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허억……! 허억……!”
난데없는 산행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이건 뭐 암벽등반 하는 것도 아니고.
“뭔 놈의 산이……! 이따위냐……!”
꾸준한 랭크 업으로 사람 구실은 할 수준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런 몸 상태로도 클라니그 산은 버겁기 그지없었다.
산길은 사람이나 산짐승들이 다니다 자연스레 생기기 마련이다.
클라니그 산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무지막지한 돌산.
사람은커녕 산짐승 한 마리도 나다니지 않는 산이다.
덕분에 산길은 고사하고 그 비스무리한 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대체 산 어디에 있다는 거지?
혹시나 내가 놓친 단서가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브론즈 비어드와의 대화를 되뇌었다.
‘야 인마! 누가 마음대로 남의 땅에서 살래?’
‘하핫! 그 정도는 좀 봐주게나!’
‘그리고! 온 산이 니 건 줄 알아? 클라니그 산으로 오라니?’
‘흐흐! 아마 와 보면 알 걸세! 그 난쟁이 녀석이 여기 사는구나! 하고 말이야!’
“하이고.”
역시나 별 도움 되는 기억은 없었다. 술에 절은 상태로도 조금이나마 기억하고 있던 게 용했다.
별수 있나.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야지. 대충 산 정상에서 주욱 살펴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끄악!”
큼지막한 바위 하날 딛고 올라서자 드디어 클라니그 산 정상에 도착했다.
“후우! 드디어 다 왔네!”
산 정상에선 백작령이 한 폭의 그림처럼 눈에 들어왔다.
거창할 것도 없이 시골 분위기가 폴폴 풍기는 영지다.
중앙에 높다랗게 세워진 저택. 저게 임페라 백작가의 저택이다.
전대 가주대까지만 해도 잘나가던 가문이어서 그런지 저택 하나만큼은 웅장했다.
그럼 뭐하나. 알맹인 하나도 없는 거지 백작간데.
그 주위로 굴뚝에서 하얀 연기를 뿜는 민가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한적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 수도 있겠지만 뭐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던가.
실상은 망하기 일보 직전인 영지다.
“그걸 막기 위해서 필요한 게 드워프고.”
드워프 장인은 웬만한 영지에서도 못 모셔 가도 안달이 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손길을 거친 아티팩트는 인간이 흉내 내는 게 부끄러울 수준이니까.
마핵만으로 움직이는 골렘부터 미약하게나마 랭크의 차이까지 극복시켜 주는 마검까지.
이것저것 못 만드는 게 없을 정도다.
물론 그런 자에게 대뜸 ‘날 위해 일해 줘라!’라고 하면 코웃음을 치며 돌아설게 뻔하다.
그에 비하면 난 양반이다.
뭐가 됐건 술이라도 한잔 나눈 사이니까. 생판 모르는 남에 비하면 친구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를 붙잡아 놔야 했다.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고.
“흠.”
그나저나 이 드워프 녀석. 대체 어디 있다는 거지?
산 정상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풀 한 포기 없는 민둥산이 조금은 쓸쓸해 보이기까지 했다.
“…응? 저거 동굴 맞지?”
그러다 산 중턱에서 자그마한 동굴이 눈에 들어왔다.
바위틈에 껴 언뜻 봐선 그저 돌무더기처럼 보였다. 하지만 분명 작게나마 동굴 비스무리한 게 보이긴 했다.
거기 말곤 비를 피하거나 하려면 딱히 적절해 보이는 장소는 없었다.
“와 보면 알 거란 게 이 소리였나.”
진작에 알았으면 정상까지 와 보진 않았을 텐데. 괜한 헛짓거릴 했다.
입으론 욕지거릴 씨불이며 바위 틈 사이로 난 동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동굴 주변은 깔끔했다. 불을 피운 흔적도 없고, 버려진 잡동사니 같은 것도 없었다.
하기사 이안과 만났던 시점이 벌써 1년 전이다.
1년은 사람이 살았던 흔적쯤은 지워지고도 충분한 시간이다.
“끄응.”
아쉬운 마음에 일단 동굴로 들어섰다. 1년이나 지났지만 잘 뒤적거리다 보면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두컴컴했지만 동굴 특유의 퀴퀴한 냄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쾌적하다고 해야 하나?
산뜻한 향기가 동굴 깊이서 느껴졌다.
“누가 살긴 했나 보네.”
난 미리 준비해 왔던 횃불 하날 꺼내 들었다.
‘파이어 볼.’
화륵!
기름을 잔뜩 먹여 논 횃불에 불이 붙자 주변이 환하게 밝혀졌다.
한 손엔 횃불을, 다른 한 손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검까지 들곤 동굴 안쪽으로 향했다.
