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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22화 (22/222)

22화

베네르 저택의 지하 깊숙이 위치한 감옥.

크기로만 따지면 죄수 수백 명을 수용하고도 남을 정도로 넓었다.

으리으리한 베네르 백작의 지하에 위치해 있기엔 좀 어색한 장소였다.

죄수들을 수용하기 위한 수용소는 이미 밖에 마련되어 있다.

그럼 여긴 대체 뭣 때문에 존재하는 걸까.

놀랍게도 이곳은 단 한 사람을 위해 지어진 감옥이었다.

퀴퀴한 곰팡내가 진동하는 감옥에 저택의 주인, 베네르 백작이 들어섰다.

그는 한 손엔 촛불을 든 채로 어두운 감옥 제일 깊숙한 곳까지 걸어갔다.

그 끝엔 한 남자가 쇠사슬에 묶인 채로 있었다.

생긴 건 멀쩡해 보이는 자였다.

그와 마주한 베네르 백작처럼 노란 금발에 초록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베네르는 그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로물루.”

“아아…….”

로물루는 그제야 천천히 고갤 들어 손님을 바라봤다.

“오랜만이군요……. 백작님…….”

로물루는 입술을 비집고 기분 나쁜 쇳소리 같은 목소리가 나왔다.

평범한 사람이 들었다면 소름이 돋을 목소리였지만, 베네르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그간 반성은 제대로 했느냐?”

“흐흐……. 물론이지요.”

로물루가 이곳 지하 감옥에 수감된 지 벌써 3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로물루는 베네르 백작령에서 꽤나 악명 높은 흑마법사다.

대외적으론 사형에 처한 걸로 알려져 있으나, 이처럼 베네르 백작의 저택 감옥에 몰래 수감되어 있었다.

죄명은 영지민 학살.

흑마법 연구를 빌미로 그간 그의 손에 죽은 영지민만 해도 백 명을 훌쩍 넘겼다.

당연히 사형을 내려야 마땅한 악인이지만 베네르 백작은 혹시 모르는 마음에 그를 살려 뒀다.

어딘가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이다.

이는 지극히 위험한 발상이었다. 흑마법은 왕국 연합법상 발견 즉시 사살이 원칙이다.

그가 이렇게 흑마법사를 숨기고 있는 것만으로도 큰 문제가 되는 일이었다.

‘가능하면 쓸 일이 없었으면 했건만…….’

하지만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서든 임페라 가문. 특히나 발디그 던전을 빼앗아 간 그 망나니 아들 놈!

그 자식들에게 복수 해 주고 싶었다.

“…네놈이 해 줘야 할 게 있다.”

“제가요? 허허……. 죄송하지만 전 이렇게 묶여 있는 터라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만…….”

로물루는 제 몸을 꽁꽁 묶은 사슬을 흘긋 거리며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까득!

베네르는 로물루의 빈정거림에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임페라 가문을 조질 수만 있다면 이깟 빈정거림쯤은 몇 번이고 참을 수 있었다.

“…그래.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준다면. 구속에서 풀어 주도록 하겠다. 대신! 내 영지가 아닌 다른 곳으로 추방시킬 것이다. 내 영지에서 또 날뛴다면 그땐 무조건 목을 칠 테니 얼씬도 하지 말아라!”

“흐흐!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간 정들었던 땅이라 조금 아쉽긴 합니다만……. 백작님의 말씀대로 해야지요.”

놈이 말하는 꼴을 보니 한동안 베네르 백작령에서 설칠 게 뻔했지만, 복수를 위해서라면 그깟 손실쯤은 괜찮았다.

“으음…….”

“그래서 부탁이란 게 뭡니까?”

로물루는 궁금하다는 듯 베네르 백작에게 물었다.

“시귀폭. 그걸 만들어서 임페라 공자놈이 있는 곳에서 터뜨려라.”

시귀폭.

이 마법은 흑마법사들이 미움 받는 원인이기도 했다.

흑마법은 대부분 거부감이 팍팍 드는 마법들로 가득했다.

시체를 걸어 다니게 한다느니, 악마와 계약해 주변을 위협에 빠뜨린다느니 하면서 말이다.

대표적인 마법이 바로 이 ‘시귀폭’.

단어 그대로 사람의 시체로 만든 폭탄이란 거다.

효과 또한 악랄하기 그지없다.

거대한 폭발뿐만 아니라, 시전자에 따라선 주변 땅을 한동안 독기로 가득 차게 만들기까지 하니까.

“시귀폭 말씀이십니까? 허허……. 이것 참. 임페라에서 아주 크게 원한 살 만한 일이 있었나 보군요.”

“그걸 말이라고……! 지금도 생각하면 할수록 피가 거꾸로 솟는다! 그 망할 망나니 X끼만 아니었어도……!”

“흐흐흐! 진정하시지요! 시귀폭쯤이야 얼마든지 만들어 드릴 테니! 대신 시귀폭 제조에 필요한 재료쯤은… 준비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시귀폭의 재료는 시신이다.

