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단순한 공격만으론 안 된다는 건가.’
그렇담 누구에게나 유효한 공격.
목을 치면 된다.
파앗!
난 몸을 최대한 낮춘 상태로 녀석의 아래쪽을 향해 파고들었다.
놈은 이를 막으려는 듯 손을 휘적거렸지만 이내 저지됐다.
콰드드득!
왼손에서 뿜어져 나온 길게 뻗은 얼음 칼날.
아이스 블레이드가 녀석의 양팔에 꽂혔다.
크락!
놈은 고통에 울부짖었지만 아직 멀었다.
난 그 사이 녀석의 왼쪽 무릎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베어봤자 타격이 없는 놈이다.
한 점을 향해 집중시킨 찌르기가 무릎 관절을 노리고 깊숙이 들어갔다.
푸각!
덩치가 큰 놈이라 그런지 무릎에 검이 박혔는데도 쓰러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주 작살을 내줘야겠지.
난 녀석의 무릎에 쑤셔 넣은 검을 강하게 비틀었다.
콰드득!
닭 뼈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녀석의 다리 살을 뚫고 터져 나왔다.
크라아악!
여기까지 오고 나서야 놈은 균형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조금이라도 틈을 줬다간 다시 상처를 봉합할 놈이다.
그 전에 끝장을 내버려야 한다.
“후읍!”
얼른 녀석의 무릎에서 용린검을 뽑아내곤 놈의 목덜미를 향해 휘둘렀다.
오러가 담긴 푸른 검격이 작렬했다.
서걱!
“…어쭈?”
용린검이 놈의 목덜미를 훑었지만 베어 넘겨지진 않았다.
끈질긴 놈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예상했다.
난 검을 휘두르면서 생긴 추진력에 몸을 실었다.
그러자 몸이 한 바퀴 빙 돌며 다시 한번 놈의 목덜미를 훑었다.
짧은 순간에 연속된 검격이 계속해서 들어갔다.
놈의 숨이 끊어지는 최후의 순간까지 검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검격을 퍼부은 끝에 놈의 머리통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크르르르…….
놈은 머리통이 날아갔는데도 날 향해 투지의 눈빛을 내뿜고 있었다.
네임드 몬스터가 이래서 귀찮다.
좀체 죽을 생각을 안 하니까.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놈의 몸뚱이 위로 왼손을 올렸다.
‘파이어 볼.’
붉은 화염의 구체를 내뿜는 스킬까지 퍼부었다.
녀석의 몸뚱이가 부글부글 끓는가 싶더니 이내 심장 부근에서 두꺼운 북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륵.
마핵이 위치한 심장 부근을 폭파시켜 버리고 나서야 놈의 눈빛이 생기를 잃었다.
“후!”
오우거 녀석의 숨통을 끊자 급락해 있던 호위병들의 사기가 다시금 샘솟았다.
“하압!”
“모두 제 뒤로 모이세요!”
“네엣!”
거기에 프리아나와 이슬린이 가세하자 호위병들도 전의를 되찾기 시작했다.
“부상병들은 뒤로 빠지고! 아직 무기를 쥘 수 있는 자들은 제 뒤를 따르십시오!”
“모두 일어나라! 손님 분께만 맡길 생각인가!”
“아닙니다!”
“으아아압!”
호위병까지 가세하자 귀빈실로 들이닥쳤던 블러드 하운드가 하나 둘 숨이 끊어졌다.
나도 잠시 숨을 고르곤 이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하나하나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 놔야 한다! 이놈들 전부 네임드 몬스터다! 블러드 하운드라 해서 얕봐선 안 된다!”
“네엣!”
이슬린은 어느새 후열로 빠져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저마다 적절한 조치가 취해진 끝에 귀빈실 내부로 들이닥쳤던 블러드 하운드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캐행!
마지막 블러드 하운드의 등에 검을 꽂아 넣었다.
뭉툭한 뭔가가 칼끝에 걸리자 있는 힘껏 검을 밀어 넣었다.
파각!
단단한 무언가는 이내 파열음을 내뱉으며 산산조각 나 버렸다.
“이놈이 마지막인가?”
“네! 공자님! 고생하셨습니다!”
“후우… 고생 좀 하긴 했지.”
처음 오우거가 들이닥쳤을 땐 정신이 아찔했다.
원래의 줄거리대로라면 황금 은행이 습격 받는 건 한참 뒤의 일이다.
그래서 방심했고, 당황했다.
분명 내가 저지른 뭔가가 황금 은행 습격을 앞당겼다는 건데.
‘대체 뭐지?’
설마 크로드랑 엮인 바람에 생긴 일인가?
“끄응…….”
“공자님! 어디 다치신 데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니. 별것 아니다.”
일단 그건 잠시 뒤로 밀어 두자.
지금 당장 해야 할 건 황금 은행의 습격을 막는 거다.
