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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58화 (58/222)

58화

루디스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은행 구역의 한 건물 앞에 도달했다.

‘대금고’의 옆에 자리한 건물이었다.

대충 구조를 보아하니 지하로는 대금고와 연결되어 있는 듯했다.

“여기서부턴 가급적 마법이나 오러 사용을 자제하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아. 그래야지.”

왜냐고 물어 보려다 고갤 끄덕였다. ‘대금고’ 주위에 겹겹이 채워진 결계들 때문이었다.

‘이런데서 함부로 오러 소드라도 뽑았다간 예쁘게 다져지겠지.’

어차피 지금 난 싸우러 온 게 아니다.

거래를 하러 온 거지.

마침내 우리 일행은 고급스런 가구들이 가득한 작은 방에 도착했다.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잠시 기다리니 루디스는 따뜻한 차를 한 잔씩 내어 왔다.

평범한 방은 아니었다.

앞, 뒤, 양옆엔 큼지막한 풍경화가 걸려 있었지만 위치를 보아하니 결계를 감추기 위한 눈속임인 듯했다.

아마 내부의 소음을 차단시켜 주는 종류의 결계 같았다.

“그럼. 다들 나가 주게.”

“네. 알겠습니다.”

루디스의 말에 따라붙었던 호위병들이 방을 나갔다.

방 안에 남은 건 루디스와 내 일행뿐.

이제 본론으로 나설 때다.

“먼저 공자님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지?”

루디스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아시다시피 임페라 백작가에서 진 채무의 납입 기한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아마… 더 이상의 납입 기한 연장은 어려울 것 같다는 게 원로원의 지침입니다.”

“그렇군.”

예상했던 대로 황금 은행은 납입 기간 연장을 거부했다.

에런골드 2세의 입김이 벌써 닿은 듯했다.

“먼 길까지 당도해 주셨지만… 지금 상황으론 원로원을 설득할 만한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뾰족한 수라…….”

루디스는 말하면서도 곤란한 기색을 표했다.

난 그런 그에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만약 내가 뾰족한 수가 있어서 찾아온 거라면?”

“…네?”

자잘한 설명 대신 품속에 고이 모셔 둔 자그마한 상자를 꺼냈다.

보석이라도 담아 놨을 법한 상자에서 나온 건 투박한 돌멩이 하나였다.

“…그게 뭡니까?”

“프리아나, 보여 줘라.”

“네!”

프리아나는 얼른 주먹에 힘을 집중했다.

이내 그의 손 위로 푸른 오러가 피어올랐다.

그런데 그때, 고막을 때리는 듯한 날카로운 경고음이 고막을 때렸다.

[오러가 감지되었습니다. 3초 안에 직원의 승인이 없을 경우 비상사태로 간주됩니다.]

[3.]

[2.]

“…루디스 이그로나. 문제없다.”

[확인되었습니다.]

방 안에 설치되어 있던 결계 덕에 잠시 소란이 있었다.

“희한한 결계가 구비되어 있군.”

“아하하… 별건 아닙니다. 이따금 화를 주체 못하시는 호위 기사분들도 계셔서.”

황금 은행은 결계가 많은 도시다.

몬스터도 결계로 관리하고, 접견실에도 결계를 쳐 놓고.

아까 황금 은행을 대표하는 ‘대금고’에는 삼중, 사중으로 결계를 쳐 놨을 정도였다.

어찌나 결계를 철저히 해 놓았는지 은행 구역은 건물 외벽에 새겨진 자잘한 룬 문양으로 반짝거릴 정도였다.

언뜻 스쳐 지나가며 본 결계만 해도 종류가 다양했다.

마법 랭크 5쯤 돼야 가능한 마법을 난사하는 결계들이었다.

이처럼 황금 은행에선 외부로부터 침입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결계를 사용하고 있었다.

‘결계만 믿고 뻗대다간 골로 갈 텐데.’

결계가 나쁜 방법이라는 건 절대 아니다.

합리적인 선택을 중시하는 은행 특성상, 결계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방어 수단이니까.

비싼 값으로 마법 랭크 보유자를 둘 필요 없이, 결계만 설치하고 주기적으로 보수만 하면 장땡이다.

마법사 열 명을 보유할 바엔, 결계 열 개를 설치하고 마법사 한 명만 있는 게 훨씬 싸게 먹힌다.

만에 하나 무시무시한 랭크의 소유자가 한순간에 모든 결계를 파훼하는 것만 아니면 전혀 문제될 게 없다.

그 정도 능력자라면 결계가 있든 없든 그냥 대참사다. 그리고 먼 미래에 벌어질 일이기도 했다.

