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회복 마법을 곁들인 수련은 무식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어깨가 넓어지고 사지가 두툼해진 게 느껴질 정도였다.
거기다 매일 삼시세끼 국밥으로 영양까지 든든하게 채워 줬으니 단순한 지방 덩어리나 붓기도 아니었다.
회복 마법을 연신 퍼부어 댄 덕에 체내의 마나가 늘어나긴 했지만, 아직 눈에 띌 만한 랭크 상승은 없었다.
워낙에 수련이랑은 담을 쌓고 살던 놈이라 하루 아침에 엄청난 랭크 상승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그래도 하위 랭크 놈들은 무난하게 이기겠지.’
하위 랭크.
첫 번째 벽인 랭크 3과 4 사이에 자리 잡은 거대한 벽.
그전까진 랭크 간 차이가 그닥 크지 않다.
검술 랭크의 경우엔 오러를 뽑아내지도 못하고, 마법 랭크는 주문 시전 시간이 오래 걸려 크게 위협적이지도 않다.
적당히 근력과 눈대중만으로도 커버가 된다는 말이다.
콰악.
주먹을 불끈 쥐자 단단한 주먹 위로 힘줄이 불룩 솟아 나왔다. 힘의 차이가 확실하게 느껴졌다.
“요즘… 바쁜가 보구나.”
“아. 네. 그렇습니다.”
맞은편에 앉은 에이먼이 조금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시간이 좀 애매해서 연무장이 아니라 에이먼과 함께 아침 식사 자리에 함께했다.
물론 먹는 건 한 솥 잔뜩 끓여 놓은 국밥이었다.
‘내 입맛엔 딱인데. 이게 별론가?’
에이먼도 궁금하다길래 한 번 먹어 본 걸로 아는데, 반응은 일레느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에이먼의 죽에도 고기가 많이 들어 있었다.
“…고생이 많구나.”
에이먼의 말을 들은 난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이안의 몸뚱이에 갇히고 난 이후로 줄곧 듣지 못했던 다정한 말투.
하지만 그의 말투 한구석에선 왠지 모를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이제야 개과천선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편으론 아쉬웠다.
왜 하필 지금인 것일까.
가문의 앞날이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지금. 어쩌면 임페라 가문이 몰락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는 이제 와서 마음을 바꾼 걸까.
그렇다 해도 개과천선한 아들을 나무란다는 건 부모로서 있을 수 없는 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아니 늦었지만 아들이 새로이 일어설 수 있도록 밀어 주자.
에이먼의 짧은 말 한마디에서 그의 복잡한 심경이 느껴졌다.
“뭐 필요한 건 더 없느냐? 내 힘이 닿는 한 도와주겠다.”
에이먼은 자신의 아들을 향해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머리가 반절은 희끗희끗해진 중년 아버지의 모습. 그가 퍼먹고 있는 죽 때문인지 더 안쓰럽게 느껴졌다.
고기가 들어갔다 해도 죽은 죽.
내 의도와는 다르게 아끼고 있는 것이 터였다.
남이 봤을 때 국밥의 비주얼 역시 죽과 다를 바 없어 보일 테니까
‘가난하다고 해도, 먹는 거라도 좀 잘 챙기지. 죽이랑 빵 말고 다른 건 없나.’
제일 서러운 게 그거다.
좋은 집에 못사는 거? 추레한 옷을 입고 다니는 거? 그것도 충분히 서럽지만 더 서러운 건 따로 있다.
음식 때문에 구차하게 빌빌 대면서 사는 일.
굳이 따지자면 방금 말한 셋 다 못하는 백작 가문이지만.
고작 몇 푼 아끼겠다고 백작씩이나 되는 양반이 빵에 죽이나 퍼먹고 있는 삶은 그닥 유쾌하지 않았다.
“아직까진 없습니다. 나중에 생기면 말씀드리죠.”
‘영약이라도 구해 줬음 좋겠다만……. 우리 영지에서 그건 좀 무리지.’
“으음……? 그래. 그럼 언제든지 말해 주거라.”
