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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5화 (15/222)

15화

에이먼은 젊었을 적 입었던 전투복을 꺼내 들었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붉은 로브.

이젠 세월에 풍화돼 옅은 분홍색에 가까웠다.

색이 바랜 아티팩트들을 살피던 그는 한 번 직접 입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흡!”

젊었을 적만 해도 낭낭하게 남던 허리춤이 꽉 조이다 못해 터질 지경이고.

손에 딱 맞던 마법구는 어딘가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엔 이렇게 차려입으면 꽤나 멋져 보였는데.

지금은 뭐 눈꼴사납기 그지없는 차림새다.

“…수선을 좀 해야겠군.”

앞으로 한 달 안에 수선뿐만 아니라 전투 연습까지 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

전투복을 차곡차곡 개던 백작은 고민에 빠졌다.

원인은 다름 아닌 그의 망나니 아들 때문이었다.

‘결투 재판이라면 문제없습니다. 제가 나가든, 대행인을 구하든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아…….”

아들의 폭탄 발언을 떠올린 그는 한숨만 푹 내쉬었다.

“원래부터 미친 놈인 건 알았다만…….”

맨날 술만 처마시고 사람들 줘 패고 다니는 개망나니 아들.

하지만 그런 아들이어도 에이먼에겐 소중한 자식이었다.

그런 아들이 결투 재판이라니!

때문에 수십 년간 책상에만 앉아 있던 그가 어려운 결정을 내린 거다.

싸우다 죽는 한이 있어도 아들만은 지키겠다고.

그런데 되려 자기가 알아서 해결하겠다니?

그러면서 당차게 대행인을 구했다고까지 했다.

대행인.

사실 그게 제일 좋다.

결투에서 져도 목숨을 잃는 건 대행인이지 자기가 아니었으니까.

문제는 돈이다.

베네르 백작가에게 뺏기고 뺏겨 남은 거라곤 쥐꼬리만 한 영지민 세금밖에 없는 거지 백작가.

그런데서 쓸 만한 대행인을 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하지만 왠지 모르게 ‘어쩌면 혹시?’라는 생각이 자꾸만 자라났다.

‘랭크도 어디선진 모르겠다만 올리긴 한 것 같던데…….’

에이먼은 홀로 상념에 잠겨 있다 고갤 홰홰 저었다.

17년간 대부분을 망나니 짓거리만 하던 아들이다.

그런 아들이 하루아침에 개과천선 했을지, 아님 그저 미쳐 돌아 버린 건지.

뭐가 더 가능성 있는지는 그도 잘 알았다.

“솜씨 좋은 신관이라도 불러야 하나…….”

* * *

호화스런 가구로 가득한 방에 한 남자가 들어섰다. 조금은 특이하게 꾸며진 방이었다.

으레 귀족집들이 그렇듯 벽엔 자신의 초상화 같은 걸 걸어 놓기 마련이다.

하지만 벽에 걸린 것들은 마법이 부여된 아티팩트들뿐이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연관성 없이 이것저것 잡다한 것들이다.

아마 이 방에 처음 들렸다면 요상스런 인테리어에 고갤 갸웃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방의 주인.

베네르 백작에게 있어서 이 아티팩트들은 의미가 남달랐다.

모두 임페라 가문에 빼앗겼던 아티팩트들이다.

베네르 백작은 적들에게 되찾은 아티팩트들을 전리품마냥 벽에 걸어 놓은 것이었다.

방의 한가운데선 생쥐 같은 수염을 기른 베네르 백작이 홀로 앉아 있었다.

그는 따끈한 홍차 한잔을 홀짝이며 상념에 잠겨 있었다.

“결투 재판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주 좋아.”

베네르 백작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차 한잔하면서 요깃거리라도 하나 집어먹는 그였지만, 적영지에서 들려오는 낭보만 들어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후후.”

그의 앞에선 후줄근한 차림새의 남자가 고갤 조아리고 있었다.

보기엔 평범한 정원사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의 진짜 정체는 주변 영지에 흩뿌려 놓은 첩자들을 관리하는 자.

들키기만 한다면 귀족들 간의 정쟁에서 나락으로 갈 게 뻔한 짓이지만. 자고로 안 들키면 안 한 거니까.

지금껏 베네르 백작이 바라는 대로 일도 척척 해 온 남자다.

“알고 있겠지? 이번 계획에 얼마나 많은 자원이 투입됐는지.”

“물론입니다.”

백작은 옅은 편두통을 느꼈다.

왕국 법관들에게 들어간 뇌물을 떠올린 탓이었다.

‘망할 돼지 새끼들. 뭔 놈의 돈을 그렇게나 밝히는지.’

하지만 결투 재판이 진행되고 나면 끝이다.

임페라 백작은 보나마나 패배할 테고. 그럼 허수아비만 남은 임페라 백작령을 쪽쪽 빨아먹기만 하면 된다.

“요전번에 말했던 기사 녀석은 어떻게 됐지?”

