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34화 (34/222)

34화

어느덧 시간이 지나 약속했던 정오가 다가왔다.

약속한 장소는 크래바 영지의 관저 앞에 위치한 고급스런 찻집.

오래전부터 나름 유서 깊은 찻집이다.

영화에서나 볼법한 중세풍의 고풍스런 가구로 제법 괜찮게 꾸며져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장의 인사를 받으며 찻집으로 들어섰다.

혹시 몰라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왔다.

하지만 찻집에 프리아나로 보이는 자는 없었다.

“2층 창가 쪽으로 자릴 내어줘라.”

“옙! 그럼 이쪽으로…….”

주인의 안내를 따라 출입구가 훤히 보이는 자리에 앉아 차를 주문했다.

조금 가격이 있는 찻집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이 돈보단 프리아나가 조금 더 중요했으니까.

난 차분히 창가에 앉아 프리아나를 기다렸다.

백작씩이나 되는 귀족이 기다린다는 게 좀 모양 빠지긴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프리아나다.

작중에선 검술 랭크 7까지 오르는 인재 중에 인재.

지금 당장 그의 랭크를 봐도 검술 랭크 5.

그의 마음을 잡을 수만 있다면 몇 날 며칠이고 기다릴 수 있다.

“정오라 했지.”

이제 곧 약속 시간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찻집 입구를 유심히 살폈다.

호로록.

뜨끈한 꽃차를 한잔 후후 불어 마시며 주윌 살피는데, 허름한 차림새의 남자가 나타났다.

‘방랑기사?’

말이 방랑기사지 사실상 거지꼴이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크로드는 아니었다.

크로드는 흑발인 반면 저자는 금발이었으니까.

마치 프리아나와 똑 닮은 금발.

“음?”

자세히 보니 예전 발디그 던전에서 만났던 프리아나 그자가 맞았다.

예전에 봤을 땐 멋들어진 귀공자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방랑기사라 해도 믿었을 정도다.

허름한 거적때기로 몸을 가리고 허리춤엔 낡은 검집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윤기 나는 금발 머리칼만이 어색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쩌면 에런골드에게 버림받고 진짜 방랑기사가 된 걸지도 모른다.

“흐음.”

그렇담 그와의 만남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았다.

뭐가 됐건 나 때문에 따르던 주인을 잃었으니까.

‘그냥 튈까?’

“…아니지.”

튄다고 뭐 달라질 것도 아니고.

프리아나쯤 되는 자라면 마음만 먹으면 금방 날 만나러 올 거다.

그땐 지금처럼 대낮의 찻집이 아니라 늦은 밤 침실로 칼을 들고 오겠지만.

마음을 굳히곤 프리아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이! 여기다!”

이내 프리아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녀석은 날 보자마자 허리춤에 있던 검을 꼭 쥐었다.

그리곤 날 향해 성큼성큼 계단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서 오십… 으앗!”

프리아나는 찻집 주인을 거칠게 밀치곤 내 앞에 섰다.

걱정스런 눈빛으로 눈칠 살피는 주인장에게 적당히 손을 흔들었다.

‘X끼. 눈빛 한 번 사납네.’

“이안 임페라 공자님. 맞습니까?”

프리아나는 내게 존칭을 써 가며 물었다.

그가 기사단장을 달기 전까진 준남작 태생이었다 하니, 태생만 놓고 보면 내가 위긴 했다.

장차 아이소테르의 기사단장이 될 운명이었던 기사.

그래서 그런지 후줄근한 차림새였지만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기백이 남달랐다.

고작해야 서른도 안 되는 외모에 이만한 기백이라니.

조연급 되는 인물은 확실히 태가 나는 건가.

“그래. 오랜만이로군, 프리아나. 결투 재판 이후로 처음인가?”

슬쩍 결투 재판 얘기를 꺼내자 녀석의 눈썹이 움찔했다.

대뜸 검을 뽑아 들거나 하지 않는 걸 보니 나쁜 마음을 먹고 찾아온 건 아닌 듯했다.

녀석은 내 앞에 선 채로 고갤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올려다보려니 목이 아프군. 높은 분을 섬기는 기사라면 귀족 앞에서 그래도 되는 건가?”

다시 한번 녀석의 눈빛이 흔들렸다.

방금 한 말은 깡촌의 백작가 아들내미가 알 만한 정보가 아니었다.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겁니까?”

“백작쯤 되면 아는 게 많아지거든.”

“…….”

