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다음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벌써 왕국 법관들은 결투 재판의 결과로 내게 죄가 없다는 판결문을 보내 왔다.
그와 더불어 발디그 던전의 소유권을 증빙하는 서류까지 내어 왔다.
베네르 백작 그 자식.
아마 눈 뜨면 또다시 정신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흐흐!”
벌써부터 고소한 냄새가 여기까지 진동하는 기분이다.
던전의 소유권이라.
꽤나 쏠쏠한 이득을 챙겼다.
던전의 보물은 옛적에 씨가 말라 버렸지만 그래도 던전은 던전이다.
몬스터가 수시로 출몰하고 수많은 여행자들이 랭크를 올리기 위해 드나드는 곳이다.
출입료만 거둬들여도 엉망진창인 재정상태에 조금이나마 숨통을 틀 수 있을 거다. 그래 봤자 적자인 건 변함없지만.
이제 급한 불은 껐으니. 다음 근원을 해결해 나가야 할 때다.
이번 결투 재판에 참여했던 이들이 한데 모였다.
임페라 백작가의 일원 둘과 방랑기사 크로드. 이렇게 셋이었다.
절그럭.
묵직한 갑옷이 서로 부딪히며 작은 소릴 냈다.
녀석은 차 한잔하는 시간에까지도 갑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무슨 강박증이라도 있나?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에요! 공자님!”
일레느는 향긋한 차 한 잔을 내어 오며 한 마디 덧붙였다.
“그러게나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옆에 앉은 기사에게 뭐라 말을 하려다 눈이 마주치자 입을 앙다물었다.
매서운 녀석의 눈빛에 잔뜩 겁먹 은거다.
“눈에 힘 좀 푸는 건 어때? 일도 잘 풀렸는데.”
“괜한 시간 끄는 건 질색이다. 빨리 용건부터 말해라.”
“당연히 그래야지. 애초에 그러려고 모인 거 아니겠어?”
“…….”
에이먼도 지난날의 충격이 가시질 않은 듯 크로드의 눈치만 슬금슬금 살폈다.
그도 봤을 거다.
랭크 5의 기사를 압도적으로 제압해 버리는 그의 어마 무시한 경지를.
“실례지만 인사가 늦었군요. 임페라 가문의 가주. 에이먼이라고 합니다.”
“그래.”
크로드는 자기소개 대신 짧게 고갤 주억거리기만 했다.
귀족을 앞에 두고 예의에 상당히 어긋나는 행동이지만 에이먼은 딱히 내색하지 않았다.
예의가 있건 없건 자기 가문을 구해 준 영웅이다.
가문의 전 재산을 바쳐도 모자랄 것 없을 정도로 큰 은혜를 입었으니 말이다.
“…지난날 입은 은혜는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은혜랄 것도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계약이니.”
“계약이라 함은……?”
크로드는 제 입으로 말하기 귀찮은지 나에게 슬쩍 눈짓했다.
“아버지.”
“…말해 보려무나. 아들아.”
사뭇 진지해 보이는 아들의 모습에 에이먼은 조금은 놀란 듯 물었다.
“죄송하지만 여기서부턴 저와 이자만 얘길 했으면 합니다.”
“호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러는 게냐?”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버지! 얘는 사실 영겁의 기사단이에요! 제국의 복원을 꿈꾸고 있죠! 전 거기에 큰 도움을 줄 유물의 위치를 알려 주기로 했어요! 라고 말하면 놀라 기절하고 말 거다.
때론 모르는 게 약인 법이다.
“하하……. 그래. 네가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는 게지.”
에이먼은 섭섭하면서도 조금은 기쁜 듯한 눈치였다.
아마 망나니인 줄로만 알았던 아들이 이렇게 변한 게 적잖이 기특한 모양이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그럼……. 우리 아들의 ‘술친구’ 분을 위해 자릴 비워 드리지.”
에이먼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자릴 떴다.
아마 크로드가 영겁의 기사단이란 말을 들으면 저런 표정은 못 지을 거다.
영겁의 기사단과 엮이는 것만으로도 삼족을 멸할 중죄니까. 난 그만큼의 리스크를 지고 하는 일이고.
“후.”
“그럼. 약속했던 위치를 알려 주실까.”
“안 그래도 그럴 참이야.”
이제 약속했던 대가를 치룰 때다.
촤륵.
난 미리 준비해 놨던 지도를 한 장 펼쳤다.
대륙 전역이 한 폭에 담긴 거대한 지도였다.
“…….”
크로드는 몸이 달아오른 듯 지도 쪽으로 몸을 가까이 내밀었다.
십수 년간 찾아 헤맸던 기사단의 유물이의 위치니 그럴만했다.
“기사단의 유물은…….”
“…빨리 말해라.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오는군.”
1분 후에 공개됩니다! 라고 농담이라도 하면 홧김에 내 팔 하날 잘라 버릴 기세다.
“흐흐……. 보채기는! 알았어!”
