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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33화 (33/222)

33화

‘죽이긴 좀 그렇고……. 당분간 고생 좀 하게 해 줘야지.’

오러 소드로 하위 랭크를 베었다간 그대로 두 동강 나 버린다.

대신 검날이 부딪히기 직전 손목을 비틀어 면으로 후려쳤다.

빠각!

“크악!”

몸뚱이가 잘려 나가진 않았지만 충분히 위력적인 건 매한가지였다.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놈들이 픽픽 쓰러졌다.

이건 뭐 땅 짚고 헤엄치는 수준이다.

연기 속에서 사지분간도 못하는 놈들을 쥐어 패는 것뿐이니까.

“대장……. 으악!”

“비, 비겁한 놈이……!”

멀지 않은 곳에서 쿠스라는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제일 마지막이다.’

우두머리만 상대할 수도 있지만 지금 내가 하려는 건 서열 정리다.

다시는 까불지 못하게 흠씬 두들겨 패서 공포를 각인시켜 놓을 생각이다.

그래야 다시는 까불 생각을 안 할 테니까.

“비겁? 열댓 명이서 달려들어 놓고 비겁?”

“이익!”

놈은 맞는 말에 아무런 대꾸도 못한 채 허공에 검만 휘둘렀다.

서걱!

녀석의 손끝에서 고깃덩이가 썰려 나가는 감촉이 느껴졌지만.

“자, 잡았다!”

“으악! 대장!”

“으응?”

눈 먼 검에 애꿎은 동료 하나만 더 잃었을 뿐이다.

난 착실하게 연기 속에서 놈들의 수를 줄여 나갔다.

빠악!

마지막 한 놈의 복부를 걷어차고 나서야 화약으로 생겨난 연기가 사라졌다.

이윽고 연기가 걷히고 나타난 건, 벌벌 떨며 서 있는 쿠스와 하나도 빠짐없이 빈사 상태로 쓰러진 부하들뿐이었다.

“아악…….”

“으어억…….”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쿠스는 눈앞의 현실이 믿기지 않는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체 어찌 된 거냐!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블랭크나 다름없던 놈이!”

“블랭크?”

눈살을 찌푸리며 쿠스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흐어억! 오지 마!”

놈은 가지고 있던 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저항했다.

이 상황에도 검을 버리지 않다니.

쿠스는 언젠가 사고를 칠 사람이라 생각이 되었다. 그를 안고 가기엔 위험부담이 컸다.

계획을 변경해야 할 듯했다.

미약하게 마나가 맴돌긴 했지만 오러 급은 아니었다.

난 녀석을 향해 오러가 흘러나오는 검을 보란 듯이 내보였다.

무리한 탓에 폐가 찌부러질 것만 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지금 내가 보여 줘야 할 건 쇼맨십이다.

앞으로 다시는 까불지 못할 상대란 걸 알려 주는 쇼맨십.

“네 눈엔 이게 블랭크나 다름없는 놈으로 보이나?”

“허억! 오러 소드! 그렇다는 건……!”

쓰러진 다른 놈들도 오러 소드를 보자 겁먹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챙그랑!

놈이 들고 있던 검이 떨어지며 날카로운 금속음을 냈다.

쿠스는 그제야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제, 제발! 제가 주인을 몰라 뵀습니다!”

“크흐흐……. 주인? 이제 와서?”

“죄송합니다! 지, 지금부터라도 당신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제 이름은 쿠…….”

“아니. 듣기 싫다.”

“…이이익!”

녀석은 마지막 발악으로 검을 다시 주어 들곤 달려들었다.

챙!

가볍게 놈의 검을 맞받아치자 검이 두 동강 나며 볼썽사납게 바닥을 뒹굴었다.

그리고 한 번 더 용린검이 깔끔한 호를 그렸다.

서걱!

최후의 발악으로 몸을 내던지던 표정 그대로 놈의 머리통이 핑그르 돌았다.

이내 땅에 대가릴 처박는 것으로 놈의 숨은 끊어졌다.

“쯧.”

제일 깝죽거리던 쿠스를 처치하고 남은 놈들을 한 번 둘러봤다.

“히, 히익……!”

최대한 손속을 써서 그런지 죽은 자들은 거의 없었다.

재수 없게 쿠스의 눈 먼 검에 맞은 클랜원 하나가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폭발에 휘말린 놈들도 다리뼈가 작살이 났지만 죽지는 않았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자연사지. 복합골절로 인한 과다출혈 자연사.’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지만 아직 내겐 그럴 만한 여유는 없었다.

이들 하나하나가 쓸 만한 자원이니까.

지금 나로선 자원을 함부로 낭비할 순 없었다.

“이봐.”

“네, 네엣!”

클랜원들은 바닥을 절절 기면서도 우렁찬 대답소릴 냈다.

