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베네르는 저택에 틀어박힌 채로 발만 동동 굴렀다.
“본대로부터 연락은 없었나?”
“아직 크라니그 산맥을 넘지 못했을 겁니다. 임페라 영지에 닿는 즉시 연락하라 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셔야 합니다.”
“끄응…….”
그의 집사 아르베르토에게 소식을 물은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불안한 마음은 좀체 가시질 않았다.
베네르는 자신의 병력을 둘로 나눴다.
일반 사병과 백사단 절반을 포함한 본대.
남은 백사단과 아르베르토의 세작까지 끌어모은 별동대.
단순히 전력만 놓고 본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백사단은 전원 랭크 4 이상으로 구성된 베네르 백작의 최정예 중에 최정예니까.
‘부디……. 실패하는 일 없길…….’
그가 별동대를 보낸 건 다름 아닌 이단 심문관의 거처였다.
이번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게 바로 별동대의 역할이다.
이단 심문관과 동행한 성기사들을 모조리 제거하는 것.
성공만 한다면 백작이 시귀폭에 관여했단 사실쯤은 묻어 버릴 수 있다.
그럼 죽은 임페라 가문에 뒤집어씌우면 그만이다.
그때쯤이면 본대가 에이먼 임페라뿐만 아니라 망나니 아들놈까지 죽여 버리고 난 뒤일 테니까.
‘본대는 걱정할 것 없다. 단순한 학살에 불과할 테니까 문제는 별동대 쪽인데…….’
“별동대는 지금 어디 있지?”
“슬슬 이단 심문관의 숙소에 도달했을 겁니다.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니 연락은 모든 일이 끝나야 올 겁니다. 아무래도 감청의 위험이 있으니까요.”
“그래. 그리하라 했지.”
하지만 뭐지? 이 찝찝한 불안감은?
백작은 자신이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성기사 녀석들이 강하긴 하지만, 각지에서 세작으로 구른 놈들까지 투입시켰다. 충분히 가능성 있어. 그런데 왜…….’
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그때.
굳게 잠겨 있던 저택의 대문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 * *
‘아무도 없군.’
베네르 백작의 저택엔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늦은 밤인 탓에 시중들은 모두 돌아가 버린 뒤고, 저택을 지킬 인원은 방금 처치한 둘이 전부다.
모두 거사를 위해 자릴 비운 지금.
거대한 저택엔 베네르 가문의 일원 말고는 없다.
‘설마 위병까지 투입한 건가?’
그건 아직 확실치 않다.
최대한 조용히 놈을 처리해야 뒤탈이 없다.
“후.”
이제 질긴 악연을 끊을 때다.
서걱!
문 틈 사이로 검을 훑자 대문은 육중한 소릴 내며 입을 벌렸다.
저택의 대략적인 구조는 소설에서 읽은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마주하는 큼지막한 홀.
여기서 2층으로 올라가면 백작의 침소다.
소설에선 디아가 사교 모임 참석을 위해 들렀을 때라 귀족들로 가득했다.
지금은 단 두 사람뿐이 없지만.
“웬 놈이냐!”
느닷없는 괴한의 출현에 둘은 놀라 소리쳤다.
둘은 이내 괴한의 정체를 확인하곤 더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안 임페라?”
왼편에 서 있던 녀석은 서둘러 검을 뽑았다.
희끗희끗한 백발에 호리호리한 체형의 늙은 남자.
‘아르베르토.’
베네르 백작가의 집사이자 잡다한 업무를 도맡은 자다.
잡다한 업무라지만 각지에 보낸 세작을 관리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그저 평범한 집사라고 방심할 순 없는 놈이다.
듣기론 검술 랭크 4에 달하는 자니까.
“…여긴 어떻게 온 거지?”
푹신한 소파에 앉은 남자가 날 노려봤다.
지긋지긋한 면상이다.
그가 바로 이 모든 악연의 시작.
아이소테르 왕국에 전쟁의 피바람을 시작하는 자.
베네르 백작이다.
“이 늦은 시간에 찾아온 거면 말 다 한 거 아닌가?”
난 녀석을 향해 조소를 날려 주며 대답했다.
“…….”
녀석은 내 등 너머 대문을 흘끗 바라봤다.
“미안하지만 모두 보내 버린 뒤다. 이제 널 도우러 올 놈들은 없어.”
“하.”
녀석은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반응을 보아하니 위병들까지 모두 거사에 투입시킨 듯했다.
“대단해. 그저 술과 도박만 좇는 망나니인 줄로만 알았는데 말이야. 이런 짓까지 벌이다니.”
“시귀폭까지 만든 놈만 하겠어?”
“…흥.”
“잡담은 이제 됐고.”
용린검에 오러를 불어넣었다.
랭크 4인 탓에 그리 거창한 오러는 아니지만 둘을 당황시키기엔 충분했다.
“오, 오러 소드?”
“그래. 오러 소드다. 신기하지?”
“하지만 어떻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쓰레기였던 주제에!”
“요새 좀 빡세게 굴렀거든.”