난 그렇게 말하며 지도의 한 부근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거긴 다름 아닌 대륙 중남부에 위치한 숲.
셀리버트 대숲림이 자리 잡은 곳이었다.
이를 본 크로드의 미간이 사납게 뒤틀렸다.
“지금 장난하나?”
금방이라도 칼을 뽑아 내 목을 베어 버릴 기세다. 놈이 그런 짓을 저지르기 전에 얼른 말을 덧붙였다.
“잠깐잠깐! 진짜 여기 있다니까?”
“하! 이 망할 망나니 새끼를 믿은 내가 어리석었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셀리버트 대숲림은 엘프들의 땅이다.
과거 제국과 연합 왕국의 전쟁에서도 줄곧 중립을 유지하던 게 엘프다.
그런 자들의 땅에 기사단의 유물이 숨겨져 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지난 십수 년간 제국의 잔당들이 가만히 있던 건 아니다.
망국의 옛 영토를 이 잡듯 뒤져 가며 찾아봤음에도 나오지 않은 유물.
그렇담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 숨겨져 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럼 혹시 생각해 봤어? 지난 세월동안 왜 기사단의 유물을 찾지 못했는지?”
“그건…….”
“틀에 박힌 생각만 해서야. 당연히 기사단의 유물이니 제국 땅 아니면 왕국 연합 땅에 있겠지. 그 생각 때문에 못 찾은 거라고.”
“…만약 이게 거짓이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를 거다.”
“물론이지. 나뿐만 아니라 사돈의 팔촌까지 없애 버려도 좋아. 만약 이게 ‘거짓말’이라면 말이지.”
“…….”
“용건은 끝난 거지?”
“흥.”
크로드는 그제야 풀풀 풍기던 살기를 진정시켰다.
바지춤이 살짝 축축해지긴 했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절그럭.
녀석은 다시 제 짐을 챙기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빈손 그대로였다.
“헉! 벌써 가시게요?”
뒤늦게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챙겨 온 일레느가 그에게 물었다.
“됐어. 서로 약속한 건 다 지켰으니까. 편히 가게 내버려두자구.”
“하지만 아직 다과도 내어오지 못했는데…….”
“…가급적 다시 만나진 않았음 좋겠군.”
크로드는 그러면서 일레느를 한 번 쓱 훑어봤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는 일레느는 고개만 갸웃할 뿐이었다.
방금 그건 내게 던지는 일종의 경고였다.
만약 거짓말이었다면 나뿐만 아니라 이 저택의 모두를 죽여 버리겠다는 경고.
하지만 녀석은 다시 돌아올 거다.
기사단의 유물이 대숲림에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걸 ‘활성화’시키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니까.
아마 그걸 안 다음엔 날 죽일듯 찾아오겠지만, 대숲림까지 갔다 오려면 적어도 한 달은 걸린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이내 생각을 정리한 나는 녀석에게 반쯤 빈정거리듯 말했다.
“피차일반이야. 서로 다시 볼 일은 없게 하자구.”
* * *
크로드와 헤어지고 난 후 베네르 백작이 깨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던전 소유권을 넘겨줬단 사실에 또다시 기절했는지까진 모르겠지만.
아무렴 어떠랴. 놈이 빼앗아 갔던 던전 하날 가져오게 됐는데.
“흐흐…….”
희소식이 하나 들려오긴 했지만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놈이라면 임페라 백작가를 향한 송곳니를 부득부득 갈고 있을 거다.
어떻게 해서든 되찾으려 발버둥 칠 거고, 그걸 막기 위해선 나름대로 준비가 필요했다.
“그리고…….”
첫 번째 사망 플래그는 막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아이소테르의 국왕 에런골드 2세.
그라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을 거다.
다른 어중간한 기사도 아닌 프리아나가 패배했으니까.
크로드는 훌쩍 떠나가 버린 뒤라 영겁의 기사단과 뒤가 밟히진 않겠지만, 에런골드는 애초의 목적을 위해 다시금 마수를 펼칠 게 분명했다.
귀족들 간에 피바람이 몰아치는 10년 전쟁.
그 기폭제가 될 계기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그렇다면?
남들이 함부로 노리지 못할 강력한 힘을 가져야만 했다.
마법 랭크 2나 검술 랭크 3으로는 한참이나 부족한 수준이었다.
“후.”
난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꼭두새벽부터 준비에 나섰다.
‘방패도 챙기고, 그리고 ’이것‘도 챙기고…….’
발디그 던전이 별 볼 일 없는 던전인 건 맞다.
고작해야 있는 집 자제분들의 성인식이나 잡동사니 그러모으는 용도다.
그래도 던전은 던전.
매일 해가 뜰 때마다 몬스터가 리셋되는 건 매한가지였다.
“도련님! 오늘도 가시게요?”
“아, 그래야지.”
“흐음…….”
일레느는 요 근래 갑자기 변한 내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기 마련이라던데.
