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영겁의 기사단!’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닐 텐데? 왜 벌써 이런 일이?
끼에에에엑!
창문을 향해 거대한 가고일 한 마리가 돌진했다.
“공자님! 숙이세요!”
이슬린의 외침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 위로 차가운 얼음의 창날이 가고일의 심장을 노리고 뻗어 나갔다.
퍼걱!
끼에엑!
하지만 가고일의 돌진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얼음 창이 녀석의 거죽에 박히기만 했을 뿐, 심장을 꿰뚫지는 못했다.
단단한 놈의 머리통이 창문을 그대로 들이박았다.
평범한 창문이 가고일의 돌진을 막을 순 없었다.
쨍강!
창문은 그대로 산산조각 나며 가고일이 객실 내부로 들이닥쳤다.
커다란 박쥐의 모습을 한 몬스터가 유리조각을 사방에 흩뿌리며 발버둥 쳤다.
생긴 외모답게 주로 어두컴컴한 장소에 사는 녀석은 황금 은행 근처엔 서식하지 않는 놈이었다.
하지만 투기장을 위해 먼 타지에서도 공수해 온 터라 서식지 따윈 중요치 않았다.
키이익!
이내 정신을 차린 가고일이 날 향해 달려들었다.
“이 자식이!”
용린검에 오러를 불어넣어 녀석의 목덜미를 향해 휘둘렀다.
…카앙!
키에에에엑!
“어쭈?”
검격이 녀석의 단단한 발톱에 막혀 버렸다.
용린검은 마검이다.
오러만 놓고 본다면 검술 랭크 5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의 검격.
그걸 가고일이 막았다고?
가고일은 커다란 아가릴 쩍! 하고 벌렸다.
날카로운 놈의 이빨엔 다른 희생양들의 살점과 피가 엉겨붙어 있었다.
“하압!”
놈이 내게 아가릴 들이밀던 순간. 프리아나의 검이 녀석의 뒷목을 후려쳤다.
끼엑!
녀석은 깔끔한 절단면을 자랑하며 목이 잘려 나갔다.
몸통과 분리되고 한참이 지났는데도 가고일은 이빨을 딱딱 부딪히며 입질을 해 댔다.
“후!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잠깐.”
난 잘려 나간 가고일의 머리통을 유심히 살펴봤다.
빠르게 생기를 잃어 가는 가고일의 눈동자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녀석의 동공에는 사람들의 왼손에 새겨진 룬 문양과 똑같은 문양이 반짝이고 있었다.
“…네임드 몬스터?”
사역 랭크 5부터 사용 가능한 스킬이 있다.
네이밍 몬스터.
스킬 이름 그대로 몬스터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스킬.
별것 아닌 듯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상당히 위험한 스킬이다.
애칭 같은 게 아닌, 해당 몬스터에게 강력한 권능을 부여한다.
몬스터에게 이름을 붙여 주면서 마나의 일부분까지 넘기는 것이다.
시전자에 따라선 하찮은 슬라임을 미친 괴물로 만들어 버리기까지 한다.
“네임드 몬스터까지! 이거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몬스터들한테 이름이 붙었다는 건 적어도 사역 랭크 5가 있다는 소리지.”
더군다나 지금은 달의 악신 셀렌이 지배하고 있는 시간이다.
네임드 몬스터가 셀렌의 힘으로 한층 더 강해진 상태라면, 피해가 계속해서 번지는 건 불 보듯 뻔했다.
만약 사람들을 잡아먹은 네임드 몬스터가 상위 종으로 진화라도 한다면…….
“무기를 챙겨라. 상황이 걷잡을 수 없게 되기 전에 마무리 지어야 한다.”
“하지만 공자님! 너무 위험합니다! 차라리 잠시 몸을 숨기시는 편이…….”
이슬린은 한창 무기를 챙기는 내게 걱정스레 말했다.
프리아나도 멈칫하곤 내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프리아나가 모르는 게 있었다.
몬스터뿐이라면 결국엔 황금 은행의 병사들에 의해 진압될 거다.
설령 그게 안 된다 하더라도 왕국 연합의 지원 병력까지 몬스터들에게 당하진 않을 거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난 여기 몬스터들이 뭐가 있는지 모른다.
여기 이 가고일이 그랬던 것처럼, 이 근방에 사는 놈이 아닌 타지에서 공수해 온 놈들도 많이 있을 게 분명했다.
대륙 각지에서 긁어모은 몬스터다 보니 종류도 제각기 중구난방이다.
그런 놈들을 상대할 바엔, 차라리 지원 병력을 기다리는 게 나았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되면 황금 은행의 원로원에서 거래를 거절할지도 모른다.
피해 복구를 위한 자금이 절실한 때에 오베론의 유물을 살 여력은 없을 테니까.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거기다 내 예상이 맞다면, 저들의 정체를 아는 건 나밖에 없다.
은행에 있어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건 나뿐이란 거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와중에도 몸이나 사렸다간 꿈자리가 뒤숭숭해진다.
