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몇 차 대격변 때일까. 현실에 탑이 생겨났었다. 마물들을 잡을수록 강해질 수 있는 곳.
아쉬타르의 농간 중 하나였던 그곳은, 발할라 시스템을 키우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각성자들은 강해지기 위해 ‘탑’에 올랐다.
“탑이라…….”
던전은 탑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클리어하고 나면 보상을 준다든가 바깥에선 내부를 파악할 수 없다든가.
개중엔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는 게 하나 있다.
바로 던전이 생성되는 원리.
탑이나 던전이나 둘 모두 원혼을 먹고 생성되는 건 동일했다.
생명체를 향한 끝없는 적의. 그게 점점 자라나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으면 그 자리엔 던전이 새롭게 태어난다.
“탑도 그랬지.”
한 번 생기고 난 던전은 여간해선 사라지지 않는다.
상급 던전의 경우 던전 마스터를 처치한다 해도 던전은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
당연히 사람들 입장에선 던전이 생성되는 걸 극도로 꺼려 했다. 바퀴벌레마냥 한 번 생기면 제거하기 어려운 놈들이니까.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던전이 생성되는 데 필요한 건 원혼이지, 마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이 세계에선 던전이 생성되는 루트가 하나 더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끝없는 원혼을 내뿜는 존재. 그런 녀석들이 딱 하나 더 있다.
‘블랭크.’
블랭크가 차별 받는 건 단순히 기분 나빠서가 아니다.
모든 블랭크가 그런 건 아니다만 블랭크 중엔 마물을 뛰어넘는 원혼을 가진 자들이 존재했다.
예를 들면 상위 랭크 보유자였다가 블랭크가 돼 버린 자들이라든지.
실제로 소설 속 블랭크로 인해 생성된 던전도 몇 존재했다.
“여기가 그거지.”
발디그 던전. 먼 과거 ‘헤카테’란 고위 기사였던 자의 유산이다.
“쯧.”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구석이 많은 던전이다.
블랭크로 전락해 버린 기사로부터 태어난 던전인 것도, 여기서 얻는 기연으로 인해 이안이 죽게 될 거란 것도.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
착잡한 마음은 고이 접어 두자. 지금은 기뻐할 때다. 주인공이 얻어야 할 기연을 날름 집어먹는 거니까.
마물들도 다 처리했겠다. 협곡 반대편 끝자락까지 가는 데 걸리적거리는 건 없었다.
이따금 바람에 흙먼지가 일긴 했지만 눈이 조금 따가운 게 전부였다.
“이거구만.”
아깐 멀어서 잘 안 보였는데 반대편 문 바로 옆엔 동상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큼지막한 안면갑을 써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이 동상이 헤카테란 기사이리라.
“…….”
문 앞에서 헤카테의 동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검을 바닥에 세운 채로 두 손을 모은 기사의 형상. 과거 눈부신 시절을 떠올리기라도 하려는 듯 충직한 기사의 모습을 던전 안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간 수많은 이들도 이 동상 앞에 섰다.
대체 이 기사의 정체가 뭔가 궁금해하면서도 나중 가선 헤카테란 이름까지 알게 되었을 거다.
그런 그들이 하나같이 느낀 감정은 혐오.
블랭크가 된 것도 모자라 던전까지 태어나게 만든 놈이니 그런 시선을 받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난 달랐다. 이 소설을 읽고, 랭크란 시스템이 얼마나 모순 덩어리인지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난 조심스레 동상에 손을 가져다 댔다.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발디그 던전의 숨겨진 아티팩트를 얻는 방법.
그저 출구 옆에 자리 잡은 동상을 만지기만 하면 된다.
이 세상 사람이라면 가질 수 없는, 블랭크에 대한 동정심을 가진 채로.
…털컹!
발치에 뭔가가 떨어졌다. 자그마한 구멍이 송송 뚫린 안면갑이었다.
[헤카테의 안면갑 : 도버의 기사 헤카테가 쓰던 안면갑. 안면갑을 통해 들어오는 공기를 정화시켜 준다.]
-최대 적용 가능 랭크 5.
“…이거구만.”
소설에서 흑마법사가 된 이안을 무찔러 주는 아티팩트.
단순히 전투 실력만 놓고 보면 이안이 주인공을 이길 리는 없다.
이안은 악마에게 영혼을 바쳐 겨우 랭크 5가 된 거고, 주인공 디아는 십수 년간 기사 학교에서 구르던 녀석이니까.
하지만 상성이 나빴다.
둘이 처음 전투를 벌이게 되는 건 폐허가 된 임페라 백작가 저택.
이안에겐 홈그라운드나 다름없던 터라 저택 내부를 지독한 독기로 채워 디아를 압박한다.
거의 죽을 뻔했지만 주인공이 괜히 주인공인가? 운 좋게 하수구로 도망친 덕에 살아남는다.
그리곤 발디그 던전에서 이 아티팩트를 얻게 되고, 독기가 무용지물이 된 이안은 그대로 패배한다.
