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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23화 (23/222)

23화

검은 두건을 쓴 여자가 큼지막한 지도에 팬던트를 댄 채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미동도 않던 팬던트는 한참을 중얼거리고 나서야 미세하게 움직였다.

지오 클랜에서 비싼 값을 치루고 빌린 ‘엘린담의 눈’의 열화판 아티팩트였다.

가지고 있는 힘은 간단했다.

전이 포탈을 감지하는 것.

전이 포탈 자체는 그리 귀한 장치가 아니다.

웬만한 영지에선 한두 개쯤 가지고들 있었고, 마법 랭크 6부턴 자체적으로 시전이 가능했으니까.

그렇담 이렇게 생고생하는 이유는 뭘까.

전이 포탈이 있어선 안 되는 곳. 예를 들면 후미진 깡촌이라든가.

그런 데서 시전되는 전이 포탈을 감시하는 거다.

이를 토대로 사냥감의 흔적을 찾고, 수소문 끝에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도 몇 번 성공하기도 했다. 아슬아슬하게 놓쳐 버렸지만.

굉장히 수고스런 일이지만 그럴 만한 가치는 충분했다.

이 사냥감의 목에 걸린 것만 벌써 1천 골드니까.

그것도 매달 100골드씩 꾸준하게 늘고 있었다.

이놈 하나만 잡으면 지오 클랜은 단숨에 손에 꼽는 암살 클랜으로 거듭 날 수 있었다.

“전이 포탈 사용이 감지되었습니다.”

“이번엔 어디지?”

“임페라 백작령에 위치한 산입니다.”

“호오…….”

임페라 백작령은 가난한 영지다.

전이 포탈 같은 값비싼 장치가 있을 리가 없었다. 마법 랭크 6의 괴물이 있을 리는 더더욱 없었고.

“드디어.”

수개월간 기다리던 사냥감이 드디어 흔적을 남겼다.

지오 클랜의 수장인 크리시니는 곧바로 부하들을 소집했다.

바삐 달려간다면 내일 아침까진 닿을 거리.

크리시니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거사는 내일이다.”

“예.”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니 주의를 놓치지 마라. 자칫 방심했다간 이쪽이 당할지도 모른다.”

“예! 대장!”

그는 클랜의 모든 인력을 여기에 투입했다. 이번 의뢰에 클랜의 목숨이 걸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오 클랜의 수장 지오 크리시니까지 이번 사냥감에 매달린 상태였다.

크리시니는 검술 랭크 4.

뒷거리에서 암살이나 일삼는 자 치곤 꽤나 능력 있는 남자다.

그런 그가 고작 사람 하나 죽이는 데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런데도 괜한 찝찝함이 가시질 않았다.

뭔가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일 것만 같은 불행한 예감.

문제는 이게 뒷세계에서 몇 년간 구르던 그의 직감인지, 괜한 기우인지 구분 안 가는 거였다.

크리시니는 고갤 세차게 털었다. 그리곤 하수인들과 한 번씩 눈을 맞추며 결의를 다잡았다.

콱!

단검을 뽑아 들어 탁자에 놓인 초상화에 찍어 버렸다. 초상화에 그려진 덥수룩한 수염에 칼이 꽂혔다.

‘하룬 론 말라크.’

구릿빛 수염을 가진 드워프가 이번 사냥의 목표였다.

* * *

약속했던 대로 브론즈 비어드와 술잔을 나눴다.

그리고 헤어질 때 즈음이면, 또 물어보려 했던 걸 까먹었다며 하루만 더 묵어 달라 부탁했다.

다음 날엔 보여 주고 싶은 아티팩트가 있다느니,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느니 하며 시간을 질질 끌었다.

그러길 벌써 일주일째.

그와 마신 술만 벌써 열 통이 넘어갔다. 대부분 브론즈 비어드가 마신거긴 하지만.

‘이제 슬슬 얘기해도 되겠지?’

오늘은 녀석에게 얘길 꺼낼 생각이었다.

나 이안 임페라를 위해 일해 줄 생각 없냐고.

그래만 주면 술은 기본이고, 백작가의 이름으로 보호해 줄 계획이었다.

‘받아 줄란가 모르겠네.’

그래도 들인 공이 있으니, 몇 달 정도라도 일해 주지 않을까.

“하…….”

그의 진명부터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하룬 론 말라크. 자이겔론드 왕국의 정당한 후계자.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그때, 브론즈 비어드의 등 뒤에 앉은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양옆으로 쭉 째진 눈은 보기만 했는데도 뭔가 께름칙한 기운이 풀풀 풍겼다.

“…….”

더 이상한 건… 녀석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눈을 돌린 거다.

그제야 깨달았다. 오늘따라 주점에 처음 보는 얼굴이 많다는 걸.

‘설마?’

임페라 백작령보다는 풍족하고 낫다지만, 여기도 시골인 건 마찬가지.

새로운 인물들이 많은 곳은 절대 아니었다.

“…이런.”

브론즈 비어드를 회유하는 데 정신이 팔려 주변 환경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대체 누구지? 설마 날 노리고?

