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네? 무슨 일이시죠?”
“뒤에 있던 놈들이 안 보이잖아. 보르긴! 보르긴 어디 있지?”
“…어? 방금까지 뒤에 있었는데?”
…퍽!
“악!”
방금 던진 짱돌 하나가 놈들의 미간을 적중시켰다.
수박통 깨지는 소리와 함께 녀석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뿌, 뿌리 거인?”
“아니! 뿌리 거인은 아직 나타나지도 않았어! 이 숲에 누군가 있다!”
‘호오.’
아주 멍청이는 아닌가 보네.
“모두 뭉쳐라! 횃불로 주윌 밝혀!”
퍽! 퍼벅!
“악!”
뒤늦게 부하들에게 소리쳐 봤지만 이미 날아간 짱돌을 막진 못했다.
어느새 절반 가까이 머리통이 터진 채로 골골댔다.
“으윽…….”
아직 멀쩡한 놈들은 부랴부랴 횃불로 주윌 밝힌 채로 서로의 등을 맞댔다.
횃불이 겹쳐지자 어두웠던 숲이 꽤나 밝아졌다.
하지만 이미 나무 위로 몸을 숨긴 덕에 위치를 들킬 일은 없었다.
“어디냐! 숨지 말고 모습을 드러내라!”
‘너 같으면 드러내겠냐?’
난 녀석에게 대답 대신 귀여운 짱돌 하날 던져 줬다.
퍽!
“으악!”
“이익……! 이 망할 놈이……!”
보이지도 않는데 머리통이 터져 나가니 미치고 팔짝 뛸 거다.
“흐, 흐아악! 살려 줘!”
클랜원 중 한 놈이 어두운 숲을 향해 내달렸다.
“이 자식이! 도망치지 마라!”
도망치던 부하의 등 뒤로 단검 한 자루가 쏘아졌다.
“커헉!”
“지금부터 도망치는 놈은 내 손에 죽는다! 모두 자리를 지켜!”
“으으…….”
흩어져서 각개격파 당할 바엔 뭉쳐 있겠단 건가?
제법 머리를 썼지만 그런다고 달라질 건 없다.
남의 영지에 몬스터를 풀려고 한 놈들이다.
그런 놈들을 살려 둘 만큼 난 자비롭지 못했다.
‘어디 보자…….’
나머지 놈들을 처치할 짱돌을 골라내는데, 대장 녀석이 혼자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놈의 의도를 단박에 파악하곤 서둘러 짱돌을 집어 들었다.
주변 몬스터를 매혹시키는 사역 랭크만의 스킬 ‘종속’.
만에 하나라도 뿌리 거인이 사역당해 버리면 골치 아파진다.
‘이 자식이……!’
짱돌에 오러까지 실은 채로 놈의 미간을 조준하곤 힘껏 내던졌다.
쐐액!
주먹만 한 돌멩이가 바람을 찢으며 놈의 머리통으로 날아갔다.
…퍽!
“악!”
하지만 주변에서 알짱대던 녀석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대신 얻어맞은 놈은 그대로 숨이 끊어졌지만, 대장 녀석의 스킬을 막진 못했다.
“크흐흐흐! 어림도 없다!”
녀석의 왼손이 환한 빛을 내뿜었다.
그대로 바닥에 손을 내려찍자 빛의 잔영이 그물처럼 뻗어 나갔다.
“크하하핫! 나와라! 뿌리 거인이여!”
‘하. 이런 젠장할.’
쿠구구구…….
이내 숲 전역을 뒤흔드는 듯한 진동이 시작됐다.
쿠드드득!
주변 나무들의 밑에서 뿌리가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촉수마냥 꾸물거리는 모습은 나무라기보단 징그러운 벌레에 가까웠다.
“크하하! 어디 숨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봤자 뿌리 거인의 영역! 날 놀린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해 주마!”
그리고 마침내.
숲 한복판 땅바닥이 쩍! 하고 갈라졌다.
부오오오…….
땅바닥을 뚫고 거대한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뿌리가 엉켜 이루어진 형태는 사람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뿌리로 이루어진 거대한 인간형 괴수.
뿌리 거인이란 이름이 절로 떠오르는 놈이다.
‘이름 한 번 잘 지었네.’
나무뿌리가 어지럽게 얽힌 녀석의 모습은 상당히 기괴했다.
움직일 때마다 흙먼지가 뿌옇게 흩날려 기괴한 분위기가 더 강하게 느껴졌다.
뿌리 거인은 우묵하게 파인 두 눈덩이로 베네르 백작을 따르던 잔당들을 노려봤다.
“히익!”
거인의 모습을 마주하자 살아남은 잔당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대, 대장! 이놈 사역 하실 수 있는 거 맞죠?”
“…물론이지! 종속 스킬이 먹혔으니 이미 이놈은 내 권속이다!”
…부오오오!
뿌리 거인은 반박이라도 하려는 듯 괴성을 질러 댔다.
적막만이 감돌던 깜깜이 숲에 녀석의 괴성이 메아리쳤다.
“이 자식이! 얌전히 있어라!”
녀석의 고성을 외치자 룬 문양이 그려진 왼손이 반짝였다.
