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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31화 (31/222)

31화

난 얼른 놈의 잘린 손을 천으로 꽁꽁 묶었다.

이놈은 죽어선 안 된다.

반드시 살아서 베네르 백작의 사주를 받았단 걸 밝혀야 했다.

일부러 놈의 심장이 아닌 왼팔을 자른 것도 이 이유에서였다.

“후!”

대충 천으로 꽁꽁 싸매자 피는 멎었다. 마나는 이미 다 빠져나간 뒤였지만.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거다.

로물루를 대충 포박해 끌고 가기 좋게 만들자 이슬린도 공터로 달려왔다.

“다 끝났나?”

“…네.”

이슬린은 로물루를 붙잡은걸 보곤 조금은 놀란 눈치다.

이슬린이 내 밑으로 들어온 뒤로 내 랭크를 알려 준 상태다.

하위 랭크는 상위 랭크를 이길 수 없다.

그게 이슬린이 지금껏 알고 있던 법칙이자 진리였을 거다.

그런데 난 상위 랭크를 이겼다. 그것도 두 번이나.

한번쯤은 우연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두 번부터는 아니다.

“…대단하시군요.”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두 번 모두 정정당당히 싸운 건 아니었다만 그래도 이긴 건 이긴 거니까.

지금껏 어쩔 수 없이 날 위해 일하는 눈치였지만, 로물루를 처치하고 난 후라 그런지 눈빛이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이슬린은 가지고 온 아티팩트를 하나 꺼냈다.

족쇄와 수갑이 달린 쇠사슬이었다.

주로 죄수를 호송할 때 쓰는 아티팩트다.

“수갑은… 좀 허전하겠네요.”

“그렇군.”

로물루의 수갑 한쪽은 허전한 상태로 놔두고 족쇄를 채웠다.

그 상태로 이슬린이 마법구를 휘두르자 로물루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기절한 상태긴 하지만, 이대로라면 임페라 백작령까지 알아서 걸어갈 거다.

“가, 감사합니다! 나으리!”

“음?”

도망쳤던 마을 주민들이 다시 되돌아와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내게 절을 올려 댔다.

“흐흑! 나으리께서 안 계셨다면 저희 모두……!”

“아. 신경 쓰지 마라. 너희들이 좋아서 한 건 아니니까.”

이들은 베네르 백작령의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내 이름이 알려져서 좋을 건 없으니까.

“하, 하지만……!”

“그럼. 이놈은 데려가지.”

“하, 하다못해 존함만이라도!”

“…나중엔 알게 될 거다.”

“나으리!”

* * *

로물루를 데려오고 난 후, 하룬에게 부탁해 특제 철창까지 만들어 그를 가뒀다.

혹여나 베네르 백작의 사병들이 그를 죽이면 말짱 도루묵이다.

이토록 악랄한 놈을 살리겠다고 온갖 사람들까지 달려드는 게 맘에 안 들긴 하지만, 왕국 연합에서 이단 심문관이 오면 더 끔찍한 일도 겪을 테니 일단은 참았다.

다행히 임페라 백작령의 위병들까지 달려들어 철통 같이 감시한 끝에.

이단 심문관이 온 며칠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로물루는 자그마한 철창에 갇힌 채로 며칠간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았다.

그저 멍한 눈빛으로 허공만 바라볼 뿐이었다.

‘X끼. 남 목숨 귀한 줄은 모르면서 손 하나 잘렸다고 지랄은.’

이슬린은 멍한 눈빛의 로물루를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괜찮겠어요? 이 녀석. 아무 말도 안 하는데.”

“상관없을 거다. 이단 심문관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백을 받아 낼 테니. 게다가 블랭크라 자백을 얻어 내기도 쉬울 테고.”

“이단 심문관에 대해 잘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백작쯤 되면 다 알기 마련이다.”

이슬린은 어깰 한 번 으쓱하곤 넘어갔다.

