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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27화 (27/222)

27화

콰앙!

“히익! 배, 백작님!”

베네르는 참지 못하고 옆에 있던 탁자를 강하게 내려쳤다.

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손톱이 손아귀를 파고들어 피가 뚝뚝 떨어질 지경이었다.

약간의 소음이 있었지만 파티의 음악 연주 소리에 금방 묻히고 말았다.

이런 적은 베네르의 인생에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계획이 약간씩 어긋나는 경우는 있었다지만, 그의 계획 자체가 완벽하게 틀어진 적은 없었다.

‘이럴 리가 없다! 마가 껴도 단단히 낀 게 분명해!’

불안한 기분이 등골을 훑었다. 운명의 신에게 철저히 외면당하는 게 이런 기분일까?

이렇게 된 이상 그가 할 일은 하나였다.

자신은 이번 사건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걸 확실히 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로물루를 죽여야 했다.

놈을 풀어주겠다는 약속 따위 안 지키면 그만이다. 그래 봐야 놈은 흑마법사고 죽여도 오히려 포상이 내려질 놈이니까.

하지만 베네르는 아르베르토의 표정에서 뭔갈 느꼈다.

아직 말하지 않은 게 있다고.

“…아르베르토. 아직 보고하지 않은 게 있나?”

“…….”

“빨리 말해라!”

“…로물루가 도망쳤습니다!”

* * *

“이쯤이었지.”

아이소테르 왕국과 카라든 왕국의 접경지에 위치한 숲. 빽빽한 숲에 산길까지 어지러운 지역이다.

두 왕국은 현재 왕국 연합의 이름 아래 묶인 연합국이다.

덕분에 이 숲엔 병사들의 감시가 뜸했다. 요새랄 것 해 봐야 숲의 초입에 있는 허름한 요새가 전부다.

덕분에 이 숲엔 한 도적 클랜의 거점이 위치해 있다.

그건 다름 아닌 ‘지오 클랜’.

얼마 전 내가 목을 벤 지오 크리시니가 수장으로 있는 도적 클랜이다.

‘랭크 빨로 세계정복!’에도 잠깐 등장한다.

주인공 디아가 길을 잃고 헤매다 어떤 도적 클랜을 만나면서 말이다.

때마침 거점에 들렀던 지오 크리시니와 만나게 되고, 몇 번 치고받고 싸우다 디아의 승리로 끝이 난다.

그때 지오 크리시니의 검술 랭크가 4로 당시의 디아에겐 적당한 경험치 몹쯤으로 나오고 만다.

‘지오 크리시니가 나한테 죽었으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주인공한테는 미안하지만 어쩌겠나. 살 사람은 살아야지.

아마 지오 크리시니가 아니어도 주인공이니 다른 적당한 도적과 싸우게 될 거다. 지나가는 단역은 발에 채이도록 많으니까.

“…그러겠지?”

소설의 줄거리가 틀어지는 건 잠시 잊자.

지금은 나 하나 살기도 벅차다.

복잡한 숲길을 따라 한참을 걷자 저 멀리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물소리가 들린다는 건 거의 다 온 거나 마찬가지다.

지오 클랜의 거점은 물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있다 했으니.

“후!”

산길을 한참이나 걸었는데도 조금 숨이 차고 만 정도였다.

그간 랭크 업을 거듭한 덕분에 체력이 꽤나 붙었다.

어느새 시냇물 하날 발견하곤 목을 잠깐 축이고 물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좀만 더 가면…….”

숨이 슬슬 차오를 때쯤 되자 물가 옆에 허름한 오두막 한 채가 발견됐다.

“저기가 거점이라 이거지.”

작중 시점과 몇 년 차이가 있어 살짝 걱정하긴 했지만 다행히 지오 클랜의 거점은 그대로 있었다.

조금은 깔끔해 보이는 게 지은 지 얼마 안 된 듯했다.

“후으…….”

호흡을 한 번 고르곤 검을 뽑아 들었다.

도적 클랜은 비열한 술수가 본업이 녀석들이다.

괜히 양손에 아무것도 안 들고 갔다가 애먼 검에 칼침 맞고 죽음 곤란하다.

최대한 감각을 살려 경계하며 오두막으로 향했다.

“…….”

아니나 다를까 주변에서 옅은 숨소리가 느껴졌다.

숲에 꽁꽁 숨어 있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숨소리까지 숨기진 못했다.

‘한… 여섯 명 정도 되나.’

나무 근처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게 다섯. 그리고 오두막 안에 홀로 있는 게 하나.

천천히 놈들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섰다.

하지만 공격해 오지는 않았다.

다행히 놈들도 아직은 상황을 살피고 있는 듯했다.

난 들고 있던 검을 검집에 다시 꽂아 넣었다.

“…얘길 하러 왔다.”

“…….”

허공에 대고 소리쳐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지금부터 난 오두막으로 들어갈 거다. 싸울 의지도 없는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진 않겠지?”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날 막아서려는 움직임은 보이진 않았다.

