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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45화 (45/222)

45화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수십여 명에 달했던 백사단.

개중엔 어중띤 랭크 4뿐만 아니라 랭크 5인 녀석도 있었다.

하지만 이젠 없다.

베네르 백작과 충직한 심복 아르베르토까지 모두 사이좋게 저승길로 떠났다.

남은 거라곤 첫 번째 벽도 못 넘긴 그저 그런 쭉정이들뿐.

몰락을 눈앞에 둔 패잔병들은 저들의 은신처 중 한 곳에 틀어박혔다.

쭉정이들 가운데 유일하게 한 남자는 생각에 잠겼다.

일단은 남은 패잔병들의 대장을 맡고 있었기에 고민은 더욱 깊었다.

‘이대로 있다간 나까지 죽는다.’

임페라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 이안 임페라.

그 망나니 X끼 손에 모든 이들이 죽었다.

이대로라면 곧 백사단의 잔당까지 모조리 찾아내 박멸해 내겠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

듣기론 베네르 가문의 가족까지 모조리 죽이곤 자살로 꾸몄다던데.

사실이건 뭐건 그만큼 악랄한 놈이란 건 변함없다.

“…아니야.”

아직 방법이 하나 있다.

절망적인 지금의 상황을 한순간에 뒤엎을 묘수.

‘사역’ 랭크를 가진 그만이 할 수 있는 게 있었다.

“…대장?”

“갈 곳이 있다.”

“어, 어디로 말씀이십니까?”

“잔말 말고 따라와라.”

“…옛!”

부하들은 남자의 말에 부랴부랴 짐을 챙겨 들었다.

‘놈이라면……. 분명 가능할 거다. 그 망나니 자식을 죽이고도 남는다. 하지만 놈을 사역하는 일이 만만치는 않을 텐데.’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죽음의 두려움 앞에 고르지 못 할 선택지는 없었다.

‘할 수 있을까?’

아니다.

‘해내야만 한다!’

남자는 비릿한 미소를 띄운 채로 계획을 세워 나갔다.

* * *

이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은 디아 제니스다.

이름만 놓고 보면 ‘혹시 제니스 학교장 가문인가?’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상은 부모 없이 자란 고아들에게 일괄적으로 주어진 성이다.

제니스 기사 학교 출신의 고아.

디아 제니스.

그게 주인공의 이름이다.

온 대륙의 내로라하는 검술 천재들이 모인 제니스 기사학교.

검술에 재능만 있다면 입학 할 수 있는 곳이긴 하다.

하지만 밥 벌어 먹기도 힘든 게 일반 평민의 삶.

자연스레 기사학교는 귀족집 자제들로 그득그득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들 가운데서 홀로 떨어진 부모도 연줄도 없는 디아.

아이러니하게도 뛰어난 실력은 오히려 독이 됐다. 주변의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았으니까.

결투 시합을 앞두고 몰래 약을 타 먹여지기도 했고, 기사 학교를 졸업해도 따가운 눈초리는 여전했다.

근근이 몬스터 퇴치로 벌어먹던 디아의 일생.

그의 일생에 한줄기 빛이 돼 주는 시점이 있었으니.

바로 이 숲에 숨겨진 보물을 만나고 나서부터다.

“아주 기특한 놈이지.”

여기 있을 기연이면 빚을 한 방에 다 갚진 못해도 당분간 숨통이 트일 거다.

“이왕이면 좀 가기 편한 데 있을 것이지.”

이른 아침부터 저택을 빠져나오곤 곧장 크라니그 산맥으로 향했다.

이제 좀 사람답게 사나 싶었는데 또 등산이라니.

아예 산 타는 게 일상이 돼 버렸다.

베네르 백작령까지 집어삼킨 임페라 백작령은 한순간에 크기가 세 배로 불어났다.

평범한 땅이어도 관리하는데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다.

문제는 영지 한가운데를 떡하니 가로지르는 돌산.

크라니그 산맥 때문에 더더욱 심했다.

어디 자원이라도 나오면 모를까 크라니그 산맥은 딱딱한 돌이 전부다.

대리석도 뭣도 아니고 거무튀튀한 회색빛의 돌.

건축 자제로 쓰이기엔 색이 너무 진해 채산성이 없는 놈이다.

어찌 보면 감사해야 하나?

이 산이 아니었다면 영지는 윤택했겠지만, 그렇기에 더 많은 적들이 노려 왔을 것이다.

크라니그 산맥 덕에 베네르의 사병을 막을 수 있었고.

거기다 내가 찾고 있는 보물은 크라니그 산맥 끝자락에 위치한 숲에 숨겨져 있다.

그리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까지 들었다.

크라니그 산맥을 헤맨 지 어언 수 시간.

겨우 노을이 저물어갈 무렵인데도 숲은 어두컴컴했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가 빛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파리까지 무성히 자란 나무들 탓에 사위는 더욱 어두웠다.

