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일단 급한 불은 껐다.
아직 베네르 백작 놈이 버젓이 살아 있고, 천문학적인 빚도 그대로긴 하다만.
ㅈ망행 급행열차 선로를 바꾸는 데까진 성공했으니까.
“이제 좀 살겠네.”
똑똑.
이제 좀 편히 쉬려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지?’
짧게 두 번 두드리는걸 보니 이슬린인 듯싶었다.
“공자님. 들어가 봐도 될까요?”
“그래. 들어와라.”
이슬린은 고갤 한 번 숙이며 방으로 들어섰다.
저택에선 일러둔 대로 메이드복을 입고 있으니 제법 태가 났다.
처음엔 어색한 듯했지만 며칠 지나니 적응한 듯했다.
적응인지 체념인지 잘 모르겠지만.
로물루를 잡을 때 그녀의 덕도 꽤나 컸다.
사방에 흩어진 구울들의 시선을 잡아 준 덕분에 손속이 한결 편해졌으니까.
“뭐지?”
“그게…….”
이슬린은 곤란하단 얼굴로 말을 망설였다. 뭐가 곤란하길래 그러는 걸까.
잠시 생각해 보니 답은 쉽게 나왔다.
“클랜원들 때문인가?”
“…네.”
“흠.”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일이다.
도적 클랜에 속한 자들이라면 대부분 평민이나 그 이하 출신이다.
개중엔 귀족을 향해 그리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자들도 많았다.
게다가 흑마법사 로물루는 잡혔다.
이제 이안 클랜, 아니 지오 클랜의 클랜원이 괜한 덤터기를 쓸 일은 없어졌다.
저들 사이에서 슬슬 얘기가 나오기 시작할 때다.
백작가에 얽혀 있지 말고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자고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슬린의 마음이 떠나진 않았다는 거다.
그녀가 날 떠나기로 마음먹었다면 보고는커녕 곧바로 부하들과 짐 싸 들고 나갔을 테니까.
지금의 나로선 이안 클랜은 놓치기 아쉬운 자원이다.
로물루의 소재 파악까지 금방 마친 걸 보면 이 근방 사정은 훤히 꿰뚫고 있는 녀석들이다.
조금 과장을 보탠다면 남의 집 밥숟가락까지 알 정도?
내가 소설 속 스토리를 안다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금에서 4년 가까이 지난 뒤의 시점부터다.
원래 설정대로라면 귀족들간의 피 튀기는 혈전이 계속되고, 수많은 귀족들이 몰락한다.
하지만 그 시발점이 완벽하게 틀어졌다.
바뀐 세세한 스토리 라인까지 파악 위해선 정보가 절실했다.
이안 클랜은 이를 위한 훌륭한 초석이 되어 줄 소중한 자원이다.
설령 내게 반기를 들었다고 해도 말이다.
‘한 번 서열 정리 좀 해 주긴 해야 했어.’
적당히 몽둥이찜질 좀 해 주면 알아서 기어 들어오게 돼 있다.
“내게 반기를 든 놈들은 몇이나 되지?”
“전부는 아닙니다! 대신 골치 아픈 녀석이 하나…….”
“하나?”
“네. 쿠스라는 놈입니다. 제가 저택에 있는 동안 녀석이 다른 클랜원들을 충동질하는 바람에…….”
“흐음.”
‘한 놈이라면 나야 더 편하지. 그 자식만 두들겨 패면 그만이니까.’
생각을 정리한 난 이슬린에게 말했다.
“이슬린.”
“네. 공자님.”
“클랜원들을 소집해라. 나한테 불만 있는 놈들을 위주로.”
“네? 하지만 그건…….”
“걱정 마라. 놈들을 ‘대화’를 하려는 것뿐이니. 그것도 나 혼자서 말이다.”
“아……. 네.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이슬린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클랜원들을 몰살시키려나 걱정하고 있던 모양이다.
‘짜식. 어떨 땐 괄괄한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순하단 말이야.’
* * *
지오 크리시니의 죽음으로 클랜 마스터는 자동으로 이슬린이 되었다.
하지만 클랜원이라고 그녀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건 아니었다.
이들은 도적 클랜이다. 절대적인 힘만으로 찍어 눌러야 겨우 말을 듣는 이들이다.
그런데 갑자기 깡촌 귀족의 공자놈을 따른다? 당연히 반발이 생길 수밖에 없다.
지오 크리시니를 죽인 것은 요행, 로물루를 처치한 거 이슬린.
아마 그들의 생각은 그러지 않을까 싶다.
더군다나 망나니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안 임페라기에 그렇게 보였으리라.
쿠스라는 놈의 생각에 확신을 심어 주기엔 충분했다.
‘랭크업도 했고, 올라간 랭크에 적응하려면 몸도 좀 풀어 줘야지.’
랭크빨로 세계정복!에 나오는 첫 번째 벽.
랭크 3과 랭크 4의 사이.
지금의 내 몸은 그걸 뛰어넘었다.