그러자 빛이 전류를 타듯 뿌리 거인의 전신에 퍼져 나갔다.
부옷!
뿌리 거인은 고통스러운 듯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나무뿌리로 엮인 거대한 머리통이 바닥에 처박혔다.
“…에잇!”
대장 녀석은 뿌리 거인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발로 후려갈겼다.
흙먼지와 잔뿌리가 사방에 튀었지만 뿌리 거인은 가만히 얻어맞고만 있었다.
부오오…….
그렇게 한참을 얻어맞고 나서야 녀석은 발길질을 멈췄다.
“흐흐! 진작에 얌전히 있을 것이지!”
확실히 소설에서 묘사되던 것보다 약했다.
주인공이 사경을 헤매게 했던 놈이라 하기엔 한참이나 부족했다.
“이제 내 명을 따르겠느냐!”
부오오…….
뿌리 거인은 낮은 울림소리로 대답했다.
이를 들은 대장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뭔가 이상한데. 뿌리 거인이 이렇게 약했나?’
불길한 예감은 어째 틀리는 일이 없다.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려던 내 시야에 뭔가가 들어왔다.
스스슥!
납작 엎드린 뿌리 거인의 발치에서 나무뿌리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뿌리는 대장 녀석이 아닌, 쓰러진 다른 잔당들을 향해 움직였다.
…퍼걱!
“악!”
쓰러진 채 간신히 숨만 붙어 있던 놈들이다.
아직까진 살아 있었지만, 뿌리 거인의 촉수에 가슴팍을 꿰뚫리자 꼼짝 없이 숨이 끊어져 버렸다.
“이, 이게 무슨……!”
츠츠츠츠…….
죽은 다른 녀석들의 시체가 빠르게 메말랐다.
방금까지 살아 숨 쉬던 놈들은 어느새 하얀 뼈만 남기고 사라졌다.
눈 깜짝 할 사이에 놈들은 마지막 살점 하나까지 잡아먹히고 말았다.
“이 망할 놈이!”
파직!
다시 한 번 대장 녀석의 손바닥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프스스…….
하지만 뿌리 거인의 몸에서 흙먼지만 조금 털어 냈을 뿐, 제대로 된 타격은 없었다.
부오.
뿌리 거인의 머리통에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눈앞에 놓인 대장 녀석의 낯빛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이, 이럴 수가…….”
퍼걱! 퍼걱!
뿌리 거인은 남은 클랜원까지 모두 집어삼켰다.
남은 건 마지막 남은 대장 하나.
부오.
뿌리 거인은 한 손으로 대장 녀석을 붙잡았다.
“끄윽…….”
녀석은 대장 놈의 목을 졸라 기절시켰다.
그리곤 커다란 진짜 입을 열었다.
녀석의 입은 머리통이 아닌 복부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설정에 따르면, 좀 더 제대로 된 소화를 할 땐 복부에 위치한 아가리로 먹는다고 한다.
랭크 4니 뼛속까지 쪽쪽 빨아먹겠단 의미겠지.
악어 마냥 쩍 벌려진 입이 대장 녀석을 집어삼켰다.
대장은 허망한 눈빛으로 뿌리 거인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부오오오오!
남은 녀석들을 모조리 집어삼킨 녀석은 전보다 더 거대한 크기로 자라났다.
“이런 등신 같은 놈들.”
지금은 소설 속 뿌리 거인이 등장하는 시점보다 과거의 일이다.
놈이 성장할 시간이 줄었으니 아직은 더 약할 테고, 그래서 랭크 4면 무난히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멍청이들이 놈의 먹이가 되어 줘 버렸다.
백작의 잔당 녀석들을 양분으로 삼은 뿌리 거인은 어쩌면 소설 속 시점과 비슷한 수준까지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하.”
이거 원 쉽게 쉽게 가는 법이 없네.
부오오.
뿌리 거인의 고개가 내 쪽으로 돌아갔다.
이제 녀석은 마지막 남은 먹잇감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쐐액!
뿌리 거인이 날 쳐다보자마자 바닥에 꾸물거리던 나무뿌리가 본색을 드러냈다.
동시에 수십 개의 촉수가 전신을 덮쳐 왔다.
“어딜!”
다급히 용린검에서 오러를 뽑아내 이를 받아 냈다.
세차게 검을 휘둘러 걷어 냈지만 수가 너무 많았다.
끝도 없이 파도처럼 밀려드는 놈들을 계속해서 베어 냈다.
쿠득!
뿌리 하나가 발목 주위로 얽혀 들어갔다.
얼른 불덩이 하날 날리자 금세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영리한 놈이다.
사역 랭크로 권속이 될 것 같으니 항복하는 척한 것부터, 단순히 날 상대할 게 아니라 움직임을 막을 생각까지 하다니.
자칫 방심했다간 순식간에 전신이 묶이고 만다.
콰득! 콰득!
최대한 체력을 아껴 가며 나무뿌릴 박살 냈다.
부오오오!
‘이 자식이…….’
그리 만만한 놈은 아니었다.
조금씩 녀석의 본체와 거릴 좁히려 발을 굴렀다.