묘한 긴장감이 둘 사이에서 흘렀다.

그가 에런골드의 명을 따랐다는 건 극비 중에 극비.

하지만 난 일부러 녀석에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 말했다.

놈이 무슨 심보로 날 찾아온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더 이상 에런골드를 섬기는 것 같진 않고.

“…역시 공자님께는 뭔가 있군요.”

“그렇게 생각하나?”

난 어깰 으쓱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갑자기.

쿵!

‘으악! 깜짝이야.’

프리아나가 무릎을 꿇었다.

그 바람에 속으론 놀랐지만 겉으론 애써 태연한 척했다.

“뭐지?”

“공자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아니, 맞았었습니다. 전 국왕 전하를 섬기던 몸이었으니.”

“흐음……?”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전 더 이상 전하를 섬기지 않습니다. 전하께 하사 받은 옷과 검집까지 모두 반납해 버린 뒤입니다.”

“그래 보이는군.”

외관만 놓고 보더라도 충분히 그래 보였다.

거기다 국왕을 섬기는 기사가 이리 함부로 무릎을 꿇진 않을 테니까.

프리아나가 무릎을 꿇은 건 예상외다.

강직한 기사의 표본인 그가 나 같은 거지 백작에게 무릎을 꿇을 일은 없다.

그런데 왜?

무표정하게 녀석을 바라보면서도 머리는 재빠르게 돌아갔다.

그렇게 뭔가 실마리가 보이려던 찰나, 프리아나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결투 재판에서 만났던 공자님의 대행인 기사. 그분을 만나고 싶습니다.”

“호오.”

“검의 속도만큼은 상위 랭크들에게도 주눅 들지 않던 접니다. 하지만 전 그분에게 패배했습니다. 그것도 무참히.”

난 조용히 녀석의 말을 들었다.

“그러니 이렇게 부탁하겠습니다! 공자님의 대행인으로 나왔던 기사! 그분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정리해 보면 이거다.

녀석은 크로드와 싸웠고, 순수하게 실력만으로 발렸다.

그게 프리아나의 가슴 깊숙이 새겨진 거다. 크로드에게 뭔갈 배우고 싶다고.

그러니 연줄이 있는 내게 부탁하고 있었다.

“크흠.”

난 치솟는 입꼬리를 숨기려 안간힘을 썼다.

지금 이건 기회다. 다른 이도 아니고 프리아나를 내 편으로 쓸 수 있는 기회.

여긴 ‘랭크빨로 세계정복!’의 세계.

랭크만 높으면 다 씹어 먹는 세계관이다.

그런데 랭크 7까지 오를 인재가 내게 엎드려 절하고 있다.

크로드를 만나게 해 달라면서 말이다.

그와 만나 다시 한번 무예를 겨루고 싶은 거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과연 진퉁 기사가 따로 없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무를 겨루고 싶다고 국왕에 대한 충성까지 버리다니.

‘보아하니 크로드가 내 부하쯤 되는 줄 아나 보군.’

그가 대행인으로 나섰으니 그렇게 볼만했다.

실상은 어디까지나 상호간에 조건을 이행 할 뿐인 계약이었지만.

아니, 지금쯤이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날 줘 패려 달려오고 있을 테고.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프리아나는 이 사실을 모른다.

‘어디 한 번 꼬셔 볼까?’

“크흠!”

난 괜히 헛기침 한 번 하곤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친구를 찾고 싶은가 보군.”

“그렇습니다!”

“일단 자리에 앉아라. 누가 본다.”

“아.”

프리아나는 그제야 주변 시선이 신경 쓰인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옆에 의자에 자릴 잡았다.

“우선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그자는 지금 여기 없네.”

“…네.”

프리아나는 내 말에 별다른 의심 없이 수긍하는 듯했다.

‘으음?’

뭔가 등골이 오싹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 자식이?’

이건 분명 ‘거짓 간파’ 스킬이 시전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녀석은 겉으론 아닌 척하면서 ’거짓 간파‘ 스킬을 쓰고 있었다.

소설에서도 프리아나가 자주 쓰던 스킬이다.

자기보다 낮거나 동등한 랭크의 소유자에게만 사용 가능한 스킬.

효과는 이름 그대로 거짓인지 아닌지 파악할 수 있는 스킬이다.

‘이럴 땐 다 방법이 있지.’

다만 거짓인지 아닌지만 간파할 수 있고, 단순한 말장난 같은 건 간파하지 못한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그자는 내 말에 따라 잠깐 어딜 가서 말이야.”