소설에서도 급격한 성장세가 시작되는 기점이 바로 이 첫 번째 벽이다.
이때부터 오러 비스무리한 걸 쓸 수 있다.
물론 잠깐 반짝거리는 수준에 지나지 않지만, 오러 소드와 마나 소드는 하늘과 땅 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저 마나를 흘리는 것에 불과한 게 마나 소드다.
그에 반해 오러 소드는 검 주위로 옅은 마나의 막을 형성시킨다.
단단한 강철이라 할지라도 오러 소드엔 무처럼 썰어 버릴 수도 있다.
랭크를 올릴수록 작게는 흠집을 내는 경지에서부터 크게는 강철 너머 고깃덩일 썰어 버리는 경지까지 차이가 난다.
“공자님, 여깁니다.”
“여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던 와중에 낡은 오두막에 도착했다.
이슬린을 비롯한 클랜원들을 처음 만났던 그 오두막이다.
약속했던 장소엔 이안 클랜의 일원들이 제법 모여 있었다.
개중에 아는 얼굴도 몇 보였다.
그 수가 대략 열댓 명 남짓.
놈들 중 한 녀석이 나와 이슬린을 보자 입을 이죽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셨구만! 우리의 ‘주인’이라시던 분이!”
구릿빛 피부에 어깨가 떡 벌어진 녀석이 빈정거리며 나섰다.
‘저게 쿠스라는 놈이군.’
다분히 도발적인 말투였지만 별것 아니라는 듯 넘겼다.
“저놈이 쿠스라는 놈인가? 내게 반기를 들었다던?”
“네.”
“하! 반기는 무슨! 우린 원래부터 자유로운 몸이었어! 너 따위 망나니를 따를까 보냐! 안 그래?”
“그, 그렇…죠.”
쿠스의 말에 다른 클랜원들이 못 이기는 척 맞장구쳤다.
몇몇 클랜원의 얼굴엔 시퍼런 멍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자유로운 몸이라. 그래서 지오 크리시니란 놈한테 얻어터지고 산 건가?”
“뭐, 뭐야?!”
슬쩍 던져 본 말인데 녀석은 찔리기라도 한 듯 괜히 소리쳤다.
‘진짜 얻어터지고 살았나 보네.’
소설에서 지오 클랜이 등장하던 시점.
그러니까 대략 수년 뒤에 지오 클랜원들은 이렇게 묘사된다.
[디아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클랜원들은 오금이 저려 왔다.
도망칠까?
하지만 그런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서 도망치기다로 했다간 지오 크리시니한테 죽을 때까지 얻어맞으니까.
그게 지오 크리시니가 미쳐 날뛰는 클랜원들을 길들인 방법이다.
“여기서 죽으나 대장한테 죽으나 그게 그거다!”
놈들은 호롱불에 달려드는 날파리마냥 디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게 끝이다.
소설에 묘사되던 지오 클랜은 그렇게 모두 디아의 손에 죽는다.
지오 크리시니의 행동은 이때부터 계속 이어졌던 게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지.”
그러면서 난 쿠스만은 또렷이 노려보며 덧붙였다.
“넌 특별히 예외다. 귀족에게 무례를 범한 녀석을 살려 둘 순 없지. 넌 반드시 죽을 거다.”
“흐, 흥! 그래 봤자 랭크도 얼마 안 되는 놈이 허세는!”
놈에게 어깃장을 놓자 움츠리는 모습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스릉.
허리춤에서 용린검을 뽑아내 놈들을 향해 겨눴다.
클랜원 가운데 강렬한 마나가 느껴지는 놈은 없었다.
고작해야 랭크4 초입에 지나지 않는 이슬린이 가장 강하게 느껴질 정도다.
‘몸 풀기엔 제격이군.’
“귀찮으니 한꺼번에 덤벼라.”
“이 자식이……!”
“어,어쩌죠? 대장?”
대장이란 말에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음이 터졌다. 벌써 지들끼리 대장까지 만들어 놨다니.
“어쩌긴! 예정했던 대로 진행한다!”
“그치만 귀족 나으릴 함부로 건드리는 건…….”
빠악!
“악!”
쿠스는 망설이던 클랜원의 턱주가릴 후려 갈겼다.
그 모습에 미적거리던 다른 이들의 정신이 번쩍 들어왔다.
“빨리 무기를 들어! 내 말 안 들려!”
“으윽…….”
결국 다른 놈들도 주섬주섬 무기를 꺼내 들기 시작했다.
“지, 지금이라도 저흴 보내 주시면 아무런 문제없을 겁니다, 나으리!”
겁에 질린 목소리로 부하 중 한 명이 소리쳤다.
하지만 쿠스는 어림도 없다는 듯 고함질렀다.
“헛소리! 나도 처음엔 그러려 했는데! 저 자식 면상을 보니까 마음이 바뀌었다! 그냥 죽여 버려야겠어!”
쿠스는 소매 속에 감추고 있던 줄을 하나 잡아당겼다.
달칵!
