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야르타를 따라 경매소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방금까지 길길이 날뛰던 몬스터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철창 안에는 살갗이 축 쳐진 몬스터들이 힘겹게 눈을 뜨고 있었다.
이들 모두 사역된 지 오래된 늙은 몬스터들이다.
이 녀석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부려 먹히다 마침내 최후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마 귀족들의 랭크 상승을 위한 경험치로 쓰일 거다.
남은 사체는 각종 비약의 재료로 거듭 날 테고.
그렇게 야르타를 따라 한참을 들어서자 커다란 천막을 마주했다.
야르타는 철창을 덮고 있던 천막을 걷어냈다.
오랜 기간 관리하지 않아 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여기입니다.”
“흠.”
천막 너머엔 웬만한 저택 규모의 거대한 철창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성인 남성 팔뚝 두께만 한 쇠창살로 이루어진 철창은 거대한 새장 같은 느낌이 났다.
구르륵…….
커다란 굼벵이와 흡사하게 생긴 몬스터가 낮은 울음소릴 냈다.
축 처진 거대한 살점으로 이루어진 몸집.
머리로 보이는 부분만 갈색빛을 띠는 게 영락없는 굼벵이다.
크기만 작았다면 귀엽게 볼 수도 있었겠지만, 거대한 몸집 탓에 조금은 징그럽게 느껴졌다.
이게 바로 자이언트 웜.
이름에 걸맞게 어마어마한 덩치를 자랑하는 벌레다.
게다가 15년 이상이란 세월을 살아온 녀석답게 일반 자이언트 웜보다 더욱 거대했다.
생긴 건 좀 징그럽지만 꽤나 온순한 녀석이다.
보통의 경우엔 사람들을 공격하지도 않고, 먹이만 잘 챙겨 주면 문제를 일으키진 않는다.
다만 눈앞에 있는 거라면 뭐든 가리지 않고 먹는다는 특이한 식성이 있다.
이 식성을 이용해 광산에서 널리 쓰이는 놈이다.
거대한 굴착기 마냥 눈앞의 땅을 야무지게 파먹어 준다.
그렇게 삼킨 바위와 자갈은 잘게 다져진 흙으로 배설한다.
배설한 흙은 이래저래 쓸데가 많으니,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몬스터다.
자이언트 웜은 손님의 등장에 뭉툭한 주둥일 오물거리다가 이내 흥미를 잃은 듯 추욱 늘어졌다.
살아온 세월 탓인지 다른 자이언트 웜보다 묘하게 힘이 없어 보였다.
“이놈이군.”
녀석을 눈앞에 마주한 난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놈이라면 분명 그게 있을 거다.
대현자 오베론이 남기고 간 ‘그것’이.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만……. 덩치가 크긴 해도 워낙 노쇠한 녀석이라 제대로 일을 하진 못할 겁니다.”
“그렇군.”
야르타는 이를 꿈에도 모르는 듯 그저 늙은 자이언트 웜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히야! 멋져요!”
프리아나는 야르타의 말에도 자이언트 웜의 몸집을 보며 감탄했다.
거대한 녀석의 몸집이 신기한 듯 요리조리 살펴보기까지 했다.
“공자님. 찾고 계시던 자이언트 웜이 이 녀석입니까?”
반면 프리아나는 이래저래 많이 보고 들은 게 있어서 그런지 자이언트 웜을 탐탁치 않아 했다.
자이언트 웜의 가용 기간은 짧게는 7년에서 길게는 10년.
대전쟁 이후 15년이나 지난 지금은 늙은 굼벵이에 지나지 않았다.
“후후.”
난 프리아나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괜찮다. 그리고 한 가지만 부탁하지.”
“네, 공자님. 뭐든 따르겠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가만히 있어라. 알겠나?”
“네? 가만히 있으라는 건…….”
난 관심 있는 척 자이언트 웜에게로 다가갔다.
이를 본 야르타가 날 말렸다.
“공자님? 실례지만 자이언트 웜에게 가까이 가시면 안 됩니다.”
“응? 방금 뭐라 그랬나?”
난 못 들은 척 계속해서 자이언트 웜에게 다가갔다.
“녀석은 눈앞에 있는 거라면 뭐든 먹는 놈입니다. 아무리 온순한 놈이어도 함부로 대하면 위험…….”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그러는 것뿐이다.”
난 야르타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다가갔다.
이쯤 되자 야르타도 놀라 날 제지하고 나섰다.
“자, 잠시만! 멈추십시오! 공자님!”
“아.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건가?”
난 자이언트 웜의 주둥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런 날 쳐다보던 야르타의 낯빛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고, 공자님! 어서 나오십…….”
