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콰득!
…부오오옷!
끔찍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뜯겨져 나간 마핵 주위로 놈의 촉수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버서석!
뒤틀리기 시작한 촉수는 이내 녀석의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바깥에서 보면 꽤나 볼만한 광경일 거다. 먹잇감에게 마핵을 뜯겨 몸부림치는 뿌리 거인의 모습이.
…파삭!
먼지 털리는 소리와 함께 전신을 감싸고 있던 뿌리의 압박이 약해졌다.
프스스스!
얼마 지나지 않아 숲을 가득 메우고 있던 뿌리가 먼지처럼 흩날렸다.
뿌리 거인의 몸속에 갇혀 있던 난 그제야 뿌리를 찢고 나올 수 있었다.
상쾌한 바람이 질척한 피부 위로 산뜻하게 느껴졌다.
“푸하!”
산뜻한 숲의 공기를 양껏 들이마셨다.
백작의 잔당 녀석들 때문에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멍청한 놈들…….”
뿌리 거인이 죽고 난 자리엔 반쯤 녹아내린 시체가 있었다.
방금 잡아먹힌 백사단이었던 걸로 보이는 놈이다.
녀석은 이미 숨이 끊어진 듯 미동도 하지 못했다.
고작해야 수분 지난 건데 이렇게나 녹아내리다니.
조금만 늦었더라도 내 피부도 저렇게 녹아 흐물흐물해지고 말았을 거다.
뿌리 거인은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손아귀에 남은 녀석의 마핵만이 방금 일이 꿈이 아니란 걸 알려 줬다.
“이거 기분 참 묘하군.”
소설에서만 보던 걸 실제로 하고 나니 뭐랄까.
기분이 좀 싱숭생숭했다.
발할라 시스템에 나오던 공략대로 몬스터를 잡은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
새삼스레 여기가 소설 속 세상이란 게 체감되는 순간이었다.
“으윽…….”
산성액에 녹아내린 피부가 따끔 거렸다.
급한 대로 회복 마법을 퍼부으니 고통이 조금은 가셨다.
“이거……. 깜깜이 숲이라 다행이라 해야 되나?”
뿌리 거인에게 잡아먹히는 바람에 입고 있던 옷이 죄다 녹아내렸다.
가볍게 움직이려 가죽 갑옷만 걸치긴 했다지만 죄다 한 방에 녹아내릴 줄은 몰랐다.
덕분에 속에 받쳐 입던 속옷만 간신히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뭐……. 입을 옷은 여기도 있겠지.”
사냥이 끝났으니 이젠 루팅 할 때다.
내가 굳이 깜깜이 숲까지 온 이유가 여기 있다.
“저거군.”
뿌리 거인이 사라지고 나자 방금까진 볼 수 없었던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나타났다.
성인 남자 서넛이 얼싸안아도 담지 못할 거대한 굵기다.
그런 나무의 뿌리 부근엔 자그마한 굴 같은 게 자리 잡고 있었다.
곰 한 마리 들락날락할 크기의 넓은 굴이었다.
겨울잠 용도로 산짐승들이 파 놓은 것처럼도 보이기도 했다.
난 검을 집어넣곤 굴을 타고 들어갔다.
워낙 어두워 플레어 마법으로 길을 밝혔다.
굴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졌다.
고갤 숙여야 겨우 들어갈 높이가 이젠 허릴 쭉 펴도 남을 정도다.
그렇게 한참을 따라 들어가자 마침내 굴의 끝에 다다랐다.
“흐흐흐!”
마침내 보물을 찾은 난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치솟아 올랐다.
굴 최심층은 따로 불을 켤 필요도 없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보물 자체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으니까.
흐뭇한 미소를 띤 채로 보물을 바라보다 소설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뿌리 거인을 해치운 디아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가 눈을 뜬 건 꼬박 한나절이 지나고 난 뒤였다.
눈을 뜬 그는 제 눈을 의심했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깜깜이 숲에 있었는데, 눈앞에 쌓인 이 보물들은 뭐란 말인가?
디아는 보물들과 함께 놓여 있는 각종 상단의 명패들을 발견했다. 지금은 없어진 옛 문양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잠시 생각에 빠진 그는 이내 알아차렸다. 이건 깜깜이 숲에 희생된 이들의 잔해라는 걸.]
크라니그 산맥이 영지 한가운데에 박혀 있긴 하지만, 아예 길이 없는 건 아니다.
때문에 수많은 상단이 산맥을 가로질러 물건을 사고판다.
그러다 재수 없게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뿌리 거인의 영역에 들어오고 만 거다.
상단 사람들은 모두 잡아먹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상품들만이 남아 굴에 쌓여 있던 거다.
음식 같은 생필품은 대개 썩어 없어졌다.
하지만 아티팩트나 보석 그리고 상단에서 가지고 다니는 금화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게 바로 깜깜이 숲에 숨겨져 있던 보물.
