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뭐하나? 얼른 들어오지 않고.”
지금껏 잘 따라오던 프리아나가 멈칫했다.
영양가 없이 넓기만 더럽게 넓은 임페라 백작가의 저택.
그 크기에 압도된 건 전혀 아닐 테지만 프리아나의 발걸음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국왕의 명령이었다곤 하지만 에이먼을 블랭크로 만들려고 했던 그.
그 사실이 양심에 찔리는지 차마 저택 안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그게…….”
“왜. 집이 너무 초라한가? 기껏 말 다 해 놓고 이제와 보니 영 아닌가 싶어?”
“그, 그건 아닙니다! 다만…….”
“그럼 들어오라고.”
“…네.”
프리아나는 두 눈 질끈 감고 저택으로 들어섰다.
조금 답답하긴 하다만 차라리 이런 모습이 낫다. 지은 죄가 있는데 아무 일 없던 채 행동하는 놈보단 낫지.
“도련님! 오셨어요?”
한창 마당을 쓸던 일레느가 갈색 포니테일을 살랑거리며 달려왔다.
“그래. 일레느. 별 일 없지?”
“그럼요! 근데… 이분은 누구시죠?”
일레느의 시선은 자연스레 동행한 녀석에게도 향했다.
스쳐 지나가듯 봐서 그런지 이 녀석이 누군지 바로 기억해 내지는 못했다.
“프리아나라는 친구다. 너도 본 적 있을 거야.”
“프리아나……. 허억! 설마 그때 베네르 백작님의 결투 대행인으로 나왔던?”
“…맞습니다.”
프리아나는 쭈뼛거리며 고갤 끄덕였다.
그리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의 등장에 한 번 놀라고, ‘친구’라는 말에 다시 한번 놀랬다.
“이분이 도련님 친구분이라구요?”
“뭐……. 그런 셈이지. 지나간 일은 잠시 잊기로 했다. 아버지껜 내가 잘 말씀드리도록 하지.”
“흐아……. 정말이지 도련님. 요샌 매번 놀라는 것도 지친다니까요. 얼마 전엔 책으로만 보던 드워프님을 친구라고 하시더니…….”
“드워프?”
드워프란 말에 프리아나가 고갤 갸웃했다.
이런 깡촌에 드워프가 있단 말로도 놀랄 만했지만, 아직 놀라기엔 이르다.
“그건 그렇고. 이 친구 입을 옷 좀 내어주겠나? 이 꼴로 계속 있을 순 없으니까.”
“네! 금방 가져올게요!”
일레느는 잰걸음으로 자릴 떴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지난 일은 잊어 주신다 하셨지만…….”
“물론 공짜로 잊어 주진 않을 거다. 그만큼 날 위해 일해 줘야겠지.”
“…감사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레느가 옷 한 벌을 가져왔다.
가끔 내가 활동복으로 입던 옷이었다. 화려한 옷은 아니지만 지금 입고 있는 거적때기보단 나았다.
프리아나가 나보다 키가 조금 크긴 했지만 넉넉하게 만든 옷이라 그런지 딱 맞았다
허름한 거적때기는 버리고 깔끔하게 차려 입으니 제법 예전 같은 태가 났다.
“그럼. 날 위해 일하기에 앞서 간단한 테스트 좀 해 볼까?”
“테스트 말이십니까?”
“그래. 따라와라.”
프리아나는 옷이 살짝 불편한지 엉거주춤한 자세로 아장아장 걸으며 내 뒤를 따랐다.
…캉! …캉! …캉!
저택 뒤뜰에선 하룬이 망치 두들기는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직은 대장간이 다 지어지지 않아 연습 삼아 간단한 아티팩트만 만드는 중이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하룬 기준에서 연습 삼아 만든 거지, 조금씩 옆 마을에 판매할 때마다 불티나게 팔렸다.
조만간 상회를 알아봐야겠다.
‘이대로 대장간 증축만 순조롭게 되면……. 흐흐……!’
“대장간으로 가시는 겁니까?”
뒤따라오던 프리아나가 궁금한 듯 물었다. 방금 자기가 들은 드워프 얘기가 진짠지 의심하는 눈치다.
사실 그것 때문에 일부러 이쪽으로 오는 거기도 했고.
“그래. 연무장이 그쪽 방향이라.”
…캉!
하룬은 용광로 앞에서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망치를 두들기고 있었다.
크래프트 오러를 감싼 짤막한 망치를 두들기는 모습은 몇 번을 봐도 인상적이었다.
“흐흠.”
곧장 연무장으로 가도 되지만 굳이 빙 돌아 뒤뜰을 거쳐 가는 건 다 이유가 있다.
지금은 크로드 때문에 날 위해 일한다곤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중 가면 다 들통날 말장난.
