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콰앙!
느닷없는 굉음이 터져 나오며 문이 박살 났다.
뒤를 이어 수십명의 병사들이 침소로 들이닥쳤다.
“반역자 이안 임페라는 듣거라!”
반역자?
아. 결국 들켰구나.
이래서 황제의 잔당이랑 어울리면 안 되는 거였는데.
“끔찍한 학살자들의 잔당과 어울려 대륙의 평화를 어지럽힌 죄! 즉각 참형에 처한다!”
잠깐! 좀 봐달라고! 재판도 없이 바로 죽이는 거야?
소리쳐 보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에잇! 망할 반역자 놈! 죽어라!”
으악!
“…허억! 허억!”
축축하게 젖은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다행히 방금 그건 꿈이었나 보다.
“…젠장.”
식은땀에 흠뻑 젖은 목덜미를 매만졌다.
차가운 칼날에 살점을 베인 감촉이 현실처럼 생생했다.
“후…….”
요새 신경 쓸 일이 많아서 그런 건가? 재수 없는 꿈이나 꾸고 앉았다니.
“공자님? 무슨 일이시죠?”
내 비명 소릴 들었는지 이슬린이 곧장 달려와 문을 두드렸다.
“아. 괜찮다. 뭣 같은 꿈을 꿔서 말이야.”
“…그러시군요.”
“흐…….”
비록 꿈에 불과하긴 했지만, 아예 현실성 없는 꿈은 아니다.
그래서 더욱 기분 나빴다.
황제의 잔당과 엮이면 그 즉시 참형하는 게 왕국 연합의 법률이다.
‘그냥 엮인 수준이 아니지.’
난 이미 황제의 잔당과 가볍게 엮인 사이 정도가 아니다.
기사단의 유물의 위치뿐만 아니라 봉인을 해제하는 방법까지 알려 줬으니 곱게 죽기만 하면 다행이다.
“…….”
제일 걱정되는 건 오베론이다.
홀로 대전쟁을 끝내고 홀연히 자취를 감춘 대마법사 오베론.
녀석이 주인공 디아와 같은 시점에 등장하는 일은 없었다.
소설 중간중간에 나오는 회상에서만 미친 활약을 보여 줄 뿐.
오베론은 대전쟁 이후 자취를 감추곤 단 한 번도 얼굴을 내비추지 않았다.
심지어 소설의 최종화 바로 전편.
디아와 라크레시아의 격전에서도 녀석은 나타나지 않았다.
죽은 건 분명 아니다.
랭크 9를 죽일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없다.
놈은 그저 구경하고 있는 것뿐이다.
신이라도 된양 고고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그래. 두 번째 대전쟁이 터졌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던 놈이야. 유물의 봉인을 푸는 법 좀 알려 줬다고 찾아오고 그러기야 하겠어?’
난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후우…….”
이게 다 잡생각이 많아서 그런 거다.
이럴 땐 더 열심히 뭐라도 하는 편이 나았다.
‘잡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도 아니고.’
“이슬린.”
“네. 공자님.”
“오늘 일정은 어떻게 되지?”
“엔델로 광산에 대한 보고가 있을 예정입니다.”
“호오.”
뱀의 머리가 될 이스바르트 볼턴의 보고라.
조금은 기대가 됐다.
머리 좋은 걸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여자였는데.
“씻을 물을 가져와라. 바로 가 보도록 하지.”
“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과연 어떤 보고 사항을 가져 왔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졌다.
* * *
새로운 주인을 맞이한 엔델로 광산.
값비싼 귀금속이 아닌 철만 나오는 철광이지만 채광량이 꽤 돼 쏠쏠한 수입이 나오는 곳이기도 했다.
주인이 바뀌었음에도 엔델로 광산은 인부들로 가득했다.
모두 얼굴에 시커먼 먼지와 땀을 뒤집어쓴 채로 저마다 할 일에 매중했다.
쿠르르르…….
