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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48화 (48/222)

48화

“다들 모였군.”

“예, 예엣! 공자님!”

고급스런 가구로 꾸며진 알현실.

기다란 탁자를 놓고 제복을 갖춰 입은 사람들이 뻣뻣하게 앉아 있다.

탁자의 맨 끝에 앉은 난 턱을 괸 채로 이들을 쳐다봤다.

누군 똥 씹은 얼굴로, 누군 창백한 낯빛을 띄고 있었다.

‘어마어마 하구만. 제대로 된 백작이 쓰는 저택이라는 건.’

지금 여긴 과거 베네르 백작이 쓰던 저택이다.

하지만 베네르는 죽었다.

이제 이 땅의 주인은 나. 이안 임페라다.

옛 임페라 저택은 멀기도 하고,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에 반해 베네르 백작 저택은 호화스러움 그 자체.

벽엔 각종 화려한 장신구와 아티팩트들이 걸려 있었다.

이런 저택을 비워 두기도 뭐해 그냥 여기 눌러앉기로 했다.

‘산맥 너머는 에이먼이 알아서 잘 관리해 줄 테고, 난 새로 늘어난 영지만 관리하면 된다.’

베네르 백작령을 흡수하고 며칠이 지났다.

이제 소란은 어느 정도 잠잠해졌으니, 내실을 다질 때다.

더욱 커진 영지를 다스리기 위해선 인재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안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왕국 전역에 소문이 자자한 망나니 새끼였다.

그런 녀석한테 인재가 모일 리도 없고.

소문이야 차차 바뀌기야 하겠지만, 영지를 돌리기 위해선 선택을 하나 해야 했다.

‘당분간은 베네르 백작을 따르던 놈들을 써야겠지.’

영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저들도 다 위에서 시키니까 한 거지 악랄한 마음을 품고 그러진 않았을 테니까.

게다가 상대는 이안 임페라.

술과 도박에 절어 사람이나 패고 다니던 한량 중에 한량.

객관적으로 놓고 봐도 임페라를 따르는 것보단 베네르 가문을 섬기는 게 정상이다.

‘그렇다고 다 받아 줄 순 없다.’

속아내야 할 놈들은 철저히 솎아 낸다.

날 위해 충성을 바칠 놈들만 남긴다. 그 이유가 날 향한 선망이건, 공포건 상관없이.

“프리아나.”

“네. 공자님.”

자리엔 프리아나도 함께 있었다.

베네르를 따르던 놈들도 프리아나가 누군진 알 거다. 결투 재판에 베네르를 위해 일했기도 했고.

크라니그 산맥을 넘으려던 병사를 홀로 막아 낸 인물이기도 하니까.

“당분간 위병대장 일도 맡아라. 내 호위기사는 오후에만 하도록 하고.”

“네. 명 받들겠습니다.”

지금은 혼란스런 시기다.

옛 주인이 죽고 새로운 주인이 자릴 꿰찼다.

그런 시기엔 치안 공백을 노리고 도적들이 들끓기 마련이다.

프리아나가 치안을 담당해 준다면 도적들도 함부로 날뛰지 못할 거다.

“그리고.”

난 턱을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른 관료들을 훑었다.

다들 내 눈을 피하며 눈칠 살피기 바빴다.

“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귀족 취급도 안 해 주던 놈들이 이렇게 나오다니.

이래서 사람은 힘이 세야 한다니까.

“…흥!”

그런데 한 녀석이 콧방귀를 꼈다.

“호오?”

엔델로 광산을 관리하는 라르크라는 녀석이다.

과거 엔델로 광산뿐만 아니라 발디그 던전까지 관리를 도맡아 했다.

하지만 결투 재판에서 패배하고 난 후로 일을 빼앗긴 녀석이기도 했다.

“뭐가 불만이지? 라르크?”

“흥! 운 좋게 영지를 받았을 뿐인 주제에! 뭐라도 된양 으스대는 꼴을 보고 어찌 화가 안 나겠나!”

라르크의 발언에 관료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른 것도 아니고 면전에서 저딴 말을 내뱉는다니.

이를 본 프리아나가 검집에 손을 올렸다.

관료들은 나와 라크르, 프리아나를 번갈아 보며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난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생각했다.

‘오히려 좋아.’

내가 검술 랭크 4에 오르긴 했지만, 프리아나의 후광에 가려져 활약이 덜 돋보이는 경향이 있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놈들에게 보여 주는 편이 나았다.

저들이 섬기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이다.

난 프리아나에게 작게 속삭였다.

“가만히 있어라. 프리아나.”

“…네. 공자님.”

“이,이보게 라르크! 지금 무슨 짓인겐가! 실성이라도 했나!”

“실성? 실성이야 네놈들이 했지! 베네르 백작님께 충성을 바쳤던 놈들이 이제 와서 입을 닦는다니!”

“아앗…….”

“됐다.”

“고, 공자님…….”