보물의 주인은 모두 옛날 옛적에 죽어 임자 없는 물건들이다.
디아는 이 보물로 한동안 풍족한 삶을 이어 나가게 된다.
“죽은 사람들 물건을 챙기는 게 좀 께름칙하지만……. 복수는 갚아 줬으니 그걸로 퉁 치자고.”
찬찬히 가지고 갈 만한 물건들을 살폈다.
오랜 시간에 풍화된 아티팩트는 버리고 금화와 보석은 하나도 빠짐없이 챙겼다.
“하나, 둘, 셋, 넷…….”
그렇게 챙긴 금화만 벌써 열 주머니.
보석까지 팔아 챙기면 이천 골드는 되어 보였다.
문제는 내 빚이 1만 2천 골드라는 거다.
“이야……. 이걸 다 팔아도 빚 갚으려면 여섯 번은 더 해야 되네? 대~단하다!”
디아는 여기서 챙긴 돈으로 집도 사고 마검 강화도 하고 별거 다 하던데.
그거야 디아가 평민에 그닥 돈 나갈 데가 없어서 그런 거긴 하지만, 그래도 뭣 같은 기분은 나아지질 않았다.
“쯧.”
어쩌겠나. 갚을 건 갚아야지.
“그건 그렇고…….”
방금 뿌리 거인에게서 뜯어낸 마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꽤나 오랜 세월 살아온 덕에 제법 알이 굵었다.
이만하면 이백, 많게는 삼백골드까지도 받아 낼 수 있을 거다.
“근데 이걸 팔아? 아니면 내가 써?”
파는 것도 방법이지만 팔면 그걸로 끝이다.
반면에 이걸로 용린검을 강화한다면?
이만한 마핵은 세공하는 것도 일이지만 내겐 하룬이 있다.
하룬이라면 이 마핵으로 용린검을 한층 더 사기템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
마검.
랭크 빨로 세계정복에서 상위 랭크를 이기게 해 주는 아티팩트!
지금 내가 아무리 검술이 뛰어나 봤자 결국엔 랭크 4다.
랭크 5 이상인 놈들과 혈전을 벌인다면 승리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내가 뭐가 됐건 간에 상위 랭크와 검을 맞부딪히면 내장이 뒤틀린다.
하지만 마검이라면?
디아도 마검으로 수준급 강자들을 랭크에 관계없이 상대할 수 있었다.
마검 자체에 달린 오러로 상위 랭크와의 싸움에 패널티를 감쇄시켜 준다.
지금의 나로선 발에 묶여 있던 제일 큰 족쇄 하나가 풀리는 거다.
그걸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입에 군침이 돌았다.
“쓰읍…….”
앞으로 상대할 놈들을 생각해 보면 마검은 반드시 필요했다.
당장 급한 건 쾌검의 크로드.
지금쯤이면 셀리버트 대숲림에 들르고 ‘기사단의 유물’ 상태를 확인 했을 때다.
대숲림을 지키는 레인져들이 있긴 하지만 크로드한테는 상대도 안 되는 녀석들이다.
오히려 화만 돋울 뿐.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녀석을 상대할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프리아나?
프리아나가 계속 내 편을 들어 준다 해도 크로드한테는 못 이긴다.
“으음…….”
크로드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오금이 저려 왔다.
마검으로 어떻게 잘 해 보면 이기려나?
“그건… 아마 아니겠지.”
검술 랭크 6을 이기려면 평범한 마검으론 안 된다. 적어도 에고 소드는 가져와야 가능하겠지.
뿌리 거인의 마핵이 드래곤 하트도 아니고, 하룬이 아무리 뛰어난 장인이어도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순 없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백 배 천 배 낫다.
크로드한테 단박에 죽지 않고 일말의 교섭 여지라도 생길 수 있으니.
“…일단 돌아갈까.”
될 수 있는 대로 보따리를 챙기곤 깜깜이 숲을 빠져나왔다.
* * *
거대한 고목 앞에 흑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하.”
크로드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몇 달을 달려온 결과가 고작 이거라니.
“이…놈! 레인져들이 네놈을 가만 놔두지 않을……!”
“시끄럽다.”
콰직!
크로드의 발치 아래에 있던 녀석은 그의 발길질 한번에 머리가 터져 죽었다.
고깃덩이로 전락해 버린 녀석은 특이하게도 귀가 뾰족했다.
셀리버트 대숲림에 모여 사는 엘프라는 종족.
이들만이 가진 특징이었다.
지금은 터져 버린 머리 파편에 뾰족한 귀만이 그가 엘프였단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크큭!”
한숨이 나오다가도 눈앞에 놓인 ‘기사단의 유물’을 보면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분명 이안 임페라, 그놈은 약속을 지켰다.
유물의 위치가 어딘지 알려 준다고 했으니까.