갱도 입구에선 철광석을 가득 실은 수레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철광석을 실은 광부는 이를 갱도 바로 앞에 위치한 공터에 쏟아부었다.
이내 어린아이와 여인네들이 와 이 중 쓸 만한 철광석을 골라냈다.
“원래 이런 어린아이들까지 일을 하나?”
이슬린은 내 물음에 고갤 갸웃했다.
“네? 실례지만 무슨 의미신지…….”
순간 뭐라 더 말을 하려다 말았다. 하긴 상식이란 건 세상마다 다른 거니까.
“…됐다. 돈은 제대로 챙겨 주지?”
“네. 가족 단위로 와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버지는 광석을 캐 오고, 어머니와 자식들이 이를 골라내는 일을 주로 합니다. 임금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았다간 가족 전체가 들고 일어나니 제대로 지급해야겠지요.”
“으음… 그렇군.”
어린 아이들이 일하는 게 내 관점에선 좀 어색하지만, 여긴 검과 마법이 날아다니는 세상이다.
근로기준법 같은 게 있을 리도 없고, 갑자기 이런 걸 바꾸겠다 하면 미친놈 소리만 듣는다.
난 이슬린과 함께 엔델로 광산에 위치한 건물로 들어섰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가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 너머엔 하얀 붕대로 얼굴을 칭칭 싸맨 여자가 골머릴 썩히고 있었다.
“끄응…….”
“많이 바쁜가 보군.”
“…예? 아앗!”
이스바르트는 그제야 우릴 발견하곤 넙죽 엎드렸다.
“고, 공자 전하! 죄송합니다! 여기까지 오신 줄도 모르고!”
이스바르트의 긴 흑발이 바닥에 쓸렸다.
그 모습에 괜히 마음이 짠해졌다.
“됐다. 방금 온 참이니. 그나저나 보고할 게 있다고?”
“아앗……. 그, 그게…….”
이스바르트는 말하기 곤란한 사항인 듯 우물쭈물 말을 망설였다.
“실은… 채산율을 높이려 새로운 작업 방식을 고안했습니다만… 인부들의 반발에 문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호오.”
인부들의 반발쯤이야 예상했던 일이다.
새로운 주인이 온 것도 모자라 옛 관리인 라르크를 감옥에 처넣어 버렸으니까.
기존에 인부들이 텃세를 부리는 것쯤은 으레 있는 일이다.
‘게다가 지금 이스바르트를 보면…….’
이스바르트는 호리호리한 체형에 얼굴은 붕대로 칭칭 동여매기까지 했다.
외견만 놓고 보면 얕보이기 십상이다.
그래서 내가 대신 기강을 잡아 주려 온 거기도 했다.
그런데 새로운 작업 방식이라니?
난 의자에 걸터앉아 다리를 꼰 채로 그녀에게 물었다.
“한 번 말해 봐라. 네가 생각해 낸 새로운 방식이란 게 뭐지?”
“아… 그럼.”
이스바르트는 탁자에 쌓여 있던 서류 더미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서류를 내게 건넸다.
서류엔 광산 인부들의 임금과 각종 부가 비용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개중에 ‘몬스터 구제비용’에는 큼지막하게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지금까지 엔델로 광산은 동이 틀 때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만 운영됩니다.”
“그래. 대부분 그렇게들 하지.”
“하지만 이렇게 진행하다 보니 매일 아침 갱도에 몬스터가 생성됐는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생성됐을 경우엔 구제비용이 추가로 투입되고요.”
“흠.”
보통 몬스터가 생성되려면 세 가지 중 하나의 조건이 필요했다.
어둡거나, 원혼이 많거나, 인적이 드물거나.
이 세 개가 모두 충족되는 경우엔 거의 백 프로 몬스터가 생성된다.
심한 경우엔 던전이나 다름없는 지옥이 돼 버리기도 하고.
광산은 이 중 두 개를 매우 잘 충족시키는 곳이다.
지하 깊숙한 갱도는 어둡고 인적이 드무니까.