“슬슬 도착했나.”

빛 한 점 들어오지 못하는 숲.

이곳은 밤이 되면 달빛 한 점 못 들어오는 칠흑 같은 암흑에 뒤덮인다.

크라니그 산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이 숲은 한 가지 이명이 붙어 있다.

깜깜이 숲.

살짝 귀엽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름이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주변이 빽빽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데 반해 바닥엔 잡초 한 포기 보이질 않았다.

놈에게 양분을 죄다 뺏긴 덕에 연약한 잡초들이 자랄 만한 여지가 없는 거다.

“이쯤 들어왔으면 도착했겠군.”

마른 땀을 훔치고 용린검을 뽑아 들었다.

여기서부턴 놈의 영역이다.

어디에서 놈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방심은 금물이다.

“후…….”

죽은 자들의 원념이 나무뿌리에 스며들며 태어난 몬스터.

뿌리 거인.

예전부터 들르고는 싶었지만, 낮은 랭크로 이 숲에 함부로 들어오긴 위험했다.

자만에 빠져 멋모르고 싸웠다 죽는 건 멍청한 짓이니까.

‘여기서부턴 베네르 백작령이기도 했고.’

이젠 괜찮다.

깜깜이 숲을 포함한 크라니그 산맥 전역은 이제 내 소유.

남은 건 내가 뿌리 거인을 이길 수 있느냐다.

“흠.”

디아가 뿌리 거인을 만나는 시점은 흑마법사 이안 임페라를 만나기 바로 전.

지금부터 수년이나 지난 시점의 일이다.

그렇다는 건 아직은 그때에 비해 약해 빠진 상태라는 거다.

난 왼손을 펼쳐 손바닥에 새겨진 룬 문양을 들여다봤다.

이내 손바닥 위로 빛이 떠오르며 랭크가 표시됐다.

[이안 임페라]

랭크 : 4(검술), 4(마법)

“후후.”

베네르 백작과의 혈전 끝에 마법 랭크까지 첫 번째 벽을 넘는 데 성공했다.

앞으론 매순간이 벽이겠지만 이만하면 나쁘지 않다.

나도 이젠 나름 강한 편이다.

아직 성장이 덜 된 뿌리 거인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만했다.

서걱!

큼지막한 나무 몸치에 검으로 표식을 새겨 넣었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지금 내가 하려는건 좀 다르다.

이대로 계속 걸어가다 보면 길을 잃고 해매기 십상이다.

난 그걸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길을 잃고 해매는 중인지 아닌지를.

표식을 새기곤 숲 안쪽을 향해 쭉 직진했다.

옆으로 새지 않고 똑바로 직진.

그렇게 삼십 분쯤 걸었을까.

깜깜이 숲의 어둠은 한층 더 깊어졌다.

‘플레어.’

마법 랭크 1의 초심자도 사용 가능한 마법.

불로 적을 태우는 용도가 아니라 밝은 빛을 내는 데 그치는 비전투용 마법이다.

불을 켜고 앞을 바라보자 익숙한 풍경이 나타났다.

성인 남성이 양팔을 써도 못 끌어안을 큼지막한 나무.

똑바로 직진했으니 처음 보는 나무라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나무엔 방금 새겨 넣은 표식이 똑같은 위치, 똑같은 형태로 새겨져 있었다.

“신기하네.”

나야 소설에서 봤으니 망정이지.

아무것도 모르고 숲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정신이 아찔해질 거다.

이대로 한나절, 아니 며칠을 걸어도 결과는 똑같다.

계속해서 같은 나무를 마주하게 된다.

심지어 시간이 지나도 칠흑 같은 어둠은 변치 않는다.

이게 바로 뿌리 거인이 가진 힘.

나무 하나하나가 몬스터인 ‘엔트’와는 결이 조금 다르다.

‘이 숲 자체가 하나의 뿌리로 엮인 몬스터라고 봐야 하나?’

놈은 제 영역을 미로처럼 만들어 들어온 이들의 혼을 쏙 빼 놓는다.

그렇게 먹잇감이 기진맥진 할 때쯤 본 모습을 드러낸다.

남은 건 탈진한 먹잇감을 흡수하는 것뿐.

끔찍한 사냥 방식이다.

파앗!

환한 불빛이 주변을 밝혔다.

그러자 어둠에 삼켜져 있던 주변 모습이 드러났다.

산처럼 쌓인 해골.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 심지어 몬스터의 해골까지 숲 주변에 널려 있었다.

여길 들어왔다 갇힌 자는 죽을 때까지 같은 곳만 빙빙 돌다 죽고 만다.

“물론 그딴 개죽음을 맞으러 온건 아니지.”

용린검을 뽑아들고 오러를 불어넣었다.

오러를 빨아 들인 검은 보랏빛으로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뿌리 거인을 불러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난 소설에서 본 구절을 찬찬히 떠올렸다.