구륵!
녀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위가 어두워지며 몸이 붕 떠올랐다.
카웁!
* * *
“꺄악! 공자님!”
눈 깜짝 할 사이에 자이언트 웜의 입 속으로 이안이 빨려 들어갔다.
“으아아악! 이 미친놈이!”
이를 본 야르타가 괴성을 내질렀다.
그가 말한 미친놈이 자이언트 웜인지 아니면 멍청하게 자이언트 웜한테 잡아먹힌 공자 녀석인지는 불분명했다.
야르타는 소리만 고래고래 지르며 발만 동동 굴렀다.
여기서 자이언트 웜을 쥐어 패 봤자 먹어 버린 이안을 내뱉지는 않는다.
괜히 몸부림치다 안에 들어간 먹잇감을 더 잘게 다져 버리는 꼴이 될 거다.
“으으으! 어서! 어서 이놈의 사역술사를 불러와라!”
“예, 예엣!”
순식간에 주변은 난장판이 됐다.
하지만 여기서 유일하게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던 이가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시지?’
이안 임페라의 호위기사 프리아나.
이안이 잡아먹히기 직전 귀띔을 해 준 덕분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놀란 건 마찬가지지만.
‘…다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
프리아나는 검집을 꾹 잡은 채로 자이언트 웜을 바라봤다.
이안을 집어삼킨 녀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멀뚱히 누워 있기만 할 뿐이었다.
* * *
“흐흐.”
계획대로 자이언트 웜의 몸속으로 들어왔다.
질척한 점액에 온 몸이 끈적해지고 숨도 못 쉬겠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제 곧 야르타가 자이언트 웜의 사역술사를 데리고 올 거다.
그 안에 내가 찾는 그걸 찾아야 했다.
“으음…….”
숨을 참은 채로 어둠 속을 더듬었다.
다행히 며칠 굶었는지 녀석의 배 속은 텅 비어 있었다.
자잘한 자갈이나 돌멩이들이 섞여 있었더라면 더 찾기 힘들었을 거다.
몸을 비틀자 자이언트 웜의 배 속이 꿈틀댔다.
그럴수록 내 몸뚱인 녀석의 배 속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쯤 있을 텐데.’
설마 허탕인가? 그냥 운 좋게 오래 산 놈이었나?
자이언트 웜 수명이 12년 전후였던 걸 보면 수명을 훌쩍 넘긴 놈은 맞는데.
재수 없는 상상이 머릿속에 떠오르던 그때.
어두컴컴한 배 속에서 은은한 빛이 느껴졌다.
‘있다!’
녀석의 마핵은 아니다.
자이언트 웜의 마핵은 갈색 머리통 안에 들어 있다.
저건 이 녀석이 어쩌다 먹잇감 틈에서 삼킨 것뿐이다.
“흐읍!”
난 빛이 나는 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점액질로 가득한 위장을 헤치며 나아간 끝에, 마침내 딱딱한 뭔가가 손에 잡혔다.
“…뱉어라!”
뭔갈 손에 움켜쥐자마자 온몸이 빠르게 반대 방향으로 빨려 나갔다.
난 얼른 방금 찾은 물건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주륵!
“으윽!”
환한 빛에 눈이 부셨다.
온몸엔 회색빛깔의 반투명한 점액질로 끈적하게 적셔져 있었다.
생선 썩은 듯한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고,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야르타가 내게 달려들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오만한 티를 내던 녀석이 시커먼 낯빛으로 뒤바뀌었다.
“…….”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녀석을 매섭게 노려봤다.
“으으…….”
야르타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 말도 못했다.
“…이놈 때문입니다! 이 멍청한 놈!”
그러다 괜히 자이언트 웜에게 다가가 몽둥이로 사정없이 후려치기 시작했다.
구륵! 구르륵!
자이언트 웜은 호된 매질에도 울음소리만 낼 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저리 성격이 온순한 놈인데도 입가에 뭐가 닿기만 하면 죄다 처먹는다니.
“그만.”
“아, 아닙니다! 이 망할 돼지 녀석을 때려죽이는 한이 있어도……!”
“자이언트 웜을 죽이는 건 죽이는 거고.”
난 자리에서 일어나 점액질을 털어 냈다.
“경매소에 있는 몬스터가 손님을 잡아먹다니, 그것도 아이소테르를 섬기는 귀족을 말이야.”
“으윽…….”
경매소의 첫 번째 원칙.
신용.
몬스터를 사고파는 곳이다 보니 무엇보다도 신용이 제일 중요했다.
이 몬스터가 주인을 해치지 않고 말을 잘 들을 것이라는 믿음.