다만 그걸 ‘활성화’시키는 건 계약에 없었다.
“재밌는 놈이군.”
특유의 흑발이 피에 젖어 붉게 물들었다.
대숲림은 중립의 땅.
외부인을 함부로 들이는 곳이 아니었다.
크로드는 그런 장해물들을 단박에 박살 내 버리고 이곳까지 왔다. 온몸을 피로 적셔 가면서까지.
그 와중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으니 흡사 귀신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재밌는 놈이지만……. 날 헛수고 시킨 대가는 치러야겠지.”
콰콰콰콰!
순간 크로드가 서 있던 자리로 마탄이 비처럼 쏟아졌다.
녹색 빛깔의 제복을 입은 뾰족한 귀의 엘프들이 뒤늦게 나타났다.
셀리버트 대숲림을 지키는 숲의 수호자 레인져.
그중에서도 마법에 특화된 엘리멘탈 레인져들이었다.
엘리멘탈 레인져들의 마탄 세례가 크로드를 집어삼켰다.
놈들은 크로드를 가운데 놓고 빙 둘러싼 채로 마탄을 계속 퍼부었다.
“정지! 잠시 마나를 회복시킨다!”
한참이나 마탄을 퍼부은 다음에야 엘리멘탈 레인져들은 공격을 멈췄다.
상대는 이미 일반 레인져 수십을 베어 낸 강자다.
얕잡아 봐선 안 될 상대기에 엘프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프스스…….
마탄 세례에 크로드가 서 있던 자리 위로 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이만한 공격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거다.
“놈! 감히 신성한 세계수의 영역을 침범하다니!”
“목숨으로 죄를 갚아라!”
승리를 확신한 엘프들이 소리쳤지만, 그리 좋은 판단은 아니었다.
이내 먼지가 가라앉자 엘리멘탈 레인져들의 시선이 한데 쏠렸다.
“허억!”
“머, 멀쩡하다고?”
상위 랭크도 꽤나 섞여 있다 자부하는 엘리멘탈 레인져.
이들 가운데엔 두 번째 벽을 넘은 랭크 5도 몇 있다.
그런 이들이 쏟아 낸 마탄에도 크로드는 멀쩡히 서 있었다.
검은 흑발을 고고히 흩날린 채로 크로드는 검을 뽑아 들었다.
“우선……. 기분이 좀 더럽단 말이지.”
콰직!
크로드가 힘껏 발을 구르자 바닥이 움푹 파여 들어갔다.
여긴 세계수 위에 자라난 땅.
썩어 부러진 나뭇가지마저도 금속에 버금가는 경도를 자랑하는 게 세계수다.
하지만 크로드가 그저 발 한 번 구른 것만으로 세계수의 뿌리는 깊은 발자국을 남겼다.
“어, 어디냐!”
서걱!
“크악!”
포위망 가운데서 레인져 하나가 비명을 내질렀다.
이를 시작으로 레인져들이 하나 둘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비명이 터져 나갈 때마다 붉은 선혈이 안개처럼 흩뿌려졌다.
“어, 어억!”
“어디서 이런 괴물이!”
“결계를 펼쳐라! 놈을 살려 둬선……!”
엘리멘탈 레인져들의 몸 주위로 룬 문양이 떠올랐다.
한 겹의 결계만으론 상대할 수 없단 걸 이들도 알았다.
무려 3개나 쌓인 두터운 결계가 레인져들의 몸을 감쌌다.
“흥.”
하지만 크로드의 분노를 잠재우기엔 역부족이었다.
검붉은 기운이 크로드의 손 주위로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무지막지한 권격은 그대로 결계를 향해 내리꽂혔다.
…파캉!
“이, 이게 무슨……!”
삼중결계는 단 한 번의 주먹질만으로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다, 단 한 번에 결계를…….”
이제 이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건 더 이상 없었다.
쿠드득!
크로드는 나뭇가지 위에 몸을 숨긴 레인져까지 하나하나 찾아내 목을 비틀었다.
수십 명에 달했던 레인져들은 순식간에 하나도 남김없이 숨이 끊어졌다.
쓸데없는 피는 피하는 게 그였지만, 지금처럼 싸움을 걸어오는데 도망치는 성격은 더더욱 아니었다.
“후우…….”
수많은 피를 보고 나서야 크로드는 진정된 듯 호흡을 가다듬었다.
레인져들을 처치했으니 이대로 조용히 대숲림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럼. 놈을 만나러 가보실까.”
크로드는 온몸을 적신 피를 털어내곤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로 두터운 갑주를 두른 기사의 석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기사의 가슴팍엔 크로드의 검집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문양이 박혀 있었다.
영겁의 기사단을 뜻하는 우로보로스의 문양.
석상은 온몸이 세계수의 뿌리로 뒤덮인 채 떠나가는 크로드를 가만히 바라만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