지금은 눈앞의 이 남자를 설득시키는 게 먼저다.

“괜찮습니다. 마저 보여 주시지요.”

프리아나는 손에서 피어오른 오러로 돌멩이를 옅게 베었다.

작은 생채기가 생기긴 했지만, 이내 틈새가 메워지며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마법 같은 일이 프리아나가 들고 있던 돌멩이에서 벌어졌다.

이를 본 루디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뭡니까? 그건?”

“크크크! 신기한가?”

거래의 기본은 감정을 잘 숨기는 것이다.

루디스쯤 되는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있었겠지만, 그가 본 광경은 충분히 놀랄 만했다.

난 완벽한 돌멩이를 집어 들곤 그에게 대답했다.

“이건 오베론이 남기고 간 실험체다. 무슨 짓을 하던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오는 힘을 가지고 있지.”

완벽한 돌멩이라 하면 싸구려 같아 보일까 봐 실험체라 말했다.

“오, 오베론 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 대륙에서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최후의 벽을 깬 대마법사. 그자가 만든 실험체라면… 가치를 헤아리기 어렵겠지.”

“오…….”

난 돌멩이를 다시 상자 속에 집어넣곤 뚜껑을 닫았다.

루디스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이미 그의 눈빛엔 거래의 기본 조건이고 뭐고 없었다.

“이거면 뾰족한 수로 충분하겠지?”

* * *

“흐아!”

푹신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여긴 황금 은행의 고객 중에서도 VVIP만이 사용할 수 있는 귀빈실.

민가 구역과 은행 구역의 사이에 위치한 건물 하나가 통째로 귀빈실이다.

대륙 각지에서 모여든 귀족들이 머무르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다.

그래서 그런지 귀족집 못지않은 안락함이 몸을 녹여 줬다.

거래 조건을 들은 루디스는 원로원의 허가가 필요하다며 하루만 기다려 달라 간혹히 부탁했다.

덕분에 황금 은행의 귀빈실에서 마음껏 먹고 마시며 쉬게 됐다.

물론 모두 공짜다.

“후후…….”

저녁으로 나온 만찬은 한동안 잊지 못할 정도로 화려했다.

육해공 총 동원한 재료들로 시작해 배가 터지도록 먹어도 먹을 게 부족할 지경이었으니까.

공짜로 먹는 거라 그런지 더 맛있게 느껴졌다.

만찬으로 배를 가득 채우고 곧바로 온 게 이곳 침실이다.

이제 편히 쉬면서 원로원의 결정만 기다리면 된다.

‘놈들이라면 받아들이겠지.’

황금 은행에 아이소테르의 입김이 닿아 있긴 하나 어디까지나 입김이다.

돈 냄새라면 기가 막히게 맡는 놈들이니 오베론이 남긴 유산의 가치를 모르진 않을 테고.

다른 왕국들의 영향 아래에 있는 이상 저들에게 이익이 가는 쪽으로 움직일 거다.

“크크크…….”

생각할수록 웃겼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멩이 하날 가지고 그 난리를 피우다니.

“공자님.”

“응?”

베개에 파묻고 있던 고갤 쳐들자 프리아나와 이슬린이 와 있었다.

“아. 다 먹었냐?”

먼저 식사를 끝마친 터라 둘에겐 마저 먹으라 하고 올라온 뒤였다.

아무래도 눈치가 보여 내가 올라가자마자 뒤따라 식사를 끝마친 듯했다.

“객실은 전해 받은 대로 따로 들어가실 생각이십니까?”

“으음. 뭐… 그래야지.”

제공 받은 객실은 총 3개.

따로 쓰든, 아니면 한 객실에 모여 있든 자유다.

크기도 셋이 잘 만큼 넉넉하기도 했고.

‘그렇다고 이슬린이랑 같은 침실을 쓰긴 그렇지. 남자 놈이랑 같이 쓸 생각은 더더욱 없고.’

“알아서들 쉬어라. 적어도 내일까진 상황을 지켜봐야 할 테니까.”

“네, 공자님.”

이슬린과 프리아나는 내 객실의 양옆에 위치한 객실로 들어갔다.

드넓은 방 안에 홀로 남은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루디스에게 건넨 거래 조건은 간단했다.

오베론의 실험체를 넘기는 대가로 남은 빚 1만 골드를 변제해 달라고.

원래는 1만 2천 골드였던 것도 가지고 온 금화로 조금이나마 갚아 1만 골드만 남은 상태였다.

“1만 골드라.”

분명 적지 않은 금액이다.

1만 골드면 평범한 사람이라면 평생을 놀고먹어도 남는 금액이니까.