그것도 지독한 원념이 사무친 시신.

그런 시신이 자연적으로 발생할 일은 거의 없다.

떄문에 대부분 흑마법사들은 시귀폭의 재료를 ‘자체적’으로 생산한다.

제대로 사고가 박힌 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베네르는 이미 복수에 눈이 멀어 있었다.

“언제부터 가능하지?”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재료만 충분하다면.”

“…알겠다. 그럼 바로 준비해 오도록 하지.”

* * *

술 한잔 사겠단 말에 녀석은 군말 없이 내 뒤를 따라 나섰다.

향한 곳은 그와 처음 만났던 옆 영지의 푸른 달빛 주점.

향하는 길 내내 녀석은 주절주절 수다를 떨어 댔다.

쓸데없는 음담패설이나 잡소리가 대부분이었다.

적당히 그의 수다에 장단 맞춰 주다 보니 술자리 한상이 차려졌다.

“오랜만이야. 난쟁이 친구.”

“크흐흐! 그러게나 말일세! 자! 한 잔 받게!”

달큰한 포도 향이 올라오는 술 한 잔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브론즈 비어드는 술잔을 받자마자 냉수 들이키듯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푸하! 그래! 이 맛이지! 이 달달한 싸구려 술맛! 이게 그리웠다구! 크하핫!”

“…내 거도 줄까?”

“뭐라? 그럼 자네는!”

“난 술 끊었어. 요새 몸이 좀 안 좋아서.”

“흐흐! 1년 만에 뭔가 많이 변하긴 했구만! 나야 좋지! 대신 술값은 다 자네가 내는 거. 알고 있겠지?”

“당연하지.”

녀석은 신난 듯 연거푸 술잔을 들이켰다.

이건 뭐 하수구에 술을 들이부어도 이렇게 안 마시겠다.

그렇게 혼자 오크통 하나는 비우고 나서야 녀석은 알딸딸한 표정을 지었다.

“끄윽……!”

시시콜콜한 잡답이 계속 오갔고, 이제 조금은 진중한 이야길 꺼내 봐도 괜찮을 듯싶었다.

“그나저나 아깐 죽을 뻔했다고.”

“크흐흐… 그건 내 사과하지! 요새 꿈자리가 영 뒤숭숭해서 말이야.”

“꿈자리?”

“…그런 게 있다네.”

“흐음.”

“…궁금한가?”

녀석의 말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술 마시면 으레 그런 법이다.

괜히 더 사람이 믿음이 가고. 숨겨 둔 비밀도 풀어놓고 싶고.

겉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녀석도 속으로 끙끙 앓고 있을 게 분명했다.

다른 상황도 아니고 자신의 집에 들어온 불청객을 단박에 죽일 상황이라면.

“조금은 궁금하지. 대체 뭐가 그리 걱정이길래 골렘까지 들여다 놓고 집을 지키는 건지 말이야.”

“실은…….”

방금까지 호탕하게 웃어젖히던 녀석은 금세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숨겨 왔던 이야기보따리 하날 꺼내 들기 시작했다.

“…내 동생이 날 죽이려 한다네.”

“동생이 널 죽이려 든다고?”

“쉬잇! 조용히 하게나! 떠벌리고 다닐 만큼 자랑스러운 얘긴 아니라네!”

“…그렇긴 하지.”

브론즈 비어드는 목소릴 낮춘 채로 자기 이야길 늘어놓았다.

군데군데 벌레가 파먹은 듯, 빈 구석이 잔뜩인 이야기였다.

자기 진짜 이름이 뭔지. 자길 죽이려는 동생의 이름은 뭔지. 왜 자길 죽이려는지.

어느 것 하나 명확하게 밝히는 구석이 없었다.

“…그렇게 된 걸세. 세상의 반대편인 여기까지 오면 좀 덜 하려나 했지만, 오히려 용병들까지 고용해서 날 죽이려 들고 있다네.”

“그래서 그렇게 날이 서 있다는 거야?”

“흐흐. 미안하게 됐네. 이제 좀 이해가 가는가? 내가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흐음…….”

하지만 난 그의 이야길 들으면 들을수록 한 가지 의심이 자라났다.

동생에게 죽임을 당하려는 드워프라…….

그것도 이역만리 머나먼 타지에서까지.

순간 일말의 가능성에 지나지 않았지만 한 인물이 떠올랐다.

분명 어마어마한 거물임에도 소설에선 스쳐 지나가듯 언급되는 것만으로 끝나는 한 드워프가.

어쩌면 이자가? 설마?

“역시나 믿기지 않는 눈치로구만.”

브론즈 비어드는 섭섭한 듯 술을 한 모금 홀짝였다. 그만큼 마시고도 술이 또 들어가네.

만약 내 예상이 맞다면 이 드워프는 보통 드워프가 아니었다.

드워프들의 왕국 자이겔론드.