브론즈 비어드는 내가 말을 하다 말자 궁금한 듯 고갤 갸웃했다.

“응? 자네 뭔가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그때 한 가지 더 이상한 점이 발견됐다.

‘뭐지? 이 냄새는?’

순간, 매콤하게 찌르는 듯한 악취가 코끝을 찔렀다.

시큼한 아몬드 향과 비슷한 냄새에 불현듯 책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흑마법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건 아마 이 마법의 영향이 클 거다. 시귀폭(屍鬼爆). 뼈에 사무치는 원혼을 온전히 담은 이 시신은 죽어서까지 원념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를 한순간에 터뜨려 주변 땅을 시체들의 땅으로 만드는 흑마법. 이처럼 악독한 마법은 일반 마법들 사이에선 찾아볼 수 없을 거다.]

‘시귀폭?’

원념으로 똘똘 뭉친 시체로 만든 폭탄.

시귀폭.

분명 ‘랭크빨로 세계정복!’에 나왔던 묘사 그대로였다.

난 냄새가 풍겨 오는 곳을 향해 고갤 돌렸다. 그건 다름 아닌 술집의 문 쪽이었다.

덜컹.

그 순간, 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가 들어왔다.

“나으리…….”

“으응?”

“사, 살려 주십쇼…….”

문 앞에선 피골이 상접한 거지꼴의 사내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냥 거지라고 하기엔 안색이 안 좋았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걸 넘어 초록빛깔까지 띠고 있는 게…….

“뭐야? 이 거지 새끼는! 당장 안 꺼져!”

난데없는 거지의 등장에 몇몇 손님들이 욕지거릴 내뱉었다.

“내 말 안 들려? 재수 없게 얼쩡거리지 말고 꺼지라고!”

그 순간, 미리 주점에 자리 잡고 있던 낯선 이들 중 하나가 거지를 거칠게 밀쳤다.

‘저, 저러면…!’

난 녀석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랐다.

녀석의 손이 닿자 거지의 얼굴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빨리 안 꺼지면……!”

고작해야 몇 초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지금 당장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어디로? 수상쩍은 놈들로 가득한 주점에서?

“흐흐! 술 맛 좋고!”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브론즈 비어드는 술잔 비우기 바빴다.

자질구레한 설명할 시간 따윈 없었다.

난 급한 대로 그의 턱수염을 움켜쥐곤 아래로 잡아당겼다.

“…숙여!”

“우읍! 이, 이게 무슨 짓……!”

그 바람에 녀석이 볼썽사납게 머릴 처박긴 했지만, 죽는 것보단 나으니까.

“모두 피해라!”

…꽈아앙!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시귀폭이 폭발했다.

* * *

역한 냄새가 주점 내부를 가득 채웠다.

주점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시귀폭은 흑마법사 중에서도 악랄한 놈들만 쓰는 스킬이다.

폭발력은 건물을 날려 버릴 정도도 안 되지만, 시귀폭의 악랄한 점은 그게 아니었다.

바로 후폭풍이 악랄했다.

어찌나 후폭풍이 참혹한지 전쟁에서도 사용이 금지된 스킬.

그런 스킬을 민간인들로 가득한 주점에서 터뜨려?

‘이런 미친 새끼들이……!’

우선 입과 코를 틀어막아 독기 흡입을 막았다.

하지만 사방이 틀어막힌 곳에서 터진 터라 이미 독기에 손발에 저릿거렸다.

‘대체 어떤 미친 놈이 시귀폭을… 노린 건 나… 아니, 설마 브론즈 비어드?’

당연히 나라고 생각했지만, 브론즈 비어드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듣고 난 지금, 노려지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크헉!”

“…쿨럭!”

시귀폭의 여파는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수상한 녀석들까지 미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하날 의미했다.

시귀폭을 터뜨린 놈과 다른 녀석들은 서로 다른 편이란 것.

독기로 정신이 아찔해지는 와중에도 머릿속은 재빠르게 돌아갔다.

브론즈 비어드를 노리고 있었다면, 그가 가진 ‘순혈’ 스킬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그를 상대로 시귀폭을 썼을 리는 없다.

순혈 스킬은 가만히 있기만 해도 주변의 독을 정화시켜 주는 능력이 있으니까.

그렇담 시귀폭은 날 노리고 들어온 공격이다.

그렇담 대체 누가?

어떤 미친놈이 이만한 원한을 가지고?

‘…베네르!’

이 망할 백작 놈이 기어이 일을 저지른 거다.

오로지 날 죽이기 위해 물불 안 가리고 흑마법에까지 손을 댄 거다.

제 몸 끔찍이 아끼는 베네르 백작이 스스로 흑마법사가 되진 않았을 거다.

어디 적당히 잡혀 온 흑마법사 한 놈을 구슬린 거겠지.

대강 상황 파악이 끝났지만 상황은 암울했다.

주점 가득 채워진 독기는 여전했고, 시귀폭의 두 번째 무서운 여파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워어억……!”

어중띤 흑마법사라면 폭발 한 번으로 끝났겠지만, 이 녀석은 아니었다.

시귀폭에 당한 시체들이 구울로 변해 일어서고 있었다.