녀석에게 내가 섬길 만한 사람이란 걸 보여 주기는 해야 했다. 섬길지 말지는 이 녀석 마음에 달렸지만.
‘국왕 섬기던 놈한테 드워프 대장장이 하나로 눈에 찰라나?’
슬쩍 프리아나의 눈치를 살폈다.
“허억!”
프리아나는 하룬을 보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행히 내 계획이 어느정도는 들어맞았다.
하기사 하룬만 한 경지의 드워프 장인을 보는 건 프리아나도 처음이겠지.
“뭘 그리 놀라나? 드워프 장인 처음 봐?”
“그, 그건 아닙니다만……. 이만한 경지의 크래프트 오러는 처음 봅니다! 마치 붉은 보석을 몸에 두른 듯한…….”
…캉!
“으응?”
인기척을 느낀 하룬이 망치질을 멈췄다.
녀석은 날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맞이했다.
“아! 이안! 내 하나뿐인 친우여! 언제부터 있었나! 미리 말이라도 하지!”
“흐흐! 괜찮아. 방금 왔거든. 워낙 열중해 있으니 말을 걸 틈이 있어야지.”
“크하핫! 한동안 쇠질을 못하다 망치를 잡으니 어찌나 즐거운지! 미안하구만!”
하룬은 너스레를 떨다 프리아나를 흘끗 쳐다봤다.
“이 기사는 누군가?”
“당분간 여기서 신세 질 친구야.“
“만나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장인이시여.”
“흐음? 그래. 자네의 친구라면 나쁜 놈은 아니겠지. 반갑네. 내 이름은 하ㄹ…”
“쓰읍.”
하룬이 이름을 밝히려던 찰나에 옆구릴 쿡 찔렀다. 녀석은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황급히 말을 돌렸다.
“하?”
“하…늘이 참 맑군. 난 브론즈 비어드라고 하네.”
“프리아나입니다.”
둘 사이에 짤막한 인사가 오갔다.
프리아나가 베네르 백작가의 결투 대행인으로 나섰던 이야긴 굳이 꺼내지 않았다.
그 당시엔 하룬도 없었고 굳이 쓸데없는 얘길 꺼낼 필요는 없으니까.
“대단하시군요……. 얼마나 혹독한 수련을 거쳐야 어르신과 같은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건지……. 저는 가늠조차 가지 않습니다.”
“하핫! 수련이랄 게 뭐가 있나! 그저 쇠질을 즐기는 것뿐이지! 랭크 상승은 그저 부가적인 것뿐이야!”
“즐기는 것이라면……?”
“자자. 서로 궁금한 건 나중에 차차 얘기하고. 지금은 다른 일부터 해치우자고.”
“으음…….”
프리아나는 뭔가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비록 하룬이 검술 랭크를 올린 건 아니지만, 대장장이 랭크에 있어선 상당한 경지에 도달한 자.
혹여 조언을 구할 순 없을지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지난번에 내가 부탁한 건 끝났나?”
“아! 물론이지! 친우가 부탁하는데 다른 일 다 제쳐 두고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네! 덕분에 어젯밤이 돼서야 끝났지.”
“아주 좋군.”
“부탁했던 대로 연무장에 설치해 뒀으니 확인해 보게나!”
잠시 딴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프리아나는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서야 허겁지겁 뒤따라 달려왔다.
* * *
연무장이라 말하기엔 다소 빈약한 공터.
있을 거라곤 연무장 정가운데에 놓인 밋밋한 허수아비 하나와 커다란 상자가 전부였다.
“공자님? 이건 대체…….”
“뭐긴. 연습용 샌드백이지.”
“샌드…백이요?”
“펀치 머신…이라 하면 모를 테고. 그냥 연습용 목각인형 같은 거야.”
“아.”
프리아나는 눈앞에 놓인 괴상한 허수아비를 요리조리 살펴봤다.
멍청한 쇳덩이처럼 보이겠지만 저건 내가 특별히 주문 제작한 아티팩트다.
사용 방식은 간단하다.
허수아비의 머리통을 열면 자그마한 홈 같은 게 나온다.
여기에 몬스터의 마핵을 집어넣기만 하면 끝.
그럼 인형이 마핵의 마나를 빨아들여 경도가 올라간다.
제대로 된 오러 소드에 맞으면 강철이라 할지라도 망가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렇게 마나를 빨아들인 상태라면 조금이나마 버틸 수 있게 된다.
사람이 상대였다면 마나가 다 닳아 죽겠지만, 이건 허수아비다.
적당히 마핵만 갈아 주면 언제든 새것처럼 사용할 수 있다.
‘효과 좋은 샌드백 같은 거지.’
하룬의 크래프트 오러로 변형된 쇳덩일 이어 붙인데 불과하지만 연습용 허수아비로 쓰기엔 아까울 정도로 좋은 아티팩트다.
“검을 들어라.”