“제니스 기사 학교 출신으로 잘 준비해 놨습니다. 말씀하셨던 대로 임페라 녀석의 왼손을 뎅겅! 해 달란 것도 일러 두었구요. 아마 지금쯤 임페라 백작가로도 서신이 갔을 겁니다. 결투 재판을 준비하라고 말이죠.”

“후후! 아주 좋아!”

일이 한 번 잘 풀리려니 이렇게도 잘 풀리는구나.

이게 다 임페라 백작가의 망나니 아들 놈 덕분이다.

놈이 멍청하게 도박빚을 지는 바람에 그나마 남은 가문의 재산 대부분을 날려먹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듣기론 얼마 전엔 술에 절어 길바닥에 쓰러져 있기까지 했다던데.

이대로 에이먼 임페라가 블랭크가 된다면, 남은 건 그의 망나니 아들놈이 자멸하기만 기다리면 된다.

“드디어!”

수십 년간에 걸쳐온 두 가문의 악연.

이제 그 종지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 * *

어느덧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이름 : 이안 임페라.]

랭크 : 2(마법), 3(검술)

“하. 더럽게 안 오르네.”

한 달간 무던히 노력했지만 검술 랭크만 3까지 오른 게 전부다.

이게 바로 첫 번째 벽.

랭크 3과 4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벽이었다.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보이지 않는 벽 같은 게 길을 꽉 가로막는 느낌이다.

차라리 발할라 시스템은 편한 축에 속했다. 게임마냥 경험치량에 따라 레벨이 올랐으니까.

‘이건 깨달음의 문제가 아니다.’

깨달음의 문제는 아니었다.

보통 이 벽을 뚫으려면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영약으로 억지로 마나량을 늘린다.

하지만 거지 백작가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둘째는 타인과 검을 섞는 거다.

그럴수록 자연스레 마나가 스며들고 랭크 상승의 계기가 된다. 이것도 불가능했다.

보통 이런 방법은 검술 스승을 두고 하는데, 말했다시피 난 거지 백작가니까.

‘마나가 느껴지기만 하고 몸으로 빨리질 않으니 이거 원.’

재능의 벽이란 게 이런 걸까. 주인공 동료 녀석들은 혼자 가부좌만 틀어도 랭크가 쫙쫙 오르던데.

‘마물 사냥이라도 할 걸 그랬나…….’

그게 제일 좋은 마지막 세 번째 방법.

재능도 없는 쓰레기 몸뚱이라도 몬스터 사냥을 하다 보면 결국엔 랭크가 오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사방에 베네르 백작의 끄나풀이 숨어 있을 테니까.

난 결투 재판 당일까지 철없는 망나니 아들로 있어야 했다.

그래야 베네르 백작이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할 거고, 랭크 5의 대행인만으로 승리를 확신할 거다.

‘크로드를 섭외해 놓길 잘했지.’

크로드라면 랭크 5의 대행인쯤은 손쉽게 발라 버릴 거다.

그런 일은 상상도 못할 테니 베네르 백작 꼴이 기대됐다.

“잠깐… 흐음…….”

순간 머릿속에서 괜찮은 계책 하나가 떠올랐다.

안정적으로 랭크를 올리면서 베네르 백작에게 빅엿을 선물할 수 있는 걸로다가.

“흐흐…….”

일단 그건 나중에 하기로 하고.

지금은 결투가 약속된 발디그 던전으로 향할 때다.

발디그 던전.

이번 결투 재판은 발디그 던전 앞에 마련된 공터에서 진행되기로 했다.

하고 많은 장소들 중에서도 여길 고른 건 베네르 백작이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임페라 가문의 소유였던 던전이다.

그런 데서 결투를 한다?

다분히 의도가 있어 보였다.

‘하긴. 놈은 에이먼이 결투에 나설 거라 예상할 테니.’

이른바 기선제압이다.

빼앗긴 영토 위에서 에이먼의 기를 팍 죽이고 시작하겠다는 거다.

미안하지만 결투에 나서는 건 에이먼이 아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할 대행인이지.

이윽고 약속된 시간이 다가오자 에이먼 백작이 걸어 나왔다.

아마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다면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억지로 품을 늘린 로브를 겨우 뒤집어쓴 에이먼의 모습은 어색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만큼은 단호한 결의로 가득했다.

누가 그를 비웃으랴.

망나니 아들놈을 위해 사지로 내달리는 아비의 모습을 보고.

“아들아.”

“예. 아버지.”

“그래도 고생했다. 네 나름대로 노력 하긴 했을 텐데. 결과가 이러니 아쉬울 따름이다.”

“그게…….”

“괜찮다. 내 이래 봬도 한때 강성했던 임페라 백작가의 가주 아니더냐? 그까짓 결투 재판. 가볍게 처리하고 오마.”

“…….”

애써 담담한 척하는 그의 모습에 맘이 짠해졌다.

같은 인간으로서 느끼는 연민의 감정. 괜시리 눈시울이 붉어질 것만 같았다.