당연히 방금 한 말은 거짓말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단 심문관은 귀족이라 할지라도 몇 번 볼 일도 없는 자들이다.

때문에 대개 흉흉한 소문만 무성할 뿐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백을 얻어 내는지는 베일에 감춰져 있다.

‘끔찍한 놈들이지.’

이단 심문관.

‘주신 히테라’를 섬기는 자들로 교황청 소속의 신관이다.

일단은 신관에 속하곤 있지만 주업무는 흑마법사의 색출이다.

아무리 왕족이라 할지라도 흑마법에 손을 댔다간 이단 심문관의 처벌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덕분에 교황청 소속이지만 권한만큼은 왕국의 왕에 못지않는 힘을 자랑했다.

임페라 백작령에 오는 심문관은 말석에 지나지 않겠지만, 이깟 영지 귀족 하나쯤은 세 치 혀로 날려 버리기엔 충분할 거다.

‘가능하면 밉보이진 말아야지.’

하지만 소설 속 심문관들의 묘사를 떠올려 보면, 그리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이단을 심문하는 자들이지만 소설에선 정치의 수단으로만 쓰이는 악랄한 놈들이니까.

이들이 심문을 하는 과정은 간단했다.

먼저 죄를 묻고, 아니라 하면 손목을 자른다.

그리고 자백제를 써 다시 죄를 묻고 죄가 있으면 죽인다.

죄가 없으면 살지만, 이미 잘린 손목이 다시 붙지는 않는다.

이 소설 속 세계관이 어떤 곳인지 생각해 보면, 손목이 잘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명확했다.

한 번 심문을 받는다면, 폐인이 되거나 죽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쯧.”

‘주신 히테라’라는 허울 좋은 방패 뒤에 숨어 악랄한 짓도 서슴지 않는, 그게 이단 심문관의 실상이다.

“심문관이 도착했다 합니다.”

“그, 그래! 어서 마중 나갈 채비를 하자꾸나!”

에이먼은 심문관을 마주하려니 적잖이 떨리는 듯했다.

하기사 제 영지에서 시귀폭이 터졌다는데, 죄를 소명하지 못하면 그에게까지 불똥이 튈 수 있는 일이었다.

“예. 아버지.”

귀족이 행차하면 자잘한 손님 맞을 준비를 했겠지만, 심문관은 딱히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저 로물루를 데리고 심문관에게 바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철컥.

로물루를 가둔 철창을 수레에 싣곤 밖으로 나섰다.

하룬은 보는 눈이 많아 일단 저택에서 숨어 있기로 했다.

짤랑.

밖에서 기다리자 맑은 종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청아한 종소리인데 뭔가 께름칙한 기운이 솔솔 풍겼다.

짤랑.

이윽고 이단 심문관과 그의 일행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느 신관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철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왠지 모를 압박감이 넘쳐흘렀다.

철가면의 생김새도 기괴하기 짝이 없다.

숨 내쉴 입 구멍조차 없이, 철가면에 난 구멍은 눈구멍 두 개뿐.

칠흑처럼 어두운 두 구멍 너머론 눈빛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따금 들썩이는 철가면만이 저들이 살아 있는 자들이라 말하고 있었다.

양손엔 하얀 칠을 한 건틀렛을 껴 랭크까지 보이진 않았지만, 한눈에 봐도 강해 보이는 놈들이다.

“꿀꺽!”

에이먼은 이단 심문관의 위세에 압도 되곤 마른침을 삼켰다.

그 모습에 한 남자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철가면의 기사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맨 얼굴을 드러낸 신관.

그는 허리에 종 하날 찬 채로 천천히 우리 쪽을 향해 걸어왔다.

“반갑습니다. 교황청 소속 심문관. 텔레인이라고 합니다.”

창백한 낯빛의 텔레인은 하얀 신관의 옷을 입은 채로 묘한 미소를 지었다.

“바, 반갑소. 임페라 백작령의 주인. 에이먼 임페라요.”

에이먼은 떨리는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이안입니다.”