“지금 말씀이십니까?”
“그럼 뭐. 며칠 기다려 줬으면 하나?”
“…아닙니다.”
그는 제니스 기사학교의 졸업생이다.
이깟 허수아비 때리는 연습은 학생 시절 때나 하는 짓이다.
검술 랭크 5의 괴물이 하기엔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생각하는 듯 보였다.
프리아나는 허름한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두꺼운 가죽을 대충 엮어 만든 검집과는 달리 검은 제법 훌륭했다.
곧게 뻗은 날과 잘 잡힌 균형까지.
시장에서 굴러다니는 검 같지는 않았다.
프리아나가 준비를 끝마치자 미리 준비해 뒀던 마핵을 홈에 끼워 넣었다.
우우웅!
잠시 진동이 울리더니 인형 주위로 옅은 마나가 흐르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검을 휘둘러 봐라.”
“평소처럼… 말씀이십니까?”
“왜 아까부터 자꾸 말을 두 번씩하게 만들지?”
“아, 아닙니다. 그럼.”
프리아나는 검을 허리춤에 가져다 댄 채로 자셀 잡았다.
지난번 결투 재판에서 본 자세 그대로였다.
“후읍!”
작게 숨을 들이 마시곤 양 무릎을 굽힌 뒤, 빠른 속도로 전신에 마나를 흘려 넣었다.
동시에 프리아나의 몸이 튕겨져 나가듯 앞으로 쏘아졌다.
‘빠르긴 하네.’
지난번 봤을 때랑은 느낌이 사뭇 달랐다.
랭크 2의 눈으론 좇는 게 고작이었지만 랭크 4인 지금은 어느 정도 반응까지 가능했다.
물론 저 검이 내 목을 노리고 들어온다면 반응 못하겠지만.
카앙!
이어서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인형 주위로 불꽃이 터져 나왔다.
“으응?”
평범한 쇳덩이라면 두 동강 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저건 하룬과 내가 합심해서 만든 아티팩트.
인형엔 대각선으로 깊은 상처가 남아 있었지만 두 동강 나진 않았다.
“이거……. 튼튼하군요.”
단숨에 잘라 버릴 심산이었는지 프리아나는 자존심이 상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녀석의 자존심이 구져진 건 그렇다 치고, 가까이서 그의 검술을 지켜본 감상은…….
“빠르네.”
어찌 보면 칭찬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빠르다. 그것도 굉장히.
하지만 그게 다다.
프리아나의 일격에 대한 감상은 그게 다였다.
적의 빈틈을 만들 기예도 없고 변칙적인 상황에 반응할 재치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러니 크로드한테 발렸지.’
크로드가 랭크가 높아서 지긴 했지만 아마 같은 랭크여도 프리아나가 졌을 거다.
오로지 신체의 능력에만 의존한 속검.
그게 지금의 프리아나였다.
‘제니스 기사학교 출신이라 그런가?’
아마 그게 맞을 거다.
기본적인 검을 쥐는 자세부터 보법 하나하나가 제니스 기사학교에서 묘사되는 검법과 빼다 박은 수준이었다.
너무 강직한 그의 성격이 오히려 독이 됐다.
기사 학교에서 가르친 교본을 빼다 박은 기사. 그게 프리아나였다.
게다가 ‘랭크 빨로 세계정복!’의 설정 속에 빼다 박힌, 한 가지 중요한 결점이 눈에 띄었다.
‘오히려 좋아. 여기서 적당한 지도만 받는다면 더 성장세가 빨라진다는 거니까.’
그는 이 상태 그대로 수련만 해, 랭크 7까지 오른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저마다 가문의 숨겨진 비급이나 생사를 오가는 전투 끝에 상위 랭크로 거듭난다.
그거 없이도 랭크 7까지 오른다는 거다.
‘이 녀석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프리아나에게 한마디 거들었다.
“정말 빠르군.”
“감사합니다.”
프리아나는 조금은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괜히 얄미워 한마디 거들었다.
“솔직하게 말해 줘?”
“…예?”
“빠르긴 한데… 그게 다야. 쓸데없이 오러가 낭비되고 있고 변수에 반응 못할 거란 게 느껴질 정도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프리아나는 자존심이 상한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크로드와의 싸움을 떠올린 듯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제니스 기사학교 교본 1장. 기사의 강함은 곧 검술 랭크에 있다.”
“…….”
기사학교 교본은 대외비가 기본이지만, 교본의 포문을 여는 첫 번째 글귀는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는 내용이다.
이 세상에선 당연한 진리이자 근본인 이야기.
기사는 검술 랭크를 따르고, 마법사는 마법 랭크를 따른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새빨간 거짓말이지.’
그리고 지금부터 난. 이 새빨간 거짓말을 깨부숴 줘야 했다.
이 소설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고지식해질 놈한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