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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7화 (17/222)

17화

“시작해도 되겠나?”

프리아나는 크로드를 향해 가벼운 도발을 던졌다.

“그럼 수다라도 떨라고 온 건가?”

꿈틀!

하지만 되려 크로드의 말에 도발당한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프리아나는 크로드가 누군지 떠올려 보려는 듯 그를 유심히 살폈다.

아마 지금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대체 누구길래 저토록 당당한 거지?’

세계 최강의 기사 학교라 알려진 제니스 기사 학교.

이름깨나 날리는 기사 중에 이 학교 출신이 아닌 이가 없을 정도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 선 이는 처음 보는 기사다.

그렇담 결론은 두 가지다.

십수 년간 은거하고 있던 숨은 고수라든가, 그저 돈에 미쳐 대행인으로 나온 멍청이.

숨은 고수가 망나니 백작 아들놈의 대행인으로 나올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담 하나다.

눈앞의 이는 그저 돈에 미친 멍청이다.

“흥!”

생각을 마친 프리아나의 발에 힘이 들어갔다.

…팡!

이어서 프리아나의 몸이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범인이 봤다면 눈으로 좇기도 힘든 속도였다.

‘오…….’

여흥 따윈 필요 없다.

이대로 적을 양단해 버리고 끝낸다.

그의 일념이 담긴 검격이 크로드를 향해 쇄도했다.

…캉!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마치 폭죽 터지듯 화려한 불꽃이 크로드와 프리아나의 격돌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이대로 끝이 났을 거다. 정말로 상대가 돈에 미친 멍청이었다면.

“흠.”

크로드는 덤덤히 프리아나의 검을 받아 내곤 한숨을 내쉬었다.

“…으응?”

프리아나는 제 눈을 의심했다. 자신의 속검 을 받아낸 것도 모자라 멀쩡히 서 있다니?

말도 안 된다.

지난 수년간 기사 학교에서 검을 휘두른 횟수만 해도 수천, 수만 번이다.

편법에 치우치지 않고 오롯이 한길만을 걸어 만들어 낸 본인만의 검무.

덕분에 속검의 기사라는 별칭까지 받았던 프리아나다.

그런 그의 검이 막혔다.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한 채로.

“그, 그런…….”

프리아나는 방금 검 한 번 맞댄 것만으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러면서 또 다른 가설 하나에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다.

눈앞의 이가 그저 돈에 미친 멍청이가 아니라.

십수 년간 은거해 있던 고수는 아닐까? 하고 말이다.

“얕군.”

“뭐, 뭐라고?”

프리아나의 검을 받아 낸 크로드가 한마디 거들었다.

“너무 얕다. 아기 기저귀 갈아 주는 손길보다 더.”

“…하!”

자신의 인생을 모조리 부정하는 발언이었다.

그간 피를 토하는 노력에 겨우 도달한 검술 랭크 5. 그걸 아기 기저귀 갈아 주는 손길에 비유해?

프리아나의 이마에서 핏줄이 불룩하게 솟아올랐다.

프스스……!

그의 몸 주위로 푸른 마나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전신의 마나를 태워 속도와 위력을 한껏 끌어올리려는 것이었다.

내뿜는 오러만 보면 랭크 6을 목전에 두고 있는 수준이었다.

고작해야 서른도 안 돼 보이는 자가 저 정도 경지라니.

그가 얼마나 혹독한 수련을 거듭했는지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그렇담 이것도 받아 내 보시지!”

파아앙!

방금보다 더 강렬한 돌진이 펼쳐졌다.

어찌나 재빠른지 주위로 풍압이 일 정도다.

크로드도 슬쩍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린 채로 오러를 끌어올렸다.

캉! 카앙!

이번엔 단 한 번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쏟아지는 연이은 검격.

둘 사이에 검이 맞부딪힐 때마다 붉은 화염이 꽃처럼 피어올랐다.

“이야…….”

난 넋 놓고 둘의 싸움을 구경했다.

“발할라 시스템으로 따지면… 한 삼,사백은 되려나?”

참고로 난 발할라 시스템에서 레벨 999까지 찍었다. 절대로 이들의 싸움을 평가절하 하려는 건 아니다.

이들의 싸움도 충분히 괴물들의 싸움이다.

살아 숨 쉬는 것조차 지옥이었던 세상이라 좀 약하게 느껴지는 것뿐이지.

이들도 네 번째 대격변 시기까지만 놓고 보면 손에 꼽는 강자였을 거다.

‘랭크 5가 이 정도면… 랭크 9은 얼마나 괴물인 거야?’

대현자 오베론.

소설 설정상 최강 중의 최강.

마법 랭크 9의 괴물이란 단어조차 아득히 뛰어넘는 존재.

