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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49화 (49/222)

49화

‘아니지. 그 녀석이 여기 있을 리가.’

소설 속 캐릭터 하날 떠올린 난 이내 고갤 가로저었다.

그 여자가 지금 여기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뭐니뭐니 해도 눈앞의 녀석과는 성격 차이가 컸다.

날 앞에 두고 오들오들 떠는 모습은 도저히 그 녀석을 떠올리기 힘들었다.

“이스바르트라는 아이입니다. 예전에 한 번 신세를 진 적이 있어 이렇게 자릴 마련했습니다.”

이슬린은 떨고 있는 그녀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보시기에 만족스럽지 못할지 몰라도. 제법 영리한 친구입니다.”

“흠.”

분명 이스바르트는 처음 듣는 이름이다.

하지만 왠지 가슴속에서 혹시나 하는 생각이 커져만 갔다.

“몇 살이지?”

“…열아홉입니다.”

“…성별은?”

“여, 여자입니다.”

“흠.”

다소 밍숭맹숭한 반응을 보자 이슬린이 대신 말하려 들었다.

난 손을 들어 그런 그녀를 막아섰다.

“가만히 있어 봐라.”

“앗……. 알겠습니다.”

나이도 내가 알던 캐릭터와 얼추 비슷했다.

분명 말도 안 되는 이야긴데, 왜 자꾸 소설에 나오는 그 미친 여자가 떠오르는 걸까?

“…이스바르트.”

“네에……. 공자님.”

이스바르트는 개미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성은 뭐지?”

“…네?”

내 물음에 정곡을 찔리기라도 한 듯 토끼눈을 떴다.

“어느 가문 출신인지 물었다. 혹여나 거짓을 말하면 그 즉시 목을 베어 버릴 테니 신중히 대답해라.”

“그, 그게…….”

“네? 공자님. 이 친구는 평민 출신입니다. 가문이라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설마?”

이슬린은 놀란 얼굴로 이스바르트를 쳐다봤다.

이스바르트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벌벌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왜 말을 못하지?”

여기서 한 번 목소리를 높이자 녀석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볼턴 가문이옵니다.”

“보, 볼턴?”

이스바르트의 성을 듣자 이슬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볼턴!

‘소설에 나오던 그 악마 같은 여자가 맞았어!’

볼턴이란 이름을 듣자마자 그게 뭘 의미하는지 떠올랐다.

그나저나 볼턴이라니.

그 여자가 왜 여기에 있지? 하지만 소설 속에선 이런 캐릭터가 아니었을 텐데.

‘뭐랄까……. 좀 더 지독한 스타일이었지?’

볼턴이란 성은 이안의 기억에도 남아 있는 가문이다.

카잔 황제의 편에 붙었다가 숙청당하는 가문으로.

다른 이들은 모두 처형당하고, 어린 소녀만이 운 좋게 살아남았다는게 이안의 머릿속에 남은 기억이었다.

볼턴은 제 성을 숨긴 채 이스바르트란 이름으로 살아온 거다.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은 족쇄나 다름없으니까. 그것도 황제의 편에 붙었다 숙청된 가문이라면.

게다가 소설의 줄거릴 아는 내겐 더욱 놀라웠다.

볼턴이란 녀석은 소설에서도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하던 여자니까.

좋은 쪽으로 등장하는 건 아니다.

소설에 나오던 볼턴은 황제의 복원을 꿈꾸려던 녀석들 중 하나였다.

뱀의 머리 볼턴.

크로드가 황제파 잔당의 검이라면, 볼턴은 두뇌 쪽이다.

왕국 연합 간에 균열을 만들고, 수많은 영지의 체제를 전복시킨 천재 중에 천재.

그녀가 세운 계책으로 황제파 잔당이 강성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볼턴에 비하면 크로드는 천사 수준이다.

크로드는 옛 주인을 향한 충성심 때문에 황제파에 가담했다지만, 볼턴의 경우엔 좀 다르다.

귀족들을 향한 끝없는 분노와 원한.

그게 볼턴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볼턴의 얼굴 반쪽엔 화상 흉터가 있는 걸로 묘사된다.

어렸을 적 악랄한 귀족에게 트집 잡히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다.

‘펄펄 끓는 찻주전자를 얼굴에 집어 던졌다지.’

그때까지만 해도 귀족 전체를 증오하진 않았다.

하지만 사랑하던 연인이 귀족 손에 죽고, 후에 볼턴이란 이름 때문에 흑마법사로 몰려 화형까지 당한다.

그녀의 사업장을 노린 귀족들이 꾸민 계략이었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때마침 근처를 지나던 크로드에게 구원 받는다.