폭발력과 독으로 치명상을 입히고 죽은 자들은 구울로 변해 주변 사람들을 공격한다.

구울의 공격에 목숨을 잃은 자들도 다시 구울로 태어난다.

따로 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연쇄적인 피해가 폭발적으로 발생한다.

그게 시귀폭의 무서운 점이고, 금술로 여겨지는 이유 중 하나였다.

“크윽!”

이를 악물고 숨을 참았다. 토혈이 턱 끝까지 끓어올랐지만 간신히 억눌렀다.

여기서 토혈을 하면 죽는다.

그럼 목숨을 잃는 것뿐만 아니라 구울이 되어 곱게 죽지도 못한다.

“괜찮은가!”

브론즈 비어드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끓어오르던 속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왕족만이 가질 수 있는 스킬 ‘순혈’.

덕분에 몸 안에 가득 차있던 독기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내 예상이 맞았어!’

브론즈 비어드는 하룬 론 말라크가 맞았다.

자이겔론드 왕국의 정당한 후계자!

“잠시 이러고 있게!”

하룬은 내 어깨에 손을 얹은 채로 손가락을 퉁겼다.

작은 불꽃이 그의 손가락에서 반짝였다.

…후욱!

하룬은 일어서서 불을 앞으로 들었다.

그의 목덜미가 불룩하고 솟더니 배 속에 가득 차 있던 술을 내뿜었다.

몸 안에서 순도 높은 발화 물질로 정제된 술은 불꽃에 닿자 거대한 불길로 자라났다.

화악!

붉은 화염이 주점 내부를 빠르게 훑었다.

이내 불길이 가라앉자 주점 가득 채워져 있던 독기가 말끔히 지워졌다.

그제야 난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허억! 허억!”

“이런……! 어떤 망할 녀석이!”

독안개가 가라 앉아 비로소 참혹한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커헉!”

안간힘을 써 가며 토혈을 버티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는 평범한 사람이 버틸 만한 게 아니었다.

“쿨럭!”

결국 참다 못해 토혈을 해 버린 이들은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방금까지 동료로 보였던 이들까지 공격했다.

“키에엑!”

놈들은 머리털이 모조리 빠진 채로 피눈물을 흘려 댔다.

이미 더 이상 인간이라 할 수 없는 몰골이었다

흑마법에 오염돼 움직이는 시체로 전락해 버린 구울.

그들 옆에서 부들거리는 이들은 그대로 구울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아마 하룬이 없었다면 난 그대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간신히 숨을 고르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녀석 하나가 비틀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 * *

‘젠장! 대체 이게 뭐냔 말이다!’

크리시니는 필사적으로 토혈을 참으며 생각했다.

전이 포탈이 사용된 걸 감지했고, 놈이 들른다던 술집에 미리 부하들을 대기시켜 놨다.

도주로를 차단하기 위해 앞문과 뒷문에 따로 배치까지 해 놓고, 놈이 술에 취하자 근처로 자릴 옮기기까지 했다.

미리 날카롭게 벼려 놓은 독단검을 만지작거리며 최적의 타이밍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근처 백작령의 공자놈이 같이 있는 게 좀 걸리긴 했지만, 그깟 깡촌의 공자놈 따윈 죽여도 별 상관없을 게 뻔했다.

더군다나 소문에 의하면 녀석은 망나니 중에 개망나니.

고작해야 랭크 1에서 2쯤 되는 놈으로 알려져 있었다.

예정됐던 데로 하룬을 죽이고, 여차하면 공자놈까지 죽이면 그만이다.

분명 완벽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별안간 거지꼴의 사내 하나가 나타나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콰앙!

폭발과 함께 지독한 시취가 주점을 가득 메웠다.

뒷세계에선 베테랑인 그였기에 이 냄새가 뭘 의미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재빨리 마나를 끌어올려 독이 퍼지는 걸 막고, 입과 코까지 단단히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의 부하들은 그러지 못했다.

“우웨엑!”

참지 못하고 토혈을 해 버린 부하들은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지곤 끝없는 식욕만이 전부인 구울로 다시 태어났다.

구울로 변해 버린 것만 열 명. 그마저도 나머진 구울에게 당해 잡아먹히고 있었다.

지오 크리시니 본인을 제외하곤 모두 전투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암살은 고사하고 지오 클랜 자체가 명줄이 끊길 판국이다.

크리시니는 입 안이 문드러지도록 어금닐 깨물었다.

‘부하들은 다시 구하면 된다! 녀석의 목숨만 끊는다면……!’

허튼 생각은 아니었다. 이번 의뢰를 맡긴 의뢰인을 생각해 보면.

몇 번이나 다릴 거쳐 의뢰를 맡긴 했지만 크리시니는 알고 있었다.

의뢰인은 다름 아닌 자이겔론드의 드워프 킹 알루윈이란 걸.

그에게 암살 대금을 받고 적당히 협박하면서 돈을 뜯어내면 클랜원쯤은 다시 채울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강한 클랜으로 거듭날 수 있다.

‘저 녀석만 죽이면!’

사방에서 달려드는 구울에 정신없는 하룬.

크리시니는 그의 뒤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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