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끄윽…….”
방금 공격에 데미지가 상당했다.
‘…갈비뼈 두 대는 나갔구만.’
골이 울릴 만한 격통이 느껴졌지만 견딜 만했다.
부러진 뼈가 튀어나온 것도 아니고 이만한 통증쯤은 예전에도 숱하게 겪어 봤다.
문제는 이안의 몸이 가진 체력 그 자체였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온몸의 자상에선 피가 줄줄 흘렀다.
그런 상태라면 아무리 건장한 남자라도 죽는다.
오히려 통증이 없었더라면 천 근 같은 눈꺼풀을 주체 못했을지도 모른다.
“…후으.”
부들거리는 팔다리로 간신히 일어섰다.
백작은 여전히 무서운 기세로 오러를 흩뿌리며 날 노려보고 있었다.
“크흐흐! 아직 일어날 힘이 남아 있었나?”
“미안하지만. 넌 방금 큰 실수를 했다.”
“…실수?”
“방금 그 일격으로 날 죽였어야 했어.”
“푸하하하! 간신히 서 있는 게 고작인 주제에 허세는!”
호흡을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했다.
적당히 간보는 걸론 놈을 이길 수 없다.
지금의 내가 가진 최대한의 힘을 한순간에 그러모아야만 했다.
‘음?’
용린검에 오러를 주입시키자 왠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졌다.
푸른빛을 띠고 있어야 할 용린검은 검은 줄무늬만 남긴 채 요지부동이었다.
지금껏 오러를 꽉 잡아 주던 용린검이 무슨 영문인지 먹통이 돼 버렸다.
‘오러 자체를 거부하는 건 아닌데. 뭐지?’
“죽어라!”
백작은 생각 할 틈도 주지 않고 내게 달려들었다.
지금은 싸움에 집중할 때다.
지금 이 순간 오러의 농도는 백작이 가진 게 더 강했다.
그런 놈을 상대로 무식하게 검을 부딪혔다간 내상만 가중시킬 뿐이다.
쐐액!
급소를 노리고 들어오는 공격.
난 이를 받아 내지 않고 계속 피하는 데만 집중했다.
프리아나와의 숱한 대전 덕에 아슬아슬하게 놈의 검을 피할 수 있었다.
종이 한 장 차이.
한순간 실수로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다.
“쥐새끼 같은 놈이!”
백작은 미꾸라지마냥 검격을 피해 내자 점차 낯빛이 어두워졌다.
흡성의 단검으로 유지되는 시간은 대략 삼십 분 남짓.
하지만 시간이 내 편이라고 단정 짓긴 어려웠다.
“크윽…….”
몸 곳곳에 난 생채기에서 피가 계속 흘러나왔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런 상황에서도 용린검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설마?’
순간 머릿속에 뭔가가 반짝였다.
오러를 조절하는 검.
그러면서도 오러를 진정시키던 검.
분명 난 이런 류의 검을 본 적 있다.
“하. 그런 거였나.”
지금껏 용린검의 힘도 모르고 무작정 휘두르기만 했다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크하핫! 미친놈! 죽을 때가 되니 웃음까지 나오는가 보구나!”
백작이 보기엔 그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포자기 한 웃음으로만 보였다.
하지만 난 알았다.
이게 뭘 뜻하는지.
난 더 이상 놈의 검을 피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실은 채로 놈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면서 용린검이 신경을 집중시켰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세상.
지구에서 숱하게 써 왔던 감각을 되살렸다.
발할라 시스템으로 각성한 인간들이 쓰던 스킬.
마치 전구의 스위치를 켜듯 막혀 있던 용린검의 혈을 열어 젖혔다.
…파앗!
그러자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영롱한 빛깔의 오러가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이게 용린검에 숨겨져 있던 스킬.
‘개화.’
오랜 시간 사용자의 오러를 응축시키고, 검을 맞부딪힐 때마다 상대방의 오러까지 집어삼킨다.
그리고 그걸 한순간에 폭발시킨다.
소설 속 주인공이 가지고 있던 마검에도 달려 있던 스킬이다.
다만 주인공 버프에 듬뿍 절여진 마검은 ‘개화’ 말고도 다른 스킬도 덕지덕지 발려 있다.
그건 그거고.
깡촌의 거지 백작에겐 이 정도 수준이 적당하다.
십수년간 이어져 온 악연을 끊기엔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하니까.
수년간 입을 오므리고 있던 꽃이 피듯, 한순간에 어마어마한 양의 오러가 터져 나왔다.
그간 나 혼자 쌓아 온 오러의 양이 아니었다.
프리아나와의 숱한 대련으로 그의 오러까지 적잖이 쌓인 용린검.
이는 자신의 부하를 죽이고 빼앗은 마나에 비하면 훨씬 강력했다.
콰아아앙!
“크아아악!”