“…그렇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크로드는 기사단의 유물을 찾아 내가 알려 준 대숲림으로 간 거니까.

소설 속에서의 그는 이것을 맹신하지 않는다.

많은 경험으로 이 스킬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걸 경험해서이다.

하지만 지금의 프리아나는 아직 순수한 거 같았다.

프리아나는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다.

망나니 백작가 아들로 유명한 이안 임페라. 이자는 사실 저력을 갖고 있는 자라고.

그러니 크로드 정도 되는 인물을 제 하수인으로 부리고 있는 거겠지.

이런 식의 착각을 할 것이다.

‘그럼 난 그걸 최대한 이용해 먹어야지.’

“그, 그럼 어떻게 하면 그 기사 분을 뵐 수 있는 겁니까?”

“흠… 아마 조만간 다시 내게 올 테니, 그때까지 기다리면 만날 수 있기야 하겠지.”

“그렇군요!”

프리아나는 내 말에 표정이 밝아졌다.

난 그런 그에게 어깰 으쓱하며 희망을 밟아 줬다.

“하지만 내가 왜 그걸 주선해 줘야 하지?”

“그건……!”

“자네는 다른 누구도 아닌 베네르 백작을 위해 싸웠던 자 아닌가? 이유가 어찌 됐건 나와 베네르의 관계는 자네도 잘 알 텐데?”

“…….”

“난 가문의 숙적을 위해 싸웠던 놈과 친하게 지내고 싶진 않아. 더군다나 내 아버지를 블랭크로 만들려 했던 놈이면 더더욱.”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더 이상 말 하지 마라. 옛 주인과의 신의까지 져 버리는 녀석은 정말 질색이니.”

프리아나는 아무런 말도 못 한 채로 입술만 깨물 뿐이었다.

크로드를 만나기 위해 가진 모든 걸 내팽개치고 왔는데, 그를 만날 수 없다니.

‘슬슬 넘어오겠는데.’

“하지만 정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제발! 알려 주십쇼! 그 방법이란 게 뭡니까? 뭐든 하겠습니다!”

“뭐든지?”

“네!”

난 못 이기는 척 한마디 툭 던졌다.

“생판 남이면 모르겠지만. 날 위해 일해 주는 자라면, 확실하게 만날 거다.”

“공자님을 위해 일한다면……?”

“후후.”

‘흐흐! 됐다!’

여기까지 왔으면 반은 성공한 거다.

프리아나는 크로드에게 배움을 받으려 뭐든 하려 할 테니까.

절대적인 충성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좋은 패가 생기는 거다.

베네르 백작의 마수, 더 나아가 에런골드 2세의 마수를 피하려면 강한 부하가 필요했다.

프리아나라면 그에 걸맞는 방패가 되어 주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크로드가 프리아나를 순순히 받아 줄 리가 없지.’

기사단의 유물의 상태를 확인한 크로드는 지금쯤 화가 머리끝까지 단단히 나 있을 거다.

그런 놈한테 대뜸 프리아나를 지도해 줘라?

괜히 한 대라도 더 얻어터지지 않으면 감지덕지다.

‘뭐……. 가르치는 건 자신 있으니까.’

사실 프리아나를 크로드에게 맡길 생각은 없다.

녀석을 가르쳐 랭크 업을 경험시켜 주는 건 크로드가 아니라 나다.

발할라 시스템으로 999렙까지 찍은 고인물 중에 고인물.

랭크만 낮지 검술만큼은 둘에게 뒤처지지 않는다 자부한다.

‘제자보다 약한 스승이라는 게 좀 웃기긴 하지만…….’

뭐 이 소설 속에 그런 놈들이 한둘 있는 것도 아니고.

나 정도면 괜찮은 스승이다.

탁.

난 마시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오늘은 이쯤하지.”

“입맛에 맞으셨습니까?”

내가 일어서자 찻집 주인이 다가왔다.

“그럭저럭 괜찮더군.”

찻집 주인은 다행이란 듯 싱긋 미소 지었다.

“계산은 저 친구가 할 거다.”

그러면서 프리아나를 가리켰다.

프리아나는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한지 한참을 멀뚱하게 서 있었다.

더 이상 자질구레한 설명은 그만뒀다.

대신 조용히 찻집을 빠져나와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프리아나는 조금은 멍한 얼굴로 망설이다 찻값을 내곤 내 뒤를 쫄래쫄래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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