하지만 랭크 상승을 간절히 원하는 자라면, 그만큼의 금액을 지불하고도 가지고 싶어 할 만한 물건이기도 했다.

실제로 소설에서 오베론이 남긴 실험체들은 군데군데 등장한다.

소설의 후반부에 가선 온갖 마탑에서 이를 연구하겠다며 피똥 싸고 있다는 언급이 나온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소설의 최종장에 도입하는 순간까지 그 누구도 오베론의 실험체를 분석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

무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륙의 내로라하는 마법사들이 매달렸는데도 말이다.

‘그러니까 그냥 파는 거지.’

랭크 7의 마법사 여럿이서도 해석에 실패한 건데, 지금의 내가 해석을 해낼 리는 없다.

솔직히 말하면 이건 그냥 신기한 돌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신기한 돌.

하지만 이게 쓸모없다는 걸 아는 이는 나밖에 없다.

“후후후.”

난 조용히 입을 다물고 거래만 성사시키면 되는 거다.

애초에 빚이 거대해진 것도 황금 은행이 이안 놈을 계속 충동질한 탓이고.

뭣 모르는 망나니 놈한테 사기 치려던 놈들인데, 똑같이 되갚아 줘야지.

“으음…….”

그간 쌓인 고민이 해결된 탓인지 그대로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 * *

“…아악…….”

한창 달콤한 꿈을 꾸던 와중에 낯선 소음이 들려왔다.

‘비명 소리?’

잘못 들은 건가 싶었지만 코끝을 아찔하게 찔러 오는 비릿한 냄새까지 느껴지자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

침대 옆에 세워 두었던 용린검을 집어 들었다.

귀빈실 건물 안쪽은 조용했다.

그렇담 밖에서 난 소리라는 건데.

난 조심스레 잠겨 있던 창문을 열었다.

창밖의 광경을 마주한 난 내 눈을 의심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황금 은행이 불타고 있다.

내가 있는 건물의 반대편이 활활 타오르고 있던 것이다.

지독한 악몽을 꿨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민가 구역 곳곳엔 불길이 치솟았고, 부상을 입은 채 도망 다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꺄아아악!”

“살려 줘!”

그런 이들을 쫓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몬스터들이었다.

크라아아악!

취이이익!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이 일어날 풍경은 아니었다.

다들 바삐 움직이며 생업에 종사하는 이들로 활기찼던 거리가 지금은 지옥에 가까웠다.

‘꿈인가?’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문을 열고 프리아나와 이슬린이 뛰쳐 들어왔다.

둘도 멀쩡히 있는걸 보니 꿈이 아닌 건 확실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몬스터들이 날뛰고 있습니다!”

프리아나는 황급히 가져온 갑옷을 다시 차려 입으며 대답했다.

몬스터들이 날뛰는 건 나도 보인다.

불이 시작된 건 민가 구역 방면이 아닌 은행 구역 쪽.

게다가 황금 은행의 외곽에서부터 몬스터가 밀려 들어왔다면 소란을 못 들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투기장에 갇혀 있던 몬스터들이 나온 건가?”

하지만 어떻게?

황금 은행이 어디 뒷골목 사채꾼도 아니고.

몬스터들이 가득한 투기장을 운영하고 있다면 그만큼 관리도 철저히 하고 있었을 거다.

저들의 두둑한 수익을 담당하는 투기장이니 결계도 겹겹이 채워 놨을 텐데…….

‘…설마?’

불현듯 끔찍한 상상이 떠올랐다.

투기장의 몬스터가 튀어나왔다는 건, 투기장의 결계가 파훼되지 않는 이상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는 건 누군가가 개입해 투기장의 결계를 박살 내 버렸다는 뜻인데.

“…황금 은행을 습격했다고?”

“습격이라 하셨습니까?! 대체 누가 황금 은행을!”

하지만 대체 왜? 그리고 누가?

나도 그 답을 찾기 위해 머릴 빠르게 회전시켰다.

다른 은행?

아니다. 그들에겐 황금 은행을 공격할 만한 이유가 없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간 교황청과 왕국 연합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들이 이런 짓을 했을 리는 없다.

그럼 왕국 연합?

연합이 나쁜 놈들이긴 해도 자기네들 은행을 공격할 만한 놈들은 아니다.

그건 자해나 다름없는 짓이다.

그럼 누굴까.

황금 은행을 공격할 이유가 있으면서, 그럴 만한 힘도 있는 놈들이.

“…아.”

딱 하나 있다.

왕국 연합을 극도로 혐오하면서 어마 무시한 강자들로 이루어진 단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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