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이, 이자……. 아니 이분은……!”
하룬이 자이겔론드 왕국의 정당한 후계자인 것까진 모를 거다.
다만 그가 드워프라는 것만은 알 거다.
웬만한 영지가 되어서도 모셔가려 안달이 난 게 드워프 장인.
그런 자가 제 망나니 아들 녀석 방에서 나왔는데 놀라는 게 당연했다.
“제 술친구이자……. 어젯밤 시귀폭을 막는 데 큰 도움을 준 녀석입니다.”
“술친구?”
“네. 예전에 같이 놀고 마시고 하던 사인데. 어젯밤에 오랜만에 만나서 한 잔 하던 중이었습니다. 일이 터지는 바람에 제대로 놀진 못했지만.”
“아…….”
“그리고.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이 친구는 앞으로 우리 가문을 위해 일해 줄 겁니다.”
“뭐, 뭐라고? 그게 정말이더냐!?”
내 말에 에이먼은 화들짝 놀라기까지 했다.
“예.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 쫓겨 다니던 친구라……. 이참에 저희 백작령에서 사는 건 어떤가 얘길 나눴습니다.”
“그런…….”
에이먼은 믿기지 않는 현실에 말을 더듬었다.
워낙 고집불통이라 한두 푼으론 모셔 가는 것조차 힘든 분들을 이런 거지 백작령에서 모신다고?
“크흠…….”
하지만 이는 하룬에겐 전혀 달리 보였다.
자기네 영지를 재앙에 빠뜨릴 뻔한 위험인물을 안고 간다?
시귀폭 사건이 저 때문에 일어난 줄 알고 있어서 그런지 눈치가 보일 만하겠지.
하룬은 내게 슬쩍 귀엣말로 속삭였다.
“정말 이걸로 되겠나?”
“걱정 말라구. 어젯밤에 했던 말. 기억하지?”
“지난밤 사건은 자네 때문에 일어난 일로 치고, 대외적으론 ‘브론즈 비어드’라는 이름을 쓰라던 거 말인가?”
“좋아. 잘 기억하고 있구만. 아무래도 그편이 좋을 거야. 드워프 킹한테 암살 대상으로 노려지는 드워프라면……. 아버지라도 감당하기 껄끄러우실 테니.”
“끄응… 알겠네.”
하룬에게 다시 한번 확인을 받은 뒤 에이먼에게 얘기했다.
“…크흠! 그래서. 아버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어?”
“제대로 망치를 잡은 지 꽤나 지났지만… 이 브론즈 비어드! 옛 감각만 되찾는다면, 실력은 그 어떤 드워프한테도 뒤지지 않을 자신 있소! 그러니… 허락해 주시겠소?”
“당연한 말씀을! 저희가 오히려 감사할 따름입니다!”
에이먼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하룬의 손을 부여잡았다.
“크흑!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다니! 이 두 손이 부르트도록 두 분을 위해 일해 주리다!”
“흐흑! 저도 그럼 손님께 모자람 없이 물심양면 지원토록 하겠습니다!”
둘은 서로를 부여안고 좋아 죽을라 했다.
약간의 거짓말 위에 쌓인 관계지만.
뭐 어떤가.
좋은 게 좋은 거지.
* * *
푸른 달빛 주점 시귀폭 사건.
소문은 순식간에 근처 영지로 파다하게 퍼져 나갔다.
‘어젯밤 푸른 달빛 주점에서 시귀폭이 터졌데!’
‘시귀폭? 어떤 미친놈이?’
고작 이틀 만에 백작령에서도 그날 밤 사건을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 이대로라면 인근 영지를 너머 왕국 연합의 귀에까지 닿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시귀폭 사건에 엮여 나에 대한 소문까지 엮여 퍼져 나가고 있단 사실이었다.
‘그 망나니 공자 놈이 시귀폭을 막았다고?’
‘그렇다더라니까!’
‘하! 이것 참 오래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네!’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다.
평판을 쌓는 건 어려워도 뒤집는 건 한순간이다.
매일 착하게 살던 사람이 실수 한 번 하면, ‘내 언젠간 저럴 줄 알았어! 지금까지 숨기고 사느라 힘들었겠구만!’ 하는 게 사람이다.
반대의 경우엔 뒤집히는 경향이 좀 약하긴 하다만, 다른 자잘한 선행도 아니고 홀로 시귀폭을 막았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평판을 뒤집기엔 충분했다.
“좋아.”
난 이른 아침부터 시장거리에 나가 사람들 이야길 엿들었다.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인도 할 겸이었다.
다행히도 소문은 순조롭게 퍼지고 있었다.
웬 미친 흑마법사가 민가에 시귀폭을 터뜨렸고, 망나니인 줄로만 알았던 이안 임페라가 이를 막아 냈다!
이렇게 말이다.
죽은 자가 없는 건 아니지만, 나와 하룬이 없었다면 피해는 더욱 컸을 일이었다.