그 뒤로 볼턴은 귀족이라 하면 치를 떨 정도로 지독한 여자로 변한다.

‘적어도 십 년은 뒤의 일이지만.’

녀석이 위험한 인물이란건 변함 없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자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그녀가 황제파 잔당에 들어가는 건 한참이나 지나서니까.

“소, 속이려고 한 건 아닙니다! 그저……. 이 이름이면 다들 절 피해서…….”

“공자님…….”

이슬린은 그제야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볼턴은 황제파에 가담했다가 숙청당한 가문이다.

아무리 내가 신분을 따지지 않는다 해도 역적 가문은 논외라 생각하는 듯 했다.

“죄송합니다…….”

이스바르트는 고갤 푹 숙인 채 눈물을 글썽거렸다.

“볼턴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였군.”

“네…….”

“괜찮으시겠습니까?”

옆에 서 있던 프리아나가 검집에 손을 올렸다.

프리아나는 준남작 출신에다가 한때는 국왕을 섬긴 인물이기도 했다.

개인적인 심성과는 별개로 볼턴 가문을 곱게 볼 수는 없었다.

“괜찮다. 얌전히 엎드려 있는 걸 보니 다른 마음을 품은 건 아니겠지.”

“으음…….”

“까짓거 내 목숨을 노리기라도 한다면 네가 막아 주면 되지 않나? 어려운가?”

“아, 아닙니다! 목숨을 바쳐 공자님을 지키겠습니다!”

“후후. 그래.”

프리아나는 이스바르트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말뿐만 아니라 뼈만 앙상한 이스바르트의 등이 진짜로 뚫릴 것 같았다.

매서운 기세에 이스바르트는 잔뜩 더 쫄아 가지곤 울상을 지었다.

“흐윽…….”

제일 가시방석인 건 이슬린이었다.

엔델로 광산 관리자로 추천한 건 그녀다.

그런데 몰락한 역적 가문을 데리고 왔으니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닐 거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제가 그만 실수를……. 이자는 그만 돌려보내도록…….”

“아니. 네가 추천한 친군데. 쓸 만하겠지. 안 그런가?”

“…네?”

“지난번에 말했을 텐데. 머리가 좋고 내 뒤통수만 안 칠 녀석이면 괜찮다고.”

“…그러셨죠.”

“그러니 간단한 시험을 해 봐야겠다.”

난 턱을 괸 채로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이스바르트. 그게 본명인가?”

“네……. 이스바르트 볼턴. 그게 제 이름입니다…….”

“문제를 하나 내겠다. 맞추면 그에 합당한 보상이 있을 것이고. 아니면 벌이 내려질 것이다.”

“으으……. 알겠습니다…….”

“이걸 봐라.”

난 미리 준비해 뒀던 서류 뭉치를 꺼내 들었다.

이스바르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류 뭉치를 받아 들었다.

내용은 저번 주, 베네르 저택에서 일어난 혈전에 관한 내용이었다.

베네르 백작은 나와의 전투로 심장이 꿰뚫려 죽었고, 그의 집사 아르베르토는 등 뒤에서 내가 찔러 죽였단 내용이었다.

‘새빨간 거짓말이지.’

아르베르토를 죽인 건 그의 주인 베네르 백작이다.

하지만 왕국 법관들은 내가 죽인 걸로 대충 마무리 짓고 끝냈다.

사건의 중심에서 벗어난 내용이기도 하고, 어차피 대외적으론 자기네들끼리 싸우다 죽은 거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거다.

베네르 백작이 살기 위해 충직한 신하를 한순간에 죽여 버렸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이 녀석도 그걸 알아차릴 수 있을까?

난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이스바르트를 바라봤다.

이스바르트는 숨죽인 채 서류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서류를 읽기 시작하자 벌벌 떨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서류에 집중했다.

‘호오.’

그 모습을 나뿐만 아니라 이슬린도 신기하게 바라봤다.

프리아나는 여전히 검집에 손을 올린 채였다.

“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바르트는 서류 뭉치를 내려놓았다.

“내가 낸 문제가 뭔지 알겠나?”

“…네.”

아직 문제를 내지도 않았다.

뭔 소린지 감도 못 잡는가 싶으면 ‘이 서류에서 오류를 발견해라.’라고 귀띔이라도 해 줄라 했는데.

난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 문제가 뭐라 생각하지?”

“이 내용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어떤 점이?”

이스바르트는 호흡을 한 번 가다듬었다.

그리곤 가리지 않은 한쪽 눈으로 날 또렷이 응시한 채로 말을 이어 나갔다.