“예, 아버지.”
에이먼은 아들의 의외의 발언에 눈썹을 움찔거렸다.
이안이 개망나니 새끼긴 했지만, 에이먼에게 이안은 그저 어린 아들일 뿐이다.
드디어 정신 차린 아들에게 무언가라도 해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에이먼은 조금은 섭섭한 얼굴로 얌전히 죽을 퍼먹었다.
“쩝쩝.”
나도 별 말 없이 국밥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평소와 똑같은 맛이었지만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뒷맛이 허전했다. 에이먼이랑 같이 먹어서 그런가?
‘흠……. 뭔가 좀 달달하면서도 새콤한 게 땡기는데.’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어도 맨날 같은 거만 먹으면 질리기 마련이다.
슬슬 다른 메뉴도 찾아보면 좋을 것 같은데.
“새콤달콤한 먹을 거라…….”
* * *
어렸을 때 기억이 난다.
시골집에 가면 실컷 밥 다 먹었는데도 굳이 과일을 깎아 주시던 할머니.
그땐 뭐하러 그러나 싶었는데 나이 들고 보니 이해가 갔다.
밥을 다 먹었으면 후식도 먹어 줘야 하는 법.
당분간 고기는 충분할 테니 이제 디저트를 챙기러 갈 때다.
푸르륵……!
“고생했다.”
말을 타고 온 덕에 점심때가 조금 넘어서 도착했다.
몇 시간을 꼬박 달린 말이 힘겨운 투레질을 해 댔다.
임페라 가문엔 말이 단 한 마리밖에 없었다. 뭔 놈의 백작령이 이리도 가난한지.
여물도 제대로 먹지 못해 뼈가 앙상할 정도로 맥아리가 없는 말이다.
사람도 제대로 못 먹고 다니는데 짐승 형편이 더 나을 리가 있나.
날 여기까지 태우고 온 것도 용했다.
“허억!”
“임페라 백작님 아드님이시잖아?”
“그런 분이 여긴 갑자기 왜…….”
추레한 행색이 아닌 이안이 평소 입던 화려한 옷을 입은 덕에 마을 사람들은 금세 날 알아봤다.
“고, 공자님!”
예고도 없이 등장한 날 보자마자 에러벨의 촌장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백발이 형형한 일흔이 넘는 노인.
누워 있기도 힘들 것 같은 노인네였지만 방금까지 일을 하다 왔는지 양손은 흙투성이였다.
촌장은 말 옆에 납작 엎드려 절을 올렸다.
예전 이안은 엎드린 촌장을 발판으로 썼던 거 같다.
그건 아니지 않나.
탓.
“으음……?”
혼자 말에서 펄쩍 뛰어내리자 촌장이 고갤 갸웃했지만 별다른 말은 없었다.
“여기가 에러벨 맞나?”
“네! 맞습니다!”
“제대로 찾아왔군.”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아 오는 게 꽤나 고생했다.
“하오나 공자 전하……. 이런 누추한 곳엔 무슨 연유로……?”
“찾는 게 있어 잠시 들렸다.”
“아아……. 그러셨군요. 뭐든 말씀 내려 주시면 즉시 따르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내 눈칠 살피느라 흘긋거리긴 했지만 따로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이안의 개망나니 짓거린 이미 유명한 터라 괜히 엮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이들 가운데서 눈에 띄는 이가 하나 있었으니.
“허억!”
수레에 과일을 싣고 끌고 가던 젊은 남자 하나.
그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백지장마냥 하얗게 질리더니 헛바람 들이키는 소리까지 냈다.
주점에서 고래고래 내 욕을 해 대던 주정뱅이.
지난번 만남 때완 다르게 술에 취하지 않아 지금은 낯빛이 평범했다.
오히려 벌겋게 달아올랐다기보단 핏기가 싹 가셨다고 해야 하나?
“오랜만이네?”
“으으……!”
“이름이… 람이었나?”
그때 당황한 듯한 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제 손주를 아십니까?”