가볍게 고갤 까닥이며 인사하자 텔레인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요 근래 명성이 자자하신 자제분이 이분이신가 보군요.”

“아하하…….”

“명성이랄 것까지야. 좋게 봐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후후……. 겸손의 미덕까지 갖추시다니. 과연 나쁜 소문은 부풀려지기 마련이라던 게 사실이군요.”

“…….”

뼈가 있는 말에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인사치레로 잡담이 오가나 싶었는데, 텔레인은 곧장 철장에 갇힌 흑마법사를 향해 고갤 돌렸다.

“그럼. 이자입니까? 시귀폭을 만들었다는 게?”

“네.”

“허허…….”

텔레인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적당한 시정조사를 마치고 추격대를 꾸리는 게 이들의 할 일.

하지만 추격대를 꾸리기도 전에 진범을 잡아 왔으니 놀랄 만했다.

“확실하겠지요?”

텔레인은 눈썹을 한번 으쓱하며 물었다.

“네. 자세한 내막은 녀석에게 들으면 될 겁니다. 자백제를 쓰든, 뭘 하든.”

“흐음. 그건 그렇습니다만.”

심문관은 쾡한 얼굴로 허공만 바라보는 로물루를 살펴봤다.

녀석은 왼손을 잃은 뒤론 계속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만큼 충격이 컸다. 이 세상에서 블랭크가 돼 버린다는 건.

“한 치의 거짓 없이 밝혀질 거라 생각하니 기쁘군요.”

“…….”

내 말에 텔레인의 눈썹이 꿈틀댔다.

에이먼은 나와 녀석 사이에 껴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놈이 했듯이 나도 뼈가 있는 말을 던졌다.

혹시나 헛짓거리 하지 말라고. 괜히 남한테 누명 씌우지 말고 제대로 밝혀내라.

그렇게 말하는 거다.

어쩌면 녀석도 아이소테르의 국왕 에런골드와 연이 닿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에런골드는 이단 심문관을 이용해 원래의 제 목적을 달성하려 할 가능성도 있었다.

로물루는 적당히 죽여 버리고, 배후에 에이먼이 있다고.

그럼 에이먼에게도 심문이 뒤따를 테고, 에이먼은 정해진 수순대로 손목이 잘리게 된다.

‘그럴 순 없지. 지금까지 내가 뭣 때문에 피똥 싸 가면서 고생했는데.’

난 표정 하나 고치지 않은 채로 텔레인과 시선을 마주했다.

텔레인은 살짝 동요가 일었지만 금세 표정을 고치곤 웃으며 화답했다.

“물론입니다. 주신님의 이름을 걸고 그리될 테니까요.”

“그것 참 영광이군요.”

놈이 주신의 이름까지 들먹이자 한시름 덜었다.

명색에 신관이니 주신의 이름까지 댄 이상 거짓 보고를 했다간 제 목이 달아날 테니까.

텔레인은 가볍게 고갤 숙이곤 옆에 기사 둘에게 눈짓했다.

“끌고 가라.”

로물루는 도살장의 가축처럼 철창 안에서 고개를 숙인 채 끌려갔다.

“끄, 끝난 겁니까?”

에이먼은 혹시 다른 뭔가가 더 있나 싶은지 슬쩍 물었다.

텔레인은 싱긋 미소 지으며 고갤 끄덕였다.

“저희가 할 일은 어디까지나 신의 심판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죄인을 인도 받았으니 이제 돌아가 봐야겠지요.”

“그…렇군요.”

다행히 왼손을 자른 걸로 별다른 말은 없었다. 어차피 나중 가면 지들이 잘랐을 테니.

“그럼.”

텔레인은 묘한 미소와 함께 로물루를 끌고 되돌아갔다.

“후!”

그의 미소에 에이먼은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볼 떈 역겨운 미소가 따로 없었지만.

“아들아! 뭣하러 심문관한테 그리 말한거냐! 하마터면…….”

