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만찬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
백작령을 둘러싼 주변 상황은 급박하게 변했다.
시작은 에런골드 2세로부터 온 봉문이었다.
임페라 가문의 문양, 붉은 사자가 그려진 휘장이 떡하니 걸린 중앙 홀.
에이먼은 저택의 중앙 홀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공손한 자세로 납작 엎드린 그의 옆엔 나도 똑같은 자셀 취하고 있었다.
국왕 녀석이 지금껏 해 온 걸 생각하면 끔찍이도 싫었지만, 어찌 됐건 녀석은 국왕이고 우리 가문은 가신이다.
기껏 몰락을 막기 위해 피똥 싸 가며 난리를 쳤는데, 불경죄로 몰락하고 싶지 않다면 할 건 해야지.
벌컥!
얼마 지나지 않아 저택의 대문이 열렸다.
붉은 의복을 휘날리는 한 남잘 앞세운 채 한 무리의 인파가 몰려 들어왔다.
에런골드 2세의 대리인으로 온 중앙 관료와 그의 호위 기사들이었다.
녀석은 꼿꼿이 허리를 편 채 당당히 저택으로 들어섰다.
‘지난번엔 이단 심문관이 오더니, 이젠 중앙 관료까지 행차해?’
소설 속 설정대로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임페라 가문은 별 볼 일 없는 거지 백작가일 뿐만 아니라 깡촌 중에 깡촌.
일평생 보기도 힘든 거물이 드나들 곳은 아니다.
“흠.”
중앙 관료는 중앙 홀을 한 번 슥 훑곤 콧방귀를 꼈다.
주위 호위 기사들 탓인지 몰라도 녀석의 얼굴엔 오만함이 가득했다.
하긴. 국왕 직속 호위 기사니 적어도 랭크 5는 될 테니까.
어쩌면 6인 놈까지 있을지도 모른다.
“임페라 백작.”
“예. 임페라 가문의 가주. 에이먼 임페라. 전하의 명을 전해 주시기 위해 먼 길까지 당도하신 점. 감사드립니다.”
에이먼이 백작이라 할지라도 녀석이 왕의 대리인으로 온 이상 예의를 갖춰야 했다.
난 그런 그의 옆에서 얌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러다 슬쩍 고개를 숙인 채 중앙 관료 녀석을 살폈다.
납작 엎드린 우릴 보곤 녀석의 입가에 미소가 언뜻 스쳤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녀석의 미소에서 불쾌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간의 사정은 모두 들었습니다. 베네르 가문의 주인이 입에 담지도 못할 짓을 저질렀더군요.”
“…그렇습니다.”
“하여 전하께서도 심사숙고 하신 끝에 결론을 내리셨으니, 전하의 명을 잘 받들도록 하십시오.”
“예. 이 한 몸 바쳐 전하의 명 따르겠습니다.”
“그럼.”
녀석은 곁에 있던 호위 기사에게 손짓했다.
안면갑까지 써 가며 전신을 꽁꽁 싸맨 기사는 들고 있던 상자를 건넸다.
상자 안엔 기다란 통 하나가 들어 있었다.
안에 양피질 담는 용도인 듯했다.
금빛 장식으로 요란하게 장식된 통엔 국왕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오오…….”
에이먼은 관료가 건넨 통을 신줏단지 받들 듯 공손히 받아 들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잠시 여독이라도 푸셔야…….”
“마음만 받겠습니다. 일이 바빠서.”
“아……. 알겠습니다.”
관료는 고갤 한 번 까딱이곤 볼일 다 봤다는 듯 자릴 떴다.
에이먼의 입장에서 그의 행동은 예의 없이 보이기에 충분했지만, 딱히 뭐라 하진 않았다.
뭐라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이래서 힘이 없으면 서러운 거다.
그의 뒤를 따라 호위 기사 무리까지 빠져나가고 나서야, 에이먼은 참아왔던 한숨을 내쉬었다.
“후! 중앙에서 온 사람들은 몇 번을 봐도 적응이 안 된다니까.”
“이 먼 땅까지 놀러 오진 않으니까요.”
“그러게나 말이다.”
에이먼은 식은땀을 한 번 훔쳐 내곤 국왕의 인장이 찍힌 통을 열었다.
안에는 새하얀 재질의 양피지가 한 장 들어 있었다.
확실히 왕이 쓰는 거라 그런지 종이 값만 해도 꽤 나가 보였다.
“무슨 내용일 것 같습니까?”
“으음. 아마도 베네르 백작령의 처분에 관한 거겠지. 백작뿐만 아니라 일족 전체가 다 죽었으니 말이다. 과연 누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될지…….”
에이먼은 심각한 얼굴로 양피지를 꺼내 들었다.
베네르 백작령은 옛날부터 그의 것은 아니었다.
불과 삼십 년 전만 하더라도 임페라 가문의 소유였던 사업장도 꽤나 많았다.