그들이 사는 산맥의 이름을 딴 자이겔론드 왕국은 소설의 중후반부서부터 등장한다.

좋은 쪽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이유는 간단했다.

탐욕의 왕 ‘알루윈 론 말라크’.

이 녀석 때문이었다.

드워프들의 정점에 섰음에도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 왕궁을 모조리 금으로 도배해 놓고도 모자라선 선조의 금기까지 범하고 만다.

자이겔론드 산 깊숙이 위치한 고대인을 깨우고 만 것이다.

어찌어찌 주인공 일행의 도움으로 고대인을 무찌르긴 하지만, 이 덕분에 말라크는 목숨을 잃고 왕국까지 공중분해 될 위기에 처한다.

어찌어찌 그의 아들이 수습하긴 하나, 찬란한 옛 드워프 왕국 기술 대부분이 유실되고 만다.

소설 읽으면서도 고구마 백 개는 입에 처넣는 기분으로 본 파트다.

얼마나 심하면 매번 요리 레시피 적던 놈도 못 참고 욕을 한바가지 써 놨을까.

대충 일이 다 수습되고 난 후에 알게 되지만, 원래 왕위에 올랐을 자는 알루윈이 아니었다고 한다.

실은 그의 형, 하룬 론 말라크가 정당한 후계자였다.

하지만 왕위 세습이 결정되던 날 밤.

알루윈은 반역에 나선다.

하룬과 그의 부하들을 암살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라 버린 거다.

그리곤 대신들에겐 뻔뻔스레 거짓말까지 했다.

형인 하룬 론 말라크는 방랑벽 때문에 왕위를 버린 채 도망쳤다고.

원래 죽이려고 했지만 하필이면 시종에게 들키는 바람에 빠져나갔다나 뭐라나.

하룬 론 말라크가 언급되는 건 그게 끝이었다.

그렇다는 건 아마 끝끝내 암살을 성공했다는 거겠지.

영원한 비밀은 없기에 왕국의 공신 몇몇 사이에서 소문이 돌긴 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어쩌겠나.

이미 하룬은 죽고 정당한 왕은 알루윈밖에 없는데.

그렇다.

내 예상이 맞다면… 이자는… 알루윈의 형이자… 정당한 드워프킹의 계승자.

하룬 론 말라크가 틀림없었다.

‘그러고 보니 동굴 안이 이상하게도 쾌적했지.’

드워프 왕족에게서만 발현되는 특수한 스킬 중 하나.

‘순혈’.

순수한 혈통을 가진 자들에게만 발현되는 이 스킬은 주변 대기를 정화 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비단 드워프 왕족뿐만 아니라 엘프나 소수의 왕족들에게도 발현되는 스킬이다.

모든 정황이 그가 하룬 론 말라크라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이자가 날 위해 솜씨 좋은 장인이 돼 줄까?

그건 둘째 문제다.

가장 큰 문제는 자이겔론드 산에 있었다.

알루윈 론 말라크.

그가 가만히 있을까?

자신의 형이자 정당한 왕위 계승자인 하룬을 받아 준다는 작자를?

거리가 멀긴 하지만 그는 드워프들의 제왕이다.

아이소테르 왕국 하나 이랑은 비견도 안 될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끄응.’

골치 아프네 이거.

하지만 그럴수록 이자는 더 달콤하게 느껴졌다.

달콤할수록 몸에 안 좋다지만, 드워프 킹의 형을 그냥 내보내 주는 건 더더욱 아쉬웠다.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뭐가 됐건 간에 1년 만에 만난 술친구에게 ‘날 위해 일해라.’라고 한다고 들어줄 리도 없고.

일주일 정도 공들여 가며 술도 먹이고 이것저것 해야 말이라도 듣지 않을까 싶었다.

‘오늘은 원 없이 먹여 주마.’

그렇게 브론즈 비어드는 오크 통 2개를 비우고 나서야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래선 요 며칠 동안 생고생한 게 말짱 도루묵인데…….’

“흐흐! 이거 나만 너무 마신 건 아닌가 모르겠구만! 크하핫!”

“나야 드워프랑 술도 먹어 보고 재미있지. 너만 괜찮다면 며칠 더 놀았으면 하는데. 괜찮겠나?”

“…며칠 더?”

녀석은 며칠 더 근처에 머무르란 말에 고민에 빠진 듯했다.

“물론 내일도 술값은 내가 대주지. 내일 간단히 뭣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물어볼 거라니? 그거라면 진작에 얘기하지 그랬나!”

“깜빡했지 뭐야. 정 어려우면 내일 하루만 시간 내주는 건 어때?”

“크흥! 며칠까진 어려워도 하루 정도라면야…….”

녀석은 못 이기는 척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녀석도 사람인데 양심이란 게 있긴 할 거다.

이렇게 하루 이틀 주는 족족 받아먹다 보면, 어느 샌가 날 위해 뭐라도 해 주지 않으면 못 참을 지경까지 가겠지.

‘그때까지 내 주머니가 버틸지가 문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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