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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57화 (57/222)

57화

대륙엔 수많은 은행이 있다.

개중에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은행을 꼽자면 3개를 꼽을 수 있다.

세계 각지의 클랜에서 모인 기금으로 운영되는 클랜 은행.

창세신을 섬기는 교황청의 헌금으로 운영되는 교황청 은행.

마지막으로 겉으론 상단의 자금으로 운영된다고 알려진 황금 은행이 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상으로 드러난 내역이고, 실제론 왕국 연합의 자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든든한 뒷배가 없는 이상 그만한 규모로 커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랬다간 돈을 왕창 빌려 놓곤 갚지 않는 대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다.

단지 신용만으로 빌려주는 게 아닌, 갚지 않으면 끝장내 버릴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기 마련이다.

다들 저마다 뒤를 봐줄 거대한 권력 하나쯤은 붙잡고 있는 게 당연했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창밖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하필이면 빌려도 황금 은행에 돈을 빌리냐.’

품속에 고이 모셔 둔 자그마한 상자를 매만졌다.

이안 임페라, 그러니까 과거에 이 몸은 황금 은행에 어마어마한 빚을 졌다.

자그마치 1만 2천 골드.

아마 대한민국 기준으로 따지면 수백억쯤 된다고 봐도 무방했다.

술, 도박, 마약, 뭐 안 한 게 없다.

이것저것 돈 새어 나갈 거라면 미친 놈마냥 펑펑 써 재낀 게 이 몸이다.

‘내가 쓴 거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이 망나니 새끼가 싸지른 똥 때문에 이게 뭔 고생인지.’

교황청 은행이나 클랜 은행이면 그나마 일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겐 적어도 이해관계가 얽혀 있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황금 은행은 다르다.

아이소테르의 국왕 에런골드 2세.

그는 귀족들 간에 분란을 누구보다 원하고 있다.

이대로 임페라 가문이 파산하는 게 국왕이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때문에 베네르 백작이 남기고 간 사업장을 모조리 우리 가문 앞으로 떠넘겼다.

지금의 재정 상태론 절대로 유지하지 못할 걸 알기 때문에.

채무 기한까지 남은 건 단 일주일.

수중에 있는 금화는 2천 골드가 끝이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마차의 건너편 자리에 앉은 프리아나가 내게 물었다.

“별거 아니다. 거래를 앞둬서 그런지 생각이 많아지는군.”

“잘 풀릴 겁니다. 오베론 님께서 남기고 간 유산이라면 황금 은행도 눈독을 들일게 뻔하니까요.”

“그렇긴 하지.”

프리아나 옆에 앉은 이슬린은 돈이 담긴 궤짝을 꼬옥 끌어안은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적잖은 금액이라 그런지 꽤나 긴장한 듯했다.

“이슬린.”

“…네. 공자님.”

“맡겨 둔 4천 골드는 잘 가지고 있겠지?”

“물론입……. 네? 4천 골드라뇨? 2천 골드 아닌가요?”

“농담 좀 해 봤다.”

“…그런 농담은 삼가 주셨음 합니다.”

“크큭! 그래.”

가볍게 농담 한 마디 던진 덕에 마차 안에서 감돌던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별 일 없이 끝나면 좋으련만.’

황금 은행에서 사람을 불러와도 되겠지만, 아무래도 큰일이다 보니 이쪽에서 직접 가 단판을 짓기로 했다.

이스바르트도 데리고 갈까 했지만, 마차엔 영 적응을 못하는 터라 영지에 내버려두고 왔다.

전용 포탈이 있기야 하지만 비용이 장난 아니다.

왕족이나 유력 가문의 귀족쯤 돼야 쓸 수 있었다.

‘뭐……. 마차 못 타는 건 빼도 자이언트 웜 다룰 연습은 해 봐야 하니까.’

그녀라면 잘 할 거다.

비쩍 마르긴 했어도 머리 하난 좋은 여자니까.

수명을 훌쩍 넘긴 자이언트 웜이지만, 나쁠건 없다.

오베론의 유산 덕분에 앞으로 5년은 더 살 테고, 오래 산 녀석인 만큼 어쩌면 상위종으로 진화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프리아나, 이슬린, 나까지 셋을 태운 마차는 황금 은행을 향해 힘차게 내달렸다.

황금 은행의 본점은 아이소테르 왕국이 아닌 이웃 왕국 도라스에 있다.

아이소테르의 국경선에 도달하자 포장된 도로 한가운데에서 검문검색이 한창이었다.

국경선은 왕국 간의 경계라 그런지 병사들의 복장엔 아이소테르 국왕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검은 늑대의 문양이다.

먹잇감을 노려보고 있는 게 에런골드의 이미지에 딱 맞는다고 해야 하나.