가장 큰 사고인 귀빈실에 귀족들이 전멸하는 대참사는 막았다.
남은 건…….
“대금고겠지.”
황금 은행의 대금고엔 돈만 있는 게 아니다.
각종 값비싼 아티팩트뿐만 아니라 고대인의 유물도 섞여 있다.
문제는 고대인의 유물이다.
평범한 대륙인이라면 고대인의 유물을 쓰는 법조차 모른다.
하지만 카잔 황제의 잔당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놈들은 고대인의 유물을 기가 막히게 잘 쓰는 놈들이다.
대륙을 찢어발기는 주술부터 비정상적인 루트로 랭크를 올리는 놈도 있다.
어쩌면 두 번째 대전쟁을 훨씬 앞당길 수도 있는 일.
그땐 빚이고 뭐고 없다.
대륙이 죄다 피 튀기는 전쟁으로 가득해질 테니까.
“감사합니다! 은인이시여!”
살아남은 호위병들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다들 적잖은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았다.
모두 목숨 바쳐 싸운 증거였다.
“은인이시여… 죄송하지만 존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존함이라.”
귀빈실엔 우리 일행 말고도 수많은 귀족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호위병이라도 이웃 왕국에서 온 내 얼굴까지 알아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름은 알겠지. 아이소테르에서 명성이 자자한 망나니 새끼니까.’
“이안 임페라다.”
“이, 이안 임페라! 설마 아이소테르 왕국에서 오셨다던…….”
“그래. 맞다. 내가 그 개망나니 공자 놈이지.”
“아,아 닙니다! 공자님은 저희 호위병뿐만 아니라 다른 귀족분들까지 살려 주신 은인! 그런 말씀은 듣는 제가 죄송스러울 정도입니다!”
“후후. 말은 잘하는군.”
계속 듣자니 낯간지러워 돌아서려는데 귀빈실에 있던 귀족 하나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하얗게 샌 턱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중년 남성이었다.
“아니라오. 임페라 가문의 귀인이시여.”
“응?”
“나 듀런 가문의 가주 스림.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소. 나뿐만 아니라 여기 있던 이들 모두.”
‘듀런 가문?’
이웃 나라라 그런지 낯선 이름이다.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기도 한데…….
“고, 고맙소. 임페라 가문의 귀인이시여…….”
다른 귀족들도 스림의 말에 동의하듯 감사를 표했다.
내 명성을 아는지 좀 껄끄러워하는 눈치였지만, 스림이라는 남자 눈치를 본 듯했다.
꽤나 명망 있는 가문 사람인 듯했다.
‘나야 나쁠 것 없지.’
악명도 아니고 은인이라는데 나쁠 게 뭐가 있겠나.
‘그건 그거고.’
지금 신경 쓸 건 따로 있다.
은혜를 입힌 건 좋지만, 아마 지금쯤 황금 은행의 대금고엔 이 사건을 벌인 놈들이 일을 꾸미고 있을 거다.
대금고가 뚫리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프리아나, 이슬린, 어디 다친 데는 없겠지?”
“네! 고작해야 블러드 하운드입니다. 네임드 오우거는 공자님께서 처치해 주신 덕분에 아직 멀쩡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럼 따라와라. 이 참극을 벌인 놈을 찾아 줘 패야지.”
“네!”
* * *
낮에만 해도 은행 구역 곳곳에 설치된 결계들이 반짝이던 거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결계가 아닌 치솟은 화마에 의해 주위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반짝이는 붉은 불길 주위로 죽은 이들의 시체들이 즐비했다.
“젠장…….”
이미 죽은 이들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 이놈들을 최대한 저지하고 나선다면, 민가 구역의 피해 자체는 줄일 수 있을 터.
그러려면 은행 구역에 바글바글한 몬스터들을 처치해야 했다.
은행 구역으로 향하는 길은 네임드 몬스터들로 가득했다.
온갖 희귀한 몬스터들이 길을 막았지만 셋의 협공 앞에 놈들은 길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취엑!
“허억! 허억!”
리자드맨의 심장을 뽑아낸 프리아나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이 근방은……! 이 정도면 끝난 것 같습니다!”
주위엔 체온이 채 식지도 않은 몬스터들이 심장과 머리통이 뜯겨져 나간 채로 쓰러져 있었다.
어찌어찌 처치하긴 했다만 문제는 체력이다.
‘머저리 새끼들……. 사람들 바글바글한 땅에 뭔 놈의 몬스터들을 이렇게 많이 숨겨 놓은 거야?’
짜증이 치밀었지만 어쩌겠나. 이미 벌어진 일인걸.
한시라도 빨리 대금고에 있을 주모자 녀석들을 처치해야 했다.
“하지만 공자님! 이만한 몬스터들을 모두 네임드 몬스터로 탈바꿈시킨 상대라면…….”
