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허억! 허억!”
“대단하시군요. 공자님. 역시 랭크 4로는 느껴지지 않는 경지십니다.”
“그런 것 치곤……! 넌 너무 멀쩡해 보이는데……!”
가쁜 숨을 내쉬며 볼멘소릴 늘어놨다.
프리아나는 싱긋 웃으며 이마의 땀 한 방울을 훔쳐 냈다.
“아닙니다. 저도 조금은 땀이 났으니까요.”
“하! 퍽이나.”
확실히 랭크 차가 깡패긴 깡패다.
검술만 놓고 보면 내가 한 수 위라 자부할 수 있다.
하지만 전투란 서로가 가진 모든 걸 걸고 내놓는 승부.
‘이놈은 랭크가 낮으니 오러는 빼 놓고 싸워야지.’하는 머저리는 없다.
이따금 오러 없이 대결 할 때 빼곤 나뿐만 아니라 프리아나도 오러를 꺼내 놓은 상태로 대련에 나섰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매번 하위 랭크인 내 패배.
‘조금 자존심 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프리아나씩이나 되는 등장인물이 내 가신으로 들어왔는데.’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프리아나는 임페라 백작가의 가신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 소식은 자연스럽게 에이먼의 귀에도 들어갔다.
프리아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가문의 숙적, 베네르 백작가의 결투 대행인으로 나섰던 인물.
이를 처음 알게 됐을 때 에이먼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 뭐라고! 프리아나 그자가? 그자는 베네르 백작을 위해 일하던 자가 아니더냐!’
‘앞으론 저희 가문을 위해 일할 겁니다. 충성의 서약도 받았구요.’
‘허어…….’
사실 어중띤 기사였다면 에이먼도 받아 주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상대는 두 번째 벽을 넘은 흔치 않은 괴물.
지난날을 생각한다면 못 할 일이었지만, 다행히 과거는 모두 잊고 프리아나를 받아 줬다.
검술 랭크 5가 밑으로 들어오겠다는데 그걸 거절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으니까.
‘그만한 자가 힘써 준다면 고맙기야 하다만……. 우리 가문엔 그에게 지급할 만한 여력이 없지 않느냐?’
‘괜찮습니다. 당분간은 무보수로 일해 줄 거니까요. 먹고 재워 주기만 하면 된다는군요.’
‘허허! 그게 정말이더냐!’
게다가 무보수라는 말에 에이먼은 벌써부터 옛날 일 따윈 깡그리 잊은 듯 했다.
이번에도 대체 어디서 그런 인연이 생긴 거냐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그냥 술친구입니다.’
벌써 술친구로 드워프 장인을 하나 데려와서 그런지 그냥 그런갑다 하고 넘어갔다.
“매번 공자님과 검을 섞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공자님은 정말 다른 이들과는 다르시군요.”
“다르다?”
“주제넘은 발언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굉장히 이질적인 검술을 구사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름 기사 학교 출신이니 대륙 각지의 검술을 알고 있다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전 우물 안 개구리였나 봅니다.”
“흐음.”
“게다가 랭크와 맞지 않는 검술 솜씨를 가지고 계시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뭐 세상은 넓으니까.”
“역시 그렇군요.”
난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의 말을 흘려 넘겼다.
그러면서도 속으론 조금 놀라웠다.
‘확실히 랭크가 높아서 그런가? 눈썰미가 제법이네.’
이 세계에선 당연한 진리다.
검술에 능숙해질수록 검술 랭크가 올라간다.
그건 다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근력 운동을 해야 근력이 강해지는 것과 똑같다.
나야 저쪽 세계에서 경험을 쌓은 뒤라 그런 거지.
애초에 남의 몸에 갇히다니? 그런 소설 같은 일이 어디 또 있겠나?
‘…있지. 나중엔.’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진리이자 법칙.
하위 랭크는 상위 랭크를 이길 수 없다.
이는 주인공 디아의 등장과 함께 박살 난다.
그야 디아는…….
“공자님!”
딴생각에 잠겨 있다 일레느의 목소릴 듣고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해맑은 얼굴로 달려오는 일레느의 손엔 짚으로 엮은 큼지막한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소풍 갈 때나 쓸법한 바구니에선 달콤한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드디어 준비가 끝난 모양이다.
허기진 배를 달래고, 아마 어쩌면 거지 백작령의 새로운 수입원이 될 수도 있는 물건이!
“후후…….”
“……?”
