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콰아아앙!
연무장을 굳건히 지키고 있던 대문.
육중한 두께가 무색하게도 굉음 한 번에 대문은 과자 부스러지듯 파편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뿌연 연기가 자욱이 일어나고.
그 너머 문을 부순 괴한의 모습이 보였다.
넝마쪽을 두른 검은 흑발의 남자.
초라한 외견이었지만 다부진 몸집에서 나오는 기개가 남달랐다.
녀석을 보자마자 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올 게 왔구나.’
쾌검의 크로드.
주인공 디아를 수차례 사지로 내몰기도 했던 괴물 중에 괴물.
그가 드디어 머나먼 셀리버트 대숲림까지 똥개 훈련을 끝마치고 돌아왔다.
‘하. X팔. 생각보다 빨리 왔네.’
적어도 일주일은 더 걸릴 거라 예상했는데.
아마 내 면상을 하루라도 더 빨리 보고 싶어 부리나케 달려왔겠지.
과연 내가 녀석을 막을 수 있을까?
민망하지만 그건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프리아나?
아쉽게도 프리아나가 나선다 해도 역부족이다.
지난번 프리아나와 결투 때도 크로드는 적당히 봐줬다.
그때 녀석은 애검 파산검(破山劍)을 꺼내지도 않았다.
산조차도 부숴 버린다는 이름에 걸맞은 거대한 대검.
그걸 안 쓰고도 프리아나는 무참히 처발렸다.
“웬 놈이냐!”
프리아나는 얼른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크로드가 더 빨랐다.
쐐애액!
“커흑!”
크로드는 눈 깜짝 할 사이에 내게 달려들어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안… 임페라…….”
“…오랜만이네?”
“아주… 재밌는 장난을 쳤더군…….”
“크흐흐! 장난? 무슨 소리야? 난 약속을 어긴 적은 없는데!”
“이놈!”
잠깐 오간 대화는 프리아나의 개입으로 멈췄다.
프리아나는 얼른 오러를 극한으로 끌어올려 괴한을 향해 휘둘렀다.
적당히 오러를 아껴 가며 싸울 상대가 아니라는 걸 프리아나도 잘 알고 있었다.
카앙!
방금까지 내 멱살을 움켜쥐었던 녀석은 어느샌가 거대한 대검을 꺼내들어 이를 막아냈다.
나부끼는 흑발 너머로 밤하늘처럼 빛나는 대검.
그 끝엔 자신의 꼬릴 집어삼킨 용. 우로보로스가 자리잡고 있었다.
파산검.
저걸 실물로 보게 될 줄이야.
꿀꺽!
아쉽지만 감탄 할 타이밍은 아니다.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흐흐……. 더럽게 쎄네…….”
“이 자식! 감히 공자님께…….”
그제야 프리아나는 크로드와 눈이 마주쳤다.
크로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 당신은?”
“네놈은……. 그때 그 애송이 녀석이군.”
크로드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피식 나왔다.
검술 랭크 5를 보고 애송이라니.
‘그러고 보니 그때도 이런 말을 했지.’
속검의 기사 프리아나.
그와 검을 나눈 크로드는 이렇게 말했다. 아기 기저귀 갈아 주는 손길보다 더 가볍다고.
게다가 이번엔 애송이라며 비웃기까지.
기사라면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는 발언이다.
프리아나의 눈살이 매섭게 찌푸려졌다.
“아무리 당신이어도 그 발언은 용납 못 합니다!”
프리아나는 크로드와의 결투로 새로운 벽을 느꼈다.
세 번째 벽.
크로드라면 자신의 벽을 뚫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내게 왔고, 이러저러한 일을 거쳐 내 밑에서 일하게 됐다.
왕가의 기사란 호칭조차 버렸다.
그런데 이런 말이나 듣다니, 충분히 화가 날 법했다.
‘오히려 좋아.’
애초에 크로드 성격상 화기애애한 사제지간은 못 됐을 거다.
분노.
분노란 감정은 나쁜 게 아니다.