오러의 폭풍은 백작의 얇은 검을 부러뜨리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꽃이 뿌리를 내리듯 놈의 팔까지 집어삼키고 나서야 개화는 멈췄다.
“이익!”
푸욱!
마지막 발버둥 치려는 놈에게 최후의 일격을 넣었다.
용린검은 그대로 베네르 백작의 가슴팍을 뚫고 지나갔다.
“내, 내가……! 이런 데서……!”
심장을 꿰뚫리고 살아 있을 순 없다.
백작은 피를 한 움큼 게워 내곤 그대로 고꾸라졌다.
뜨거운 피가 저택의 바닥을 적셨다.
“허억……! 허억……!”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심장 박동이 빨라진 탓에 피가 계속해서 줄줄 흘러나왔다.
어느새 온몸이 피로 흠뻑 젖어 들어갔다.
“끄으윽…….”
기껏 피똥 싸 가며 백작을 처치해 놓고 나까지 과다 출혈로 죽을 순 없다.
급한 대로 상처를 지혈하고 마나가 차오르는 족족 회복 마법을 퍼부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출혈을 멈출 수 있었다.
“흐아아…….”
그제야 긴장이 풀린 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생각보다 강력한 폭발에 나도 놀랐다.
그저 폭발한 것뿐만 아니라 상대를 집어삼킬 수준이라니.
아마 용린검에 저장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오러가 쌓였을 거다.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면 백작과 검을 맞부딪히다가 부러졌겠지.
“ㅈ될 뻔했구만.”
백작의 시신은 싸늘하게 식어 갔다.
탐욕스런 그간의 모습이 무색하게, 놈은 얼빠진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원래 스토리대로라면 임페라 가문을 몰락시키고, 온갖 귀족들과 깽판을 쳤어야 할 놈이다.
그런 놈이 내 손에 죽다니.
살아남는 데 급급했던 내가 되려 놈을 처치하게 될 줄이야.
“쯧.”
어쩌겠나.
프리아나가 임페라 가문을 섬기는 것부터 원래 스토리와는 전혀 딴판인 길을 걷고 있는데.
허리춤에 쟁여 둔 마법구 하날 꺼내 들었다.
감청의 위험 탓에 잠시 꺼두고 있었지만, 백작을 처치한 지금.
더 이상 거리낄 건 없었다.
“아아. 이슬린. 들리나?”
[…자님?]
거리가 먼 탓에 잠시 끊기는 듯한 소리가 이어졌다.
[공자님?]
“그래. 나다.”
[후후! 역시 성공하셨군요.]
“그러게 말이다. 이렇게 멀쩡히 통신되는 걸 보면 그쪽도 성공한 거겠지?”
[네. 말씀하셨던 대로 상위 랭크는 모두 제압했습니다. 일반 병사들도 구류 중에 있구요.]
“가능하면 살려 둬라. 일이 어찌 될지는 모르니.”
[네. 그럼…….]
이제 남은 건 내 손에 달려 있지 않았다.
이단 심문관 쪽도 잘 해결될 테고, 베네르 백작의 그간 비행은 낱낱이 밝혀질 거다.
“꺄아악!”
“응?”
난데없이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
마법구가 아닌 다른 데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비명은 다름 아닌 2층.
베네르 백작의 침소 쪽이었다.
“설마?”
난 황급히 용린검을 챙긴 채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마주한 건 싸늘하게 식어 가는 두 구의 시신이었다.
“이런…….”
시신의 정체는 베네르 백작의 부인과 어린 아들이었다.
외상은 없었지만 둘의 옆엔 빈 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살짝 냄새를 맡아 보자 시큼한 견과류 향이 코를 찔렀다.
“…자살인가.”
둘은 백작이 죽자마자 독을 먹고 자살했다.
백작의 비행이 밝혀지고 나면 둘의 처분은 불 보듯 뻔했다.
백작의 부인은 처형당할 게 뻔하고, 어린 아들이라 할지라도 목숨을 보전할 가능성은 낮았다.
‘적어도 아들은 살려 두려 했건만.’
이건 백작의 탐욕이 불러일으킨 전쟁이다. 고작해야 다섯 살 남짓한 어린 소년에겐 죄가 없다.
몰래 빼내 수도원에라도 보낼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죽어 버리다니.
“…….”
가슴 한구석이 바늘로 찌른 듯 쿡쿡 쑤셨다.
“…이슬린. 계속 듣고 있나?”
[네. 공자님.]
“이단 심문관 쪽은 잘 해결됐나?”
[네. 미리 언질을 한 덕에 급습에 대비 할 수 있었다는군요.]
“그래. 그럼 됐다. 그리고…….”
[…무슨 일 있나요? 갑자기 통신이 끊긴 거 같은데.]
“…아니다. 곧 그리로 가겠다.”
[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 *
베네르 백작의 거사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임페라 백작령을 무단 침입하던 병사들은 모두 제압했고, 이단 심문관을 노리던 별동대까지 모조리 처치 당했다.