끼익……!

오두막 문이 삐걱이며 열렸다.

그러자 눈앞엔 두꺼운 로브를 뒤집어쓴 녀석이 하나 보였다.

로브 너머로 자그마한 마법구 하나가 보였다.

언제라도 스킬을 퍼부으려는 듯 마법구에선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마법사 같긴 한데…….

“여기 책임자가 당신인가?”

“…….”

묘한 분위기가 폴폴 풍기는 놈이다.

하지만 걱정할 건 없다.

지오 크리시니의 부하였으니 엄청 강한 놈은 아닐 테니까.

높게 쳐 줘야 랭크 3이나 4?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겠지?”

녀석은 그제야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이안 임페라. 에이먼 임페라의 외아들이자 장차 임페라 백작가의 주인이 될 자.”

“잘 알고 있구만. 그래. 내가 바로 이안 임페라다.”

“…….”

“내 소개가 끝났으니 그쪽도 소개를 좀 해 줬으면 하는데.”

“…알았다.”

녀석은 덮어 쓰고 있던 로브를 젖혔다.

그러자 감춰져 있던 놈의 얼굴이 드러났다.

조금은 꾀죄죄하지만 흰 피부가 유난히 돋보이는 녀석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여자?’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던 녀석은 여자였다.

소설 속 줄거릴 떠올려 봤지만 지오 클랜에 여자 마법사는 없었다.

아마 원래 줄거리대로라면 죽거나 떠난다는 건데.

녀석이 로브를 벗자 숨어 있던 도적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경계를 풀지 않은 놈들은 저마다 무기를 쥐곤 날 에워싸고 있었다.

“임페라 가문의 공자가 여긴 무슨 일이지?”

마법사는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다른 이들도 잠자코 있는걸 보면 저 여자가 임시 대장인 듯 보였다.

“이자들 모두 지오 클랜에 속한 사람들인가?”

“…….”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갤 끄덕였다.

“그럼 얘기가 빠르겠네. 다들 알고 있지? 너희들 대장이 실패했다는 거.”

“…알고 있다.”

“그럼 지오 크리시니가 내 손에 죽었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

지오 크리시니는 검술 랭크 4의 만만찮은 상대였다.

시귀폭에 당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졌을 정도의 경지.

이들이 이렇게까지 경계하고 있는 이유를 알겠다.

아마 내가 랭크 4는 될 정도의 강자라 생각하는 거겠지.

나야 말하기 편해졌으니 나쁠 건 없었다.

그럼 겁을 좀 줘 볼까?

“세상에 귀족을 노린 것도 모자라 시귀폭까지 쓰다니. 그게 얼마나 큰 죄인지는 알겠지?”

“…시귀폭을 쓴 건 우리가 아니다! 그건…….”

시귀폭 얘기에 마법사 녀석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걱정될 거다. 귀족 암살 미수도 모자라 시귀폭까지 덤터기 쓴다면 곱게 죽진 못할 테니까.

시귀폭은 왕국 연합에서 눈에 불을 키고 조지는 흑마법 중에서도 악랄한 금기.

아무리 도적 클랜까지 만든 놈들이라 해도 왕국 연합의 눈 밖에 나는 건 두려울 수밖에 없다.

상대는 눈앞에 이름만 귀족인 거지 백작가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다.

어마 무시한 귀족들이 모여 왕국을 이루고, 그 왕국들이 한데 모인 게 왕국 연합이다.

왕국 연합의 눈 밖에 난다는 건, 대륙 전체를 적으로 돌린다는 뜻.

코딱지만 한 도적 클랜이 감당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두려움에 흔들리는 놈들의 눈동자를 또렷이 바라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생초짜 놈들이구만.’

겁먹은 태를 이리 적나라하게 드러내다니 얘기가 쉬워지겠는데?

“나도 예상했어, 너네들이 시귀폭을 쓰지 않았다는 건.”

“알면서도 왜…….”

“하지만 왕국 연합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으음…….”

“그런데 있잖아. 너희에게 뒤집어씌우는 게 왕국 연합한테도 쉽지 않겠어? 너흰 좋은 먹잇감이야. 연합에게도 시귀폭을 쓴 사람에게도.”

“그, 그건…….”

“왕국 연합이 어떤 놈들인지는 알지?”

“우리가 안 했다잖아!”

참다못한 도적 한 놈이 소리쳤다.

난 비릿한 미소를 띄우며 놈에게 대꾸했다.

“그래. 계속 그렇게 소리쳐 보라고. 사지가 포 떠지는 와중에도 말이야. 흑마법사들 대우가 어떤진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원하는 대답을 할 때까지 고문은 계속되겠지! 버티고 버티면 결국엔 왼손을 잘라 블랭크로 만들고!”

“으으……!”

“이 자식이!”

순간 마법사 녀석의 마법구가 반짝였다.

콰드득!

동시에 바닥에서 얼음이 솟구쳐 오르며 내 몸 주윌 덮쳐 왔다.

