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일은 소설에서와 똑 닮은 방향으로 진행됐다.
다만 그 시기가 몇 년 정도 앞당겨지고, 베네르 백작의 절박함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졌다.
결국 베네르 백작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다.
제대로 된 성명문도 없이, 베네르 백작이 모은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명분 없는 전쟁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그것도 지금의 아이소테르 왕국마냥 귀족들 간에 힘이 비등비등 할 때는.
지금 같은 때에 뭐라도 된양 전쟁을 벌였다간 집단 린치에 두들겨 맞고 골로 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방심했다.
베네르가 그런 멍청한 짓까지 저지르진 않을 거라고. 이단 심문관까지 온 마당에 놈의 암약이 드러날 거라 믿고 있었다.
벌써 보름이란 시간 동안 감감 무소식이긴 했지만 별 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블랭크에게 자백제를 쓰는데 보름이나 걸린다고?
뭔가 꾸미는 게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이 모든 게 에런골드 2세, 국왕이란 작자가 그린 그림이다.
거짓을 보고하지 않는다 했을 뿐 보고를 미루진 않겠다 맹세한 게 아니다.
베네르의 속을 살살 긁으며 그가 멍청한 짓을 저지르길 기다린다.
그럼 임페라 가문뿐만 아니라 베네르 가문까지 날아가 버린다.
계획은 애초의 계획대로 시작될 것이고, 귀족들 간의 피 튀기는 전쟁이 이어지게 될 거다.
이건 간단히 볼 문제가 아니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태풍을 일으킨다.
이른바 나비효과처럼 불어나 온 대륙에 피바람을 불러올 것이다.
전쟁은 아이소테르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번져 왕국 연합의 붕괴까지 초래하고 만다.
그 틈에 황제파 잔당이 수많은 기사단의 유물들을 활성화시킨다.
에런골드 2세는 모르고 있다. 이 작은 전쟁의 불씨가 어디까지 번져 나갈지.
“들리나?”
[네. 공자님. 말씀하신 위치에서 모두 준비까지 마친 상태입니다.]
“다행이군. 그건 그렇고. 놈들 규모는 어느 정도 되는 것 같나?”
[말씀하신 사병만 놓고 본다면 전방의 아도르네이의 후작가에 견줄 수준입니다. 그 수가 백에 달하니까요. 다만 눈에 띄게 강한 자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흐음. 그래도 징집된 이들까지 합하면 쪽수는 어마어마하겠군.”
[네. 그에 반해 임페라 백작령은…….]
“끄응…….”
이슬린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사병은 운용하려면 돈이 무지막지하게 깨진다.
가난한 임페라 백작령에선 꿈도 못 꿀 존재.
이제야 위병을 모집해 볼까 생각할 정도다.
그걸로 베네르 백작의 사병과 싸운다?
쓸데없는 개죽음만 될 뿐이다.
성문을 걸어 잠그고 버틸까? 그것도 딱히 괜찮은 방법은 아니다.
첫 번째 벽을 넘은 이들이 수두룩한 마당에 농성은 죽는 시간만 조금 늦출 뿐이니까.
설령 막는다 해도 다른 귀족들의 개입까지 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제일 피해야 하는 게 그거지.’
그래서 이번 계획을 준비한 거다.
성공만 한다면 베네르 녀석의 사병을 막을 뿐만 아니라 이어질 귀족들 간의 전쟁까지 막을 수 있는 계획이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건 압도적인 무위를 보여 줄 누군가와 약간의 쇼맨십이다.
“미리 말했듯이 클랜 사람들은 무리해서 싸울 필요 없어. 어디까지나 기습에 대비하는 게 목적이니까.”
[네. 공자님.]
“다들 살아서 보자구.”
오랜만에 느끼는 흥분을 만끽하며 통신구의 접속이 끊어졌다.
* * *
베네르 백작령과 임페라 백작령 사이엔 두 가지 루트가 있다.
크라니그 산맥을 가로질러 가는 길과 산맥을 우회해서 가는 길, 이렇게 두 개뿐이다.
우회하는 길이 훨씬 안전하지만 그만큼 시간이 오래 걸린다.
적어도 나흘은 걸리는데다가 중간중간 보급까지 감안한다면 더욱 지체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베네르 백작은 조급했다.
한시라도 빨리 적들을 쓸어버려 압도적인 무위를 보여 준다면 다른 귀족들도 제 편에 붙을지 모른다.
때문에 징집병들에겐 제대로 된 훈련조차 하지 않았다.
급급하게 머릿수만 겨우 채운 병사 수.
