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그럼. 수고하라고.”
“옛! 들어가십쇼! 공자님! 충성!”
귀족집 아들내미가 좋긴 좋다.
그것도 영지 하나를 다스릴 만한 귀족이면 더더욱 좋고, 위병대장은 칼각 잡힌 경례까지 올려 가며 우릴 돌려보냈다.
솔직히 말하자면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정체 모를 괴한들뿐만 아니라, 이 근방에선 보기가 하늘에 별 따기인 드워프까지.
심지어 시귀폭은 왕국 연합에서 금지한 악랄한 흑마법 중에 하나.
평범한 이였다면 귀찮은 조사가 줄을 이었겠지만 다행히도 난 아니었다.
피똥 싸게 가난한 백작가여도 백작가이긴 했으니까.
그렇게 유야무야 일을 마무리 짓곤 짤딸막한 새 친구를 데리고 가문의 저택으로 되돌아왔다.
늦은 시간이라 에이먼은 잠에 든 듯했다. 아마 내일이면 시귀폭 사건을 듣고 놀라 까무러치겠지.
“어서 오세…….”
늦은 밤 일레느가 인기척을 느끼고 마중 나왔다.
“…꺄악!”
일레느는 피칠갑을 한 날 보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 일레느.”
“도련님! 대체 오늘은 또 무슨 일로 그렇게 되신 거예요!”
“내 피는 아니니까 걱정 마.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할게. 아버지는?”
“배, 백작님은 오늘 일찍 주무셨어요…….”
“다행이네. 내일 아침이면 바쁠 테니 푹 쉬셔야지. 일단 피 좀 닦을 수건 좀 챙겨 줄래?”
“네에…….”
일레느는 이젠 지쳤다는 듯 잠자코 내 말에 따라 줬다.
내일 아침이면 백작령 전체가 소란스러워질 거다.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양쪽으로.
“들어와.”
“…알겠네.”
일레느가 가져다준 수건으로 대충 피를 닦아 내자 하룬은 얼른 고갤 숙였다.
“미안하네!”
아마 그는 이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시귀폭과 지오 클랜의 암살 미수가 모두 자신을 노린 공격이라고.
난 그 틈에 재수 없게 껴 피해를 입었고 운 좋게 목숨을 구제한 거라고 말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분명 나에게 목이 달아난 크리시니는 하룬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시귀폭에 휘말린 탓에 부하들까지 모조리 구울로 변해 버렸고 덕분에 크리시니를 손쉽게 처치할 수 있었다.
만약 하룬이 없었다면 목숨이 위험했을 쪽은 오히려 나다.
따지고 보면 하룬이 내 생명의 은인이었다.
하지만 그걸 사실대로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흐음…….”
열심히 짱구를 굴렸다. 그리곤 결론 하날 끄집어냈다.
‘당연히 설명할 필요는 없지.’
빚이란 건 크게 지울수록 좋은 법.
더군다나 상대가 드워프 킹의 후계자씩이나 되는 자라면 더더욱 해당되는 이야기다.
난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하룬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오히려 네 덕에 구울로 변해 버릴 뻔한 걸 살았잖아? 물론 내가 아니라 ‘널’ 노리고 한 공격이었겠지만.”
“그, 그렇지.”
“덕분에 죽을 뻔한 것도 사실이고.”
“…….”
“하지만 이렇게 살아 있잖아?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지 않겠어?”
“으음.”
하룬은 미안해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흐흐.’
양심이 좀 찔리긴 하다만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이걸로 하룬은 내게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할 테고, 내 부탁이라면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놈들이 왜 널 노린 거지? 혹시 저번에 말한 ‘가정사’랑 관계가 있는 건가?”
난 모르는 척 하룬에게 물었다.
“끄응…….‘
하룬은 입술을 앙 깨물곤 고민에 빠졌다. 그리곤 잠시 고민하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래. 얘기 못 해 줄 것도 없지.”
하룬은 숨겨 왔던 이야길 다시 늘어놓기 시작했다.
다만 지난번처럼 벌레가 파먹은 듯 군데군데가 끊긴 이야기가 아닌, 온전한 이야기였다.
자이겔론드 왕국의 선왕 베일렌드 론 말라크는 그의 장자 하룬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평소 모험에 열의가 있는 그였기에 조금은 탐탁지 않았지만 이내 운명이라 생각하곤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의 동생 엘루윈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후계자 지명이 이뤄진 그날 밤.
엘루윈은 형과 형의 부하들을 향해 숨겨 왔던 발톱을 드러냈다.
부하들의 희생 끝에 자이겔론드 산에서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아직 산에 남아 있던 그의 자식들과 부하들은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야말로 몸만 덩그러니 탈출한 거다.