여기서 까불었다간 목숨이 달아날 테니 어떻게든 눈에 들려 애쓰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네놈들 살점을 포를 떠 버리고 싶지만…….”

“으으…….”

“여기 있는 녀석을 봐서 그건 참겠다.”

그렇게 말하며 옆에 있던 이슬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슬린의 입에서 작게 안도의 한숨 같은 게 들려왔다.

“하지만 참는 건 이번 한번이 유일할 거다. 만에 하나라도 이런 일이 또 발생한다면…….”

난 쓰러진 녀석들과 한 번씩 눈을 마주치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몸 성히 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마라.”

“히끅!”

“가, 감사합니다!”

“흥.”

용린검을 검집에 꽂고 뒤돌아섰다.

“이슬린. 부상자들을 치료해라. 몸이 다 나으면 적어도 한 달간은 죽어라 굴리고. 알겠나?”

“네!”

이슬린은 고갤 끄덕이며 부상자들을 향해 달려갔다.

“으으… 죄송합니다. 대장……. 쿠스 놈이 합류 안 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하는 바람에…….”

“시끄러. 죄송할 거면 죄송할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악!”

이슬린이 부러진 뼈를 맞추자 고통스런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저들도 잘못한건 아는지 눈물만 뚝뚝 흘리며 참았다.

“힐.”

바앙.

이슬린은 클랜원들의 뼈를 대충 다 맞추고 회복 스킬을 사용했다.

적당히 죽지 않을 정도로만 응급처치를 끝마쳤다.

나머진 자연 치유로 알아서 회복될 거다.

“흐음…….”

그러는 동안 난 손아귀를 쥐었다 폈다 하며 힘을 가늠했다.

확실히 랭크 4라 그런지 힘이 남달랐다.

발할라 시스템으로 날아다니던 때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못하지만, 같은 랭크와 싸운다면 무조건 이길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말하면, 나 정도 경험이 있어도 상위 랭크를 이길 순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참. 웃기는 시스템이지. 이 랭크 시스템이라는 건.’

랭크 시스템에 숨겨진 이면을 떠올려 본 난 어이없다는 듯 조소가 흘러나왔다.

“공자님.”

“끝났나?”

“네.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뭐가?”

“저들의 목숨을 내버려두신 점 말입니다.”

“흥. 지금도 그냥 죽여 버릴까 말까 고민 중이다만.”

“…공자님은 정말 특이하신 분이시군요.”

“그렇게 생각하든가.”

난 퉁명스레 대답하곤 영지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슬린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내 뒤를 따라 나섰다.

* * *

이단 심문관 일행이 로물루를 데려간 지 사흘이 지났다.

하지만 금방 끝날 것 같던 심문 결과는 아직까지도 내려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혹시나 하는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설마 신께 맹세한다 해 놓고 거짓 보고를?’

난 고갤 홰홰 저으며 괜한 생각을 떨쳐 내려 애썼다.

거짓 보고야 언젠간 들통나기 마련이다.

게다간 이단 심문관이 신을 걸어 놓고 거짓말을 쳤다? 내막이 밝혀지는 순간 신성 모독으로 즉결처형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차분히 결과 보고를 기다리는 것 말곤 없었다.

일단 로물루에 관한 건 이단 심문관에게 맡기고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짤랑짤랑.

탁자에 놓인 종을 짧게 두 번 흔들었다.

이슬린과 일레느를 호출하는 용도다.

매번 모양 빠지게 소리치기도 그렇고 해서 하나 마련해 뒀다.

한 번 울리면 일레느.

두 번 울리면 이슬린.

처음 이를 들은 일레느는 내심 자기가 먼저라 생각하는지 조금은 우쭐해하기도 했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지난번에 내가 말한 건 어찌 됐지?”

“프리아나라는 자에 대한 것 말이신가요?”

난 대답 대신 고갤 끄덕였다.

쿠스란 녀석 때문에 클랜원들이 빈사 상태에 있긴 하지만, 당시 외부로 나가 있던 이들은 제 역할을 계속해 주고 있었다.

“아직 확실한 거처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간의 행적에 대해선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그것부터라도 말씀드릴까요?”

“그래라.”

“일단. 알려진 바론 정해진 거처는 없습니다. 결투 재판에서 패배하고 난 후, 소문에 의하면 모시던 주인에게 버림받은 모양입니다. 원래 머물던 거처도 정리해 버리고 여기저기 떠돌고 다닌다고 합니다.”

“그래?”

‘이거 괜히 미안해지네.’

프리아나는 어중띤 기사가 아니다.

장차 아이소테르의 기사단장이 될 운명이기도 했던 앞길 창창한 캐릭터다.

그런 녀석을 그리 만들어서 그런지 가슴이 쿡쿡 찔렸다.

“…가장 최근에 발견된 건 어디지?”

“사흘 전에 크래바 영지에서 발견됐다고 합니다.”

“사흘 전이라.”