잘못 수습했으면 임페라 백작령까지 피해가 왔을지도 모르니까.
“근데. 대체 누가 그런 짓을 벌인 거지?”
“시귀폭이라며! 흑마법사 놈들이 한 거 아니야?”
“그러니까 흑마법사 놈들이 왜 시골에서 그런 짓을 한 거냐! 이 말이지!”
“흐음… 듣고 보니 그러네.”
모든 일엔 이유가 있고, 그에 따른 결과가 있기 마련이다.
시귀폭을 터뜨린 건 결과다.
그렇다면 왜? 왕국 연합의 영향력이 큰 것도 아니고, 시골 영지에 뭐하러?
무슨 원한이 있길래?
“설마… 베네르 쪽에서 공자님을 노리고 벌인 일 아니야? 이안 공자님이 거기 있었다며.”
“쉬잇! 이놈아! 그게 무슨 정신 나간 소리야! 아무리 우리 백작님이랑 사이가 안 좋아도 귀족은 귀족이라고! 불경죄로 목 잘리고 싶어?”
“아니 뭐…….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시끄럽게 떠들던 이들은 방금 한 말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경직됐다.
난 조용히 이들 옆을 지나쳤다.
“흠.”
평민이라고 바보는 아니다.
이들에게 부족한 건 지식이지 지능이 아니다.
단순히 먹고 살기에 급급하기만 한 자들도 있지만. 대략적인 큰 그림을 읽을 줄 아는 자들도 많았다.
그리고 이런 자들의 입을 타면서 소문은 퍼지는 거다.
“평민들 사이에도 저런 얘기가 나오는 걸 보면… 조만간 결론이 나겠군.”
다른 일도 아니고 시귀폭이다.
아이소테르 왕국에서도 뭔가 행동에 나설 거다.
아이소테르 또한 왕국 연합에 속한 왕국. 이런 문제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문제는…….”
아이소테르의 국왕 에런골드 2세.
그자의 계략대로라면, 임페라 백작가는 지금쯤 몰락의 길을 걷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크로드가 나서 준 덕분에 몰락의 길을 걷지 않았고, 에런골드 2세의 계략 또한 제동에 걸렸다.
귀족들 간에 피 튀기는 정쟁.
그게 에런골드가 원하는 바였다.
만약 그가 이번 시귀폭을 애먼 사람에게 뒤집어씌운다면?
평소 평판이 안 좋고, 사고만 치고 다닌 사람.
사람들에게도 아직 망나니로 찍혀 있는 나에게 뒤집어씌우지 않을까?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드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거기다 국왕이 직접 나선다면 일도 아니니까.
그럼 에런골드의 계략은 다시 박차를 가하게 될 거다.
임페라 백작가는 블랭크가 아닌, 시귀폭으로 몰락하고, 피 튀기는 정쟁이 이어지겠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마냥 앉아 기다려서 에런골드 2세의 자비가 있기만 기도하고 있어야 하나?
“…쯧.”
가만히 앉아서 남의 자비를 바라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다.
뭐라도 해야 한다.
내 손으로 이번 시귀폭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
이름 모를 흑마법사 놈을 잡아다 바치기라도 해야 한다.
그렇게만 한다면, 몰락의 길은 내가 아닌 베네르 백작의 앞에 놓여지겠지.
“하…….”
이제 좀 편해지나 했는데. 또 일이라니.
다른 놈도 아니고 시귀폭까지 만드는 흑마법사를 어떻게 찾지?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닐 거다.
시귀폭이 터질 때 여파로 시전자의 랭크를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다.
단순한 폭발로만 끝났다면 흑마법 랭크 3.
독기에 전염된 이들이 구울로 변한다면 흑마법 랭크 4.
푸른 달빛 주점에서 있었던 일을 감안해 볼 때, 아마 녀석의 랭크는 4 정도일 거다.
“어흐.”
괜시리 소설에서 랭크 7 흑마법사 놈들이 펼치던 흑마법들이 떠올랐다.
말 그대로 땅이 갈라지고 온갖 역겨운 괴수가 균열을 비집고 틀어 나오던 묘사가 가득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래. 그래도 그게 어디냐. 랭크 1차인데.’
랭크 3과 4 사이엔 이른바 첫 번째 벽이 있다곤 하지만, 지오 크리시니 놈도 검술 랭크 4였으니 어떻게 잘 비벼 보면 될지도 모른다.
정면에서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다.
독을 쓰든, 마도구를 쓰든, 아니면 다구리를 치든.
“흐음.”
* * *
“호호호…….”
우아하게 차려입은 귀족들의 사교장.
베네르 백작의 저택에서 열린 파티엔 수많은 귀족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들 아이소테르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자들이다.
아도르네이 후작, 가톨 백작 외에도 수많은 가문의 유력가들도 자리하고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로 귀족의 품위를 뽐내고 있긴 하다만, 다들 속에 시커먼 능구렁이를 키우고 있었다.