‘꽤 깊네.’
그렇게 십여 분 정도 걸었을까?
좁은 통로 끝에 벽이 가로막았다.
“아무것도 없군.”
동굴 끝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호오?”
횃불 끄트머리에서 피어난 연기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동굴의 한쪽 벽.
연기가 빨려 들어간 부근을 매만지자 얇은 홈 같은 게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꽁꽁 숨어 있을 줄이야. 그냥 평범한 방랑객이 이런 장치까지 마련해 둘 리는 없다.
뭔가 있는 녀석이란 생각이 점점 커졌다.
‘익스플로젼.’
벽의 틈을 향해 랭크 3부터 가능한 마법을 시전 했다.
상위 랭크로 갈수록 어마 무시한 파괴력을 자랑하지만 지금의 나로선 자그마한 불 폭발을 일으키는 게 고작이었다.
…펑!
작은 폭음과 함께 틈이 벌어졌다.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법한 작은 통로.
난 마른침을 한번 꼴깍! 삼키곤 안으로 들어섰다.
“오오…….”
숨겨진 장소는 꽤나 넓었다.
임페라 백작 저택의 내 방 정도 되는 크기에 이것저것 잡다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개중엔 마핵으로 움직이는 화로도 보였다.
“이래서 불 지핀 흔적이 없었구만.”
중요한 건 하나같이 먼지가 잔뜩 쌓인 게, 한동안 아무도 들르지 않은 듯 보였다.
이래선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데.
이렇게 된 거 적당히 값나가 보이는 거라도 팔까? 마핵 화로면 적어도 10골드는 받아 낼 수 있을 텐데.
덜그럭.
옆에 쌓인 돌탑에 발치가 걸렸다. 돌탑을 이루는 자그마한 돌멩이들엔 자그맣게 룬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분명…….”
마핵 골렘이다.
대부분의 골렘은 마나를 주입해 줄 때만 움직인다.
하지만 마핵 골렘은 다르다.
드워프들만의 독립적인 기술은 마핵을 기반으로 골렘이 스스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덕분에 일반 골렘들보다 곱절은 비쌌다. 당연히 이것도 꽤나 비쌌다.
이런 값비싼 아티팩트들을 내버려두고 간 게 고마우면서도, 한켠으론 얼마나 대단한 방랑자길래 이런 걸 두고 가나 궁금했다.
“…응?”
프슷!
마핵 골렘에 쌓인 먼지를 털어 내려 하자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불안한 기운이 엄습했다.
…쿠구구!
불안한 예감은 어째 틀리는 일이 없을까.
꿈쩍도 않던 골렘은 내 손이 닿자마자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침입자를 감지했습니다.]
돌무더기 맨 위에 놓여 있던 돌멩이에서 두 개의 빛이 반짝였다.
마치 짐승의 눈처럼 생긴 두 빛을 시작으로 돌무더기가 하나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자, 잠깐!”
돌무더기 사이에 칼을 쑤셔 박아 봤지만 동작은 멈추지 않았다.
쿠르륵!
이내 돌로 이루어진 전갈의 모습을 갖춘 골렘.
녀석은 이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침입자를 제거합니다.]
“하. X팔.”
녀석의 꼬리 부근이 가슴팍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난 횃불을 집어 던지곤 검을 고쳐 잡았다.
카가각!
세월에 풍화돼 뭉툭해진 터라 그리 위협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놈이 가진 육중한 무게에 손목이 시큰거렸다.
급하게 구해 온 검.
그냥 시장에서 파는 것과 같은 뭣도 없는 강철검이었다.
놈은 첫 공격이 빗나가자 자세를 낮춘 채로 내 반응을 살폈다.
일단 저 녀석을 제압해야 뭐라도 할 판이다.
우웅……!
검 주위로 푸른 마나가 일렁였다.
오러 소드에 비하면 한참이나 부족하겠지만, 돌멩이쯤은 간단히 부숴 버릴 수 있다.
전갈마냥 바닥을 잽싸게 기어 다니는 골렘.
가능하면 부수지 않고 가져가고 싶었다. 그래야 비싼 값을 받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딴 걸 따질 때가 아니다.
“일단 다리 하나……!”
목표는 놈의 다리.
다리 하나 정도 가져가면 움직임이 꼬일 거다.
난 곧바로 목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캉!
“으왓!”
하지만 예상보다 단단한 경도에 검이 튕겨져 나갔다.
일단 한발 빠져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던 그때, 놈의 등 뒤에 뭔가가 요란한 소릴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룬 문양이 잔뜩 달린 고리가 빙글빙글 돌며 빛을 내뿜었다.