“쓸 만한 놈이지. 랭크 5 이하가 쓰는 독기는 죄다 정화시켜 주니.”
이래저래 쓸모가 많은 놈이다.
이런 걸 맘대로 가져가도 되나 싶었지만……. 몇 번 쓴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다 쓰고 나서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으면 그만이다.
“…….”
안면갑을 떨어뜨린 헤카테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두 눈을 꼭 감고는 있었지만 슬픔에 가득 차 있는 얼굴이 느껴졌다.
“…잘 쓸게.”
파앗!
작별 인사가 먹히기라도 했는지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동상이 먼지처럼 흩날려 사라졌다.
이래선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도 없는데.
“뭐 적당히 근처 땅에 묻어 두면 되겠지.”
주인공이라면 알아서 잘 구할 거다. 괜히 주인공이 주인공이겠어?
* * *
다음 날 아침에도 꾸준하게 발디그 던전에 들렀다.
헤카테의 안면갑을 얻었는데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던전은 계속 그 자리에 있었고 아침이면 몬스터가 그득그득 채워졌다.
문 앞에 자리 잡고 있던 동상은 온데간데없지만.
그렇게 매일 아침 사냥에 사냥을 거듭하자 슬슬 몬스터 사냥이 손에 익었다.
그래서 시도해 본 또 하나의 방법.
바로 해가 졌을 때 던전으로 들어가는 거다.
달의 악신 셀렌의 영향으로 몬스터들은 한층 더 강해져 있었다.
덩치도 제법 커져 있었고, 이따금 엘리트 몬스터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얻을 수 있는 경험치는 더욱 늘어났다.
다른 던전에 가는 게 더 효율적이긴 하다만, 가지고 있는 던전이 발디그 하나밖에 없고 타 귀족 영지까지 가서 사냥하기엔 수지가 안 맞았다.
뭐가 됐건 일단 발디그 던전은 혼자 독식이 가능하니까.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변화가 찾아왔다.
[랭크가 변경되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랭크 업!
난 떨리는 마음으로 왼손을 펼쳐 랭크를 확인했다.
[이름 : 이안 임페라.]
랭크 : 3(마법), 3(검술)
“흐음…….”
랭크가 오른 건 검술이 아닌 마법 랭크였다.
마법과 검술 랭크 3.
이제 나도 평범한 수준까지 성장은 했다만… 어디까지나 평범한 정도다.
크로드나 프리아나 같은 괴물엔 한참이나 모자랐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랭크 1의 코찔찔이가 랭크 3까지 올라간 건데, 그간 최소한의 간식만 챙겨 와 몬스터 사냥하기만을 반복했다.
덕분에 몬스터 부산물로 모은 돈도 거의 그대로였다.
자그마치 3골드!
이거면 빚 이자도 갚기 힘들지만, 생활비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한 달 정도 이 정도 수익을 꾸준히 얻어도 이자 정도밖에 안 됐다.
그만하면 오늘 하루쯤은 맛있는 걸 먹어도 괜찮…으려나?
한 달 동안 개고생해서 번 돈으로 이자만 겨우 갚는다니.
그럼 다음 달에 똑같이 개고생해서 이자만 겨우 갚고.
또 다음 달에도 똑같이 개고생하면…….
원금 내놔야 할 날이 오겠지.
“…하.”
갑자기 기분이 팍 상해 버렸다.
“이걸로 어느 세월에 다 갚냐.”
티끌은 아무리 모아 봐야 티끌이다.
발디그 던전의 잡동사니만으로 태산을 만들긴 무리였다.
‘…차라리 도박으로 불려 봐?’
짝!
그런 생각이 들자 뺨따귀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술이랑 도박으로 이 지경을 만들어 놓고 또 도박이라니.
“아으…….”
이거 볼을 너무 세게 때렸나?
찝찔한 맛이 입 안에서 느껴졌다.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쯥.”
입 안에 피를 쪽 빨아먹다 불현듯 괜찮은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마정석이나 마물들의 자잘한 뼛조각.
던전 길드에 팔아치운 잡동사니들이다.
하나하나가 별 값어치 없는 것들이지만 그래도 쓸데가 다 있다.
코볼트의 발톱은 무두질 하는 데 쓰이고, 고블린의 뼈는 잘 정제하면 하급 포션의 재료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별 쓸모없어 보이지만 꾸준한 수요가 있는 놈들이다.
정제만 하면 꽤 값이 나가니까.
“그럼… 나도 하면 되잖아?”
잡동사니만 팔아서 빚을 갚는 건 한평생 걸려도 못 갚을 확률이 높다.
저번에 들였던 과일도 좋은 상품이 되겠지만, 조금이라도 더 값나갈 만한 걸 팔아야 한다.
그래도 무기라든가, 갑옷 같은 아티팩트가 목돈 마련하긴 좋은데…….
“흠.”
그렇다고 별 시답잖은 놈들을 데려다 아티팩트를 만들 순 없다.