음흉한 미소를 짓자 프리아나가 영문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쪼르르 달려오던 일레느는 얼른 바구니를 덮고 있던 천을 걷으려다 멈칫했다.
“어? 기사님도 계셨네요?”
“예.”
“흠……. 그럼…….”
일레느는 물건을 꺼내려다 말고 내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어떻게 할까요! 공자님!”
“안심해라. 이 녀석은 내게 충성을 맹세한 몸이니까. 그렇지?”
“그렇습니다.”
“흠……. 공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래야지요. …하지만!”
“…하지만?”
“이건 저랑 공자님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 데나 말하고 다니면 안 되는 거. 알죠?”
일레느는 입에 검지손가락까지 가져다 대며 신신당부했다.
아무래도 베네르 백작편에서 일하던 녀석이라 그런지 영 미덥잖은 모양이다.
프리아나는 하는 수 없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녀석도 바구니에 감춰진 게 뭔지 궁금한 듯했다.
하기사 한창 검 휘두르고 난 다음이니 배도 고플 테고.
이 냄새를 맡고도 참는 건 힘들 거다.
“예에……. 뭐……. 알겠습니다.”
“그럼……. 짠!”
일레느는 마침내 감추고 있던 바구니를 열어젖혔다.
그러자 천으로 감춰져 있던 달콤한 향이 진동했다.
“음. 잘 만들었구만.”
“헤헤……. 아침부터 고생했다구요!”
바구니 속엔 조막만한 맥주잔에 무언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이건……?”
프리아나는 처음 보는 괴상한 음식물에 눈살을 찌푸렸다.
제일 아래층엔 붉은 레드 핀의 과육, 그다음엔 하얀 생크림.
이 두 개가 반복해서 쌓여 있고 제일 맨 위엔 블루핀으로 만든 푸른빛의 시럽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만화로만 봐서 잘은 모르겠다만……. 대충 이런 생김새였지?’
처음 블루핀을 봤을 때부터 많은 고민을 했다.
당장 나 먹을 입도 부족한 건 맞지만, 매주 오는 작물들을 다 먹을 순 없을 노릇이다.
그래서 생각한 게 제대로 된 요리로 만들어 파는 것.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마음 같아선 ‘아……. 이건 [케이크]라는 거다. 많이 먹으면 살이 찌지.‘라며 내놓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케이크 비스무리한 건 이미 있었다.
이 세상에 있는 요리를 만들자니 식상해서 안 팔릴 테고, 그렇다고 없는 걸 팔자니 이질적이라 팔리지 않을 거다.
그나마 절충안으로 내 건 게 바로 이거.
대충 있는 재료로만 만든 파르페 비스무리한 게 이거다.
만드는 법은 그닥 어렵지 않았다.
과일이랑 생크림을 번갈아서 쌓아 주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그 매번 댓글창에 레시피 적던 놈이 몇 번 남겨 놓기도 했고.’
제대로 된 파르페에 비하면 모자란 점이 적진 않았다. 하지만 겉보기엔 꽤나 그럴싸한 게 먹음직스러웠다.
‘제대로 된 놈은 아이스크림도 넣고 뭐 한다더만……. 그건 좀 비싸지.’
이 세상에서 제대로 된 냉동 장치는 굉장히 비싸 아이스크림은 사치 그 자체인 디저트였다.
냉장고 대신 이슬린을 써 보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일단은 생각만 하는 선에서 멈췄다.
“한번 먹어 볼까?”
“네! 여기요!”
일레느가 얼른 맥주잔 한 가득 담긴 파르페를 건넸다.
제대로 된 유리잔이 없어 맥주잔에다 담긴 했다만. 아무래도 디저트는 눈으로도 즐기는 요리다. 나중에 팔 땐 제대로 담아서 팔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푸른 빛깔의 블루핀 시럽과 생크림을 한 숟갈에 퍼 담아 입으로 직행했다.
달콤한 크림에 더 달콤한 시럽이 한데 어울려지니 맛이 없을 수가 있나.
지금 이 한 숟갈만으로도 블루핀을 공수해 온 보람이 있다 할 정도다.
레드핀도 충분히 달긴 했지만 향긋한 과일향이 시럽에 스며들어 퍼져 나가는 달콤함은 비교 불가였다.
중간중간에 쿠키 부스러기까지 넣어 바삭한 식감도 빼놓지 않았다.
파르페 표면부터 착실하게 퍼먹어 나가던 숟가락은 어느새 제일 밑바닥인 레드핀까지 닿았다.
와삭!