누군가에겐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니까.
세 번째 벽을 마주한 젊은 기사에겐 특히나.
“공자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저자는 분명 당신을 따르는…….”
“뭐… 설명하자면 길어.”
“그런……!”
“한 가지 확실한 건. 저렇게 길길이 날뛰곤 있어도 쟤는 날 못 죽여.”
“예?”
내 말에 크로드도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하! 과연 그런지 확인해 보고 싶나?”
“확인하고 자시고가 있나? 유물을 활성화하는 방법을 아는 건 나뿐인데? 온 대륙을 통틀어도.”
그리곤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한마디 덧붙였다.
“아니면 ‘그놈’한테 가서 물어보지 그래? 유물을 그 상태로 만든 작자한테!”
“…이놈이!”
크로드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오러를 내뿜었다.
마치 파도와 같은 오러의 빛줄기가 파산검에서 터져 나왔다.
파산검이란 이름은 허세가 아니다.
저걸로 내려치면 진짜로 산이 날아갈 거다.
내 몸뚱이라면 산산조각 날 테고.
“다시 한번 말하지. 난 약속을 지켰다! 정 억울하면 새로운 계약이라도 새로 맺든지?”
“…….”
내 말이 맞긴 했다.
녀석은 임페라 가문을 대신에 결투 재판에 나서 줬다.
그리고 난 그 대가로 기사단의 유물이 어디 숨겨져 있는지 알 려줬다.
그게 끝이다. 화야 좀 나긴 하겠지만.
“네놈 말이 맞다.”
“그렇지?”
“하지만.”
녀석은 여전히 오러를 풀풀 풍긴 채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좀처럼 화가 풀리질 않는군. 팔이라도 하나 잡아 뜯어야 기분이 풀리겠어.”
“…으응?”
‘…화가 생각보다 많이 났네?’
크로드는 내 말만 믿고 한 달이나 걸려 셀리버트 대숲림으로 갔다.
거기만 가면 기사단의 유물을 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들떴을 거다.
그런데 그 모든 게 헛수고였다. 다시 한 달간 분노를 곱씹으며 내게 달려왔으니, 화가 이만저만 난 게 아니겠지.
오금이 저려 왔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한번 싸우긴 했어야 했다.
“아무튼 프리아나, 복잡한 건 제쳐 두고. 그토록 기다려 왔던 싸움 아닌가? 크로드와 싸우고 싶다 하지 않았나?”
“그, 그렇습니다!”
“그럼 딱 됐네. 저놈은 날 쥐어 패고 싶어 미칠 지경이고, 넌 날 호위하는 기사지 않나?”
“…그렇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프리아나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검을 고쳐 잡았다.
“일단 저 녀석 화가 풀릴 때까지만 장단 맞춰 주자고.”
“명 받들겠습니다!”
프리아나를 따라 용린검에 오러를 불어넣었다.
‘성능 테스트치곤 좀 빡세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오러?”
크로드는 날 보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기야 크로드가 셀리버트 대숲림으로 갈 때만 해도 난 랭크 2였다.
크로드 입장에선 벌레나 다름없던 놈이 랭크 3도 모자라 첫 번째 벽까지 허물었다.
‘그래 봐야 저놈한텐 지렁이에서 풍뎅이 수준으로 올라간 수준이겠지.’
그렇다고 무력하게 처맞고만 있진 않을 거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댄다고!”
용린검에 오러를 담은 채로 놈에게 돌진했다.
가만히 얻어터질 바에야 검이라도 한두 번 섞어야지.
“크크…….”
“웃어?”
크로드는 달려드는 날 보곤 오히려 조소를 띄웠다.
“오히려 잘 됐군. 오러를 띄울 경지까지 오르다니. 몇 대 맞는 걸론 죽지도 않을 테니.”
“으응?”
순간, 크로드의 입가에 어려 있던 미소가 싹 가셨다.
그와 동시에 파산검이 내 머릴 향해 내리찍혔다.
후웅!