작은 기계음이 들려오며 내 주변에 하얀빛이 뿜어졌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 하얀 룬 문양이 새겨졌다.
‘이건……. 대마법 결계구만.’
결계 내에선 마법의 위력이 약해지는 결계다.
그리 강력한 수준 같진 않았지만 마법 랭크 3인 내겐 충분히 효과적이었다.
내가 검술과 마법을 사용하는 걸 알고 적어도 하나라도 묶어 놓겠단 심산이었다.
“이슬린.”
내 지시로 여태 가만히 있던 이슬린이 조용히 대답을 해 왔다.
아무래도 지금 상황이 불편한 듯 보였다.
“…네. 공자님.”
“넌 빠져라. 확실하게 힘의 차이를 보여 주려면 그리해야겠지.”
“하지만 공자님……!”
“내가 질 것 같나?”
“그건… 아닙니다.”
그녀는 단호하게 그렇게 말했다.
“넌 나한테서 가능성을 봤겠지. 그러니 내 편에 있는 거잖아.”
“맞습니다.”
“그럼 두 눈 똑똑히 뜨고 보도록. 네가 섬기는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네!”
이슬린은 뒤로 물러서며 자세를 잡았다.
결계가 펼쳐졌어도 자기 한 몸쯤은 알아서 보전할 테니 만에 하나 그녀가 인질로 잡히는 걱정은 덜어도 됐다.
내가 해야 할 건 눈앞의 개자식들을 줘 패는 거다.
‘감히 주인을 물어?’
난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마나는 점차 짙어지고 푸른빛의 형체, 오러를 갖추기 시작했다.
확실히 전보다 거대해진 마나의 그릇이 느껴졌다.
단전이 아닌 왼손의 룬 문양에서 터져 나오는 마나.
처음 마주했을 땐 마치 오른손을 움직이려는데 왼다리가 움직이는 듯한 괴리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적응이 끝난 지금은 다르다.
몸에 달려 있던 커다란 추 하나가 뜯겨져 나간 기분이다.
“크하핫! 이슬린! 지금이라도 우리 쪽으로 붙어라! 그럼 목숨만은 살려 주지! 그냥 죽이기엔 아까운 얼굴이니까!”
쿠스는 허세인지, 자신감인지 모를 헛소리들을 내뱉고 있었다.
“말이 많군. 그렇게 겁이 나나?”
“뭐라고? 겨우 랭크 3밖에 안 되는 놈이!”
“랭크 3이라……. 도적 클랜치곤 정보 습득이 늦군. 걸러 내게 돼서 다행이야.”
“…지랄!”
쿠스가 수신호를 내리자 주변에 있던 놈들이 저마다 가진 암기를 내던졌다.
단도, 쇠뇌, 폭발탄. 뭐 다양했다.
“죽여라!”
순식간에 사방에서 암기가 날아 들어왔다.
“후읍.”
난 호흡을 한 번 가다듬곤 용린검을 휘둘렀다.
랭크가 높으면 전신에 오러를 둘러 해결하겠지만 아직 그만한 경지는 아니다.
대신 검을 재빠르게 훑어 날라드는 암기를 하나하나 걷어 냈다.
카카캉!
사방에서 날아들던 암기는 그대로 힘을 잃고 추락했다.
이제 남은 건 폭발탄.
자그마한 단지에 폭약과 뇌관이 달린 일종의 수류탄 같은 물건이다.
빨간 불꽃이 타오르는 뇌관을 한번 훑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했던 폭발탄은 뇌관을 잃자 단순한 폭약 상자로 변했다.
얼른 폭약으로 가득 찬 상자들을 검 끝으로 받아 냈다.
그리곤 놈들 쪽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폭발탄은 그대로 놈들 주변에서 박살 나 검은 화약이 풀풀 터져 나왔다.
“으앗!”
탁!
손가락을 가볍게 퉁기자 마법 랭크 1의 스킬 파이어 볼트가 시전 됐다.
결계 탓에 미약하기 그지없는 불꽃이었지만 폭발판에 뇌관 역할을 하기엔 충분했다.
손끝을 타고 발사된 자그마한 불씨는 화약에 닿자마자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꽈아앙!
가루로 흩날려 있던 화약은 한층 더 강력한 폭발을 일으키며 놈들을 집어 삼켰다.
“크아악!”
이어진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놈들의 몸뚱이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검은 화약의 연기에 시야가 차단된 건 덤.
난 두 눈을 살짝 감은채로 소리에 집중했다.
“콜록! 콜록!”
갑작스레 연기를 들이 마신 놈들은 거친 기침을 내뱉었다.
“이 자식이!”
검은 연기 속에서 허우적대는 곳을 향해 발을 굴렀다.
허둥대며 우왕좌왕 하는 놈들을 향해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다.
이제부터는 뭣 모르고 주인을 문 개들에게 훈육을 선사할 시간이다.
어두컴컴한 검은 연기 속.
그 안에서 푸른 오러 소드가 홀로 밝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