어쩌면 그걸 모두 되돌려받을지도 모르는 일.
에이먼은 내심 그걸 기대하고 있는 투였다.
촤륵.
에이먼은 떨리는 마음으로 양피질 읽어 내려갔다.
“…뭐, 뭐라고?”
그의 낯빛은 시선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창백하게 변해 갔다.
대체 뭐라고 적혀 있길래 저러는 거지?
“아니다. 그럴 리가……! 전하께서 왜 그런 결정을?”
에이먼은 보고도 믿기지 않는 듯 눈을 부비고 다시 읽기까지 했다.
“뭐라 쓰여 있길래 그러시는겁니까?”
“아들아! 네가 한 번 읽어 보거라!”
“예에…….”
난 에이먼이 건넨 양피질 받아 들었다.
옛 세상에서 쓰던 문자와 전혀 딴판인 문자였지만, 이안의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던 터라 아무 문제없이 읽을 수 있었다.
찬찬히 편지를 읽던 난 에이먼과 비슷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
[아이소테르의 충성스런 임페라 가문에게.
참으로 경악할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왕국 연합의 일원으로서 대륙의 평화를 지켜 나가는 영광스런 아이소테르에 흑마법으로 비열한 수작을 부리다니!
한시라도 저주 받을 가문에게 응징의 철퇴를 내려야 하건만. 창세신 크리오스 님의 심판에 악이 멸하여 버렸으니 하늘 같은 은혜에 감사를 표할 수밖에 없다.
…….
하여 베네르 가문의 모든 재산은 국고로 환원될 것이며, 대륙의 평화를 위해 쓰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여기까진 그럴 수 있다 치자.
왕국 연합법상 흑마법을 쓰거나 사주한 자는 재산을 몰수한다는 조항이 있다.
베네르 백작이 꿍쳐둔 재화가 꽤나 될 테니 배가 좀 아프긴 하지만.
문제는 다음 줄이다.
[또한, 주인을 잃은 땅은 모두 임페라 백작령으로 귀속시킨다.]
“허허……. 전하께서 어찌 이런 결정을…….”
에이먼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듯 고갤 갸우뚱했다.
그러면서도 기쁜지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베네르 백작령에 임페라의 옛 땅이 포함되어 있다곤 하지만, 그것뿐만 아니라 모든 땅 통째로 임페라 백작령에 귀속시킨다.
그게 에런골드 2세가 내린 결정이었다.
“아무래도 가문의 충성심이 보답 받은 듯하구나! 하하하!”
에이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게 땅이 늘었는데 나쁠 게 뭐가 있나?
수입도 몇 곱절은 늘어날 테고 지금 가문의 주머니 사정을 감안해 본다면 기쁜 소식이 틀림없다.
하지만 난 밥 먹다 바퀴벌레 반 마리 발견한 표정을 지었다.
“아들아. 뭔가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는 게냐?”
“…베네르 백작령. 그걸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
“음? 그야…….”
에이먼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물론 땅이 넓으면 좋다.
영지민도 늘어날 테고 세수도 늘어나니까.
문제는 베네르 백작의 재산이 모두 압류당했다는 거다.
사업장을 돌리려면 수입도 좋지만, 그만한 고정 지출 비용이 있다.
넓어진 땅의 치안을 관리해야 하니 위병도 많이 필요하고, 사업장에 투입된 인원까지 먹여 살리려면 지출이 어마어마해진다.
몇 달 정도 버티면 상황이 좋아지겠지만.
지금의 임페라 가문 재정 형편으론 몇 달을 버틸 수나 있을지 의문이다.
“…아버지.”
“으음.”
“황금 은행에서 빌린 돈 말입니다. 납기일이 얼마나 남았죠?”
“한 달 정도 남았을 거다. 이자 상환은 꼬박꼬박 했으니 기일을 연장하는 것쯤은…….”
“한 번 이야기는 해 봐야겠지만……. 남의 자비를 상정하고 계획을 짜는 건 좀 그렇죠.”
“끄응…….”
에런골드의 의중을 대강 파악했다.
십중팔구, 아니 십중십.
황금 은행은 납기일을 연장해 주지 않을 거다. 그런 상황이 오지 않길 빌지만.
일단 오고 난 다음을 생각해 보자.
돈이 없으니 사업장을 팔아서라도 빚을 갚아야 할 테고, 아이소테르의 귀족들은 내 상황을 아니 어떻게서든 값을 후려칠 게 분명하다.
그럼 임페라 가문은 다시 깡통 신세되는 거고, 귀족들 간에 혼란은 계속해서 유지된다.
국왕 입장에선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다.
‘지독한 놈.’
베네르 백작을 쓰러트렸으니 이제 좀 편히 사나 했건만, 국왕이란 놈은 날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하아……. 그럼 이를 어쩐다?”
“생각해 봐야죠. 황금 은행을 설득하든, 돈을 마련하든.”
“끄응…….”