“우선……. 아르베르토라는 분은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 매사에 의심이 많아 함부로 일을 그르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여기선 그분이 등 뒤에서 공격을 당했다 적혀 있습니다. 그것도 짧은 단검으로요. 공자님께서 쓰시는 검과는 길이 자체가 다릅니다.

기습을 당한 게 진실이라면 정말 예상치도 못한 이의 기습에 당한 것 같습니다. 현격한 랭크 차이를 가진 사람이라면 기습은 안 할 테니까요.”

“호오.”

“이분을 죽인 건 공자님이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그럼 누구지?”

“베네르 백작. 아마 흡성의 단검 같은 걸로 일순간 마나량 상승을 노린 게 아닐까 합니다.”

‘히야!’

솔직히 놀랐다.

실제 현장을 본 것도 아니고, 그저 글 몇 줄 읽은 것만으로 진실을 파악하는 통찰력이라니.

‘확실히 머리가 좋긴 하네.’

난 잠시 아무 말 없이 이스바르트와 눈을 마주쳤다.

“…….”

나와 눈을 마주하던 이스바르트는 황급히 다시 고갤 아래로 처박았다.

방금 그걸로 녀석의 재능은 확인했다.

분명 내 사람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거다.

하지만 이 여자를 내가 써도 되는 걸까?

소설에 따르면 최악의 적이 되는 캐릭터를?

“네 말이 맞다. 아르베르토를 죽인 건 베네르 백작이었지. 흡성의 단검으로 말이야. 그래 봤자 나한텐 한참이나 부족했지만.”

“…….”

“이슬린이 말한 대로 머리가 좋군.”

“과, 과찬이시옵니다.”

“한 가지만 묻지.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인가?”

“네? 그건…….”

이스바르트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다시 제 본업으로 가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본업이라. 무슨 일을 하지?”

“…용병 길드에서 회계 장부를 조금 다룹니다.”

“흐음. 회계 장부라.”

이스바르트는 영문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난 이슬린을 흘긋 바라봤다.

녀석은 내 의중을 대강 알아차렸는지 표정이 밝아졌다.

“고, 공자님. 굉장히 실례되는 말씀입니다만, 왜 그런 걸 제게 묻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난 대답 대신 씨익 하고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이스바르트를 보낸다면 용병 길드의 회계 관리인으로만 살진 않을 거다.

세상의 더러운 일도 겪어 보고, 귀족들의 횡포에 눈물 글썽이는 일도 생긴다.

숙청당한 볼턴 가문의 성은 평생 동안 그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결국엔 귀족들에게 흑마법사로 몰려 또다시 몰락하게 된다.

그러다 황제파 잔당을 만나, 옛 볼턴 가문의 이야길 들려주겠지.

그 뒤론 소설의 줄거리대로 가게 된다.

볼턴은 황제파 잔당에서 왕국 연합을 위협하는 뱀의 머리가 된다.

하지만 내가 녀석을 포섭한다면? 왕국 연합을 위협할 두뇌가 날 위해 일한다면?

그만큼 든든한 전력은 또 없을 거다.

“이스바르트 볼턴.”

“예. 공자님.”

“내 밑에서 일해 볼 생각 없나?”

“…네?”

“아르베르토는 섬길 주인을 잘못 골랐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넌 어쩔 생각이지?”

“…….”

“너도 잘못된 주인을 섬길 건가? 아니면, 아예 주인도 없이 하루하루 입에 풀칠만 하고 살 생각인가?”

“그건…….”

“마침 엔델로 광산 관리인 자리가 비었다. 용병 길드의 회계 장부만 만지작거릴지, 아님 광산 하날 관리할지. 생각해 봐라.”

“하지만… 대체 왜 저 같은걸?”

“문제를 맞췄으니 주는 상이다. 날 섬길 기회를 주지.”

“조금 생각해 볼 시간을 주신다면…….”

“아니. 난 성격이 급하다. 지금 당장 말하도록.”

“으으…….”

이스바르트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난 겉으론 태연한 척 미소를 띠우면서 속으론 애가 탔다.

‘너무 세게 말했나?’

차라리 살살 꼬셔 볼 걸 그랬나?

아니다.

소설에서 묘사된 이스바르트는 매사에 신중했다.

신중한 선택으로 박멸되다시피 한 황제파 잔당을 강성하게 만들었다.

그런 그에게도 약점이 하나 있었으니, 지금처럼 생각할 시간을 안 주고 몰아붙이는 거다.

그럴 때마다 남의 강요에 어물쩡 넘어가 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식은땀 한 방울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려던 그때.

마침내 이스바르트가 입을 열었다.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공자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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