가진 게 몸뚱이밖에 없었던 그는 그 뒤로 전 세계를 떠도는 떠돌이 신세로 전락했다.
아직까지도 엘루윈은 용병 암살단을 고용해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세계 반대편에 위치한 임페라 백작령조차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
한순간에 드워프 킹의 후계자에서 도망자 신세가 돼 버린 하룬.
그간의 여정을 듣자 가슴이 퍽 메어 왔다.
‘쯧쯧…….’
“그런 일이 있었구만.”
“분명 이번 일도 동생 녀석이 날 노리고 벌인 일일 게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 같으니!”
하룬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로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먹이 추욱 늘어졌다.
“후우…….”
하지만 그에겐 힘도 뭣도 없었다.
상대는 이미 자이겔론드 왕국의 왕위를 물려받은 드워프 킹.
그런 자를 떠돌이 드워프가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매번 내 망치에게 미안할 뿐이라네. 쇠를 두드려야 할 망치가 몬스터들이나 때려잡고 있다니.”
“괜찮다. 네 잘못이 아니라구.”
“가끔은……. 그냥 다 포기하고 편해지고 싶어진다네. 망할 도망자 신세 따위는…….”
그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편해지고 싶다라.’
그렇담 아주 좋은 곳이 있는데.
“이제 여기도 떠나야겠지. 괜히 더 얼쩡거렸다간 여기도 위험해질 테니 말일세. 이번 일은 정말 깊이 사죄하겠네. 친우여.”
난 씰룩거리는 입꼬릴 애써 참아가며 진중한 척 한마디 내뱉었다.
“그 말은……. 편하게 지낼 수만 있다면 계속 있겠다는 소린가?”
“으음? 뭐…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지.”
“그럼 나랑 함께 지내지.”
내 말에 하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네랑? 안된다네! 그렇게까지 민폐를 끼칠 순…….”
“민폐라니! 고작해야 사람 하나 들이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내 영지가 아무리 가난해도 그렇게까지 가난하게 보일 줄은 몰랐는데?”
“아니아니! 그런 의미가 아닐세! 난 그저……! 게다가 영지에 피해를 끼친 놈이랑 같이 산다니! 그랬다간 자네한테도 피해가 갈 수 있어!”
“흥! 그 까짓거 날 노리고 일어난 일이라 해 주지. 그거면 되겠나?”
하룬의 입은 거절하지만, 눈동자는 확실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건 너무 미안한데…….”
“미안하면 다른 걸로 갚으면 되지 않나? 가령 날 위해 일해 준다거나.”
“일?”
“그래. 친구를 위해서라면 작은 일자리 하나 정도는 내어줄 수 있지. 작은 대장간의 장인으로 말이야.”
“자,장인!”
장인이란 말에 하룬이 격하게 반응했다. 눈이 커지고 콧구멍을 벌름거릴 정도였다.
드워프란 대장장이질을 업으로 삼는 종족이다.
대장간을 짓고 연료를 태우며 광석을 녹인다.
이는 쫓겨 다니는 도망자로선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 일이었을 거다.
그걸 해 주겠다는 제안이다. 덤으로 자신의 보호 아래에 있게 해 주겠다는데.
이토록 격하게 반응할 법했다.
“내 자이겔론드 산에서 쫓겨난 이후로 평생을 꿈꿔 왔네! 예전처럼 망치로 철을 두드리는 꿈 말이야! 망할 몬스터 대가리가 아닌 단단한 철을!”
하룬은 망치를 손에 쥐고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그렇담 특별히 그쪽으로 신경 좀 써 줄 수 있지. 손이 닿는 한에서 최고의 시설을 마련해 주는 걸로 말이야. 대신 일이 좀 많을 거야. 보수는 적을 테고.”
“상관없네! 아니! 밥 먹고 재워주기만 하면 얼마든 부려 먹어도 좋아!”
“밥이랑 재워 주기만 하면 되겠나?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술까지 내어주지!”
“저, 정말인가!”
“친구끼리 못 해 줄 게 뭐 있나?”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하룬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와락! 달려들었다.
“으흐흑! 정말 고맙네!”
이렇게까지 고마워하니 좀 미안한데. 뭐 이 정도면 착한 거짓말인 셈 치자.
하룬은 안전한 안식처가 생겨서 좋고, 난 아주 싼값에 드워프 대장장이를 얻었으니 좋은 거니까.
* * *
“뭐라! 시귀폭이 나타났다고!”
이른 아침, 옆 영지에서 날아온 편지를 보고 에이먼은 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놀랬다.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왕국 연합.
시귀폭은 이 왕국 연합에서도 악랄한 범죄로 금기시하는 흑마법이다.