제대로 만들지도 문제지만 그런 어중띤 놈들이 만든 아티팩트가 비싼 값에 팔릴 걸 기대하는 게 양심 없는 거다.
제대로 된 장인을 데려오려면 그만큼 값을 치러야 할 테고.
어디 하늘에서 장인이라도 뚝! 떨어지면 안 되나?
“이왕이면 드워프나 엘프 같은 애들 있음 좋을 텐데…….”
아쉽지만 엘프는 인간과 가능하면 엮이려 들지 않는다.
대륙 전역이 전쟁의 화마에 휩싸였는데도 나서지 않았던 종족이다.
저들이 사는 숲에 틀어박혀 고고히 사는 종족.
그게 엘프다.
게다가 이안처럼 개망나니 새끼로 유명한 시정잡배라면 더더욱 거들떠보지도 않을 테고.
그렇다면 드워프는?
드워프라면 좀 얘기가 다르다.
술을 좋아하는 종족이니 어쩌면 이안과 관심사가 맞아떨어질지도 모른다.
이따금 인간들 사는 마을로 술을 마시러 오는 드워프들도 있으니까.
하지만 드워프라도 가능성이 희박한 건 매한가지다.
드워프들이 모여 사는 자이겔론드 산.
거긴 이곳 임페라 백작령과 세상 반대편이라 할 정도로 멀었다.
좀처럼 제 영역을 떠나질 않는 자들이니 찾긴 더더욱 힘들었다.
만약 산이 아닌 다른 곳에서 드워프를 발견했다면 대체로 추방당했거나 방랑벽이 있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라 해도 머나먼 임페라 백작령까지 올 가능성은 적었다.
‘이건 뭐 사막에서 바늘 찾기도 아니고.’
아티팩트를 제작해 파는 건 마음 접어야 하나?
그냥 발톱이나 뼈를 갈아서 조금이라도 더 챙기는 걸로 만족해야 하나?
“…응?”
그런데 갑자기 왠 드워프 한 놈의 얼굴이 기억 속에서 언뜻 스쳤다.
뭐지? 이 녀석은?
소설 속에서야 드워프를 많이 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글로 본 거다.
소설만으로 이처럼 얼굴이 또렷하게 기억 날 순 없었다.
그렇다는 건 실제로 본 적이 있단 소린데…….
“끄응…….”
난 기억 속 드워프의 정체를 떠올리려 안간힘 썼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이안의 옛 기억 틈에서 드워프의 정체를 떠올렸다.
술에 잔뜩 절어 있었는지 기억이 또렷하지는 않았다.
‘나? 브론즈 비어드라고 부르게나! 카하핫!’
술잔을 가득 채운 채로 호탕하게 웃어 재끼는 드워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그런 놈이 있었지.
이름에 걸맞게 황동처럼 짙은 구릿빛의 수염을 뽐내던 드워프.
예전 이안이 술에 절어 고주망태가 되었을 때 만났던 녀석이다.
호탕한 성격이 재미있어 그 뒤로도 이안과 몇 번 술잔을 부딪히기도 했다.
이후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안도 그리 생각이 깊은 녀석은 아니었던 터라 금방 기억에서 잊어버린 지 오래다.
“호오…….”
더럽게 도움 안 되는 놈이라 생각했는데, 맨날 술만 처마시고 다니던 게 도움이 될 줄이야.
하지만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얼굴 본 게 옆 영지 술집이니, 이런 촌까지 온 걸 보면 떠돌이 드워프인 게 분명했다.
그를 만난 게 자그마치 1년 전이니 지금쯤 다른 대륙으로 떠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흠…….”
혹시나 단서가 될 건 없는지 곰곰이 떠올렸다.
‘언제든 술 한잔하고 싶다면 클라니그 산에 있는 동굴로 오게나! 물론 술값은 자네가 내야 하고! 크하핫!’
기억을 떠올릴수록 브론즈 비어드란 녀석은 이안을 술 나오는 자판기쯤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무렴 어떠랴. 드워프를 모실 수만 있다면 그깟 술 몇 잔이 아쉽겠나.
오크통째로 배 터지게 준비해 드려야지.
‘클라니그 산이라.’
클라니그 산이면 임페라 백작령 북동쪽에 위치한 산이다.
인접한 다른 영지를 구분 짓는 산이기도 했다.
그저 단단한 암석으로만 이루어진 돌산. 덕분에 클라니그 산 인근엔 아무도 살지 않는다.
‘왜 굳이 그런 험준한데서 숨어 사는 거지?’
호기심이 솔솔 피어올랐지만 결론은 쉽게 나지 않았다.
자세한 건 만나서 물어봐야 할 듯했다.
‘맛있는 거라도 좀 사 먹나 했는데.’
3골드면 고기 정도는 배 터지게 먹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래서 뭣하겠나. 먹고 나면 똥으로 나오는 건 똑같은데.
차라리 비싼 술이라도 하나 사 선물용으로 준비하는 게 나을 듯싶었다.
꼬르륵!
고기와 술 중에 뭘 먹을지 고민하는 백작이라니.
아직 편하게 사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