“하! 그래 봤자 랭크 4 수준! 내가 살아 있는 한! 백작님께는 손가락 하나 댈 수 없다!”
아르베르토는 허리춤에서 얇은 검을 뽑아 들었다.
손가락 한 마디 넓이의 얇은 검. 펜싱 할 때나 볼 법한 사브르였다.
검 두께가 얇다고 얕봐선 안 된다.
오히려 저 녀석마냥 호리호리한 체형에겐 저게 더 위협적이다.
“백작님! 놈은 제가 맡겠습니다!”
“아니다. 이래 봬도 검에 몸을 담았던 몸! 저런 잔챙일 두고 도망칠 순 없다!”
이에 질세라 베네르도 검을 뽑아 들었다.
둘은 얇은 세검을 뽑아 든 채로 날 노려봤다.
“흠.”
순순히 당해 주진 않는구만.
이 정도는 예상했다. 베네르 녀석도 나름 검술 랭크4까지 올린 놈이다.
오히려 잘됐다. 질긴 악연이 쉽게 끝나면 싱거우니까.
“그럼. 시작해 볼까?”
“흥!”
싸움은 아르베르토의 선공으로 시작됐다.
오러를 두른 얇은 검이 가슴팍을 노리고 돌진했다.
카앙!
이를 받아치자마자 화려한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어딜!”
놈의 공격은 단발로 끝나지 않았다.
연이은 수차례의 찌르기를 몸 곳곳을 향해 내질렀다.
캉! 카앙!
얕지만 하나하나가 위협적인 공격이다.
찌르기는 오러가 없었더라면 갑옷 틈새만 주의 깊게 막으면 그만이다.
두터운 갑옷을 뚫고 치명상을 입히기엔 얇은 검은 너무나도 취약하니까.
하지만 오러를 두르면 얘기가 달라진다.
제대로 된 갑옷이라면 모를까 간단한 가죽 갑옷쯤은 오러로 뚫고도 남는다.
“놈!”
아르베르토의 검을 막아내자 베네르까지 틈을 노리고 들어왔다.
아직 둘의 경지까진 모른다.
섣불리 공격에 나서기보단 검을 섞으며 둘의 수준을 파악하려 애썼다.
“흐음.”
검술 수준만 놓고 본다면 베네르가 약간 우위에 있지만, 마나의 총량만 놓고 보면 아르베르토가 조금 더 많았다.
“하아압!”
둘의 검이 좌에서 우로 길게 들어왔다.
이를 받아 냄과 동시에 오러를 극대화시켰다.
콰아앙!
“크악!”
순간 둘의 몸이 허공에 떠오르며 뒤로 굴렀다.
“이 자식이!”
전체적인 평가를 내려 본다면?
“그래 봤자 고만고만 하구만.”
“뭐, 뭣이?”
“고만고만 하다고. 하나는 책상 앞에 앉아만 있느라 마나 수련이 개판이고. 다른 한 놈은 근본도 없이 푹푹 쑤시는 것밖에 모르는구만.”
“이익!”
가볍게 던진 도발에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첫 번째 벽을 넘었으니 나름 자부심을 갖고 있었을 거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첫 번째 벽.
이 세상엔 그보다 더한 벽을 깬 괴물이 득실거린다.
이깟 놈들보다 강한 놈들은 쌔고 쌨다.
‘날 포함해서 말이야.’
프스스……!
장기전으로 질질 끌 생각은 없다. 이를 위해선 한 놈을 처치하는 게 급선무다.
“먼저 죽는 건 네놈이다.”
몸을 둥글게 말아 허벅지를 크게 부풀렸다.
파앗!
그대로 베네르 백작을 향해 몸이 튀어 올랐다.
“으읏!”
허리를 노리고 들어온 공격에 백작은 황급히 검으로 이를 가로막았다.
쿠드득!
하지만 이는 페이크.
검이 지척에 닿는 순간 손목을 강하게 비틀자 검선이 아래로 내리꽂혔다.
용린검은 검로를 급격히 선회하며 백작의 허벅다리를 훑었다.
서걱!
“크아악!”
“배, 백작님! 이놈!”
연이은 추가타로 끝을 내보려 했지만 아르베르토가 녀석과의 사이로 달려들었다.
“이, 이 자식이……!”
백작은 피가 철철 흐르는 다릴 움켜쥐며 울부짖었다.
“하! 그보다 더 한 짓도 한 놈이 제 몸은 소중한가 봐?”
“끄으윽……!”
“이제 끝내자. 이 찰거머리 같은 새끼.”
용린검에 오러를 가득 채운 상태로 놈에게 다가갔다.
“물러서라! 물러서!”
아르베르토는 제 주인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쳤다.
얇은 검에 오러를 두른 채 마구잡이로 휘둘러 봤지만 전처럼 위협적인 공격은 없었다.
카앙!
“으읏!”
놈의 검을 강하게 후려치자 검이 하늘로 치솟았다.
아르베르토는 손목이 저린 듯 손을 부들부들 떨며 뒷걸음질 쳤다.