“아무래도 불만이 많겠지. 베네르 백작 밑 닦아 줄 때만 해도 떵떵거리면서 살았는데. 이젠 그러지 못할 테니까 말이야. 게다가 발디그 던전을 뺏은 놈을 섬기라니? 화가 날 법도 해.”

난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뽑아 들었다.

라르크는 잠시 움찔했다가 더 큰소리로 소리쳤다.

“흥! 이젠 무기도 없는 자를 상대로 검을 휘두르겠다는 건가?”

“아니, 그러면 쓰나.”

챙그랑!

용린검을 라르크의 앞에 집어 던졌다.

“…이게 무슨 짓이지?”

“검을 들어라. 내게 불만이 있으면.”

“으음…….”

라르크는 프리아나를 슬쩍 살폈다.

하지만 프리아나는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할 뿐이었다.

라르크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결투라도 하자는 건가?”

“그래. 뭐 아예 무기도 없이 싸울 순 없긴 하니까…….”

그러면서 탁자에 놓여 있던 자그마한 손칼을 집었다.

편지지 열 때나 쓰는 날도 없는 조악한 칼이다.

“이거면 충분하겠군.”

이를 본 라르크는 이마 핏줄이 불룩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용병 출신이었다 했지.’

“이 자식이!”

라르크는 용린검을 주워 들곤 내게 달려들었다.

녀석의 검엔 미약하게나마 오러가 깃들어 있었다.

평범한 귀족이었다면 녀석이 이겼겠지만.

미안하지만 난 아니다.

카앙!

손칼로 녀석의 검을 튕겨 냈다.

그리곤 얼른 반대편 주먹으로 턱주가릴 날렸다.

빠아악!

“어억!”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놈의 팔을 잡아 비틀었다.

그대로 놈의 뒤통수를 낚아채 아래로 내리꽂았다.

콰아앙!

눈 깜짝할 사이에 녀석은 대가릴 탁자에 처박힌 채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츠츠츠츠!

손칼에 오러를 불어넣자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곤 손칼로 라르크의 왼쪽 손을 향해 사정없이 내려찍었다.

파각!

“아아악!”

룬 문양이 새겨진 손 위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이대로 칼날을 조금만 비틀면 손이 떨어져 나간다.

신에게 버림 받은 자. 블랭크가 되는 거다.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공자님! 제발 블랭크만은!”

방금까지 깝치던 라르크는 벌벌 떨며 애원했다.

난 조소를 흘리며 손칼을 조금씩 비틀었다.

새빨간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아, 아아아악! 안 돼! 사, 살려 줘!”

“…살려 달라니? 내가 네놈을 죽이려 했다면 목을 찔렀겠지.”

퍼석!

녀석의 왼손을 자르다 말고 손칼을 뽑아냈다.

라르크의 왼손은 너덜너덜해지긴 했지만 아직 멀쩡히 달려 있었다.

이대로 적당히 치료만 하면 블랭크는 면할 거다.

“끌고 가라.”

“옛!”

위병들은 라르크를 끌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

적당히 치료를 마치면 본보기용으로 감옥에 처박아 둘 거다.

난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자. 엔델로 광산이 공석이 돼 버렸군. 지원하는 사람 있나?”

방금 싸움을 봐서 그런지 관료들은 다들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었다.

난 어깰 으쓱하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없으면 그건 나중에 뽑지.”

“네, 네에…….”

“아, 그리고. 언제든 내가 맘에 들지 않는다면 도전하도록. 물론 그땐 방금 그 친구처럼 적당히 봐주는 선에서 그치진 않을 거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공자님!”

* * *

‘이쯤이면 됐겠지?’

라르크 녀석이 나서 준 덕분에 일이 쉽게 풀렸다.

이를 본 관료들도 이제 내게 함부로 나서진 못할 거다.

편한 마음으로 푹신한 침대에 몸을 던졌다.

확실히 제대로 된 귀족집은 다르긴 달랐다.

임페라 저택에 비하면 구름에 몸을 맡긴 기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에이먼은 크라니그 산맥 너머에 있으니 사실상 이 땅 주인은 나 혼자다.

“흠…….”

문제는 광산 관리를 이제 누가 하느냐는 건데.

“공자님.”

“아. 이슬린.”

고민에 빠져 있던 그때 이슬린이 고개를 숙이며 다가왔다.

이슬린도 프리아나와 함께 새로운 영지로 넘어왔다.

‘일레느는 잘 있으려나.’

당분간 따로 지낸다 하니 눈물까지 글썽이던 게 기억난다.

나중에 정리가 끝나면 에이먼과 함께 이쪽으로 오기야 하겠지만, 그때까지 옛 저택을 관리해야 하긴 하니까.

“전에 맡기신 일 잘 마무리됐습니다.”

“보석이랑 마검 말인가?”

“네. 보석은 모두 제 값을 받고 팔았습니다. 몇 개는 요즘 매물이 뜸한 것들이라 웃돈까지 받았구요.”

“잘했어.”