때문에 매일 아침 갱도엔 확인 작업이 필요했다.
그러다 몬스터가 발견되기라도 한다면, 몬스터가 구제될 때까지 인부들이 투입되지 못한다.
그럼 그날 채굴량은 반절로 급감한다.
“그래서?”
“아예 광산 인부들을 두 개 조로 나누는 겁니다. 그럼 몬스터가 생성될 확률도 줄고, 생성되더라도 초기에 진압이 가능해집니다.”
현대 지구에선 익숙한 방법이었다.
‘공장 2교대 근무 같은 거구만.’
“말로만 들었을 땐 괜찮군.”
“하지만…….”
신나서 설명하던 이스바르트는 금세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밤에 일할 인부들이 반발한다. 이거군.”
“네…….”
“흠.”
이스바르트의 보고를 들은 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내 반응에 뭔가 실수라도 한 줄 아는지 이스바르트는 목을 움츠렸다.
솔직히 내 반응은…….
‘놀랍네.’
2교대 근무야 내 기준에선 흔한 생각이다.
하지만 이스바르트는 아니다.
이 세계에 밤은 ‘달의 악신 셀렌’의 영향에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밤에 던전이나 갱도에서 일하는 건 위험한 짓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다.
비단 인식뿐만 아니라, 실제로 밤에 몬스터들은 더욱 강해진다.
때문에 발디그 던전도 밤엔 출입이 제한된다.
밤은 위험한 시간이다.
그게 상식인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 살면서 2교대 근무를 고안해 냈다.
어찌 보면 악랄하다고 해야 하나?
어떻게서든 최고의 효율로 인부들을 쥐어 짜낼 생각을 해낸 거니까.
‘확실히 머리가 좋긴 해.’
난 입꼬리를 스윽 올린 채로 이스바르트에게 말했다.
그녀가 머릴 써 줬으면, 난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야지.
“인부들을 모아라.”
“네? 그치만…….”
이스바르트는 내가 인부들에게 뭔 짓이라도 할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빨리.”
“네, 네엣!”
따로 설명하긴 귀찮아 윽박지르니 부리나케 인부들을 소집하러 달려 나갔다.
이내 광산 앞에 자리 잡은 공터로 인부들이 모여 들었다.
“고, 공자님 아니야?”
“그러게! 귀하신 분이 이런 누추한 곳에…….”
인부들은 난생처음 보는 귀족의 등장에 어안이 벙벙했다.
“…칫!”
개중엔 내 등장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이도 있었다.
머리가 깔끔하게 벗겨진 덩치 큰 남자다.
아마 광산의 재를 뒤집어쓰지 않았다면 얼굴이 비쳐 보일 정도로 머리가 반질반질한 녀석이다.
“저기…….”
이스바르트는 인부들에게 어렵사리 얘기를 꺼냈다.
“지,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작업 방식에 대해 공자님께서 말씀하실 게 있다십니다!”
이스바르트의 말에 인부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뭐?”
“그 있잖아. 밤에도 일시킨다던 거.”
“에잉! 밤에 위험해서 일을 어떻게 하나! 사람 죽을 일 있어?”
“그러게 말이야!”
인부들의 반응은 당연하다는 듯이 부정적이었다.
“흐흐.”
대머리 녀석은 그런 모습이 만족스러운 듯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크흠!”
“…….”
그때 내 헛기침 한 번에 인부들은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다들 귀족이란 자리에 무서워 입을 다물긴 했지만 눈빛엔 꺼려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새로운 작업 방식에 대해 불만이 있다고 들었다.”
“…….”
난 맨 앞에 선 남자를 콕 집어 물었다.
“거기 너. 어떤 이유에서 불만이 있는지 말해 봐라.”
“그, 그게…….”
“다그치려는 게 아니다. 이유를 듣고 싶을 뿐.”
“으응…….”