개중에 가장 커다란 능구렁이를 가진 자는 당연히 파티의 주인, 베네르 백작이었다.
“준비한 음식이 입에 맞으실진 모르겠군요.”
베네르 백작은 아도르네이 후작에게 싱긋 미소 지으며 겸손을 떨었다.
아이소테르 왕국의 최전방을 지키고 있는 아도르네이 후작.
전방 지역인 탓에 재원이 넉넉하진 않지만 사실상 군권을 쥐고 있는 자다.
덥수룩한 수염이 희끗희끗 새었지만 두 눈의 총기만은 젊은이 못지않았다.
“다른 파티도 아니고 백작님께서 준비하셨는데 부족함이 있겠습니까? 역시 볕이 좋은 땅에서 자란 와인답게 풍미가 아주 깊더군요.”
“아도르네이의 주인께서 자릴 빛내 주신 덕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하하…….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겉으론 아양을 떨고 있지만 다들 속내는 달랐다.
‘하! 등신 같이 던전을 하나 뺏기더니. 그래도 돈은 여전히 많나 봐?’
‘전방에서 구르던 네놈은 이런 거 구경이나 해 봤나?’
하지만 귀족들의 정쟁이 그러하듯 결코 속내를 들켜선 안 된다.
서로 실실 웃기만 하다가도 명분만 있으면 곧장 등에다 칼을 꽂을 놈들이니.
이번 베네르 백작의 파티는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임페라 가문에 발디그 던전을 빼앗긴 건 벌써 파다하게 소문이 나 버린 뒤다.
덕분에 다들 그를 우습게보고 있으니, 이를 반박할 만한 뭔갈 보여 줘야 했다.
아직 임페라 가문은 건재하다.
아이소테르의 귀족들 중 손에 꼽는 사병을 가지고 있고, 돈도 제일 많으며, 그깟 던전 하나 빼앗긴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덕분에 백작의 파티엔 온갖 산해진미와 평소엔 보기도 힘든 와인들로 가득했다.
이만하면 그의 힘을 과시하기엔 충분했다.
베네르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면서도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망할 망나니 새끼. 그 개자식 때문에 깨진 돈이 얼만지…….’
울화가 치밀었지만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썼다.
숨겨 왔던 히든카드 로물루까지 쓴 마당이니 이제 임페라 백작령은 신경 꺼도 된다.
이안은 죽었을 터였다. 운이 좋다면 구울들이 임페라 백작령까지 침범했을 수도 있다.
그때 베네르 백작이 구원을 나선다.
시귀폭이 터진 영지를 구원해 주고, 증거를 날조해 이안 그 망나니가 시귀폭을 터트렸다 하면 된다.
그다음 임페라 백작에게 책임을 물게 한 뒤, 영지전으로 다 뺏을 계획이었다.
그렇게 결론지으면 그만이다.
“후후……!”
조소를 흘리며 낭보를 기다리던 그의 눈에 집사 아르베르토가 보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만족스런 표정으로 이안의 죽음을 보고해야 할 그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배, 백작님……?”
“무슨 일이지? 아르베르토?”
파티가 한창이라 베네르는 태연한 척 집사에게 말했다.
“잠시 드릴 말씀이…….”
“…그래.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아도르네이 후작은 싱긋 미소 지으며 자릴 비켜 줬다.
베네르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
전방에서 구른자다 보니 눈치 하난 백단인 노인네다. 덕분에 아르베르토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듯싶었다.
베네르는 일단 집사를 데리고 조용한 방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길래 파티 도중에까지 온 거지?”
“그, 그게……! 계획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차질?”
베네르의 눈썹이 꿈틀댔다.
“…설마 이안이 살아남은 건가?”
“그…렇습니다.”
“이런 망할!”
억수로 운 좋은 놈이다.
하지만 어떻게?
“시귀폭이 잘못 터지기라도 했나? 이 로물루 등신 같은 놈을 그냥!”
“아닙니다! 시귀폭은 제대로 터뜨렸습니다만……. 어째선지 이안 녀석은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뭐라? 그게 가능한 소린가?”
“보고에 의하면……. 사실입니다.”
베네르의 목에 핏대가 불룩 솟았다. 아르베르토는 벌벌 떨기만 할 뿐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흑마법사 로물루를 써 가며 시행한 계책이다.
그의 손에 죽어 간 영지민만 해도 수십. 거기에 이번 시귀폭의 재료로 소모된 사람까지 합하면 더 된다.
“흐으……! 그래도……! 임페라 놈들에게 피해를 주긴 했겠지?”
시귀폭이 터진 건 사실이다.
이안을 죽이는 데는 실패했어도 어느 정도 피해를 주긴 했을 터.
하지만 아르베르토의 대답은 그의 바람을 무참히 짓밟았다.
“배, 백작님…….”
“빨리 대답해라!”
“주점에 있던 사람들은 다 죽었답니다!”
“…주점?”
“예……. 대충 스무 명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