전이 포탈이 가동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뭔가가 이쪽으로 넘어오고 있다는 건데.
…콰악!
“으왓!”
전이 포탈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골렘이 내게 달려들었다.
공격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내 몸에 찰싹 달라붙기만 하는 녀석.
떼어 내려 검을 휘둘러 봤지만 단단한 경도에 모두 막혀 버렸다.
“으윽……!”
그런 거였나.
이건 공격용 골렘이 아니었다. 침입자를 붙잡아 두기 위한 골렘.
녀석은 무수하게 많이 달린 다리로 내 온몸을 옥죄였다.
그 상태로 난 바닥에 처박힐 수밖에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는 그때, 전이 포탈로 뭔가가 넘어왔다.
쿵!
짤딸막한 신장.
놈은 온몸을 철로 두르고 있었다.
‘로봇……?’
마치 로봇처럼 온몸이 철로 이루어진 놈은 한 손에 거대한 망치를 들고 있었다.
한 눈에 봐도 상당히 위험해 보였다.
“자, 잠깐……!”
“우오오옷!”
놈은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달려들었다.
거대한 망치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린 채로.
…콰앙!
“으억!”
가까스로 고갤 비틀어 머리가 쥐포 되는 걸 피했다.
망치는 아슬아슬하게 내 머리가 아닌 바로 옆 땅바닥을 강하게 내려쳤다.
그 바람에 귀가 얼얼했지만 그게 어디냐.
하마터면 머리가 납작해질 뻔했는데.
“야! 브론즈 비어드!”
난 서둘러 그에게 고함질렀다.
“으응?”
그제야 녀석은 뭔가 이상한 듯 고갤 갸웃했다.
“나야 나! 이안 임페라!”
“이안……? 이안 임페라…….”
“에잇! 작년에 같이 술 마신 것도 기억 못해? 술 먹고 싶으면 놀러 오라며!”
“…아아!”
익숙한 목소리가 철갑 너머로 들려왔다.
로봇처럼 보이던 녀석은 머리에 얹고 있던 철투구를 벗어젖혔다.
그러자 구릿빛으로 반짝이는 수염이 튀어나왔다.
“그래! 그 새파랗게 젊은 애송이! 이안!”
“맞아!”
수염이 대단한 녀석이다.
얼굴 절반이 구릿빛 수염으로 가득 뒤덮여 있을 정도니까.
“크하핫! 하마터면 친구를 죽일 뻔했어!”
브론즈 비어드는 살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미안하네! 개인적인 사정이 좀 있어서 말일세! 하하핫!”
“…….”
방금까지 사람 하나 죽이려 했던 놈이 할 말은 아닌데.
난 녀석의 망치를 흘긋 살펴봤다.
방금 녀석이 한 공격은 명백한 살의를 담은 공격이었다.
만약 날 알아보지 못했다면 단박에 죽였을 거다.
‘실제로도 몇 명 죽인 것 같고.’
이안의 기억에선 그저 술 좋아하는 드워프였는데, 이거 생각보다 위험한 놈 아닌가?
하지만 어쩌겠나.
당장 급한 사람은 난데.
“그래서. 친구여, 여긴 무슨 볼일이지?”
브론즈 비어드는 다시금 망치를 고쳐 쥐곤 내게 물었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태도는 달랐다.
금방이라도 수틀리면 죽여 버리겠다는 녀석의 태도.
이건 뭐 사이코패스가 따로 없다. 대체 뭐가 그를 이렇게 만든 건지.
“…기억 안 나나? 그때 네가 심심하면 놀러 오라며?”
난 허리춤에 차고 있던 와인 한 병을 꺼냈다.
던전을 돌아서 얻은 금액으로 사 온 아까운 술이었다.
‘아까운 내 돈.’
하지만 마핵 골렘이 달려든 덕분에 산산 조각나 버린 뒤였다.
브론즈 비어드는 그제야 들고 있던 망치를 내려놨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보게! 그러게 미리미리 좀 오지 그랬나! 내 약속을 한 지가 벌써 1년 가까이 됐거늘!”
그는 호탕하게 말하며 껄껄거렸다.
“그냥 떠돌이 드워프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게 다 뭐야? 마핵 골렘이니 전이 포탈이니 이런 비싸 뵈는 건 다 뭐고?”
“…사람마다 개인적인 비밀이란 게 있는 법 아니겠나! 아무튼 죽일 뻔한 건 사과하지! 크하핫!”
상당히 수상쩍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냥 드워프가 아니라 뭔가 있는 놈인가?
하지만 녀석은 좀처럼 자기 비밀을 꺼내 놓으려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래서. 술 한잔 안 할 거야?”
“흐흐! 어디 드워프가 술 거절하는 거 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