너무 단걸 먹어서 그런지 달달한 레드핀도 그저 새콤한 과일로만 느껴질 정도였다.
‘음……. 그런 게 오히려 좋은 점이지.’
맥주잔 표면에 남은 시럽과 크림까지 과육으로 삭삭 훑어 먹었다.
그렇게 설거지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먹어치우고 나서야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어우. 달아.”
“저, 정말요? 너무 단가요?”
“그 맛에 먹는 거지.”
“그래요? 헤헷! 다행이네요! 제가 먹었을 때도 달긴 했는데 왠지 계속 먹게 되더라구요!”
“후후. 영양식에 비하면 먹을 만한가 봐?”
“헤헤……. 영양식은 좀……. 저랑은 안 맞는 것 같아요.”
일레느의 입맛에 맞는 거면 다른 사람들 입맛에도 맞을 거다.
몇 번 더 만들어 보고 그다음부턴 팔면 된다.
거지 백작령이라 이런 디저트를 챙겨 먹는 사람이 많진 않겠지만.
어디에나 돈 있는 놈들은 있는 법이니까.
적당히 입소문을 타고 나면 타지에서도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생길 거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맛있는 걸 먹은 본성은 어쩔 수 없는 거니까.
“…크흠!”
파르페 첫 시식 행사가 성황리에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옆에서 불청객 하나가 헛기침 소릴 냈다.
누가 기침 소리를 냈나 찾을 겨를도 없었다.
여기엔 나랑 일레느 말곤 딱 한 사람밖에 없었으니까.
‘프리아나?’
헛기침을 내뱉은 건 다름 아닌 프리아나.
혹시나 검술 수련 시간에 딴짓하는 걸로 뭐라 하는 건가 싶었지만, 녀석의 눈빛을 보니 그런게 아니었다.
“뭐 필요한 거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그저……. 목이 조금 마르군요.”
“아! 물이라면 여기 있어요!”
일레느는 눈치 없이 얼른 바구니에서 물을 한 컵 꺼내 줬다.
“음…….”
역시나 물 한 잔 건네받은 녀석은 아쉬운 듯 입맛만 다셨다.
“목마르다더니 왜 안 마시고 있어?”
“예? 아, 그렇죠.”
프리아나는 하는 수 없이 냉수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당연히 원했던 게 냉수는 아니었으니, 아쉬워하는 프리아나의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뭔가 우스우면서도 어색했다.
‘얘가 이런 캐릭터였나?’
먹을 걸 보고 입맛이나 다시는 캐릭터는 아닌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소설에서도 드문드문 대식가라는 언급이 있긴 했다.
‘주인공 일행 축하 자리에서 혼자 몇 인분을 먹었다 했었지.’
하지만 그땐 단순히 기사단장이라 운동량이 많아서 그런 거라 생각했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먹는 걸 좋아하는데, 운동량도 많으니 더 좋아하게 된 걸지도.
“하나 줘?”
한참 동안 몸 쓰느라 고생 좀 했을 텐데, 디저트 하나 가지고 인색하게 굴어서야 쓰나.
마침 일레느가 연습용으로 몇 개 더 만들어 오긴 했다.
“괘, 괜찮겠습니까?”
“충직한 가신이 하나 달라는데 줘야지 그럼.”
“흐흠. 그럼 공자님께서 주시는 것이니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곤 행여나 내 맘이 바뀔까 얼른 파르페 하날 받아 들었다.
“으음!”
한 숟갈 맛본 녀석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휘둥그레졌다.
바삐 움직이던 숟가락은 어느새 파르페가 담긴 유리잔을 깨끗이 비웠다.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다른 사람들 입맛이 비슷했다면 대박은 따 놓은 당상일 듯했다.
“굉장하군요! 부드럽고 달콤한 크림에 간간히 씹히는 빵까지! 정말 맛있습니다!”
“그래 보인다.”
맛없는 걸 저렇게 먹었을 리는 없지.
“어떻게 이런 걸 만드실 생각을……! 대단하십니다!”
“그, 그런가요?”
일레느는 찬사에 가까운 극찬에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그런 모습에 난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반응으로 서 있었고.
“하나 더 먹어도 됩니까?”
결국 프리아나는 바구니에 담겨 있던 남은 파르페까지 깨끗하게 비웠다.
그래도 한사코 거절하는 일레느한테도 하나를 건넸다.
올곧은 기사의 표본이라 생각했던 녀석이 이러고 있으니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다.
“…그래. 많이 먹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