그렇다고 코치코치 캐물을 수도 없어 발만 동동 구르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걱정 말라고. 갔다 오면 시킬 일 잔뜩 줄 테니까. 육포 남은 건 좀 있나?”
“네…….”
괜히 서성거리는 게 더 신경 쓰이는 법이다. 얼른 일레느가 건넨 육포를 바리바리 싸 들고 나왔다.
* * *
이른 아침부터 향한 곳은 당연하게도 발디그 던전이었다.
대개 던전은 해가 졌을 땐 출입이 금지된다.
달의 악신 셀렌의 영향으로 몬스터들이 강화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덕분에 발디그 던전 인근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오랜만이구만.”
이안의 기억 상으론 코흘리개 시절 에이먼을 따라 몇 번 들른 게 전부였다.
그때 당시만 해도 임페라 가문의 소유였던 던전이다.
‘나중에 네가 크면 이곳 발디그 던전에서 성인식을 행할 것이다.’
이안의 할아버지가 했던 말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가 말한 일이 실현되는 일은 없었다.
발디그 던전은 베네르 백작가에게 빼앗기고, 이안은 던전에서 성인식을 치르기엔 한참이나 모자란 망나니로 자라니까.
혹여나 이안의 기억에 도움이 될 건 없을까 했지만 역시나 없었다.
‘하여간 도움 되는 구석이 없어요.’
던전의 입구 앞엔 결투 재판의 흔적이 그대로 남은 상태였다.
크로드가 내뻗은 발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과연 주인공과 우위를 다투던 놈이다.
그저 걸음걸이만으로 이런 흔적을 남기다니.
적어도 크로드 정도의 경지에 오르면 앞으로의 일들도 편했을지도 모른다.
‘발할라 시스템 있을 땐 나도 이 정도는 개껌이었는데…….’
아쉽지만 아쉬워해서 뭐하랴. 이미 사라져 버린 힘이거늘.
난 주먹을 불끈 쥐며 다시금 의지를 다졌다.
힘이 사라졌음 다시 쌓으면 된다. 오늘 할 일이 그 첫 발자국이 될 거고.
“하암…….”
“흐어엄…….”
던전 앞에선 경비병 둘이 하품을 주고받고 있었다.
던전 길드에서 파견 나온 비정규직 같은 이들이다.
대부분 던전은 귀족들 소유 아래에 있다.
제 던전에 자기 병력을 보내 지키는 던전들도 있지만, 소유권이 자주 바뀌는 터라 이처럼 던전 길드에 외주를 맡기기도 한다.
그와 동시에 던전의 부산물 매매, 부상자 치료, 숙박 등 자질구레한 일들을 해결해 주는 거다.
겸사겸사 수수료도 챙기는 일종의 공생관계 같은 거다.
난 던전의 문 앞에 선 둘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조금은 우스꽝스런 차림새였다.
커다란 방문을 뜯어 만든 나무 방패를 짊어지고 있었다.
필요할 거라 생각돼 급하게 제작을 한 것이다.
“…어이쿠! 깜짝이야!”
어두워서 잘 안 보였는지 코앞에까지 가고 나서야 날 알아차렸다.
“해 뜨기 전까진 던전 입장이 제한됩니다. 나중에 해 뜨거든 오쇼.”
“…….”
난 경비병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뭐 할 말이라도 있소?”
“…아앗! 고, 공자님!?”
“으응? 공자님이라고?”
뒤늦게 경비병 하나가 날 알아채곤 경례 자셀 취했다.
“아! 임페라 백작님의 자제분이신… 근데 공자님이 여긴 왜……?”
“이 멍청아! 이번에 발디그 던전 소유주 바뀐 거 못 들었어?”
“그, 그랬어?”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이 친구가 워낙 정신이 없어서…….”
이안은 거지 백작가 출신이라 그런지 무시당하는 걸 못 참는다.
같은 귀족끼리면 몰라도 평민이 자길 무시한다?
그런 낌새가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가차 없이 줘 패는 게 이안이다. 덕분에 피똥 쌀 뻔하기도 했고.
이전의 소문대로라면 경을 칠 일이었다.
요즘 많이 좋아졌다고는 해도 아직은 망나니를 전부 벗긴 불가능했다.
하지만 난 그럴 생각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었다.
“그럼 안에는 아무도 없나?”
“네! 달의 악신 셀렌의 영향 때문에 해가 진 이후론 출입이 금지라서요. 이미 모두 밖으로 내보낸 뒤입니다요.”
“그래? 그럼 그거 잘 됐군.”
던전으로 들어서려는 자셀 취하자 경비병들이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죄, 죄송하지만 아직은 시간이 좀 이릅니다요! 적어도 한 시간은 지나야…….”
괜히 들여보냈다가 죽기라도 한다면 책임은 여기 두 경비병이 다 뒤집어쓸 수도 있다.
난 한숨을 한 번 푹 내쉬곤 품 안에 종이 한 장을 꺼내 뭔갈 적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