“싫으면 관둬라. 나 혼자라도 갈 테니.”
둘의 만류를 뿌리치고 검을 챙겨 들자 녀석들은 얼른 날 따랐다.
“아, 아닙니다! 명 받들겠습니다!”
“저도 따르겠습니다!”
이슬린도 딱히 사람들의 생명을 가볍게 보고 그런 건 아니다.
그녀의 임무는 날 보좌하는 것.
애먼 사람들 구하다 내가 죽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그게 더 큰일이다.
“날 위해 한 말이란 건 알겠다. 하지만 내가 명령을 내린 이상 따라라. 그게 너희의 일이다.”
“네! 공자님!”
무기를 챙겨 건물 1층으로 곧장 내달렸다.
1층엔 황금 은행의 호위병을 비롯한 귀빈들로 바글바글했다.
“대체 무슨 일인 게냐! 지금 밖이 난리도 아니더만!”
“빨리 내보내 줘! 내 영지로 돌아가겠다!”
다들 힘깨나 쓰는 이들이라 그런지 긴박한 상황에서도 주눅 들기보단 고래고래 소리치기 바빴다.
그 대상이 몬스터가 아니라 황금 은행의 호위병들인 게 흠이지만.
호위병들은 귀족들의 소란을 잠재워 보려 애썼다.
“여러분! 모두 진정해 주십시오! 객실엔 상급 결계가 쳐져 있으니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객실에서 기다리시는 게 더 안전합니다!”
“상급 결계? 그런 건 없던데.”
소란 틈에 용케 내 말을 들은 호위병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실례지만 방금 하신 말씀. 다시 해 주시겠습니까?”
“너희들이 말하는 상급 결계 같은 건 없었다. 덕분에 창문을 향해 네임드 가고일이 그대로 들어왔지.”
“저, 정말입니까? 그렇담 녀석은…….”
“걱정마라. 해치우고 오는 길이다.”
난 호위병에게 가고일의 피가 묻은 검을 보여 줬다.
“허… 그 말인즉…….”
그는 내 검을 보곤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귀빈들의 눈치가 보여 말을 망설이는 듯했다.
그렇다는 건…….
‘결계가 모조리 날아가 버린 게 확실하군. 은행 구역뿐만 아니라 황금 은행 전역에 걸려 있던 결계까지 모조리 다.’
이렇게 치밀한 걸 보면, 그들이 맞을 것이다.
놈들은 귀족들이 모인 객실에 결계까지 파훼를 끝마친 뒤였다.
만약 이대로 몬스터들이 들이닥친다면, 제대로 싸울 줄도 모르는 귀족들은 몬스터들의 먹잇감이 돼 버리고 말 거다.
이는 곧 사태가 진정되고 난 뒤에 황금 은행에 커다란 빚을 지우게 된다.
이건 그저 평범한 예상이 아니다.
‘랭킹빨로 세계정복!’에서 황금 은행 습격은 왕국 연합의 붕괴를 알리는 대사건이었으니까.
‘그건 적어도 5년 뒤에 일어날 사건일 텐데?’
난 착잡한 마음에 이빨을 질끈 깨물었다.
이 세상에서 바뀐 건 단 하나다.
바로 나.
내가 던진 자그마한 돌멩이가 거대한 파도로 자라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커져만 갔다.
하지만 더 이상 감상에 젖어 있을 여유는 없었다.
귀빈실의 큼지막한 대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룬 문양이 반짝여야 할 대문은 아무런 빛도 발하지 않은 채로 있을 뿐이었다.
“대, 대문의 결계까지……!”
호위병들은 아직까지도 결계 타령만 하기 바빴다.
십수 년간 평화에 쩌든 이들한테 이런 상황이 들이닥치리란 건 상상조차 안 한 듯했다.
…쿵! …쿵!
“문을 막아라!”
호위병들은 다급히 대문에 달라붙어 문 너머의 괴수를 막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고생이 무색하게도 대문에 걸려 있던 걸쇠에 금기 가기 시작했다.
…쿵!
“결계는! 방금까지 결계가 있다고 하지 않았냐!”
“그, 그게……!”
꼭 상황파악 못하고 현실도피 하는 놈들이 있다.
아직도 없어진 결계에 의존하다니.
튼튼한 성문도 아닌 평범한 문짝이 몬스터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호위병들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대문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박살 났다.
우지직!
“으악!”
그 바람에 온몸으로 문을 틀어막고 있던 호위병들은 볼썽사납게 뒤로 나자빠졌다.
크라아아악!
이윽고 문짝을 부수고 들어온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성인 남성 둘을 이어다 붙인 듯한 거대한 체구에 불룩 튀어나온 뱃살.
그러면서도 팔뚝만큼은 두꺼운 근육이 돋보이는 몬스터.
문을 부수고 들어온 녀석은 오우거였다.
놈은 아까 본 가고일과 같이 동공에 룬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녀석도 네임드 몬스터였다.