하지만 문제없다.
결국 이 세상에서 소규모 전쟁은 랭크가 전부다.
검술 랭크 5에 달하는 마르시안이 참전한 이상, 제대로 된 전투는 벌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오로지 학살.
이를 이용해 베네르 백작의 계획만 성공한다면 전세를 뒤집을 수 있다.
얄팍한 가능성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것 말고는 길이 없었다.
‘오로지 속전속결로 끝낸다! 그게 유일한 해결책이다!’
그런 다음 이번 계획의 가장 중요한 단계.
혼란스런 틈을 타 이단 심문관까지 죽인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흑마법사 로물루에 대한 혐의는 유야무야 묻혀질 것이고.
이미 싸그리 전멸해 버린 임페라 백작가에 혐의를 뒤집어씌운다.
그게 베네르 백작이 꿈꾸는 계략이었다.
억지투성이인 계략이었지만, 거기에 기댈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는 절박했다.
“속도를 늦추지 말아라! 늦어도 오늘 밤까진 산맥을 넘어야 한다고!”
마르시안은 말에 올라탄 채로 병사들을 다그쳤다.
“X펄. 지는 편하게 말 타고 다니면서…….”
“뭐 어쩌겠어. 까라면 까야지.”
다들 똥 씹은 얼굴로 헥헥 댔지만 군말 한마디 없이 마르시안의 명령에 따랐다.
십 년이란 세월 넘게 용병으로만 살아온 그에겐 처음 겪는 일이었다.
명예랄 것도 없이 돈만 좇아 싸우기 급급한 용병.
그게 지난 세월 그의 삶이었다.
그에 비하면…….
“흐흐……!”
이래서 권력이란 게 좋다. 수백대 달하는 병사들이 단 한 사람에게 넙죽 엎드리는 꼴이라니.
마르시안은 말에 탄 채로 흐느적거리며 산길을 따라 올랐다.
‘그나저나 제대로 된 병사도 없이 징집병들을 이끌고 가라니. 그래도 되나?’
마르시안은 백작의 명령에 따라 징집병과 백사단 절반을 이끌고 크라니그 산맥으로 향했다.
머릿수만 놓고 본다면 수백에 달했지만, 징집병 대부분은 랭크랄 것도 없는 무지렁이들이다.
사실상 없는 거나 다름없는 셈.
매번 소규모 전투만 하다 이런 대규모 전쟁에 투입된 건 마르시안도 처음이었다.
‘뭐… 괜찮겠지?’
자신의 힘에 대해 기대되는 한편, 괜한 떨림도 느껴졌다.
이제 막 두 번째 벽을 넘은 그였지만, 그 이후로 제대로 된 싸움조차 해 본 적 없었다.
‘에잇. 아니야.’
마르시안은 고갤 홰홰 털어 냈다.
이건 괜한 쓸데없는 걱정이다.
상대는 아이소테르에서 제일 가난한 거지 백작령.
백작도 전대 가주일 때나 백작이라 불릴 만했지. 지금은 백작이란 이름이 민망할 정도다.
용병으로 살아온 그였기에 임페라 백작령의 상황은 남들 못지않게 알고 있었다.
“모두 들어라!”
마르시안은 터덜터덜 걷는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또 뭔 헛짓거리를 시키려나 했지만 그 반대였다.
“오늘 우린 베네르 백작님의 숙적! 임페라 백작령을 친다!”
“…….”
“백작님의 오랜 숙원이 말끔히 해소되는 날이기에! 백작님께서 특별히! 내게 허락하셨다!”
“허락? 무슨 허락 말입니까?”
“베네르 백작령에서 얻는 전리품은! 모두 너희들의 몫이다! 쌀 한 톨까지 전부 모두 너희들의 몫이 될 거라 약속하셨다!”
“오오……!”
“그러니 마음대로 날뛰어라! 백작님께서 기뻐하실 때까지!”
“와아아……!”
크라니그 산맥 한가운데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르시안은 흡족한 미소를 띤 채 병사들을 내려다봤다.
그의 기준에서 약탈과 살인은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일이었다.
그걸 마음껏 허용하겠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있나.
하지만 모든 병사들이 환호성을 내지른 건 아니었다.
“그게 좋은 건가? 솔직히 난 귀족 나으리들 싸움에 왜 끼어들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어쩌겠어. 시키면 해야지.”
“그렇긴 한데… 소문 들어 보니까 임페라 쪽 공자님이 흑마법사 놈한테서 사람들을 구했다던데…….”