이걸 그대로 맞으면 무조건 죽는다.
반사적으로 용린검을 치켜들었다.
…우직!
와. 이건 소리 자체가 다르네.
파산검을 한 번 막으려 한 것만으로 온몸의 관절이 비명을 내질렀다.
동시에 랭크 차이로 인한 후폭풍이 몰려왔다.
“크허억!”
배 속에 용암이 날뛰는 기분이다.
내장이 뒤틀리고 전신의 근육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소설 속 설정을 생각해 보면, 생각보단 버틸 만했다.
이제 막 첫 번째 벽을 뚫은 초짜와 세 번째 벽까지 뚫은 괴물의 싸움.
일합을 나누고 뭣도 없다.
랭크 차이로 내장이 터져 죽어 버릴 테니까.
지금은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죽을똥 말똥하면서도 죽진 않는. 딱 그 정도라 해야 되나?
이 모든 게 용린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으으윽!”
“…호오?”
“공자님!”
이어서 프리아나의 협공이 들어왔다.
프리아나도 속도라면 자신 있는 인물이다.
순식간에 수차례의 검격이 크로드를 향해 쏟아졌다.
“흥.”
크로드는 입술을 이죽거리며 이를 막아 냈다.
순식간에 나뉜 검격에 사방으로 불똥이 매섭게 튀었다.
“…전보다 조금은 강해졌군.”
“…그렇습니까?”
“하지만 아직도 약하다. 한참이나.”
이번엔 크로드의 차례였다.
옛 결투 재판 때가 떠올랐다.
무참히 짓밟힌 프리아나와 자비를 베풀어 목숨만은 살려 준 크로드.
그만큼 둘의 차이는 극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미묘하게 달랐다.
콰콰콰콰!
파도처럼 쏟아지는 검격.
매섭게 휘몰아치는 파도에도 프리아나는 차근차근 이를 받아 냈다.
파도 틈에서도 뒤집히지 않고 간신히 버텨 내면서도 결코 전복되지 않는 노련한 손놀림이었다.
“…크윽!”
하지만 한계는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수 합을 받아 낸 프리아나였지만 랭크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점차 프리아나의 움직임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둘의 싸움이 한창이던 그때, 바닥에서 얼음 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콰직!
왼손을 바닥을 타고 튀어나온 얼음기둥.
아이스 블레이드.
크로드는 싸움을 잠시 멈추고 한쪽 주먹으로 이를 박살 냈다.
“…….”
크로드는 주윌 두리번거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이건 마법 랭크 4부터 가능한 마법이다.
크로드도 이를 잘 아는지 아이스 블레이드를 보곤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때? 또 놀랐어?”
“이놈이……!”
“한눈 팔지 마십쇼!”
이건 정정당당한 일대일 싸움이 아니다.
랭크 차이가 있는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콰앙!
짧은 틈을 노리고 프리아나가 다시 공격을 이어 갔다.
그러다 프리아나가 조금 밀리는가 싶으면, 여지없이 내가 끼어들어 훼방을 놨다.
“공자님! 지금입니다!”
“오케이!”
프리아나가 있는 힘껏 크로드의 대검을 밀쳐 냈다.
그런 프리아나의 입가에 핏물이 배어 나왔다.
혼신의 힘을 담아 만든 틈이다.
이를 놓칠 순 없었다.
용린검에 내재된 한 가지 권능.
개화.
지금껏 담아온 오러를 한순간에 폭발시키는 스킬.
‘랭킹빨로 세계정복!’의 세계관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좋은 스킬이다.
단 일 합에 그치긴 하지만, 일순간 랭크를 뛰어넘는 오러가 펼쳐지니까.
보통 충전시키려면 며칠 걸리긴 했지만, 이번엔 다르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쾌검의 크로드와 검을 나눴다.
고작 몇 번 합이 오간 것만으로 용린검의 오러가 상당 부분 채워져 있었다.
“하아압!”
용린검의 막힌 혈을 뚫듯 담겨 있던 오러를 폭발시켰다.
