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는 건가요?”
“그래! 나도 궁금하구만!”
일레느와 하룬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도 못 잡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던전 포식자 사건은 어디까지나 용병들이 전멸한 사건일 뿐.
그것도 임페라 백작령이 아니라 베네르 백작령 이야기다.
죽은 자들에겐 미안하다지만 옆 동네 용병들이 죽은 것 가지고 호들갑 떨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벌어질 일련의 사건을 말하려다 멈칫했다.
나야 소설에서 본 사건이니 알고 있다지만, 이들에겐 비약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이야기다.
용병들이 죽은 사건이 전쟁이랑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게다가 그걸 소설 속 등장인물들한테 말해도 되는 건가?
‘…뭐 어쩌겠어. 결국엔 벌어질 일인데.’
안 벌어질 일이면 좋겠다만,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지금부터 내가 얘기하는건 가설일 뿐이야. 그것도 굉장히 희박한 확률을 가진 가설.”
“호오…….”
일단 밑져야 본전이니 앞으로의 일어날 일들을 물 흐르듯 설명했다.
물론 중간중간 ‘그럴 수도 있겠지’나 ‘그럴 것도 같아’ 같은 첨언이 계속해서 등장했다.
어쩌면 용병들이 누군가에게 계획적으로 살해당했고.
어쩌면 그 범인들이 누군가에게 후원을 받는 놈들일 것도 같고.
그게 어쩌면 베네르 백작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모든 가설 끝엔 베네르 백작이 우리 영지로 쳐들어오는 걸로 끝이 났다.
“도련님! 이제 어떡해요!”
이슬린은 두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대전쟁 때 부모를 잃은 녀석이라 그런지 전쟁의 무서움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래서 더욱 겁먹은 듯 했다. 가설투성이인 내 말을 저리 철썩같이 믿다니.
“흐음……. 이거 문제가 심각하구만.”
그런데 웬걸?
일레느 뿐만 아니라 하룬도 믿는 눈치다.
“음…….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이슬린 너까지?’
“뭘 그리 철썩같이 믿나? 어디까지나 가설인데.”
“그치만… 왠지 요즘 도련님을 보면 맞는 말일 것도 같아서요…….”
일레느는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으음…….”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프리아나도 파르페엔 신경을 끈 채 침음을 흘렸다.
베네르 백작이 벌인 짓은 분명 기사도와는 확연한 거리가 있다.
용병들을 시켜 동료들을 살해하고, 이를 통해 얻은 랭크를 바탕으로 아무 죄 없는 자들을 학살한다?
아직 한참 애송이에 불과한 프리아나였지만 치를 떨 만한 악행임은 분명했다.
“그런 자를 위해 싸웠다니…….”
프리아나는 빵 먹다 바퀴벌레 반 마리라도 발견한 것마냥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리 국왕의 명령이었다지만 그런 자를 위해 검을 휘둘렀던 자신이다.
그런 자신에게서 혐오감이 치밀 지경이었다.
“신경 쓰지 마라. 네 잘못은 아니니까.”
“으음…….”
“정 신경 쓰이면 죄를 씻을 정도로 열심히 싸우면 되는 거고.”
“…명심하겠습니다.”
프리아나는 굳은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난 대답 대신 어깰 한 번 으쓱하고 말았다.
내가 따로 말 안 해도 프리아나는 알아서 잘 싸워 줄 거다. 다른 놈도 아니고 차기 기사단장이 될 녀석인데.
게다가 당장 지금만 봐도 여기 모인 이들 중에 가장 강한 전력이다.
‘놈들 중에 랭크 6이상은 없겠지.’
아직 제대로 된 베네르 백작의 사병단. 백사단이 나타나기엔 시기가 너무 이르다.
적어도 수년 뒤 동고동락한 동료들을 죽여 랭크를 잔뜩 빨아먹은 놈들쯤 돼야 그 정도 된다.
‘덕분에 다른 찬탈자들도 꽤나 고생했지.’
애먼 데서 튀어나온 사병 중에 랭크 5 심지어 6인 놈들이 튀어나온 거니 당연했다.
덕분에 베네르 백작도 당시엔 꽤나 손에 꼽는 세력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랭크 6은 고사하고 랭크 5에 막 달성한 녀석도 있을까 말까다.
“흠.”
랭크 5.
프리아나와 동급인 랭크.
두 번째 벽을 넘은 자.
사실 크로드 같은 괴물을 봐서 그렇지 랭크 5도 충분히 강자에 속한다.