병사, 민간인을 나누지 않고 지역 자체를 초토화시켜 버리는 악랄한 흑마법.
그게 임페라 백작령의 코앞에서 터졌다.
“그, 그래서! 지금 피해 상황은 얼마나 심각한 게요!”
“예?”
소식을 전하러 온 옆 영지의 집사는 다급한 에이먼의 반응에 고갤 갸웃했다.
이웃 영지에서 발생된 일이기에 간단히 소식만 전하러 온 그에겐 에이먼의 반응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갈 뿐이었다.
“예는 무슨! 시귀폭이 얼마나 번졌는지 알아야 이쪽도 대비를 해야 할 것 아니요!”
“흐음… 공자님께 따로 들으신 건 없으십니까? 그분께서 어제 수습하는 것까지 도와주셨던지라…….”
“…뭐라고? 내 아들이?”
에이먼은 저가 잘못 듣기라도 한 듯 고갤 갸웃했다.
아마 자기가 숨겨 둔 아들이 하나 있었나? 하는 생각이라도 하는 눈치다.
다른 놈도 아니고 망나니 아들, 이안이 시귀폭을 수습했다고?
“아, 왔나.”
상황이 복잡해질 것 같아 얼른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날이 밝는 대로 직접 말하려 했지만, 이미 밝혀진 마당에 뭐가 중요하겠나.
난 어깰 으쓱하며 에이먼에게 말했다.
“공자님!”
에이먼을 마주하고 있던 집사가 날 보자 표정이 밝아졌다.
“…이안?”
“저 친구 말이 사실입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그렇게 됐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어제 술 한잔 하러 갔는데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정리하고 왔습니다.”
“저, 정말이냐? 네가 혼자서 시귀폭을 정리했다고?”
에이먼은 똑똑히 듣고도 믿기지 않는 듯 되묻기까지 했다.
“…실례지만. 집사는 보내고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그, 그래……. 이만 가보셔도 좋습니다.”
“아.... 네. 그럼 가 보겠습니다.”
겨우 내려진 축객령에 어깰 으쓱하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래. 아들아.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너가 요 근래 좀… 많이 바뀌긴 했다만. 시귀폭을 홀로 저지하다니?”
에이먼은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그의 눈빛에서 아들을 걱정하는 아비의 마음이 느껴졌다.
아마 그런 걱정을 하고 있을 듯싶다.
이안이 흑마법이라도 배운 건 아닐까? 하고.
단기간에 랭크를 올리는 방법은 뭐니뭐니 해도 흑마법이다.
네크로노미콘마냥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랭크를 올릴 수도 있고.
그 외에도 산제물을 바친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흑마법 랭크를 올릴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흑마법을 배워 랭크를 올렸다면, 지금 이 상황이 가능했다.
같은 흑마법사라면 시귀폭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대처가 쉬워질 테니까. 그간의 급격한 랭크 상승도 해석이 될 테고.
왕국 연합의 눈으로 볼 땐 파렴치한 범죄 행위지만, 에이먼에겐 하나뿐인 아들이다.
설령 아들이 흑마법에 손을 댔다 하더라도, 에이먼은 아들을 위해 뭐든지 할 사람이다.
그러니 내게 묻는 거다.
만약 흑마법에 손을 댄 거라면. 차라리 아비에게 털어놓아 달라고.
“…우선 말씀드려야 할 게 있습니다. 놀라지 말고 들으셔야 합니다.”
“알겠다. 아들아. 넌 뭐가 됐건 내 하나뿐이 아들이다. 그러니…….”
에이먼의 표정에서 침울함이 묻어 나왔다.
그가 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전에 얼른 소리쳤다.
“브론즈 비어드! 들어와라!”
“으응? 브론즈 비어드?”
에이먼은 생뚱맞은 아들의 외침에 멍한 얼굴로 주윌 살폈다.
“나 말인가?”
내 방이 위치한 2층 쪽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젯밤 시간이 늦기도 해서 하룬은 내 방에 딸린 쪽방에서 한숨 자고 있었다.
“그래. 이왕 식객으로 들어온 거 집주인분께 인사부터 드려야지!”
“그하핫! 그래! 내 어제 정신이 너무 없었구만! 금방 내려가겠네!”
잠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오곤 내 방의 문이 열렸다.
내 허리깨나 겨우 올법한 짤딸막한 키의 하룬은 뒤뚱거리며 내려왔다.
“이분인가! 자네의 아버지 되시는 분이!”
에이먼은 하룬을 보곤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이겔론드 산맥이 임페라 백작령과 꽤나 멀리 떨어져 있긴 하다만 에이먼은 백작이다.
소문이나 책에서 많이 봤을 거다.
대장장이의 종족 드워프.
소문으로만 듣던 그의 모습에 에이먼의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