하지만 놈은 금세 이를 알아차리곤 거대한 나무뿌리로 반격했다.
이를 베어 내자 녀석은 멀찌감치 떨어진 뒤였다.
거릴 벌린 녀석은 다시금 뿌리로 내 전신을 덮쳐 왔다.
본체는 인간형이지만 공격까지 인간처럼 하는 건 아니다.
상단, 중단, 하단을 동시에 노리고 들어오는 공격은 예측하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걱!
“윽!”
날카롭게 날을 세운 뿌리가 뺨을 훑었다.
흘러내린 핏방울은 뿌리에 닿자 금세 스며들었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피맛을 본 뿌리 거인이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파앙!
오러를 극대화시켜 주윌 얼쩡이던 뿌리를 한 방에 베어 냈다.
그리곤 뒤로 잠시 물러서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가면 내가 불리하다.’
난 마나가 제한된 반면, 녀석은 아니다.
사방이 나무로 둘러싸인 숲이니 나무뿌리가 모자랄 일은 없다.
이 주변이 깜깜이 숲인 이상,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한 건 내 쪽이다.
‘…하는 수 없나.’
머릿속에서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상당히 위험한 일이기에 가급적 안 하려고 했지만, 강해질 대로 강해진 뿌리 거인을 상대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쐐액!
큼지막한 나무뿌리 하나가 가슴팍을 노리고 쇄도했다.
난 눈을 질끈 감고 이를 막지 않았다.
퍼억!
“커헉!”
눈앞이 새하얘질 격통이 밀려 들어왔다.
그대로 내 몸은 붕 떠올라 저만치 떨어진 곳에 처박혔다.
“…….”
쓰러진 내 몸 주위로 뿌리가 모여들었다.
뿌리는 팔을 쿡쿡 찔러 보기도 하고, 엉덩일 때리기도 했다.
하지만 난 기절한 것마냥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부오옷.
그제야 뿌리 거인은 안도의 울음소릴 냈다.
‘시팔. 더럽게 아프네.’
정신을 잃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내 예상대로라면 녀석은 날 이대로 집어삼킬 거다.
‘제발 그래라.’
아니나 다를까.
주변에 얼쩡거리던 뿌리가 내 몸 주위로 엉켜 들어오기 시작했다.
난 여전히 기절한 척 몸을 추욱 늘어뜨렸다.
콰드드득!
축축한 나무뿌리가 전신을 감쌌다.
여기서 저항했다간 나무뿌리 채로 꼬챙이를 만들 거다. 그 즉시 잘게 다져져서 죽어 버리고 말겠지.
지금은 최대한 녀석이 위협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
폐가 짜부라지는 듯한 압박이 가해졌지만 꾹 참았다. 놈이 날 맛있게 집어삼키는 그 순간까지만.
사위가 어두워지고 정신이 점점 멀어져 간다.
숨 한 번 들이마시는 것조차 맘대로 되질 않는다.
치이익…….
피부가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전신이 점점 뿌리 거인에게 흡수당하고 있었다. 전신을 짓누르는 압박감과 함께 힘이 빠져나간다.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예전에도 이런 기분을 느끼다 죽어 버렸으니까.
‘주인공 녀석. 용케도 이걸 버텼군.’
사흘 밤낮을 헤매던 디아는 거의 탈진한 상태로 뿌리 거인에게 붙잡힌다.
파훼법도 뭣도 모르는 상태였기에 무식하게 뿌리 거인을 상대하다 결국 기절하고 만다.
그대로 뿌리 거인의 잔뿌리 한줄기로 소화될뻔했지만.
주인공 버프로 간신히 정신을 차려 뿌리 거인을 격파하는 데 성공한다.
소설 속 주인공이 했던 고생에 비하면 난 아무것도 아니다.
소화되는 와중이지만 정신만큼은 또렷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촉감에 정신을 집중시켰다.
놈의 심장 박동이 뿌릴 타고 느껴졌다. 박동은 내 몸을 집어삼킬수록 더욱 강해졌다.
…두근!
마침내 지척에서 놈의 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껏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
사람에게도 심장이 있듯이, 몬스터에겐 마핵이 있다.
뿌리 거인이 아무리 괴랄한 힘을 가졌어도 결국엔 몬스터다.
난잡한 뿌리를 헤치고 마핵을 뜯어내면 놈도 죽는다.
그걸 못하니 일부러 놈에게 잡아먹힌 거다. 놈이 방심한 최후의 순간에 마핵을 잡아뜯기 위해서.
순간 참아왔던 마나를 왼손에 집중시켰다.
그리곤 박동이 느껴진 곳을 향해 힘껏 손을 뻗었다.
콰드득!
부오오?
이변을 느낀 뿌리 거인이 이상한 울음소릴 냈다.
치이익!
동시에 온몸을 녹이고 있던 산성액의 농도가 한층 짙어졌다.
“끄으읍!”
오러를 두른 손이 뿌리 거인의 체내를 헤집었다.
그리고 마침내.
둥그렇고 각진 뭔가가 손아귀에 잡혔다.
“뒤져라!”
그대로 있는 힘껏 손아귀를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