당장 프리아나만 놓고 보더라도 모셔 가고 싶어 하는 귀족들이 쌔고 쌨으니까.
“이슬린.”
“네. 공자님.”
“백ㅅ…아니. 내가 말한 베네르 백작의 후원을 받는다는 놈들. 제일 센 놈은 어느 정도일 것 같나?”
“사망한 용병들이 어마어마한 강자라 할 순 없겠습니다만. 랭크 4였던 용병들도 꽤나 많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어쩌면 랭크 5를 달성한 자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
랭크 5가 여럿이면 좀 곤란한데.
아무리 나랑 프리아나가 난리를 쳐도 랭크 5 여럿을 상대하는 건 좀 어렵다.
거기다 다른 백사단까지 동원된다면…….
‘잠깐. 랭크 5? 그럼 이거 혹시 모르겠는데.’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불태라.
분명 베네르 백작은 자기가 머리가 좋다 생각하는 놈이다. 그러니 국왕의 손에 놀아나는 줄도 모르고 이따위로 날뛰었겠지.
그렇다면.
“이슬린. 클랜에 전투 가능한 놈들 얼마나 있지?”
“이안… 클랜 말씀이십니까?”
“뭐 다른 클랜이라도 숨겨 놨나?”
“아닙니다. 일단 지난번 훈육 때의 부상은 모두 회복했습니다. 모두 전투에 투입 가능한 수준입니다. 하지만 전투에 특화된 자들은 아니라…….”
“전투가 아니라면?”
“네?”
이슬린은 영문 모르겠다는 듯 고갤 갸웃했다.
“전투가 아니라 보조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지난번처럼 암기도 던지고 하면서 말이야.”
“그야… 그런 방면에 특화된 자들이긴 합니다.”
“그럼 됐어.”
난 얼른 탁자 위로 임페라 백작령 인근의 지도를 펼쳤다.
그리곤 두 지점을 콕 짚어 가리켰다.
“여긴…….”
“여기가 승기를 잡을 수 있는 포인트야.”
* * *
베네르 백작가 저택, 그 지하엔 저택의 주인만큼이나 음흉한 시설들이 가득했다.
흑마법사 로물루를 숨겨 둔 지하 감옥이 그 첫째.
둘째론 이따금 소집되는 비밀 사병들을 위한 회합 장소였다.
마석등이 은은한 빛만을 발하고 있는 공동에 하나 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점점 불어나던 그 수는 백여 명에 달하고 나서야 불어나는 걸 멈췄다.
베네르 백작의 비밀 사병.
백사단.
애당초 계획대로라면 한참이나 먼 미래에 꺼내야 했을 백작의 마지막 수단이었다.
하지만 절박한 상황에 더 이상 앞뒤 잴 여유 따윈 없었다.
…까득!
베네르 백작은 회합 장소에 모인 백사단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계획은 완벽했다.
살인에 미쳐 날뛰는 놈들을 고르고 골라, 이들을 용병이란 탈을 씌운 채 백작령 각지로 흩뿌렸다.
매달 영지 세수의 상당량을 잡아먹긴 했지만, 그 누구보다 강한 사병을 만들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지출이었다.
수년간 흩뿌린 백사단의 씨앗은, 조만간 거대한 마수로 자라나 아이소테르를 집어삼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다 끝이다.
나름 머리깨나 굴린다 자부한 그였지만, 결국 그의 행동 하나하나 꼭두각시 마냥 놀아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이소테르의 국왕 에런골드 2세.
그는 베네르 백작이 사병을 동원해 전쟁이라도 일으키길 바라고 있었다.
이를 지금에서야 깨달은 백작은 뒷골이 얼얼했다.
“가문의 숙적을 없애려 했던 것이… 모두 놈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것뿐이었나?”
백작은 팔을 추욱 늘어뜨렸다.
이대로 이단 심문관에게 죄목이 밝혀져 몰락하거나, 적어도 가문의 숙적은 쓸어버리고 몰락한다.
그게 백작이 가진 단 두 개뿐인 선택지였다.
“…….”
“배, 백작 각하…….”
아르베르토는 백작의 곁에서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백작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안 임페라. 그 망할 망나니 놈! 그 자식만 없었더라면!
뿌드득!
다시 한번 격한 이 갈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곧 그의 선택지에서 한 가지 길은 지워졌다.
“아르베르토.”
“네, 네! 백작 각하!”
“오늘 모인 백사단 전원. 랭크 상태는 어떻지?”
“으음……. 아직 용병으로 생활한 지 오래되지 않았던 터라……. 랭크 상승을 크게 겪은 이는 없…….”