“에잇! 그거야 헛소문이겠지! 뭣하러 그런 짓을 해? 그리고 그놈이라면 맨날 술 처먹고 사람 패고 다닌다던 놈 아니야?”
“뭐 그런 소문도 있긴 하지.”
“그게 말이 되나? 평소엔 개망나니인 공자놈이. 갑자기 사람들을 구하고 다녔다는 게?”
“그…런가?”
“그럼 신경 끄라구. 어차피 평생 얼굴도 못 보고 살 귀족 나으리들 이야긴데. 우린 그냥 시키는 대로 살면 돼.”
“그렇긴 해.”
상반된 반응도 분명 존재했지만, 전체적인 병사들의 사기는 크게 높아졌다.
사람이란 이기적인 동물이다.
제 한 몸 챙기기도 바쁜데, 개망나니로 유명한 이웃 영지 귀족의 사정 따윈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베네르 백작의 병사들은 계속해서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크라니그 산맥은 대부분 지형이 완만한 축에 속했다.
길도 열댓 명이 나란히 걸어도 될 정도였다.
중간에 좁은 길목이 있긴 하지만, 상대는 아이소테르 최고 빈민 영지 임페라 백작령.
기습을 노려 온다 해도 짓뭉개 버리면 그만이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삭막한 돌산.
어둑어둑한 시간 탓인지는 몰라도 을씨년스런 분위기가 맴돌았다.
“곧 있으면 목덜미 골짜기입니다. 병사들을 잠시 휴식시키는 게…….”
부관 하나가 마르시안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원래라면 베네르 백작을 모셨어야 했지만, 마르시안이 낙하산으로 내려온 이상 그에게 빌빌거릴 수밖에 없었다.
부관은 전투를 위한 존재가 아니다.
지휘관이 혹여나 실수를 범하지 않을까, 간간히 조언을 건네는 게 부관의 일.
베네르 백작이라 해도 부관의 의견은 무시하지 않고 곰곰이 생각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마르시안은 생각은커녕 코웃음 칠 뿐이었다.
제대로 된 랭크도 없이 입만 번지르르한 놈.
그게 마르시안이 부관에게 내린 평가였다.
“흥! 뭘 그리 겁을 내나? 뭐가 나와도 박살을 내 버리면 될 터! 괜한 소리 마라!”
“…알겠습니다.”
하는 수 없이 부관은 꼬랑질 내리 말 수밖에 없었다.
이번 본대의 지휘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베네르 백작이 직접 위임했다.
괜한 꼬투리라도 잡혀 항명죄를 물었다간 부관만 손해다.
‘그래. 어차피 마실 나가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왠지 모를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상대는 임페라 백작령이니까.
설사 길목을 막고 있어 봐야 뭐 얼마나 대단한 게 있겠다고.
“…정지!”
병사들의 전열에 위치해 있던 척후병이 소리쳤다.
“음?”
설마 진짜로 길목을 막고 있었다고? 그 거지 백작령에서?
마르시안의 입가에 조소가 가득했다.
“크흐흐! 웃기는군! 뭣들 꾸물거리냐! 길목을 막고 있다면 뚫으면 된다!”
하지만 그의 호통에도 병사들은 좀체 움직이질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마르시안은 전열을 향해 다가갔다.
“대체 뭣 때문에 그리 꾸물…….”
녀석은 그제야 길목의 상태를 확인했다.
안 그래도 좁았던 길목은 바위를 쌓아 마차 하나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아져 있었다.
그리고 길목 한가운데엔 웬 금발의 남성이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이게 무슨……?”
으리으리한 갑주로 몸을 뒤덮은 것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움직이기 조금 편해 보이는 하얀 외투를 걸친 사내였다.
“이런 생각을 하실 줄이야.”
“그러게 말이에요.”
길목을 좁힌 건 이슬린의 마법과 하룬의 마핵 골렘 작품이었다.
이슬린이 마법으로 돌산을 부수고 마핵 골렘이 열심히 이를 옮겼다.
덕분에 기지로 돌아갈 출력만 겨우 남기긴 했지만, 제 할 일은 다 한 뒤다.
남은 건 이 길목을 지키는 것.
그게 프리아나와 이슬린이 부여 받은 명령이다.
마치 베네르 백작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둘의 주인은 모든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다.
프리아나가 임페라 백작령에 온 뒤로 매번 감탄의 연속이었다.
처음엔 그저 안중에도 없던 개망나니 공자.
그저 세 번째 벽을 넘기 위해 들렸던 가난한 백작령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이곳에서 더 있고 싶은 마음이 자라나고 있었다.
프리아나는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