콰콰콰콰!
용린검에서 터져 나온 오러가 크로드의 몸을 집어삼킬 기세로 덮쳤다.
아주 짧은 순간, 크로드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거 설마 이기나?’
라는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쏟아지던 오러를 향해 크로드가 손을 내질렀다.
그리고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쩌억!
“으응?”
매서운 기세로 뻗어 나가던 오러는 크로드의 손에 허무하게 막혔다.
오히려 녀석은 이를 쇠가죽 잡아 뜯듯이 잡아당겼다.
그러자 용린검의 오러가 한순간에 찢겨져 나가며 연기처럼 사라졌다.
‘미친! 오러를 손으로 찢어?’
검으로 막은 것도 아니고 손에 오러를 둘러서 직접 찢어발기다니.
놀랄 틈도 없이 녀석의 주위로 오러가 폭발했다.
파아앗!
오러는 번개가 내리치듯 주윌 향해 엄청난 속도로 퍼져 나갔다.
이는 나와 프리아나, 둘을 향해 있었다.
본능적으로 이를 피해야 한다 생각했지만, 피하기엔 너무나도 빨라 불가능했다..
파지지직!
“끄아아악!”
“아아아악!”
오러에 닿자마자 전신에 짜릿한 격통이 퍼져 나갔다.
나뿐만 아니라 프리아나까지 한순간의 공격에 그대로 쓰러졌다.
손가락 하나 까닥 못할 마비까지 온 건 덤.
그 동안의 사투가 무색하게 기술 한 방으로 둘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 기술까지 쓰게 하다니…….”
크로드는 대검을 다시 등에 맸다.
이미 싸움은 끝났다.
다굴 치면 어찌어찌 이기나 했는데, 역시 랭크 6은 괴물이라 이건가.
콰악!
“윽!”
크로드의 손아귀가 다시 내 멱살을 움켜잡았다.
“날 놀린 대가는 치러야겠지?”
“아하하……. 미안하게 됐어. 그땐 워낙에 급해서 말이야.”
“하. 사과라도 하겠다는 건가.”
“사과하면 받아 줄 거야?”
“그럴 리가.”
“크흐흐……. 역시 그렇지?”
크로드의 손 주위로 푸른 오러가 휘몰아쳤다.
녀석은 오러가 깃든 손을 내 얼굴로 가까이 했다.
“네놈 말대로라면 기사단의 유물을 활성화하는 방법은 너밖에 모르겠지. 그러니 혀가 아닌 눈을 가져가 주마.”
말장난 좀 쳤다고 눈을 뽑겠다니, 그건 좀 심한 거 아닌가?
하지만 난 녀석에게 자비를 구하지는 않았다.
크로드 같은 녀석들에게 흔히들 하는 실수가 그거다.
녀석은 자신에게 자비를 구하는 자들을 숱하게 봐 왔다.
그런 놈들한테는 자비를 구할 바엔 오히려 세게 나가야 된다.
“…그래! 뽑아라!”
“…….”
크로드의 손이 우뚝 멈춰 섰다.
하지만 여전히 손은 내 눈앞에 댄 채였다.
“대신 한 가지 명심해. 내 몸에 손끝 하나라도 댔다간 혀 깨물고 죽어 버릴 거다.”
“…….”
“내가 아니라 다른 주변인한테 손을 대도 마찬가지야.”
강인했던 크로드의 눈빛이 약하게 흔들렸다.
“미안하지만 랭크 좀 높다고 해서 무조건 우위에 있는 건 아니라구? 내가 죽어 버리면 유물의 봉인은 평생 풀지 못할걸?”
“…이 X끼가!”
크로드는 입에선 욕지거릴 내뱉었지만 낯빛에선 고민하는 게 느껴졌다.
뿌득!
이빨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한 번 났다.
그리고 나서야 크로드는 내 멱살을 붙잡았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원하는 게 뭐지?”
‘후! 십 년 감수했네.’
난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일단 이 손부터 좀 놓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