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다, 당신을 섬깁니다.”
다른 클랜원 놈들도 여잘 따라 예의 비슷한 자셀 취했다.
이슬린. 역시 소설에서도 본 적 없는 이름이다.
한번이라도 봤으면 낯이 익기라도 할 텐데, 난생처음 듣는 이름 같았다.
생각보다 쉽게 끝났다.
본보기로 제일 센 놈을 쥐어 패기라도 해야 하나 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내가 지겠지.’
랭크 차이란 그런 거니 차라리 이게 잘 된 걸지도 모른다.
난 검을 뽑아 이슬린의 목덜미로 가져갔다.
그 모습에 부하놈들이 움찔했지만 놈들의 대장이 가만히 있자 섣불리 나서진 않았다.
이건 ‘랭크빨로 세계정복!’에 나오는 의식이다.
그간의 행적을 모두 잊어 주고, 자신의 부하로 인정해 주겠다는 의식.
‘그냥저냥 실력 좋은 마법산 줄 알았는데. 의식에 대해서도 알고, 뭔가 있는 녀석인가?’
혹시나 내가 소설에서 놓친 게 있나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이슬린이란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뭐. 세상은 넓고 이만한 인재는 소설에서도 꽤나 나오니까.’
‘랭크빨로 세계정복!’에 자잘한 설명이 많이 나오긴 하지만 결국엔 소설이다.
세세한 엑스트라까지 모두 나오기엔 수천 편이 아니라 수만 편이 돼도 모자랄 거다.
그렇게 생각하곤 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난 이슬린의 어깨에 검을 올리며 말했다.
“오늘부터 너희는 이안 클랜이다.”
* * *
“도련님? 이분은…….”
일레느는 새로 데려온 여자를 보고 고갤 갸웃했다.
“아. 이슬린이라고. 새로 들어온 시종이야. 인사해.”
“…안녕하세요.”
이슬린은 멋쩍어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슬린.
얼마 전까지 지오 클랜의 부마스터였고, 마법 랭크 4의 적잖은 인재이자 날 아이스 블레이드로 위협했던 여자다.
지오 클랜은 무사히 내 밑으로 들어왔다.
시귀폭 때문에 대부분의 주요 인력이 죽었지만, 카라딘 왕국과 아이소테르 왕국 양쪽에 발을 담근 도적 클랜이다.
그간 가지고 있던 정보망만 활용해도 꽤나 도움이 될 터.
덕분에 괜찮은 수익을 챙겼다.
이슬린은 내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정말입니까? 저보고 여기서 메이드로 일하라는 게?”
“왜? 너가 적당히 왔다 갔다 하면서 나한테 보고 할 건 해야 할 거 아닌가?”
“그렇긴 하지만…….”
“싫은가? 그럼 내가 하리?”
“아, 아닙니다…….”
싫으면 어쩌겠나. 이미 내게 충성을 바쳤는데.
싫으면 왕국 연합한테 잡혀 죽는 것 말곤 방도가 없다.
“정말요? 그럼……. 제 후배인 거네요?”
“그, 그건……!”
“그렇지. 따로 내가 시키는 일이 있지만… 가끔 바쁘고 할 때 이것저것 시키면 다 할 거다. 그렇지? 이슬린?”
“네…….”
“하핫! 정말 감사해요! 안 그래도 후배 하나 있었음 좋을 것 같았는데!”
일레느는 신이 난 듯 방방 뛰기까지 했다.
반면에 이슬린은 죽을상이다.
하기사 도적 클랜의 부마스터까지 했던 이가 시종이라니. 그것도 자기보다 열 살 가까이 어려 뵈는 일레느의 후배로.
“그럼! 입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혀도 될까요?”
일레느는 잔뜩 기대 가득한 얼굴로 내게 허락을 구했다.
“당연하지.”
“감사합니다! 자! 후배님! 어서 이리로 오세요!”
“아, 저기. 그게…….”
일레느는 이슬린을 데리고 사라졌다.
이내 이슬린은 일레느와 똑 닮은 메이드복을 차려 입고 왔다.
검은 바탕에 프릴이 잔뜩 달린 귀여운 옷이었다.
“옷이 좀 작은가?”
“으응…….”
확실히 이렇게 입고 보니 시종처럼 보이긴 했다.
나이도 이십대 중반이니 딱 적당할 나이고.
두꺼운 로브로 가려져 있던 몸이 조금은 드러나 보이지만, 그래도 꽤 어울렸다.
“나중에 좀 더 크게 맞춰 줄 테니까! 그때까지만 좀 참으세요, 후배님!”
“예… 선배님.”
“푸흡!”
그 모습에 참다못해 웃음이 터지자 이슬린이 뱁새눈을 뜨곤 날 째려봤다.
“잘 어울리는군.”
‘나한테 아이스 블레이드 날린 벌이다.’
“…….”
“일레느, 앞으로 열심히 일할 친구니까. 이것저것 잘 가르쳐 줘라. 알겠나?”
“네!”
그렇게 이슬린은 새로 생긴 선배를 따라 허드렛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건 그렇고.”
지오 클랜을 흡수한 덕분에 이것저것 새로 알게 된 게 많았다.