병사들은 두 개로 나뉜 길을 가로막고 지나다니는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나는 허름한 복장에 맨발로 걸어 다니는 이들로 가득했고, 다른 한쪽 길은 마차들의 왕래가 주를 이뤘다.

잠시 마차가 멈춰 섰지만 이쪽 길은 사람 빠지는 속도가 빨라 금방 우리 순번이 찾아왔다.

프리아나가 마차에 난 창문을 열자 병사들이 가볍게 경례를 취했다.

“실례하겠습니다. 혹시 어떤 목적으로 도라스를 방문하시는지요?”

“황금 은행에 볼일이 있습니다.”

“황금 은행이라면…….”

마차 창문을 들여다보던 병사와 눈이 마주쳤다.

“아! 그럼 바로 통과시켜 드리겠습니다.”

병사는 내가 귀족이란 사실을 알아채자마자 얼른 길을 내어줬다.

확실히 이웃 왕국이어도 왕국 연합이란 이름 아래 묶여 있어서 그런지 검문이 가벼웠다.

그렇게 우리 일행을 태운 마차는 금세 도라스로 진입할 수 있었다.

“도라스엔 처음 와 봅니다.”

“그래?”

프리아나는 아이소테르를 떠나자마자 조금 들뜬 표정을 지었다.

“아쉽겠지만 관광이나 하고 다닐 시간은 없다. 바로 황금 은행으로 가야 하니까.”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프리아나의 눈빛은 창밖에 한참이나 머물렀다.

기사로서 검만 잡은데다, 임무를 제외하고는 타지로 나올 경험이 적은 듯했다.

일만 잘 마무리되면 황금 은행 주윌 돌아다니는 것 정도는 가능할 거다.

웬만한 영지보다 큰 규모를 자랑하는 은행이라 볼만한 것도 많다고 하니 그럭저럭 눈요기 정도는 될 거다.

아이소테르-도라스 국경지를 지난 지 수 시간 후에 마차가 멈춰 섰다.

확실히 돈이 많은 지역이라 그런지 길도 잘 포장되어 있고, 창 밖에 사람들 얼굴에도 여유가 넘쳤다.

북적거리는 인파 너머로 황금 은행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둥그런 원판의 구조를 띈 황금 은행은 총 세 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원판의 중앙에 위치한 우뚝 솟은 건물로 시작되는 주위 자잘한 건물들을 통틀어 은행 구역이라 부른다.

조금 더 밖으로 나가면 황금 은행에서 일하는 이들의 거처인 민가 구역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황금 은행의 가장 외곽 지역엔 상인들이 북적이는 시장 거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가에 시장이 생긴다는 걸 감안하면 조금은 특이한 구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황금 은행은 은행이다.

보안이 생명인 은행답게 은행 구역 근처엔 시장 상인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했다.

이는 민가 구역도 마찬가지였고, 뒤늦게 나타난 시장 상인들이 좌판을 펼칠 수 있는 건 가장 외곽에 위치한 시장 거리뿐이었다.

그래도 나름 시장 거리랍시고 이색적인 문화를 자랑하는 거리다.

황금 은행 도시를 빙 둘러싼 시장 거리를 돌며 구경하는 것도 나름 재밌는 구경일 거다.

‘거래만 잘 끝나면 한 번 구경이나 다녀 볼까.’

마차는 시장 거리를 지나쳐 민가 구역 근처에서 멈춰 선 상태였다.

“문부터 열어 드리겠습니다. 공자님.”

프리아나가 마차 문을 열자 한 무리의 인파가 마차 앞에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거액의 빚을 지고 있다곤 해도 이웃 왕국의 귀족이다.

게다가 빚을 지고 있다는 것도 어찌 보면 황금 은행의 고객이라고 볼 수도 있는 관계다.

그래서 그런지 황금 은행에 직접 방문한다는 소식에 환영 인사를 준비까지 해 놓고 있었다.

아마 귀족에 대한 매뉴얼이리라.

“이안 임페라 공자님 맞으십니까?”

다른 이들과는 달리 하얀 제복에 금색으로 수를 놓은 남자가 환한 얼굴로 우릴 맞이했다.

단순히 돈이 많다기보단 멀끔하게 차려 입은 엘리트 관료 느낌이 큰 남자다.

그런 그의 옆엔 짙은 회색빛의 옷을 입은 자들도 있었다.

얇은 검을 허리춤에 하나씩 매단 이들은 몸집이 조금은 부어 보였다.

회색빛 겉옷 안에 가벼운 가죽 갑옷을 입고 있는 거 같았다.

호위병까지 거느리고 있는 걸 보면 어중띤 하급 관료는 아닌 듯했다.

“맞다.”

나이도 그리 많아 보이진 않고, 황금 은행의 높은 관료라 해도 귀족은 아니다.

그러니 그냥 맘 편하게 말을 놓았다.

백작이나 되는 사람이 굽신거리고 다녔다간 얕보이기 십상이기도 했고.

