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난 곧바로 놈이 있는 곳을 향해 내달렸다.
소리가 난 곳은 마을의 중앙에 위치한 공터.
저마다 바삐 일하는 사람들로 북적여야 할 공터는 구울들과 공포에 떠는 영지민들로 가득했다.
그들의 낯빛엔 절망과 공포가 가득했다.
“끄아아악!”
“크흐흐! 더 울부짖어라! 더!”
반대로 로물루는 앞으로 재탄생할 재료들을 아주 만족스런 얼굴로 보고 있었다.
‘역겨운 놈.’
소설로만 이 세상의 설정을 본 입장에서, 흑마법에 대한 처우가 조금 심하지 않나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어디까지나 극악무도한 놈들 중에 흑마법사가 많은 거지, 흑마법 자체가 나쁜 건 아니라 생각했으니까. 가끔 착한 흑마법사가 등장하기도 했고.
하지만 로물루 저놈을 보고 있자니 없던 흑마법사 혐오도 생길 지경이다.
영지민을 지켜야 할 위병들은 구울이 돼 버린 채 로물루의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저 구울들을 뚫고 로물루를 사로잡아야 했다.
다행히 마법사이니 순간적인 기습이라면 어떻게든 생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머릿속으로 구울 녀석들을 처치하고 놈을 제압할 검의 궤적을 떠올렸다.
타닷!
생각을 끝마치곤 곧장 놈들의 뒤를 향해 팔을 뻗었다.
“크륵?”
“크르륵!”
뒤늦게 날 발견한 구울 놈들이 소리쳐 봤지만 이미 늦었다.
서걱!
용린검의 깔끔한 궤적 아래 구울 놈들의 목이 우수수 떨어졌다.
갑옷 사이에 틈을 정확히 노리기도 했지만, 마나를 빨아들인 용린검의 절삭력 덕에 무 썰듯 숭덩숭덩 썰려 나갔다.
확실히 그저 평범한 철검일 때완 비교도 안 될 위력이다.
마나가 한 치도 새어 나가지 않고 절삭력을 극대화시킨다고 해야 하나?
손에 착착 감기는 게 써는 맛도 굉장했다.
로물루의 구울은 랭크도 뭣도 없는 그저 움직이는 시체다.
시귀폭이 터졌을 때마냥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내겐 그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크라악!”
구울이 검을 쥐고 달려들었지만 옆으로 반 보 뛰며 손쉽게 피했다.
그리고 검을 한 번 휘두르자 녀석은 머릴 잃은 채 몇 발작 걷다 고꾸라졌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몇 초.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로물루도 멍하니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으응?”
놈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곤 고문을 멈췄다.
내 목표는 공터 가득한 구울이 아닌 로물루다.
놈과의 사이에 놓인 구울만 썰어 넘기곤 곧장 놈을 향해 거릴 좁혔다.
녀석과의 거리가 지척에 닿는 순간, 놈과 눈이 마주쳤다.
“죽어라. 이 정신 나간 새끼.”
…콰앙!
용린검이 녀석의 허릴 향해 파고들자 굉음과 함께 녀석의 몸이 튕겨져 나갔다.
“쯧.”
랭크 4는 랭크 4다.
급습을 노렸는데도 그 짧은 틈에 녀석은 방어막을 펼쳐 간신히 공격을 막아 냈다.
방어막에 튕겨져 나간 손이 전기에 감전된 듯 저릿거렸다.
로물루는 입고 있던 거적때기 안에서 기다란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주변에 굴러다니던 나뭇가지로 급조한 듯 볼품없었지만 가볍게 봐선 안 된다.
맨손으로 마법을 시전하는 것과 지팡이를 매개로 하는 건 위력이 남달라지니까.
“웬 놈이냐!”
놈의 미간에 자리 잡은 주름살이 짙어졌다. 곧바로 내 경지를 가늠하기도 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곤 날 살펴봤다.
난 저릿한 손목을 빙글빙글 돌리며 대답했다.
“누구겠어. 흑마법사 잡으러 온 사람이지.”
로물루는 첫 번째 벽을 넘은 상태.
그만큼 랭크의 격차라는 게 얼마나 뛰어넘기 힘든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자기보다 상위 랭크였다면 방어막이고 뭐고 그대로 썰려 반 토막이 났을 터.
일격을 막아 낸 걸 보면 분명 자신보다 상위 랭크는 아닐 터였다.
“…흐흐! 어쭙잖은 놈이 용기만 가상해 가지곤!”
녀석은 곧장 지팡일 들어 주변 구울에게 소리쳤다.
지팡이 끝이 보랏빛으로 반짝이자 구울들의 몸짓이 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놈을 죽여라!”
흑마법 랭크 4쯤부터는 구울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릴 수 있다.