지금이라도 크로드에 대해 얘기할까 하다가 그만뒀다.

크로드는 영겁의 기사단 소속이었던 자다.

괜히 미리 얘길 꺼냈다가 에이먼이 알아차리기라도 하면 귀찮아진다.

어찌 됐건 간에 그도 아이소테르 왕국을 섬기는 귀족이니까.

‘나중에 얘기하면 되겠지. 뭐.’

* * *

“놈들은 언제 오는 게지?”

“미리 마차를 보내 놨으니 금방 올 겁니다.”

“흐흐! 도살장에 끌려오는 돼지 꼴이구만!”

베네르 백작은 흰 이를 드러내기까지 하며 킬킬댔다.

드디어 가문의 숙원이 끝나는 시간이다.

이대로 임페라 백작을 불구로 만들고 놈의 백작령을 꿀꺽! 하는 일만 남았다.

그런 베네르의 옆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짧은 단발에 곱상하게 생긴 젊은 기사였다.

가벼운 흉갑만을 입고 얇고 긴 검을 쓰는 게 제법 날렵해 보였다.

그가 바로 비싼 값 주고 구해 온 대행인.

프리아나라는 사내였다.

그를 한번 슥 훑어보곤 베네르 백작은 확신했다.

‘이자라면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다!’

처음 프리아나를 봤을 때 베네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게 검술 랭크 5의 괴물이라고 들었는데, 얇은 검이며 가벼운 흉갑을 보니 그리 강해 보이진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의 검무를 보자마자 깨달았다.

이자는 어마 무시한 강자라는 걸.

‘제니스 기사 학교 출신이라더니, 거짓말이 아니었어!’

그가 첫 검무를 뽐냈을 때가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돈이 한두 푼 깨진 것도 아니고.

수천 골드가 들어간 마당에 난생처음 보는 이를 대행인으로 내세울 순 없었다.

간단한 검술 시범이라도 보여 달라며 내놓은 볏짚.

그걸 베어 보라는 가벼운 요청이었다.

프리아나라는 사내는 살짝 불쾌한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순순히 따라 줬다.

베네르 백작이 숨죽여 프리아나의 검무를 살피던 그때.

후웅!

일순간 가벼운 바람이 연무장에 들이닥쳤다.

그런데 그때.

프리아나는 별안간 검술을 보여 주다 말고 뒤돌아서는 게 아닌가.

이런 깡촌에 사는 백작이라고 무시하나?

하는 생각이 들던 찰나.

…서걱!

연무장 한가운데에 놓여 있던 볏짚이 두 갈래로 쪼개졌다.

“허억!”

충격적이었다.

베네르 백작 또한 검술 랭크 4의 나름 힘깨나 쓰는 양반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눈으로도 프리아나의 검무를 좇지 못했다.

그것이 랭크 4와 랭크 5의 벽.

정정당당한 결투라면, 랭크 4는 죽었다 깨어나도 랭크 5를 이기지 못한다.

백작도 익히 알고 있던 진리였지만 새삼스레 체감됐다.

그의 검무에 소름이 돋은 건 덤.

그런 자가 자신의 대행인으로 나서 준다.

백작은 가슴 깊이서부터 자신감인지 자만심인지 모를 무언가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끝이다! 망할 임페라 놈들!’

베네르 백작이 옆에서 비열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프리아나는 저만의 생각에 잠겼다.

‘하…….’

검술의 귀재들만이 모이는 제니스 기사 학교를 졸업한 그였다.

그 즉시 왕국의 기사단으로 스카우트 돼도 이상할 게 없는데, 이딴 깡촌에서 무슨 개고생인지.

‘그분’의 명만 아니었더라면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을 거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궁금했지만 얼른 고갤 털어 버렸다.

그는 주인을 섬기는 하인이다.

하인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만이 해야 할 일. 의구심 같은 건 허용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그래. 그게 그분의 명이니까.’

이까짓 깡촌에서 하는 결투 재판이니 별 볼 일 없는 자들만 나올 거다.

높게 쳐 줘 봐야 랭크 4?

프리아나는 고작 그 정도 실력을 가진 자에게 진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하루라도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본국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오늘까지만 참자.’

해가 하늘 꼭대기를 가리키자 약속했던 대로 임페라 가문의 일원들이 도착했다.

살집이 두툼하게 오른 임페라 백작과 그의 아들. 마지막으로 시중들러 온 시종 하나가 끝이었다.

‘대행인은 없는 건가.’

프리아나는 곧장 나타난 이들을 훑어봤다. 에이먼이야 말할 것도 없이 결투와는 동떨어진 체구였다.

한 가지 의외였던 건 에이먼의 아들이었다.

맨날 술에 절어 사는 망나니 놈이라 들었는데, 태를 보면 검을 다룰 줄 아는 자 같았다.

그래 봐야 프리아나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약한 건 변함없었다.

그렇게 간단한 탐색이 끝났고. 뒤이어 왕국 법관까지 나타나 재판의 시작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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