뿌리 거인의 굴에서 구한 보석은 모두 이슬린에게 맡겼다.

지금이야 이렇게 메이드복 차림으로 돌아다니지만, 도적 클랜 하나를 운영하는 여자다.

그런 사람에게 보석 몇 개 팔아 치우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런데 대체 어디서 이런 보석들을 구해 오신 겁니까?”

“그냥……. 오다 주웠다.”

“후후, 운이 좋으시군요.”

자세히 말하면 귀찮을 것 같아 대충 얼버무렸다.

이슬린도 내 맘을 아는지 더 이상 물어보진 않았다.

“그래서 얼마지?”

“총 이천삼백 골드입니다.”

“으음……. 많기는 한데 한참이나 부족하군.”

황금 은행에 진 빚은 총 만 이천 골드.

아직 갈 길이 멀다.

“이것만 해도 놀라운 겁니다. 영지 수입 몇 배를 하루아침에 구해 오시다니.”

“후후.”

이슬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날 띄워 줬다.

예의상 하는 말이겠지만 기분은 좋았다.

“아, 그리고 말이야.”

“네, 공자님. 말씀하세요.”

“라르크 녀석이 관리하던 엔델로 광산. 누구한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나?”

“음…….”

이슬린도 도적 클랜의 마스터니 이래저래 발이 넓을 거다.

나 혼자 고민 할 바엔 그녀에게 조언을 구하는 게 낫겠지.

“먼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지?”

“특별히 원하는 사람 같은 게 있으신가요?”

“원하는 거라…….”

이슬린이 말하는 게 뭘 의미하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난 뭐가 됐건 귀족이다.

으레 귀족들이 그렇듯 신분이 낮은 자들과는 상종하지 않는 게 정상.

‘신분 같은 걸 따질 생각이냐. 이거군.’

하지만 난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다.

“머리 좋고 뒤통수 안 칠 놈이면 된다. 다른 건 상관없어.”

이슬린은 내 말에 싱긋 미소 지었다.

“후후, 역시 그러셨군요. 그럼 소개시켜 드리고 싶은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이라.”

“예. 원하신다면 지금 바로 데리고 올 수도 있습니다.”

“호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돈 나오는 구멍을 막아 둔 채로 있어서 좋을 건 없다.

“그래. 그럼 부탁하지. 무슨 연유로 찾는지는 비밀로 하고 데려오도록. 아직 결정하기엔 이르니까 말이야.”

“네, 공자님. 그럼 공자님께서 급히 찾는다 하고 불러오겠습니다.”

“좋아.”

이슬린은 고개를 꾸벅 숙이곤 자릴 떴다.

그나저나 이슬린이 저렇게까지 말하다니.

대체 뭐하는 사람이길래?

* * *

난 살짝 들뜬 마음으로 이슬린을 기다렸다.

일단은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자리다.

혹시 모를 일이니 옆에 프리아나도 대기시켜 놨다.

“어떤 사람일 것 같습니까?”

“나도 모르지. 다만 이슬린이 추천해 준 자이니 쓸 만하긴 할 거다.”

“으음, 그렇군요.”

푹신한 소파에 앉아 잠시 기다리자, 이슬린은 사람 하날 옆에 끼고 돌아왔다.

“공자님, 이 사람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공자님.”

“흠.”

이슬린이 데려온 녀석은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로 날 마주했다.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덩치도 작고 패기가 없다고 해야 하나?

엎드린 녀석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하긴. 내 소문이 워낙 안 좋아야지.’

망나니라면 둘째가도 서러운 게 이안의 평판이다.

보잘것없는 평민 입장에서 이안의 이름은 두려워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무슨 연유로 내가 찾는지도 비밀로 했으니.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고 있을 거다.

혹시 내가 뭐 실수라도 한 거 아닌가? 하고 말이다.

“고개를 들어라.”

“네, 네엣!”

고갤 든 녀석은 물에 빠진 강아지마냥 오들오들 떨었다.

‘음?’

녀석의 얼굴을 본 나는 고갤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오른쪽 눈을 가릴 정도로 하얀 붕대가 얼굴 절반을 칭칭 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녀석은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지 뼈만 앙상한 게 여잔지 남잔지 구분이 안 갈 정도다.

머리가 짧았더라면 남자라 해도 깜빡 속았을 뻔했다.

‘아니. 그것보다 여자는 맞나? 그냥 머리가 긴 남자 아닌가?’

피부가 유난히 새하얗긴 했지만 피부 하얀 게 여자만 그런 것도 아니고.

‘얼굴을 절반 가리고 있으니 구분이 가야 말이지.’

“…음?”

순간, 왜인지 녀석의 얼굴을 보자마자 소설 속 캐릭터 하나가 떠올랐다.

그 녀석도 얼굴을 반쯤 가렸던 게 특징이었으니까.

딱 하나 그런 캐릭터가 있긴 했다.

쾌검의 크로드에 버금가는 미친 여자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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