크로드와 손을 잡는다는 건 그런 괴물과 척을 진다는 걸 의미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으음… 아쉽긴 하지만. 크로드랑 인연은 여기까지로 해야겠지.’

난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둘의 결투를 계속해서 살펴봤다.

무수한 궤적을 그리는 검로.

그 사이에서 둘의 검이 맞부딪힐 때마다 굉음이 터져 나왔다.

“어어…….”

건너편 베네르 백작뿐만 아니라 옆에 에이먼 백작도 넋을 놓고 둘의 싸움을 바라봤다.

아마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거다.

나도 검로를 눈에 겨우 담는 게 고작이니까.

“크윽……!”

마침내 둘 사이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침음의 주인은 다름 아닌 프리아나였다.

계속된 공격으로 서서히 쌓여 있던 마나가 고갈되고 있는 것이었다.

반면 크로드는 여전히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카가각!

마지막 공격을 끝으로 프리아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숨을 헐떡였다.

“허억……! 허억……!”

“끝인가?”

“이… 자식이……!”

“그럼 이제 내 차례군.”

크로드는 검을 허리춤에 가져다 댄 채로 자셀 잡았다.

일순간이지만 그의 오른쪽 팔이 불룩하게 부풀어 오르는 걸 느꼈다.

콰직.

아까와는 전혀 다른 결의 발자국 소리다.

마치 땅을 짓이기는 듯한 소리에 프리아나는 황급히 검을 들어 올렸다.

콰앙!

“커헉!”

벼락이라도 내려치는 듯한 굉음이 크로드의 공격에서 터져 나왔다.

가까스로 막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프리아나는 검 채로 몸이 붕 뜨며 볼썽사납게 땅에 처박혔다.

“이런… 젠장할……!”

프리아나는 힘겹게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크로드가 이를 가만히 놔주질 않았다.

쾅! 콰앙!

“크악!”

제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상대.

크로드는 그런 그를 향해 무자비하게 검을 휘둘렀다.

방금까지만 해도 속검의 기사답게 빠르고 간결한 움직임을 보였던 프리아나.

지금은 비틀거리며 크로드의 검을 겨우 받아 내고만 있었다.

“…커흐윽!”

울컥!

프리아나의 입에서 검붉은 각혈이 한 움큼 흘러나왔다.

오러 소드는 양날의 검이다.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는 검이지만, 이처럼 실력에 차이가 난다면 내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고작해야 수 분간 이뤄진 공세에 프리아나는 저렇게 된 거다.

이게 랭크 5와 랭크 6간의 싸움.

발할라 시스템에선 레벨 한두 개 차이 정도는 숱하게 뒤집히기도 한다.

하지만 여긴 ‘랭크빨로 세계정복!’의 세계.

랭크가 모든 걸 지배하는 불합리한 세상.

그게 이 소설 속 세상이다.

“네놈의 검은 너무나 가볍다.”

“그런…….”

“단순히 빠르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한 방 한 방, 적을 분쇄해 버릴 힘을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위협적인 검술이 되는 거다.”

“으윽…….”

크로드는 빈사 상태의 프리아나에게 주절주절 이야길 늘어놨다.

저와 비슷한 검술을 쓰는 프리아나에게 모종의 유대감 같은 걸 느낀 듯했다.

‘하긴. 그렇게 무뚝뚝하던 녀석이 디아랑 처음 싸울 때 주절주절 검술 지도까지 했던 놈이니.’

악역이긴 하지만 일종의 검술 스승이기도 했던 녀석이다.

기사치고 너무 아티팩트에만 의존한다느니, 중간중간엔 마법도 섞어 주는 게 좋다느니 하며 말이다.

결국엔 제 손으로 키운 디아한테 죽지만.

“닥…쳐라……!”

프리아나는 토혈을 하고서도 다시 꿋꿋이 일어섰다. 크로드는 그런 그를 보곤 입가에서 언뜻 미소가 스쳤다.

‘나랑 얘기할 땐 칼로 쑤셔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았던 녀석이…….’

“그래. 알겠다.”

크로드는 다시 한번 자세를 잡았다.

“이제 끝내 주지.”

크로드는 다시금 오러 소드를 뿜어냈다.

프리아나는 마지막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 그에게 맞섰다.

…콰앙!

이내 또 한 번의 격돌이 이어지고.

이변은 없었다.

* * *

“계속해야 하나?”

프리아나는 만신창이가 된 채로 바닥에 쓰러졌다.

랭크 5의 괴물.

그런 그가 어디서 온지도 모를 기사에게 패배했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법관은 입을 헤 벌린 채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도 이번 결투의 자초지종은 대강 들어 파악하고 있었다.