“자, 잠깐!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나! 내, 내 진심으로 사과하겠네!”
“사과?”
“그래! 사과뿐이겠나! 내 약속하겠네! 지금껏 임페라 가문에서 빼앗은 모든 영지며 사업장이며 다 돌려주겠다고! 그러니 이제……!”
“조금이라도 시간 벌려고 개지랄을 하는군.”
“으읏…….”
“이상하지 않나? 크라니그 산맥을 돌파하기로 한 병사들한테 지금껏 아무런 연락도 없다는 게?”
“뭐, 뭣이?”
“아마 별동대랍시고 보낸 놈들도 지금쯤 사이좋게 저세상으로 갔을 거다.”
“그걸 네놈이 어떻게!”
“다 말해 뒀거든. 아마 오늘쯤이면 네놈이 암살대를 꾸려 이단 심문관을 노릴 거라고.”
“그, 그걸 네놈이 어떻게…….”
이번 거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이단 심문관의 생사다.
호위 기사들이 있기야 하지만 기습엔 장사 없으니까.
때문에 클랜원들을 시켜 이단 심문관의 거처에 언질을 해 놨다.
순순히 믿어 줄진 모르겠지만, 아예 모르고 당하는 것보단 나을 거다.
“넌 끝이다, 베네르 백작.”
“…….”
모든걸 끝낼 마지막 일격.
오러를 짙게 품은 용린검을 높게 들어 올렸다.
…푸욱!
“커헉!”
“…응?”
내가 낸 소리는 아니었다.
아직 용린검을 내려치지 않았으니까.
그건 다름 아닌 아르베르토의 입에서 난 소리였다.
짧은 검 하나가 아르베르토의 가슴을 뚫고 튀어나왔다.
왈칵!
녀석은 피를 한 움큼 토해 내는 와중에도 눈앞에 무슨 일이 닥친지 이해하지 못 했다.
“배, 백작님?”
녀석의 심장을 꿰뚫은 건 다름 아닌 베네르 백작.
백작은 품 안에 숨겨 두었던 단검으로 아르베르토의 등을 찔렀다.
“어, 어째서…….”
아르베르토는 제 주인이 무슨 생각인지 알지도 못한 채 앞으로 고꾸라지며 숨이 끊어졌다.
“자, 자네는 이해해 줄 거라 믿네! 그렇지?”
죽기 직전인 상황에서까지 충성을 다한 부하를 죽여? 대체 왜?
내 시선은 자연스레 놈이 가진 단검으로 향했다.
단검의 정체를 확인하고 나서야 놈이 왜 그런 짓을 벌인지 깨달았다.
‘이런 미친!’
이대로 시간을 줘선 안 된다.
황급히 백작의 목덜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앙!
하지만 녀석은 내 검을 막은 채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크흐흐흐!”
아르베르토의 심장에 꽂혀 있던 단검이 붉게 빛났다.
그때 소설에 나왔던 아티팩트 하나가 기억 속에 떠올랐다.
흡성의 단검.
대상의 마나를 일시적으로 빼앗는 아티팩트!
‘이런 것까지 가지고 있을 줄이야!’
베네르 같은 놈이 호위도 없이 거사를 치르려던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정 안 되면 충직한 심복을 죽여서라도 마나를 증폭시키면 된다.
이게 놈의 생각이었다.
단순한 생채기론 그리 많은 마나를 빼앗을 수 없지만, 지금처럼 심장을 꿰뚫어 즉사시킨 경우엔 얘기가 다르다.
아르베르토 체내에 쌓여 있던 마나가 한순간에 베네르의 몸으로 밀려 들어가고 있었다.
“크하하하! 이건가! 두 번째 벽이라는 건!”
베네르는 오러를 끌어안지 못하고 철철 흘리며 웃어젖혔다.
방금 그걸로 랭크 5가 되거나 하진 않았겠지만, 아슬아슬하게 못 미치는 수준까진 달성했을 거다.
“흐흐흐!”
피가 줄줄 흐르던 녀석의 허벅다리는 어느새 멀끔히 치유됐다.
놈은 다시금 검을 든 채로 자셀 잡았다.
“놈!”
오러가 흘러넘치는 검이 쇄도했다.
콰앙!
전과는 전혀 딴판인 묵직한 내공이 느껴진다.
검을 막아 낸 것만으로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내질렀다.
‘이런……! 망할……!’
당황하면 안 된다.
차분히 숨을 고르자.
그래 봤자 결국엔 아티팩트로 일순간 힘을 증폭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흡성의 단검이 가진 지속 시간까지만 버틴다면!
“그렇게 놔둘 성싶으냐!”
연이은 찌르기를 막기 급급했던 그때, 놈의 반대쪽 손이 푸르게 빛났다.
손 주위로 모여든 빛은 그대로 내 하복부를 향해 쏘아졌다.
콰드드득!
“커헉!”
마법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주체 없이 흘러나오는 오러를 한데 뭉쳐 쏜데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위력만큼은 평범한 랭크 4의 마법보다 강력했다.
놈의 공격에 몸이 붕 뜨며 뒤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