[숲을 빠져 나가기 위해 발버둥친 지 벌써 수일이 지났다. 이 망할 숲은 아무리 걸어도 똑같은 풍경만 계속됐다.

주인이 누군지도 모를 해골이 발치에 걸렸다.

‘나도 이렇게 되는 건가?’

디아의 낯빛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절망으로 가득 차 있던 그는 홧김에 검을 뽑아 들었다.]

깜깜이 숲의 파훼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상대는 몬스터다. 그럼 몬스터답게 줘 패면 그만이다.

어떻게? 놈이 본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깜깜이 숲을 죄다 작살내면 뿌리 거인도 결국엔 기어 나오게 돼 있다.

“이제 소설에 적힌 대로…….”

“…….”

“응?”

용린검을 휘두르려는데 어디선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환청?

뿌리 거인한테 환청을 들려주는 힘은 없을 텐데?

프스스스…….

잠시 불을 끄고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았다.

그러자 조금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여기 사람이 왜 있지?’

깜깜이 숲은 평범한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이 아니다.

그렇다는 건 평범한 놈들이 아니란 건데.

난 조심스레 놈들이 모인 곳으로 다가갔다.

“준비는 끝났나?”

“네!”

‘뭐하는 놈들이지?’

그곳엔 칙칙한 후드를 푹 눌러쓴 놈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드문드문 들고 있는 횃불에 대략적인 놈들의 머릿수가 짐작 갔다.

‘스무 명 정도군.’

음흉한 기운이 풀풀 풍기는 놈들이다.

이런 음침한데서 작당 모의를 하는 놈들치고 착한 놈은 없다.

그닥 강해 보이지는 않지만.

난 용린검을 고쳐 잡은 채로 놈들의 대화를 계속해서 엿들었다.

“흐흐……. 이대로 뿌리 거인을 사역하기만 한다면!”

“으음……. 대장. 정말로 뿌리 거인을 깨워도 괜찮은 걸까요?”

“흥! 내 사역 랭크면 충분하다! 내가 누군지 잊은 거냐? 지금이라도 다시 기억나게 해 줘?”

“아, 아닙니다!”

‘뿌리 거인을 사역한다고?

놈들은 꽤나 당돌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보아하니 대장쯤 되는 놈이 사역 랭크를 보유한 듯했다.

미쳐 날뛰는 몬스터를 사역 시킬 수 있는 랭크.

검술이나 마법에 비해 사역 랭크는 상당히 대우가 뒤떨어졌다.

랭크 특성상 사람들을 죽이는 몬스터와 가까이 해야 하는데, 그걸 좋게 보는 이는 없으니까.

그나마 용병 클랜에서 밥 벌어먹는 게 대우가 좋았다.

“이걸 임페라 백작놈 저택에 풀어놓기만 하면……!”

‘호오…….’

놈들은 날 노리고 있었다.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놈들의 옷깃에 달아 놓은 독특한 모양의 핀.

뱀의 머릴 흉내 낸 듯한 핀은 백사단 놈들이 사용하는 핀이었다.

‘어디로 도망쳤나 했는데. 여기들 숨어 있었군.’

이쯤 되자 대강 상황파악이 끝났다.

놈들의 정체는 베네르 백작이 비밀리에 키우던 사병.

백사단의 미처 소탕하지 못한 잔당들이다.

그런 놈들이 모여 뿌리 거인 사역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건 안 되지.’

솔직히 궁금하긴 했다.

검술과 마법 랭크는 숱하게 봤지만 사역 랭크는 아직 직접 볼 기회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궁금하다 해도 날 향해 적의를 내보이는 놈들을 살려 둘 순 없다. 더욱이 뿌리 거인을 내 영지에 던져 놓으려는 놈들은.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 속.

놈들을 상대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타이밍이다.

조용히 놈들을 처치하기 위해 살며시 발걸음을 옮겼다.

“자! 이제 뿌리 거인을 불러내기만 하면…….”

치익.

“응?”

놈들 대열의 맨 뒤에 있는 횃불 하나가 꺼졌다.

푸걱!

동시에 용린검이 등 뒤를 뚫고 가슴팍으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어둠 속에 잡아먹혀 버렸기에 동료의 죽음을 알아차릴 순 없었다.

‘약하군.’

방금 한 놈을 처치하고 느꼈다.

이놈들은 약하다. 첫 번째 벽도 넘지 못한 랭크 3 이하의 떨거지들.

그러니 운 좋게 살아남은 거겠지.

“허업!”

서걱.

다른 한 놈의 입을 틀어막은 채로 목을 그었다.

붉은 피가 바닥을 적셨지만, 역시나 놈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게 두 놈이나 더 처치하고 나서야 대장 녀석이 눈치를 챘다.

“…잠깐! 모두 멈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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