“그래. 최소한 사역 랭크 5는 되겠지. 어쩌면 6일지도 모르고.”
“으음…….”
뭐든 계획을 세울 땐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야 한다.
이 대참사의 주모자가 사역 랭크 6이라 가정해 보자.
어쩌면 소설 속에서 황금 은행을 붕괴시킨 셋이 똑같이 이번에도 이 습격을 일으켰을지도 모른다.
꿀꺽!
작중 시점에서의 셋이 가진 랭크보단 아직은 낮을 거다.
하지만 그럼에도 터무니없는 강자라는 건 변함없었다.
그럼 우리한테 승산이 있을까?
“…있지.”
셋이라곤 했지만 사실상 둘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소설에서 일어난 황금 은행 대참사.
거기서 주범 중 하나는 다름 아닌 크로드니까.
녀석이 이번 습격의 주범일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지난번 기사단의 유물의 봉인 해제를 알려 주는 대가로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언제든 내게 와서 날 한 번 도와라.’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한 놈이니 입 싹 닫고 모른 척 할 놈은 아니다.
그럼 상대는 둘로 좁혀진다.
사역술사와 마법사.
개중에서 사역 랭크는 조금 특이한 랭크다.
몬스터를 부릴 수 있다는 건 큰 장점이다.
사역한 몬스터가 죽어도 새로운 몬스터를 네임드화 시키면 계속 싸울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만큼 단점도 분명 존재했다.
“사역 랭크는 근접전에 취약하다. 놈이 사역한 몬스터를 상대하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본체를 공격하면 충분히 버틸 수 있어.”
“오…….”
“게다가 우리가 해야 할 건 놈들을 저지하는 거지 이기라는 게 아니다. 놈들은 대금고에 숨겨진 보물을 노리고 있을 테니, 옆에서 시간만 끌면 연합의 기사단이 들이닥칠 거다.
아무리 강한 놈들이어도 연합의 기사단 모두를 상대하는 건 부담스럽겠지. 적당히 시간이 되면 어쩔 수 없이 놈들도 내뺄 거다.”
“그렇군요!”
내 말에 프리아나의 눈빛에서 생기가 돌았다.
‘물론 사역 랭크 6이 부리는 몬스터를 얼마나 상대할 수 있는지가 문제지만.’
차라리 크로드를 불러 버리는 건 어떨까?
품속에 고이 모셔 둔 통신용 마법구로 연락만 하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정황상 상대는 크로드와 같은 황제파 잔당.
자기네들 동료와 싸워 달라고 부탁했다간 일이 복잡해진다.
‘…일단 이건 최대한 아껴 놓자.’
크로드는 어디까지나 딱 한 번 날 도울 비장의 수다.
그런 걸 지금 써 버리긴 살짝 아까운 감이 없지 않았다.
“따라와라!”
“네! 공자님!”
통신용 마법구는 잠시 접어 두고, 난 프리아나와 이슬린을 데리고 대금고로 달려갔다.
대금고는 황금 은행의 보물이 잠든 중요한 건물이다.
때문에 이중 삼중으로 방어 결계를 겹겹이 쳐 놓고 있었지만, 한밤중의 대금고는 결계랄 것도 없이 후줄근한 회색빛 건물에 불과했다.
귀빈실의 결계가 모조리 해제되어 있던 걸 보면, 대금고의 결계도 해제되어 있을 게 뻔했다.
두터운 철문이 있기야 하지만, 랭크 6의 괴물들에겐 시간만 조금 있으면 금세 뜯어내 버리고도 남는다.
…콰앙!
대문을 부수고 들어서자 텅 빈 대금고 건물의 중앙 홀이 나타났다.
곳곳엔 호위병들의 시체가 즐비했지만, 호위병들을 죽인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중앙 홀에 위치하고 있는 건 단 한 명뿐.
붉은 망토로 제 몸을 숨기고 있는 녀석이었다.
망토로 머리칼을 덮고 있었지만 긴 붉은 곱슬머리가 망토의 틈 사이로 언뜻 보였다.
“네놈이냐?”
난 용린검에 오러를 띄운 채로 녀석에게 겨눴다.
그러면서 천천히 놈들의 동태를 살폈다.
키는 살짝 크지만 호리호리한 체형이 붉은 망토 너머로 느껴졌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소설 속 묘사와 소름 끼치게도 일치하는 녀석이 하나 있다.
사역술사 바르카.
상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대로 이번 습격의 주인공은 바르카였다.
꽤나 명성이 자자한 여자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홀로 페시스 몬스터 경매소를 파괴한 것도 모자라, 후에 황금 은행을 작살내기까지 하는 정신 나간 걸론 둘째가 서러운 미친 여자다.
단순히 심성이 미친 것뿐만 아니라 그만큼 랭크도 상당한 상대였다.
‘하. X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