“일단 방에서 생각 좀 해 보겠습니다.”
“그래. 나도 머릴 좀 식히면서 생각해 봐야겠구나.”
* * *
방 안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기분은 개 같았다.
에런골드가 더러운 수작을 부린 것도 부린 거지만, 애초에 이 빚은 내가 아니라 이안 이 망나니 새끼가 진 빚이다.
“…크아아악!”
하룬과 술친구였을 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놈인가 했는데!
이 망할 망나니 새끼가 진 빚까지 갚아야 한다니! 등신 같은 새끼!
“흐으으…….”
한숨을 내쉬고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좋게 생각하자. 앞으로 몇 달만 잘 버티면 오히려 어마어마한 수익을 내게 될 수도 있잖아?
“몇 달이라…….”
앞으로 몇 달간 버틸 만한 방법이 있을까?
난 소설의 초반부를 곰곰이 떠올렸다.
“흠…….”
짤랑짤랑.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종을 두 번 울렸다.
금세 이슬린이 이를 듣곤 내 방으로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지금 임페라 가문 재정 상태. 정확히 어떻지?”
“정리해서 말씀드리자면, 황금 은행에 진 빚만 1만 2천 골드입니다.”
“일만 이천 골드라…….”
예전 임페라 백작령 위병 임금이 한 달에 1골드다.
다시 말해 1만 2천골드는 사병을 만 명이 넘게 고용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평범한 이라면 빌리는 것조차 어려울 빚.
이안이 임페라 백작의 후계자였기에 빌릴 수 있었던 액수다.
술과 도박으로 몽땅 날려 한 푼도 없는 상황이지만 말이다.
‘까면 깔수록 대단하네. 더럽게 많이 빌렸군. 이것들을 혼자 썼다고?’
“…한 달에 들어오는 돈이랑 나가는 돈은?”
“아티팩트 생산이 지금처럼 수월하다 가정하면 한 달에 팔백 골드 정도 들어옵니다. 빠지는 비용은 그 절반 정도 되구요.”
“사백 골드 정도 버는군.”
“하지만 베네르 백작령의 관리를 하려면 빠지는 비용이 몇 배는 늘어날 겁니다. 당분간은 적자 신세겠죠.”
“그렇지.”
그렇다고 베네르 백작의 사업장을 팔아 버리는 건 아깝다.
황금 알을 낳을 수 있는 거위를 지금 돈 급하다고 째 버리는 건 멍청한 짓이다.
지금 당장 손에 쥔 게 없으니 다른 선택지가 딱히 보이진 않았다.
“지랄 났군 아주.”
어디 돈 좀 빌릴 데 없나?
“…야. 이슬린.”
“네. 공자님.”
“너 돈 좀 있냐?”
“예?”
내 말에 이슬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니 뭐……. 없으면 어쩔 수 없고.”
“의뢰 실패 위약금으로 다 내버려서 땡전 한 푼 없습니다.”
지오 크리시니가 의뢰를 실패하는 바람에 위약금이 꽤나 많이 청구됐다.
이슬린은 이를 악물고 탈탈 털어 지불했던 것이다.
“그래. 그랬지.”
이슬린은 딱 잘라 거절했다. 매정한 녀석.
“쩝.”
이렇게 된 이상 급전을 땡겨 올 뭔가가 필요한데…….
‘드디어 빚 좀 줄여 가나 했더니. 망할 은행 놈들.’
황금 은행. 아주 악랄한 놈들이다.
이안이 술주정뱅이란 사실을 알고 저들이 먼저 손을 내밀기까지 했으니.
그러면서 한 방에 빚을 갚고 싶지 않냐며 도박에까지 손을 대게 했다.
황금 은행은 그런 놈들이다.
구제의 손길을 내미는 척 수갑을 채워 버리는 놈들.
이안은 소위 말하는 ‘빨래질’ 당한 거다. 백작가의 후계자씩이나 되는 놈이 등신같이.
사연이 어찌 됐건 갚아야 하는 건 갚아야 한다.
“하는 수 없나.”
가능하면 건드리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상황이 이런데 어쩌겠나.
급한 불은 꺼야지.
“…나가 봐야겠다.”
“어디 가실 생각이시죠?”
“어디긴. 돈 벌러 가야지. 그거 말고 다른 수가 있어?”
“돈을 벌어요?”
이슬린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고갤 갸웃했다.
갑자기 돈을 번다니 대체 무슨 소린가 싶을 거다.
베네르 백작령에 숨겨진 보물.
디아는 그저 우연한 기회에 얻게 되지만 난 아니다.
‘놈’이 어디 있는진 소설에서 다 봐서 알고 있으니까.
더 이상 소설의 틀을 벗어나고 싶진 않았지만 뭐 어쩌겠나.
내 코가 석 자다.
‘주인공 녀석한테는 미안하지만……. 빌려 쓰는 셈 치지 뭐. 나중에 다시 채워 넣던가 하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