얼음은 내 몸을 꿰뚫기 직전에 그 자리에서 멈췄다.

‘흠.’

이건 마법 랭크 4부터 사용 가능한 아이스 블레이드다.

얼음 줄기가 뾰족하지 않고 뭉툭한걸 보니 이제 막 랭크 4에 도달한 녀석 같았다.

‘이십대쯤으로 뵈는데 랭크 4라……. 이건 못 참지.’

소설에도 나오지 않는 인재라.

이거 잘만 하면 예상외의 수확을 얻게 생겼다.

난 목이 꿰뚫릴 상황에서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녀석을 노려봤다.

도적 클랜에서 썩긴 안타까운 인재다.

그것도 조만간 추적당해 사라져 버릴 클랜이니 더더욱 안타까웠다.

“…….”

길게 뻗은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강한 척하곤 있었지만 두렵겠지. 다른 놈들도 아니고 왕국 연합에 노려진다는 거니까.

난 아이스 블레이드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체하며 말했다.

“이대로면 너희들은 죽는다. 그것도 아주 비참하게.”

“흥! 그 까짓거 여기서 널 죽이고 도망치면 그만이야!”

“그럴 수도 있겠지. 여기 있는 놈들 전부가 덤비면 한두 놈 죽는 걸로 날 처치 할 수도 있으니.”

“…….”

“하지만 그게 끝이다. 오히려 네놈들 죄목에 ‘귀족 암살 미수’가 ‘귀족 암살’로 바뀌기만 할 뿐.”

“…그래서 어쩌라고!”

난 얼음 기둥 사이를 비집고 마법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마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날 위해 일해라.”

“…뭐?”

“내 수족이 되어 달라 이 말이다. 그깟 까마귀 문양 따윈 버려 버리고. 붉은 사자를 위해 일하라고.”

붉은 사자. 임페라 가문의 문양을 뜻하는 말이었다.

마법사는 내 말에 눈빛이 흔들렸다.

“그런…….”

“그렇게만 해 준다면 지금까지의 죄는 다 잊어 주지.”

“하, 하지만! 시귀폭은 어쩌려고! 아무리 백작가 후계자라도 너 혼자 그걸 무마할 수는……!”

“그렇지. 시귀폭은 왕국 연합에서 금지한 흑마법. 아무리 나라도 왕국 연합을 홀로 없던 일로 만들 순 없지.”

“그럼 뭔데!”

“지금까지 너희들이 말하지 않았나? 시귀폭을 터뜨린 건 너희들이 아니라고?”

“그, 그랬지…….”

“그러니 그게 내가 너희들에게 내리는 첫 번째 임무다. 내 영지에서 시귀폭을 터뜨린 미친 흑마법사 X끼, 걜 찾아. 정보를 모아서 갖고 와라.”

대뜸 녀석들에게 ‘날 위해 일해라!’라고 했음 거절했을 거다. 뭐가 됐건 저들의 대장을 죽인 게 나니까.

그래서 이들에게 똑똑히 새겨 준 거다. 네놈들에게 대안은 없다고.

왕국 연합에게 모진 고문을 당해 죽든가. 아님 날 위해 일하든가.

‘잠깐. 이 여자 혹시 지오 크리시니랑 무슨 관계가 있거나 한 건 아니겠지?’

혹시나 이 여자가 크리시니의 애인이나 혈연관계면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뭣보다 마법 랭크 4니까 가능하면 내 편으로 들어왔음 하는데.

일단 내가 할 말은 다 했다.

겉으론 태연한 척 녀석들의 반응을 살폈다.

“어, 어떻게 할까요? 부마스터?”

“시끄러!”

“히익…….”

부하 놈들 눈치를 보니 저들은 이미 마음 떠난 듯했다.

이 여자를 빼면 그리 강해 뵈는 자들도 별로 없었다.

‘소설에선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는데.’

보아하니 나중엔 다 물갈이 되는 녀석들 같았다.

하룬을 죽이고 돈도 두둑이 챙겼을 테니 그 돈으로 어중띤 놈들은 다 갈아치운 거겠지.

그 과정에 이 여자도 떠나거나 했을 수도 있고.

한참을 고민하던 여자는 혀를 한 번 찼다.

“쯧!”

“후후.”

“…이봐.”

“뭐지?”

“그……. 정말로 그럴 생각이냐? 우리 죄를 묻는 대신 널 위해 일하라는 거.”

‘됐다!’

이만하면 다 넘어온 거나 다름없다.

난 어깰 으쓱하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게 아니면 내가 뭣하러 이 먼 땅까지 왔겠나?”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안 거지? 여긴 클랜원이 아니면 아무도 모를 텐데?”

“원래 귀족들은 이것저것 아는 게 많기 마련이다.”

“…알겠어.”

“알겠다는 건?”

여자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 앞에 섰다.

그리곤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갤 숙였다.

“…제 이름은 이슬린. 오늘부터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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