크래바 영지면 우리 임페라 바로 위쪽이다.

원래 수도에 살았던 녀석이니까 위치상으로만 따지면 점점 내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기분탓…이라기엔 묘하게 거슬렸다.

부르르…….

이슬린과 얘길 나누고 있는데 어디선가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아. 죄송합니다. 잠시.”

이슬린은 품속에서 둥그런 구슬을 꺼내 들었다.

통신 마법이 가능한 마법구였다.

“…뭐라고?”

마법구에 귀를 기울이던 이슬린은 화들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지?”

“그, 그게…….”

이슬린은 자기 귀를 의심하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방금 말씀하셨던 프리아나. 그자의 행적에 관한 겁니다만…….”

벌써 결과나 나왔다고?

이래서 도적 클랜 하나 있으면 좋은 거다. 딱 필요한 타이밍에 정보를 얻어 오다니.

그런데 잠깐.

“…다만?”

“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그게……. 프리아나의 뒤를 쫓던 클랜원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녀석이 가진 통신구가…….”

“음.”

하긴 프리아나는 랭크 5의 괴물이다.

그쯤 되면 자기 뒤를 밟는 낌새쯤은 금세 눈치채고도 남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처리를 한다고?”

아마 뒤를 밟던 사람에 대해 진작에 눈치를 챘을 텐데, 여기까지 가만히 둔 것부터, 지금에 와서야 처리한 것까지.

프리아나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부하는 아마 죽었을…….

“아닙니다. 지금 그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습니다.”

“그래?”

“그것도 프리아나 본인한테서 메시지를 받았다는군요.”

“호오.”

이거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는 듯한데.

“나한테 보내는 메시지겠군.”

“네. 공자님께 그자가 말했습니다. 내일 정오 크래바 영지의 관저 앞에 있는 찻집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입니다.”

날 기다리겠다고? 왜?

“설마 나한테 복수하겠다고 그러는 건가?”

“그건… 확답을 드릴 순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프리아나한테 그리 크게 척을 진 건 아닐 텐데.

결투 재판에서 크리드가 이기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당한 결투 중에 벌어진 일이다.

소설에 따르면 프리아나는 강직한 기사의 표본이라 할 정도로 묘사되던 인물이다.

결투에서 졌다고 쩨쩨하게 복수하고 그런 놈은 아니었다.

‘아니지. 그건 어디까지나 소설에서 이야기야. 아직 어리니 혈기왕성할 수도 있다.’

아무리 못해도 10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의 시점.

지금의 프리아나도 똑같이 강직한 기사의 표본이라 장담할 순 없다.

“뭣 때문인지는 말이 없었나?”

“네. 그저 기다리겠다는 말뿐이었습니다.”

“흠.”

녀석이 여기까지 오겠다고 메시지까지 남긴 마당에 피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뭐가 됐건 일단 만나는 편이 좋을 듯싶었다.

‘복수는… 아니겠지.’

복수였다면 애초에 찾아오겠다고 미리 말을 하진 않았을 거다.

몰래 잠입해서 목을 그었으면 모를까.

“…설마?”

혹시 날 섬기고 싶어서 그런가?

“…아니겠지.”

아쉽지만 그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프리아나쯤 되는 자를 부리려면 세 가지가 필요했다.

권력이 강하거나.

본인이 강하거나.

돈이 엄청 많거나.

당연하게도 난 세 가지 모두 해당되지 않았다.

“후.”

지금의 난 빚이나 한 푼 줄었으면 하는 거지 백작에 지나지 않았다.

프리아나를 부리는 건 꿈에서나 그릴 법한 일이다.

‘일단 만나 봐야 알겠군.’

내일 정오.

혹시 모를 일이니 용린검을 잘 챙기곤 약속 시간만을 기다렸다.

* * *

“여긴가.”

모든 일이 끝나고 새로운 일이 시작된 곳.

프리아나는 허리춤의 검을 꼭 쥔 채로 상념에 잠겼다.

에런골드 2세의 명을 받들던 기사.

국왕이 직접 하달한 명령만 해결한다면, 창창한 앞길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모든 건 이 영지에서 끝났다.

그는 국왕의 명령을 따르지 못했고, 이름도 모르는 방랑 기사에게 패배했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운이 나빴다거나 비겁한 술수에 당한 게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실력만으로 패배했다. 그것도 그가 자신하는 속검보다 더 빠른 검격에.

꾸욱.

프리아나는 허름한 검집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국왕에게 하사 받은 화려한 금으로 장식된 검집은 반납한 지 오래다.

직속 기사만이 받을 수 있는 왕의 문양이 새겨진 표식도 이젠 없었다.

낡은 검집에 가문에서 받아 온 검.

그리고 허름한 옷차림.

그게 프리아나가 가진 전부였다.

“후.”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곤 약속했던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간 묵혀 왔던 숙원을 끝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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