그게 페시스 몬스터 경매소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원칙이다.
그런데 그게 방금 깨져 버린 거다. 그것도 귀족이 잡아먹히는 끔찍한 사고로.
“제,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공자님! 제 이름을 걸고 이 망할 몬스터 녀석을 벌하도록 하겠습니다!”
“하. 그걸로 될 거라고 생각하나? 날 벌레 녀석의 먹잇감으로 삼으려 했으면서?”
“아닙니다요! 그런 생각은 조금도……!”
“뭐 일부로 하진 않았겠지. 만약 그랬다간 귀족 암살 미수일 테니까.”
“허억……!”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그건…….”
야르타는 넙죽 엎드린 채로 벌벌 떨었다.
다른 이들에게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여간 큰일이 아니다.
어쩌면 페시스 경매소에서 퇴출될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야르타에겐 죽음보다도 무서운 일이었다.
‘그러게 말이야. 사람 돈 좀 없다고 그딴 식으로 깔봐?’
원래 계획은 제 값 주고 사 오려고 했다.
이놈이 돈 없으면 그냥 가라는 투로 얘기만 안 했으면.
“쯧.”
나도 일이 크게 소문나서 좋을 건 없다.
귀족이란 놈이 자이언트 웜한테 잡아먹혀 죽을 뻔했다는 건 그리 유쾌한 소문은 아니다.
대신 적당한 위로금 정도는 받아야지.
“물론 나도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저,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대신. 피해자 입장에서 정당한 보상 정도는 바라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이 망할 벌레 녀석은 제 손으로 반드시 처리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네?”
“날 잡아먹은 놈이니 처벌은 내가 하겠다. 이놈은 내 영지로 데려가도록 하지.”
“아…….”
이쯤 되자 야르타도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는지 알아차렸다.
녀석의 목에 핏대가 불룩 솟아났지만 얼굴 표정은 최대한 평온을 유지했다.
“그, 그리하시지요……. 이 아이는 공자님께 드리겠습니다…….”
“그래. 운송에 드는 비용까지 알아서 잘 처리해 주겠지?”
뿌득!
어디선가 이빨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짝!
난 밝은 얼굴로 손뼉을 한 번 쳤다.
“그럼. 계약은 그걸로 된 거겠지? 이 일은 불운한 사고였으니 없던 셈치고. 피해 보상차 자이언트 웜은 내가 가져가는 걸로.”
“…네.”
* * *
“자이언트 웜의 운송 준비를 끝마쳤다고 합니다.”
“아. 빨리 끝났구만.”
사건은 대충 마무리하고, 난 페시스 경매소에 마련된 욕탕에서 몸을 씻었다.
나름 규모가 있는 경매소라 그런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굴 설비 정도는 갖추고 있었다.
‘아직도 냄새가 좀 나는 것 같은데.’
자이언트 웜의 점액질은 생각보다 냄새가 심했다.
뜨뜻한 욕탕에 한참이나 몸을 불렸는데도 생선 썩은 듯한 냄새가 은은하게 남은 것 같았다.
“프리아나, 냄새 나는지 한 번 맡아 봐라.”
프리아나에게 정수리를 들이밀었다. 그러자 녀석은 슬쩍 냄새를 맡는 척하곤 대답했다.
“…하나도 안 납니다.”
“진짜? 아닌 거 같은데.”
“진짭니다.”
“…이스바르트.”
“네? 그, 그게 저…….”
이스바르트는 아까부터 내 눈도 못 맞추고 있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게 내 차림새를 신경 쓰고 있는 듯했다.
끈적한 점액으로 뒤덮인 옷을 계속 입고 있을 수도 없을 노릇이고, 혹시나 해서 챙겨 온 하얀 속받침용 옷만 입고 있었다.
속받침용 옷이라고 해서 팬티 차림으로 있는 건 아니다.
좀 얇은 셔츠 같은 거지.
“자.”
이스바르트한테 팔을 들이대자 녀석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소, 송구합니다.”
그리곤 코를 대고 몇 번 킁킁대더니 고갤 가로저었다.
“…안 나는 것 같습니다.”
말로는 안 난다고 했지만, 방금 표정이 살짝 구겨지는걸 봐 버렸다.
여기서 괜히 더 물어봐야 뭐하겠나.
가신 입장에서 주인보고 ‘공자님 냄새 납니다!’ 하는 것도 웃기다.
“…그래. 그런 걸로 치자.”
하루 종일 욕탕에 몸을 담구고 있을 순 없다. 그건 저택에 가서 하는 걸로 하고.
이젠 돌아갈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