임페라 백작을 블랭크로 만드는 것, 그걸 시작으로 귀족들 간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것.

혹시라도 베네르 백작이 마음을 돌리면 그것을 저지하는 역할을 갖고 있었다.

애초에 프리아나가 지는 건 전혀 염두해 두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가 졌다.

국왕의 후원을 받는 제니스 기사 학교 출신의 천재가.

“어…….”

“법관.”

“에? 아! 으응…….”

법관은 저도 무슨 소린지 모를 옹알이만 계속했다.

보다 못한 다른 법관 하나가 대신해서 나섰다.

“스, 승자! 임페라 백작가!”

“와아아아!”

자리에 모인 관중들 가운데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함성이라 해 봤자 일레느와 나 둘뿐이었지만.

“허…….”

에이먼 백작도 현실이 믿기지 않는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랭크 6의 대행인뿐 아니라 승리까지 한 사실이 믿기지 않아 보였다.

자신이 죽거나, 이안이 구한 대행인이 죽는 걸로 끝날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공자님! 우리가 이겼어요!”

“크흐흠……. 아무래도 트라이어스 님의 가호는 우릴 향해 있나 봅니다?”

난 기뻐 방방 뛰는 대신 베네르 백작의 심기를 살살 긁었다.

“으으…….”

질 거라고는 일말의 예상도 하지 않았던 그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로 부들댔다.

‘흐흐! 쌤통이다!’

“아! 그건 그렇고. 아까 말씀 나눴던 대로 발디그 던전의 소유권. 그것도 잘 받아 가겠습니다?”

“뭐, 뭐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가……! 무효다! 이건 모두 무효야!”

이 소인배 백작놈. 여기서 억지를 부리시겠다?

하지만 재판을 승리한 이상, 주도권은 우리에게 있었다.

“무효라구요? 법관님들마저 합석한 자리에서 이뤄진 정.당.한. 결투 재판이 무효라니……. 그건 반역이나 다름없을 텐데요?”

“그, 그건…….”

베네르 백작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법관의 눈치를 살폈다.

법관도 놀란 건 마찬가지지만, 약속은 약속이다.

약속을 지키라고 있는 게 법관인데, 베네르 백작이 생떼를 부린다 해도 받아 줄 순 없었다.

“그, 그의 말이 맞소. 약속했던 대로 발디그 던전의 소유권은 임페라 백작가로 귀속될 것이오.”

“아악……!”

베네르 백작은 그만 화를 못 이기곤 게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백작님!”

같이 행차한 시종들이 뒤늦게 그에게 달려들었지만 이미 그는 정신을 잃은 뒤였다.

“거, 적당히들 처리하시고.”

이대로 콱 죽어 버렸으면 좋겠지만 그러진 않을 거다.

며칠 끙끙 앓다가 다시 일어나겠지. 또다시 우리 가문을 건들려 할 테고.

“쯧.”

난 쓰러진 베네르 백작을 뒤로하고 크로드에게 향했다.

“어쩔 거야? 이 친구는?”

쓰러진 프리아나를 두고 하는 소리였다.

결투 재판에서 승리하면 상대의 생사여탈권을 갖게 된다. 가차 없이 목을 베어도 되고, 아니면 왼손을 베어 내 블랭크로 만들어도 된다.

모두 크로드의 맘에 달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프리아나를 죽이진 않았으면 했다.

그는 장차 아이소테르의 기사단장이 될 남자다.

그런 그가 여기서 죽어 버린다면?

소설의 흐름이 더욱 걷잡을 수 없이 뒤엉켜 버릴지도 모른다.

이미 내가 어지르고 있었지만, 최대한 변수를 줄여야 한다.

‘애초에 여기서 임페라 백작가가 이긴 것부터 문제지만.’

비슷하지만 전혀 다르게도 볼 수 있는 문제다.

깡촌의 거지 백작가가 망하지 않고 버텼다.

이는 나에겐 큰일이지만 대륙의 큰 그림을 볼 때 그리 큰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리아나는 달랐다.

기사단장으로서 주인공과 생길 인연 자체가 사라진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됐다.”

“됐다고?”

“내가 약속한 건 어디까지나 결투에서 이기는 것뿐. 상대의 목숨까지 거두기론 약속하지 않았다.”

‘휴!’

속으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됐건 죽지만 않는다면 미래에 대한 영향이 그나마 적지 않을까 싶다.

“…….”

크리드는 쓰러진 그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갤 돌렸다.

“그럼. 저흰 이제 가 봐도 되죠?”

“그, 그렇소.”

법관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베네르 백작님 일어나시면 말씀 좀 잘 부탁드릴게요? 아셨죠?”

“으음……. 그리해야겠지요…….”

그렇게 난 콧노래를 부르며 임페라 백작령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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