우선 이번 시귀폭을 터뜨린 흑마법사의 이름은 ‘로물루’.
과거 흑마법으로 베네르 백작령에서 꽤나 악명을 날렸던 놈이었다.
후에 베네르 위병대에 잡혀 처형당했다곤 했지만, 처형이 아니라 제 영지에 숨겨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어딘가 쓸 일이 있지 않을까 하고.
“지독한 놈이야 아주.”
다른 놈도 아니고 제 영지민을 학살한 흑마법사를 숨겨 놓다니, 지 야망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는 미친 놈.
그게 베네르 백작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오늘 아침, 베네르 백작의 사병 중 정예 몇이 몰래 어디론가 향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다들 허름한 차림으로 급히 나서는 게 뭔갈 찾으러 가는 듯했다.
‘베네르 백작이 그렇게 급하게 찾는 거라면……?’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솔솔 피어 올랐다.
로물루 녀석은 베네르 백작의 수중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때문에 놈을 어떻게 빼 올까 고민 중이었는데, 정황상 놈이 도망친 게 틀림없었다.
흑마법 랭크 4의 미친놈이 풀려난 건 끔찍한 일이지만, 적어도 내겐 희소식이었다.
내가 먼저 도망친 놈을 잡는 게 쉬우니까.
“그럼 이놈을 어디서 찾는담…….”
아쉽게도 로물루는 소설에서 등장하지 않는 놈이었다.
흑마법 랭크 4라…….
소설에선 짜잘한 잡몹쯤으로 취급당하는 놈들이다.
지금은 내가 상대하기 버거울 정도로 강한 놈들이고.
“끄응…….”
놈이 누군지 알았으니 이제 다음 문제다.
놈을 찾는 건 둘째 치고, 만약 로물루를 만나면 이길 수 있을까?
더군다나 베네르의 사병까지 가세한다면?
결투 재판 당시 프리아나를 데려온 걸 감안하면 랭크 5의 괴물은 없을 거다.
하지만 랭크 4라면 베네르여도 충분히 부리고도 남았다.
나중 가선 무슨 이상한 기사단도 이끌던 놈이었으니까.
이슬린이라면 어찌어찌 가능하겠다만, 아직 내 랭크론 부족했다.
“더럽게 약하구만.”
약하면 끝이냐? 그건 아니지.
놈들을 상대하기 힘들면 놈을 약하게 만들거나, 아님 내가 강해져야 한다.
랭크로 안 되면 템빨로라도.
“슬슬 정리는 됐겠군.”
하룬이 임페라 영지에 오고 난 후, 에이먼은 곧바로 하룬을 위한 작업장 마련에 나섰다.
장소는 영주 관저 뒤뜰. 말이 뒤뜰이지 버려진 땅이나 다름없었다.
드워프 장인이나 되는 분을 바깥 땅에서 일하도록 내버려둘 순 없다! 라는 에이먼의 의지가 적극 반영된 결정이었다.
드르르륵!
“하이고. 시끄럽구만.”
뒤뜰에선 에이먼과 하룬 둘이 작업장 설비 마련에 한창이었다.
쿵……! 쿵……!
작업엔 몇몇 동네 사람들뿐 아니라 하룬이 몰고 온 마핵 골렘까지 달려들었다.
덕분에 공사가 시작된 지 사흘이 됐을 뿐인데도 제법 작업장 태가 났다.
용광로며 열기를 식힐 수로까지 파 놓은 상태였다.
“아! 이안! 내 둘도 없는 친우여!”
작업에 한창이던 하룬은 날 보자마자 반갑게 맞이했다.
“왔구나. 아들아.”
“예. 아버지. 잠깐 바람이나 쐴 겸 나왔습니다.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그러려무나. 장인분의 마음에 찰지는 모르겠다만. 그래도 꽤나 열심히 준비했으니.”
“하핫!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이렇게 망치를 쥐는 것만으로도 무한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단 말은 없네.’
하기사 자이겔론드 왕국의 후계자였는데 이런 작업장이 눈에 찰 리가 있나.
‘뭐 앞으로 계속 키워 나가면 되는 거니까.’
하룬이 왔으니 앞으로 수익은 계속 늘어날 거다.
이안이 쌓아 놓은 빚까지 순식간에 갚진 못하겠지만, 차차 여유가 생기겠지.
“흠.”
작업장 구석엔 마핵 용광로와 일반 용광로가 가지런히 있었다.
“이거 둘 다 쓰는 건가?”
“으음. 아무래도 약식으로 만든 마핵 용광로라 출력이 조금 모자란다네. 주괴를 달구려면 하나론 모자랄 듯싶어서 말이야.”
“으음.”
이거 적당한 아티팩트라도 부탁하려고 온 건데.
이러면 그냥 돌아가야 하나?
“크흐흐! 눈빛을 보니 뭐라도 하나 챙겨 가고 싶었나 보군!”
“흐흐… 그렇게 티가 났나?”
“당연하지! 내가 어디 그런 눈빛 한두 번 본 줄 아나? 내 친우가 부탁하는데 못할 거야 없지! 지금 차고 있는 검. 잠시만 줘 보게!”