놈은 묵직한 나무 몸둥이를 붕붕 휘두르며 귀빈실 내부로 돌진했다.
후웅!
바람을 찢는 듯한 파공성이 나무 몽둥이에서 터져 나왔다.
문 바로 앞에서 얼쩡거리던 호위병 하나가 몽둥이에 제대로 얻어맞았다.
콰직!
“커…헉!”
재수 없게 얻어맞은 호위병은 그대로 피를 흩뿌리며 튕겨져 나갔다.
온몸이 기괴하게 뒤틀려 버린 그는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졌다.
“히이익!”
단 한 번의 유효타만으로 호위병들의 사기는 급락했다.
두배나 큰 덩치의 몬스터. 게다가 한 방만 맞아도 골로 가 버리는 강력한 힘까지.
이를 똑똑히 마주한 상태에서 멀쩡히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이상했다.
크르륵!
뒤이어 큼지막한 개의 모습을 한 몬스터들이 들이닥쳤다.
사냥감을 먹을 때 온몸에 피를 칠갑하는 탓에 이름 붙여진 블러드 하운드 무리였다.
“마, 막아야 한다! 이대로 뚫리면……!”
“으악!”
호위병들이 외쳐 봤지만 놈들을 이미 늦었다.
크락!
블러드 하운드의 날카로운 이빨에 병사들의 살점이 뜯겨져 나갔다.
전의를 상실한 병사들과 놀고먹는 것밖에 모르는 귀족들만 남은 상황.
도망칠 출구 따윈 없었다.
이대로라면 전멸은 불 보듯 뻔했다.
크라락!
오우거 녀석이 벌벌 떨고 있는 귀족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놈은 벌써부터 배를 불릴 생각에 흉측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막아라! 그게 네놈들이 할 일 아니더냐!”
“하지만… 저런 괴물을…….”
후웅!
호위병과 귀족들이 옥신각신 하는 사이, 오우거의 몽둥이가 다시 한번 바람을 갈랐다.
…콰앙!
“으아악! 나 죽어!”
귀족 하나가 바지에 오줌까지 지리며 나자빠졌다.
하지만 창피한 꼴만 보였을 뿐, 다진 고깃덩이가 되진 않았다.
“으, 으응?”
그런 그의 앞에서 난 용린검으로 녀석의 몽둥이를 받아 냈다.
“크흐흐……! 더럽게 무겁네!”
확실히 체급차가 있다 보니 몬스터여도 관절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이 상당했다.
그렇다고 못 막을 정도는 아니다.
나와 이 검은 쾌검의 크로드가 내지른 파산검도 막아 본 사이다.
이깟 몬스터의 몽둥이쯤은 그에 비하면 깃털보다도 가볍게 느껴졌다.
“프리아나! 이슬린! 호위병들을 재정비시켜라! 이놈은 내가 맡겠다!”
“네! 공자님!”
크륵?
오우거는 눈앞에 자그마한 먹잇감을 보곤 고갤 갸웃했다.
분명 제 몸집의 반밖에 안 되는 작은 인간이 자길 막은 걸로 놀라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너 같은 잡몹은 수도 없이 잡아 봤다고!”
파캉!
오러를 극한까지 끌어올려 놈의 몽둥이를 받아쳤다.
평범한 나무 몽둥이라 오러 소드에 숭덩숭덩 썰리지 않을까 했는데.
네임드 몬스터라 그런지 나무 몽둥이치곤 단단했다.
크라락!
화가 머리끝까지 난 놈은 마구잡이로 몽둥일 휘두르며 공격했다.
아무리 오러를 쓴다 해도 저걸 맞으면 골로 간다.
반대로 말하면, 저걸 맞지만 않으면 된다.
제대로 된 검법도 아닌 그저 무작위로 휘두르는 난잡한 공격.
지금껏 상대해 본 놈들이 죄다 괴물 같은 놈들이라 그런지, 녀석의 공격은 느릿느릿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육중한 풍압이 느껴지는 공격 사이로 녀석과의 거릴 좁혔다.
이놈은 체구가 크다. 난 작고.
그런 상황에선 녀석의 약점을 최대한 노려야 했다.
예를 들면 불룩 튀어나온 저 뱃살.
덩치가 큰만큼 대충 휘둘러도 녀석의 살점에 닿을 정도다.
차분히 상처를 쌓아 나간다면, 아무리 커다란 덩치의 놈이라도 결국엔 쓰러지기 마련이다.
서걱!
용린검이 횡으로 깊게 녀석의 하복부를 훑었다.
검을 타고 바위를 베는 듯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붉은 피가 하복부를 뚫고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두터운 놈의 살갗만 조금 긁었을 뿐, 내장까진 닿지도 않았다.
크르륵!
놈은 주춤거리며 피가 흘러나오는 상처 부위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녀석의 살덩이 주위가 움찔거리더니 이내 벌어져 있던 상처가 입을 오므렸다.
‘뭐야? 초속 재생까지 한다고?’
“끄응…….”
일이 상당히 귀찮게 꼬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