미리 이안 클랜에서 이단 심문관들한테 언질을 줘서 가능한 일이었다.
처음엔 녀석들도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얼마 못 가 나타난 별동대의 급습에 이안 클랜과 합심해 이들을 막아 냈다.
그리고 백작 본인도 목숨이 끊어졌다. 백작뿐만 아니라 그의 가문 일원 전원의 목숨까지도.
그러자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이단 심문관은 백작의 비행을 모두 밝혔다.
‘흑마법사 로물루는 베네르 백작의 사주를 받고 시귀폭을 만들었다!’
소문은 삽시간에 아이소테르 왕국 전역으로 퍼졌다.
변방에 위치해 있긴 해도 나름 강소 귀족으로 이름을 날렸던 베네르 가문.
백작이 고생해서 쌓아 올린 명성은 한순간에 그의 손으로 산산조각 났다.
서로 웃고 떠들던 귀족들은 곧바로 돌변해 베네르 백작의 만행을 손가락질했다.
그러면서도 저들의 시커먼 속을 감추려 애썼다.
베네르 백작의 어린 아들까지 죽어 버린 지금 그의 백작령은 공석에 놓였다.
임페라 가문에게서 빼앗은 사업장을 제하고도 꽤나 수익이 짭짤한 알짜배기 땅이다.
아직 광맥이 마르려면 한참 남은 광산도 있고, 곡식을 기를 드넓은 평야도 있다.
이게 누구의 입으로 들어갈지 다들 의견이 분분했다.
“흐음…….”
에이먼은 머릿속이 복잡한지 침음을 흘렸다.
“무슨 고민을 그리하십니까?”
“으음? 아, 아니다.”
에이먼은 고개를 한 번 털며 어깰 으쓱했다.
“세상에 그리 강성하던 베네르가 한순간에 몰락해 버릴 줄이야. 사람 인생이란 게 참 모를 일이군.”
“뭐 인생이란게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너스레를 떨었다.
지난 베네르 백작가에 일어난 일은 사실과는 조금 다르게 세간에 알려졌다.
이단 심문관을 급습한 베네르 백작.
그의 집사 아르베르토는 이를 보다 못해 백작과 혈전을 벌이게 된다.
둘 사이에 치열한 접전 끝에 둘 모두가 죽었다.
그게 사람들에게 알려진 내용이었다.
내가 놈의 저택에 쳐들어가 격전 끝에 백작을 죽였다?
베네르 백작이 쓰레기여도 그리 유쾌한 소식이 아니었다.
남의 영지에 무단 침입한 것도 모자라 가주를 죽였다는 건 크게 문제가 되고도 남을 일이다.
‘크라니그 산맥을 넘어오던 사병도 저들끼리 다투다 와해 된 걸로 알려졌지.’
언젠간 알음알음 퍼질 일이긴 하지만, 당분간은 몸을 사리는 게 나았다.
‘문제는 에런골드 놈이 어떻게 나올지가 관건인데.’
그게 제일 골치 아팠다.
놈은 귀족들 간에 전쟁을 원하고 있다.
베네르 백작의 알짜배기 영토가 공석이 돼 버린 지금.
에런골드가 어떤 태도를 취할지 가늠조차 가지 않았다.
자기 수하를 새로 파견할까?
아니면 주변 귀족들한테 사이좋게 나눠 먹으라고 할까?
그것도 아니면…….
“백작님!”
“아! 일레느! 준비가 끝난 게냐?”
“네! 그럼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고민에 빠져 있던 그때, 일레느가 활짝 웃으며 나와 에이먼을 불렀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하핫! 요번에 브론즈 비어드 선생께서 제작한 아티팩트가 잘 나와서 말이지! 발디그 던전의 수입도 제법 쏠쏠하고 말이야!”
“…설마?”
“오랜만에 목 좀 축이자꾸나! 괜찮겠지?”
일레느를 따라가자 전엔 꿈도 못 꿀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누룽지 빛깔로 바삭하게 익은 칠면조부터 윤기가 줄줄 흐르는 스테이크까지.
벌써부터 입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설마 했는데 진짜일 줄이야.
‘그러고 보니 이 세계에 온 뒤로 귀족답게 먹어 본 적도 없었지.’
“아! 하나뿐인 내 친우여! 왔는가!”
하룬은 벌써 자리 하나 잡고 앉아 있었다.
“내 특별히 오늘 같은 날을 위해 준비했지!”
그러면서 큼지막한 오크 통 하날 꺼내 들었다.
“내 직접 담은 맥주일세! 자이겔론드에서 먹는 것만은 못하겠다만! 그래도 꽤나 달콤할걸세!”
“아아…….”
가능하면 술은 먹지 않으려 했는데.
‘이건 못 참지.’
소설 속 세상에 갇힌 지 어언 삼 개월.
이날 난 처음으로 식사다운 식사를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