남자는 그런 내 말투에도 전혀 불편한 기색 없이 공손히 인사했다.

“황금 은행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황금 은행 서부 지점장을 맡고 있는 루디스 이그로나라고 합니다. 루디스라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반갑군, 루디스.”

루디스란 사내는 절을 올리는 대신 내게 악수를 청했다.

귀족이 아니라 할지라도 황금 은행을 대표하는 자리라 그런지 거추장스런 예의는 갖추지 않았다.

‘나야 편하고 좋지.’

소설 속 세상에 온 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귀족의 몸가짐이 영 적응이 안 된다.

난 루디스가 내민 손을 가볍게 잡았다.

맨들맨들 하고 길게 뻗은 손가락이 손아귀에 잡혔다.

따로 검술을 연마하거나 마법을 배운 듯한 느낌은 없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기백이 남다르시군요.”

“그런 편이지.”

“그럼.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우린 그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흠.”

가는 길에 황금 은행의 건물들을 훑어봤다.

대륙에서 손에 꼽는 은행이라 그런지 웬만한 영지급 영토를 뽐내고 있었다.

개중 가장 돋보이는 건 은행 구역의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네모반듯한 건물.

이른바 ‘대금고’라고도 불리는 황금 은행을 대표하는 녀석이다.

지하에 상상조차 어려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금은보화를 가지고 있는 걸로 알려져 있다.

왕국의 보고에 버금간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다.

그 옆에도 커다란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져 있었고, 수많은 이들이 건물 앞을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평범해 보이는 이들 전부가 황금 은행에서 일하는 자들이다.

황금 은행 민가 구역에 살 수 있는 건 오로지 근로자들뿐.

그래서 그런지 부랑자나 거지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슬쩍슬쩍 구경하던 와중에 한 가지 예상치 못한 게 눈에 들어왔다.

크르르륵…….

“몬스터?”

파충류의 모습을 한 거대한 사람형 괴수가 철창 안에 갇힌 채로 낮은 울음소릴 토해 내고 있었다.

“아! 괜찮습니다. 공자님. 모두 사역술사의 관리 하에 잘 통제되고 있습니다. 결계도 겹겹이 준비되어 있구요.”

루디스는 늘상 있는 일이라는 듯 날 안심시키려 들었다.

은행 구역을 거닐고 다니는 이들도 코앞에서 몬스터가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들 할 일 하기 바빴다.

묘한 풍경이지만 황금 은행인 걸 떠올려보면 그럴 만했다.

“…벌써 투기장 시즌이었나?”

내 말에 루디스가 고갤 끄덕였다.

“잘 알고 계시군요. 다음 주부터 투기장이 열리기로 되어 있습니다.”

“흠.”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한 번 들리는 것도 괜찮겠습니다만?”

“마음만 받겠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투기장이란 말에 벌써 이 망나니 몸뚱이가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몬스터끼리 치고 박는 걸 투기장이라 하진 않는다.

어느 몬스터가 이길지로 거액이 오가는 건 당연지사.

쉽게 말하자면 도박판이 열리는 거다.

‘그러고 보니 소설에서도 나왔지. 황금 은행의 투기장.’

은행은 돈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장소다.

그런 이들을 맨손으로 돌려보내는 건 장사치 입장에서 바보 같은 짓이다.

덕분에 황금 은행엔 도박장 같은 유흥 거리가 많았다.

소규모 카지노도 있긴 하지만 황금 은행의 주력 유흥 사업은 투기장.

각지에서 몬스터들을 그러모으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그랬다가 골로 가지.’

황금 은행의 주력 유흥 사업 투기장.

소설의 줄거리대로라면 황금 은행은 이 투기장으로 인해 붕괴된다.

‘그거야 앞으로 한참이나 지나서 일어날 일이지만.’

* * *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어 갈 이른 저녁.

황금 은행의 민가 구역에 낯선 이들이 기척을 숨기고 있었다.

둘은 한 건물 지붕 위로 올라가 작게 대화를 나눴다.

지붕 색깔에 맞춘 붉은 망토를 두른 터라 자세히 보지 않는 이상 눈에 띄지 않았다.

“거사는 준비됐겠지.”

“하핫! 준비랄 게 있나? 여기 멍청이들이 다 준비해 놓은 뒤인데!”

“그렇긴 하지. 몬스터를 민가에 들여놓다니.”

둘 중 한 녀석은 제 왼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크로드는 별 말 없던가?”

“그냥 조용히 제 갈 길 가던데? 칼로 쑤셔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놈이니까. 깡촌의 귀족 한 놈 노린다고 뭐라 하겠어?”

“그럼 상부의 지시대로 하면 되겠군. 거사는 오늘 밤. 달빛이 제일 강할 때를 노린다.”

“그래! 그럼 그때 보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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