“이보쇼. 백작 나으리.”
“뭐, 뭐라?”
난데없이 끼어든 불손한 목소리에 아르베르토가 눈살을 찌푸렸다. 감히 백작의 후원을 받는 자가 저런 발언을?
하지만 베네르 백작은 딱히 화가 나지 않았다.
그럴 힘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버르장머리 없는 불청객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봤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나댄다는 건, 그만큼 실력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이놈이 감히 백작님께 무슨 말버릇이냐!”
“됐다.”
“예, 예? 하오나 백작 각하!”
“예절 따진다고 뭐가 나오기라도 하나?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니. 가만히 있어라.”
“…네. 백작 각하.”
백작이 오히려 불청객을 두둔하고 나서자 아르베르토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불청객은 그런 모습에 우쭐해져 피식 웃음을 내보였다.
“랭크 상승을 크게 겪은 사람이 없다길래.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있어야지요.”
“흐음……. 대체 얼마나 대단한 경지에 도달했길래?”
“긴 말 할 것 뭐 있겠습니까. 직접 보십쇼.”
남자는 자랑스레 왼쪽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이어서 밝게 빛나는 녀석의 손바닥을 보자, 잔뜩 풀 죽어 있던 베네르 백작의 표정이 급변했다.
“거, 검술 랭크 5? 두 번째 벽을 넘었다는 소리 아닌가!”
“뭐. 그렇게 됐수다!”
1년간 동고동락하던 동료들을 한순간에 배신해서 얻은 힘인데도, 남자는 제 스스로 얻어 낸 경지인양 자랑스레 대답했다.
베네르 백작은 서둘러 머릿속을 회전시켰다.
‘두 번째 벽을 넘은 이가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랭크 5의 기사를 보유했다는 건, 그가 그릴 수 있는 그림 자체가 달라진다는 것.
단순한 최후의 발악이 아니라 궁지에서 살아나올 계책까지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래. 이 녀석만 제대로 싸워 준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셈을 마친 백작은 굳은 얼굴로 남자에게 말했다.
“이름이 뭔가?”
“원래는 다른 이름이었습니다만……. 하도 입에 익어서 그런지 마르시안이란 이름을 계속 쓸까 생각중이죠.”
“그래, 마르시안. 원하는 게 뭐지?”
마르시안은 바로 본론으로 나오는 백작의 반응에 호탕한 웃음소릴 터뜨렸다.
“하핫! 역시 백작 나으리라 그런지 화끈하시구만! 별 거 없습니다! 그간 후원 받던 금액을 두 배로…….”
“세 배. 통상적으로 후원하던 금액의 세 배를 주지. 그리고 백사단의 지휘 권한까지 네게 일임하겠다.”
“세, 세 배?”
연봉 협상의 기본 조건은 블러핑이다.
일단 안 될 걸 알면서도 높은 금액을 불러 보고, 설령 제안이 받아들여진다 하더라도 기쁜 내색을 하지 않는 것.
하지만 그러기엔 베네르 백작이 제시한 금액이 너무 컸다.
“세, 세 배나……!”
이를 들은 다른 백사단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백사단은 용병 수입을 훌쩍 넘는 후원금을 받고 있던 터라 더욱 놀라움은 컸다.
그 금액의 세 배라는 건, 용병들로 굴러다니던 이들에겐 터무니없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베네르 백작은 알고 있었다.
고작해야 서른도 채 되지 않은 랭크 5의 기사.
그런 자를 돈으로만 매수 할 수 있다는 건 어마어마한 메리트라는 걸.
“크흐흐! 내가 주인 고르는 재주는 있다니깐! 좋습니다! 세 배! 그리고 백사단의 지휘는 이제부터 제 몫입니다!”
“그, 그런…….”
옆에서 듣고 있던 아르베르토가 보다 못해 나섰지만, 그게 끝이었다.
다른 백사단원도 살짝 불만이 있어 보였지만 역시나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
랭크 5나 되는 녀석에게 개겼다간 뼈도 못 추릴 게 분명했으니까.
“그럼! 바쁜 와중에 우리들을 불른 이유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그래.”
베네르 백작은 다시 한 번 머릿속 계획을 차분히 정리했다.
어거지에 가까운 계획이었지만 성공만 한다면 분명 몰락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는 계획이었다.
차분히 백작은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고, 이를 들은 백사단 전원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그러는 한편, 피에 미친 자들답게 입가엔 미소가 드리우고 있었다.
“내일 아침까지. 이 두 자는 살아남아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