“뭐 어떻습니까?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그렇긴 하다만……. 흐어……. 난 좀 쉬어야겠구나.”

에이먼은 진이 빠진 듯 비틀거리며 제 방으로 돌아갔다.

“후아! 무서웠어요!”

일레느는 심문관 일행이 자릴 뜨고 나서야 마음이 놓인 듯 한숨을 내쉬었다.

“대단해요! 도련님! 이단 심문관 앞에서도 주눅 하나 들지 않으시고……. 게다가 흑마법사를 잡기까지 하시다니!”

“그냥……. 운이 좋았지.”

“하핫! 그러게요! 요새 도련님께서 운이 좋긴 좋은가 봐요!”

“그러게나 말이다.”

일레느는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날 띄우기 바빴다.

그런 그녀의 옆에서 이슬린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누가 사주한 걸까요?”

“밝혀지겠지. 주신까지 내걸었으니.”

“…밝혀질까요?”

일레느는 걱정스러운 듯 내게 물었다.

“블랭크가 돼 버렸으니 자백제에 면역도 없을 테고. 이대로 술술 불고 처형당할 거야.”

“으응……. 그렇군요.”

정황상 베네르 백작이 벌인 일이지만, 정황만 있는 것과 물증까지 있는 건 천지 차이다.

이렇게까지 한 이상 임페라 가문이 덤터기 쓸 걱정은 덜어도 됐다.

남은건 베네르 백작이 정당한 처벌을 받는지 기다리는 것뿐.

심문관을 보내고 난 내 방에 조용히 들어왔다.

“후.”

로물루의 포획은 다행히 별 문제 없이 끝났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왼손을 펼쳤다.

[랭크가 변경 되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당연하지.”

[이름 : 이안 임페라.]

랭크 : 4(검술), 3(마법).

“하아아…….”

로물루를 처치한 뒤로 검술 랭크가 하나 상승했다.

단순히 녀석을 처치해서 오른 건 아닐 거다.

그간 랭크 상승이 더디기도 했고.

크리시니 놈을 죽이면서 쌓인 경험치가 기어코 벽을 넘은 거다.

자그마치 랭크 4!

이 정도면 귀족들 사이에선 목에 힘깨나 주고 다닐 수 있다.

프리아나나 크리드에 비하면 약해빠진 건 변함없지만.

“흠…….”

그나저나.

프리아나랑 크리드 이 둘은 뭘 하고 있으려나?

프리아나는 소설 상 비중이 꽤나 있는 인물이라 클랜에게 행적을 조사하라 일러 뒀다.

예전에 베네르 백작가를 위해 싸웠던 기사.

프리아나의 현 상황을 조사해 달라고.

어쩌면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아이소테르 국왕의 명령에 실패한 거니까.

장차 기사단장에 오르는 건 물론이고 어쩌면 경질당했을지도 모른다.

“쯧.”

소설에서도 나름 괜찮은 녀석이긴 했지만 뭐 어쩌겠나. 일단 내 코가 석자였는데.

가능만 하다면 내 편으로 만들고 싶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 싶다.

국왕의 직속기사였던 자 눈에 거지 백작가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으니까.

아마 조만간 어디서 뭐하고 있는지 밝혀질 거다.

크리드야 지금쯤 ‘유물’이 숨겨진 대숲림에 도착했을 테고, 조만간 유물이 어디 있는지 확인하게 될 거다.

그럼 유물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화가 잔뜩 나가지곤 다시 임페라 백작령으로 오겠지?

“으으…….”

다른 놈도 아니고 크리드씩이나 되는 놈이다.

그런 놈이 화가 잔뜩 나가지고 온다면…….

“아니지. 캥길 게 뭐가 있어? 난 약속대로 위치만 알려 준 거라고.”

애초에 녀석과의 계약이 그거였다.

난 유물의 위치를 알려 주고, 녀석은 나 대신 결투 대행인으로 싸워 준다.

하등 꿀릴 게 없는 제안이었다.

“그럼. 그렇고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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