십수 년째 제대로 된 망치질 한 번 못한 하룬이다.
뭐라도 만들고 싶어 몸이 근질거려 미칠 지경이겠지.
“그럼 친우한테 부탁 좀 해 볼까?”
난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하룬에게 검을 건넸다.
별다른 특이장점도 없는 평범한 철검이다.
내구도 하난 튼튼하지만… 조금 심심한 감이 없진 않았다.
“우선 용광로를 최대 화력으로 올려놓고!”
화륵!
하룬은 두 개의 용광로에 불을 지피곤 검 손잡이를 떼어 냈다.
그리곤 뜨겁게 달궈진 용광로에 검을 집어넣었다.
츠츠츠……!
이내 붉게 달아오른 검은 열기와 함께 요란한 소릴 내뱉었다.
하룬은 철검을 모루 위에 올려놓곤 망치를 집어 들었다.
구울의 대가릴 박살 내던 기다란 워해머가 아닌, 철을 두드리기에 최적화된 짧고 묵직한 망치였다.
캉! 카앙!
하룬은 그대로 달아오른 철검을 힘껏 내려치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망치 주위론 붉은 기운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단순한 열기로 인해 생긴 기운이 아니었다.
드워프 장인만이 발현할 수 있다는 오러.
기사들이 소드 오러를 뿜어내듯 대장장이에겐 저들만의 오러가 있다.
크래프트 오러.
이 오러로 두드린 갑주는 보잘것없는 쇳덩이조차 마갑으로 변모시킨다.
무구에 장인의 혼과 마나를 불어넣어 아티팩트로 새로이 태어나는 것이다.
…쾅!
계속된 망치질 끝에 붉게 달아올랐던 철검이 식은 듯 빛을 잃었다.
그럼 다시 용광로에 넣고 두드리고, 또다시 용광로에 넣고 두드렸다.
대략 그게 다섯 번 정도 반복되고 나서야 하룬은 철검을 수로에 넣고 한숨 식혔다.
“…후! 오랜만이구만! 이 열기는!”
“히야!”
나뿐만 아니라 에이먼까지도 이 과정을 숨죽여 지켜봤다.
어디서 볼 수 있겠나. 다른 누구도 아니고 자이겔론드 왕족의 망치질을.
검의 열기가 한숨 식자 하룬은 수로에 담가 뒀던 검을 꺼냈다.
그러자 전과는 전혀 딴판인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용의 비늘처럼 자잘한 문양이 검 주위로 살아 숨 쉬듯 새겨져 있었다.
“원래라면 추가 공정까지 꼬박 사흘은 걸리겠다만, 일단 오늘은 이걸로 만족해 주게나!”
하룬은 검을 다시 검집에 꽂아 넣곤 내게 건넸다.
아직 뜨끈뜨끈한 열기가 검 주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오…….”
그저 용광로에 몇 번 넣다 뺐다 한 게 전부다.
그런데도 평범했던 철검은 전과는 전혀 다른 검이 되어 있었다.
난 검을 쥔 채로 미약하게나마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검은 마치 내 몸에서 마나를 빨아들이듯 오러를 발현시켰다.
하지만 전혀 불쾌하거나 그런 감각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 몸에 딱 적절한 양만 취하면서 함부로 낭비하지 않으려는 느낌까지 들었다.
“이건 정말…….”
“하핫! 마음에 드는가?”
“대단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소유자의 부담까지 판단하는 마검이라니…….”
순간 나도 말하다가 아차 싶었다.
옛 생각이 나서 그런가? 괜한 말까지 늘어놓고 말았다.
난 어디까지나 망나니 술주정뱅이 공자다.
운이 좋아 술친구로 크리드나 하룬 같은 기연을 맞은 거지.
마검의 운용까지 알 만한 이가 아니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아들아?”
다행히 에이먼은 무슨 말인지도 못 알아먹은 듯했다.
하지만 하룬은 달랐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듯 한쪽 눈썹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자네도 꽤나 검에 조예가 있었나 보군…….”
“…그냥 뭐. 주워들은 게 많은 거지.”
“…그런 거겠지? 후후.”
하룬은 날 신경 써 주는 듯 어물쩍 넘어가 줬다. 덕분에 에이먼도 별것 아니라는 듯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다.
“아무튼 정말 고마워. 이 은혜는 잊지 않도록 하지!”
“은혜랄 거야 있나! 오히려 내가 고맙지!”
“그나저나……. 이만한 검이면 이름이 있어야 할 듯싶은데.”
“이름이야 검 주인이 지어 주는 거 아니겠어?”
“그래도 되겠나?”
“물론.”
난 검을 물끄러미 살펴보며 이름을 떠올렸다.
용의 비늘무늬가 있는 검이라.
“용린검(龍鱗劍). 어때?”
“용린검? 그게 무슨 말이지?”
“용의 비늘로 만든 검이란 거야. 옛날 책에서 봤어.”
“크하핫! 그것 참 멋진 이름이군!”
진짜 용의 비늘로 만든 검에 비하면 이쑤시개나 다름없겠지만.
그래도 멋있으면 장땡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