제 좀 일어나지?”

“어으윽…….”

“손대지 마……. 이 더러운…….”

“…….”

괜히 깨워 보려다가 욕만 잔뜩 먹었다.

둘은 잠시 내버려두자. 때 되면 알아서 일어나겠지.

“쫓아라…….”

밖에서 한발 늦게 달려온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몸 성하게 끝났다.

황금 은행도 수많은 사상자를 내긴 했지만, 금고는 멀쩡했다.

“…이 정도면 이긴 거로 봐야 하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