물론 랭크가 랭크인 만큼 고차원적인 명령은 불가능하다.
저 녀석을 죽여라, 영지민들을 감시해라.
같은 간단한 명령이 전부다.
하지만 맹목적으로 주변 사물에 달려드는 구울들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
“크르륵!”
곧바로 주위에 있던 구울들이 내 주윌 포위했다.
움직이는 시체로 전락하기 전, 병사였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 녀석들은 저마다 검을 쥔 채로 날 노려봤다.
“…으응?”
녀석은 뭔가 이상한 낌새라도 느낀 듯 지팡일 다시 한번 휘둘러 봤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흥! 사지에 혼자 올 정도로 멍청한 놈은 아닌 게로구나!”
다행히 구울이 더 쏟아지지는 않았다.
공터에 있는 놈들이 전부.
추가로 몰려드는 구울은 없었다.
‘이슬린이 잘 해 주고 있나 보구만.’
역시 지오 클랜의 부마스터까지 갔던 녀석이다.
이깟 구울쯤은 얼마든지 상대 가능할 거다.
그렇담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지.
“흐읍!”
용린검에 마나를 불어넣어 절삭력을 극대화시켰다.
마치 오러 소드라도 뽑아낸 기분이다.
술주정뱅이 이안 임페라의 몸에 갇혀 있는 게 아닌,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기사의 몸에 들어온 기분이다.
예전만큼의 무위를 보여 줄 순 없겠지만, 이깟 구울쯤은 손쉽게 상대하고도 남았다.
“크르륵!”
“어딜!”
사방에서 달려드는 구울 녀석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용린검은 놈들의 살갗을 파고들고 뼈를 갈라냈다.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구울의 움직임이 멎었다.
“이, 이 자식이……!”
로물루도 가만히 두고만 있을 순 없는지 지팡이를 내게 겨눴다.
“죽어라!”
그러자 녀석의 지팡이 끝에서 검은 구체가 날아왔다.
마법사들의 가장 기본적인 마법 마탄.
수많은 전장에서 구른 내겐 탁구공마냥 느리게만 보였다.
지금껏 눈으로는 좇을 수 있지만 몸이 따라 주질 않았다.
마치 물속에 갇힌 듯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몸.
하지만 이젠 달랐다.
조금씩이나마 눈으로만 좇던 공격에 몸이 따라 주고 있었다.
발에 채워져 있던 쇠공 하나가 떨어진 느낌이다.
아슬아슬하게 녀석의 마탄을 피하며 구울의 숫자를 착실히 줄여 나갔다.
“크륵!”
사방에서 동시에 검이 쏟아졌다.
카앙!
난 몸을 숙인 채로 놈들의 검을 받아 냈다.
“으음…….”
죽은 지 얼마 안 된 놈들이라 그런지 제법 힘이 남아 있다. 게다가 놈들을 조종하고 있는 건 랭크 4의 흑마법사.
지금 내 상태론 얕잡아봐선 안 된다.
과거 절대자였을 때의 생각했단, 바로 저승길일 것이다.
검을 살짝 비틀자 받아 내던 검이 옆으로 쏠렸다.
“크륵?”
무게 중심이 뒤틀린 놈들은 이상한 울음소릴 내며 비틀댔다.
그 틈에 검을 한 번씩 훑어 주자 놈들은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콰직!
그러는 와중에도 날려 나간 머리통은 확실히 밟아 끝장냈다.
괜히 발목이라도 물렸다가 독에 감염되면 끝이다.
로물루도 그걸 노리고 있었는지 구울의 머리통이 터져 나갈 때마다 눈살을 찌푸렸다.
“이, 이익……!”
구울들이 아까운지 녀석의 입술을 비집고 침음이 흘러나왔다.
어느새 공터 가득했던 구울은 점차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공포에 질려 있던 영지민들은 갑작스레 등장한 구원의 손길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지만 내 등장에 혹시 모를 희망을 느꼈다.
하지만 로물루는 이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흥!”
쿵!
녀석은 갑자기 지팡일 땅에 꽂아 넣었다.
“웅얼웅얼…….”
그리곤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마법은 그냥 사용할 때보다 주문을 외고 사용할 때 위력이 더 강해진다.
그렇다는 건 분명 뭔가 큰 걸 쓰려 한다는 건데.
난 빠르게 소설의 구절을 떠올렸다.
흑마법 랭크 4가 쓰는 흑마법.
개중에 지팡일 땅에 꽂고 쓰는 건 단 하나밖에 없었다.
‘포이즌 스웜.’
주변 일대에 끔찍한 독을 퍼뜨리는 흑마법.
시귀폭을 만드는 게 본 목적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모두 구울로 만들고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난 내게 달려들던 구울 한 마릴 베어 내곤 소리쳤다.