남자는 눈치를 살피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밤은 달의 악신 셀렌의 시간입니다요……. 그 시간에 갱도에 들어갔다가 몬스터라도 마주친다면 랭크도 변변찮은 저흰 모두 죽습니다요!”
역시 일반적으로 알려진 소문에 근거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상세하게 들어가면 허점이 있다.
“아니. 그건 편견이다. 몬스터가 생성되는 건 인적이 드물 때야. 계속 갱도에 사람이 드나들면 오히려 몬스터가 생성될 일이 없어진다.”
“그렇습니까요?”
내 말에 인부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웅성댔다.
그런데 그때, 대머리 녀석이 손을 들었다.
“뭐지.”
대머리는 날 똑바로 쳐다보며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만약에라도 몬스터가 생성되면 어쩝니까? 그랬다간 셀렌의 영향으로 강해져 더욱 상대하기 힘들 텐데요?”
“그렇습니다요!”
대머리의 말 한 마디에 다시금 인부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었다.
‘하. 저 대머리 X끼 저거.’
마음 같아선 머릴 찰지게 때려 주고 싶었다.
생긴 것도 라르크를 닮은 게 더 꼴 뵈기 싫었다.
“이봐, 이슬린.”
“네, 공자님.”
“저 대머리 자식, 뭐하는 놈이지?”
“음… 라르크의 조카 힐론입니다. 인부들 사이에선 우두머리로 인정되는 분위기 같군요.”
“그래서였군.”
하지만 라르크의 조카란 이유로 잘라 버릴 수는 없었다.
저놈을 자른다고 인부들 사이에서 용기가 샘솟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 반발이 더 강해질 가능성이 있다.
“아니. 몬스터가 생성 된다하더라도 생성 초기엔 오히려 약하다. 곡괭이로 한 번 찍으면 죽는 수준이지.”
“으으…….”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니 인부들은 누구 말이 맞는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이럴 땐 한 방에 이들을 설득할 만한 뭔갈 내놓아야 한다.
예를 들면.
거절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돈이라든가.
“하지만, 너희들이 불안해하는 건 이해한다.”
“네에…….”
적어도 마음이 동할 거라 장담했다.
현대인들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조건을 걸겠다.”
“조건이라굽쇼?”
“밤에 일하는 인부들에겐 통상 임금의 3할을 더해 주지.”
“사, 삼 할!”
겨우 30프로 더 준다는 말인데도 인부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힐론이란 녀석도 놀란 눈치다.
“그렇게나 많이요!?”
이스바르트도 놀라 허둥댔다.
‘너까지 놀라냐.’
솔직히 반응이 밍밍하면 50프로까지 부르려고 했는데.
나야 돈 아끼게 됐으니 좋긴 하다만.
“또한, 만에 하나, 아주 정말정말 재수 없는 악운이 겹치고 겹쳐서! 밤에 일하다 몬스터에게 당해 목숨을 잃게 된다면! 통상 임금의 삼백 배를 가족들에게 지급하겠다.”
내가 제시한 임금은 커다란 동요를 불러왔다.
“삼백 배!”
“공자님! 그건 좀…….”
이스바르트는 삼백 배라는 말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난 그녀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 만에 하나 밤에 몬스터가 나와 날뛴다면, 너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니 잘 관리해라. 알겠나?”
“…네! 공자님!”
이스바르트의 한쪽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내가 나서서 이만큼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는 건 그만큼 자신이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 그럼 전 하겠습니다요!”
“저도요!”
이쯤 되자 인부들은 오히려 밤에 일하고 싶다는 듯 눈이 반짝였다.
사실 통상 임금의 삼백 배라고 해 봐야 얼마 안 된다.
인부들의 하루 평균 임금은 3에서 4코퍼.
100코퍼가 1골드니 삼백 배라고 해 봐야 10골드 안팎이다.
이 세계의 노동 환경이 얼마나 열악한지 새삼스레 느껴졌다.
난 만족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거지 백작가이긴 해도 귀족 몸으로 태어난 게 다행이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