“모두 도망쳐라!”
“에, 에?”
“빨리! 저놈한테서 떨어져!”
“으,으아악!”
영지민들은 내 외침에 따라 혼비백산 도망치기 시작했다.
구울놈들도 모두 내게 시선이 쏠린 터라 바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럼 난?
뭐하러 도망치나? 더 좋은 게 있는데.
품속에서 미리 준비해 온 안면갑을 꺼내 들었다.
주인공 디아가 흑마법 랭크5를 상대 가능하게 만들었던 아티팩트.
[헤카테의 안면갑.]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미리 준비해 뒀다.
성능 하난 확실한 놈이다.
다른 놈도 아니고 미래의 나, 흑마법사 이안 임페라를 상대 가능하게 했던 아티팩트니까.
“크흐흐! 이미 늦었다!”
녀석이 비릿한 미소를 짓자 하복부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
마치 개구리 뱃가죽마냥 큼지막해진 채로 입을 벌렸다.
그러자 녀석의 입 안에서 보랏빛 연기가 구름 쏟아지듯 터져 나왔다.
푸화악!
녀석의 배 속에서 터져 나온 독안개는 삽시간에 내 몸을 집어삼켰다.
보랏빛 구름에 빠진 기분이다.
파스스……!
독에 닿은 풀은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지며 썩어 문드러졌다.
흑마법사들이 왜 기피되는지 알 것 같다.
하나같이 께름칙한 마법들뿐이다.
구울이니, 시귀폭이니, 독이니.
“으아아악!”
“도, 도망쳐!”
영지민들은 혼비백산하며 로물루에게서 떨어지기 바빴다.
다행히 미리 언질을 놓은 터라 독안개에 집어삼켜진 이는 없었다.
끔찍한 독 안개는 공터를 가득 채우고 나서야 세를 멈췄다.
이내 시간이 지나자 독 안개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뿌연 안개 가운데서 로물루가 홀로 모습을 드러냈다.
놈의 주위엔 죽은 시체들 말곤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로물루는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쯧! 애써 잡은 사냥감들이 다 도망갔잖아! 다시 잡으러 다닐 생각하니 귀찮군…….”
놈은 승리를 확신한 듯 벌써 다음 계획을 떠올리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난 멀쩡히 살아 있다.
“으응?”
…서걱!
“…크악!”
보랏빛 안개 속에서 용린검을 내질렀다.
마나를 옅게 뒤덮은 용린검은 그대로 로물루의 왼쪽 손을 가로질렀다.
그제야 앞을 가리던 보랏빛 안개가 걷히고, 안면갑을 말끔하게 쓴 내 모습이 드러났다.
나와 로물루 사이가 멀지 않았기에, 충분했다.
“어, 어떻게 그 짧은 순간에……!”
놈은 잘린 왼손을 부여잡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포이즌 스웜이 날 덮친 건 고작해야 몇 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그 안에 말끔하게 안면갑을 썼으니 놈의 입장에선 신기하게 보일 만했다.
한국 남자에게 방독면 훈련은 필수였으니까.
“연습 많이 해 보면 돼.”
툭.
허공에 솟구쳐 올랐던 로물루의 왼손이 바닥에 떨어졌다.
꾀죄죄한 왼손에서도 밝게 빛나던 룬 문양.
주인을 잃은 왼손은 이내 룬 문양의 빛을 빠르게 잃어 갔다.
“끄아아아악……!”
이어서 로물루의 고통에 가득 찬 신음이 터져 나왔다.
잘린 손에선 피와 검은빛의 마나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소설 속 세계관에서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
왼손이 잘리는 것. 블랭크(blank).
그 즉시 아무리 높은 랭크의 소유자라도 모든 힘을 잃고 평범한 사람이 되고 만다.
지금 로물루는 그걸 경험하고 있었다.
그간의 악행을 쌓아 만든 흑마법 랭크 4.
왼손이 잘림과 함께 피와 마나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위 랭크 보유자였다면 단순히 손만 잘리고 끝났을 거다.
하지만 로물루는 첫 번째 벽을 넘은 자.
체내에 보유한 마나의 양도 상당했다.
쿠구구구……!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마나와 함께 대지가 흔들리는 듯한 요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크르르…….”
미처 남아 있던 구울들은 주인이 마나를 잃자 원래 있어야 할 모습, 시체로 되돌아갔다.
위병들은 공허한 눈빛의 구울이 아닌 평안히 눈을 감은 채로 자리에 쓰러졌다.
“아, 안 돼! 마나가… 마나가……!”
로물루는 잘려 나간 왼손을 부여잡고 울부짖었다.
단면에 팔을 대 보기도 했지만 그런다고 붙을 리는 없었다.
“끄아아악……!”
로물루는 마지막 비명을 끝으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