“아! 촌장 손주였어? 이거 세상 참 좁네.”
람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도망치자니 결국 잡힐 테고, 다가가자니 가만두지 않을 테고.
‘딱히 그럴 생각은 없다만.’
윗사람 뒷담 까는 거야 으레 있는 일이다. 더군다나 상대가 개망나니 이안인 걸 감안하면 욕 안 하는 게 이상한 거지.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나으리!”
람에게 다가가자 녀석은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아 벌벌 떨었다.
“죽을죄? 설마 이 녀석이……!”
촌장은 람의 말에 되려 놀라 눈살을 찌푸렸다.
“제 손주 녀석이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제가 혼쭐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공자님의 귀하신 손을 더럽힐 순 없습니다!”
촌장은 날 두둔하는 척 말했지만, 속내는 달랐다.
이안의 눈 밖에 난 이상 몸 성히 보전하긴 어려울 터. 그러니 자신이 다그칠 테니 제발 용서해 달라는 의미였다.
“별건 아니야. 술 한잔하려는데 웬 녀석이 내 욕을 신나게 하더군. 덕분에 술은커녕 물 한모금도 제대로 못 마셨고.”
“그, 그런…….”
촌장은 낯빛이 시커메졌다. 귀족 모욕죄는 중죄. 거기다 대상이 이안이라면… 구제가 불가능하리라.
마음이 급해진 촌장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다 제가 잘못 가르친 탓입니다! 차라리 저를……!”
“됐어.”
“네! 이 늙은이 목 하나로 만족하신다면……. 네?”
“아니. 하. 참. 여긴 뭐 이리 다들 극단적이야? 됐으니까 이만 가 보라고. 손자랑 잠깐 얘기 정도는 해도 되겠지?”
“예? 아… 예.”
촌장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미로 생각하는 듯했다.
“얘기만 끝나고 금방 돌려보낼 테니까 걱정 말고.”
“저, 정말이십니까……?”
“넌 이리 오고.”
“네,네엣!”
긴가민가해하는 촌장은 돌려보내고 람을 불렀다.
나이 지긋한 노인네한테 꼬박꼬박 공자님, 공자님 소리 듣는 것보단 그나마 좀 젊은 친구가 낫지.
“람.”
“옛! 공자님!”
“에러벨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겠나? 너도 알다시피 내가 영지 상황에 대해선 빠삭하지가 못해서.”
“허윽…….”
“빨리.”
“네! 그럼…….”
람은 살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에러벨에 대해 설명했다.
주 수입원은 뭐고, 마을에서 세금은 어떻게 내는지까지. 촌장의 손자라 그런지 그런 부분에 있어선 빠삭했다.
“흠. 과일은 주로 어디서 채집하지?”
“이, 이쪽 산에서 주로 채집합니다. 과일 나무가 모여 자라는 곳이 있어 주기적으로 가지도 치고 있습니다요.”
채집은 별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었다.
산짐승이나 마물이 가끔 나타나긴 하지만, 따로 사냥꾼이 있어 채집에 큰 방해 요소는 없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가 두 개 있었다.
일단 과일의 수확량을 떠나, 팔기 어렵다.
마을 가서 팔아야 하는데, 가난한 임페라 백작령에서 팔면 가격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옆 영지까지 가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21세기야 다 인터넷으로 연결되고 길도 잘 닦여 있어 크게 문제될 건 없다.
하지만 여긴 인터넷은커녕 칼과 마법이 난무하는 세상.
인터넷이 있을 리가 없고 이런 깡촌까지 길이 닦여 있을 리도 만무했다.
‘이러니 세금을 걷어도 돈이 안 되지.’
거기다 도적까지 있다고 들었다.
자연스레 에러벨 마을엔 도는 돈이 적었다.
‘총체적 난국이구만.’
돈으로 세금을 걷는 게 여러모로 편리하긴 하다만, 지금은 잠시 바뀔 필요가 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채 걷다, 과일 나무 하날 발견했다.
붉은 과일이 잘 여문 게 꽤나 관리에 신경 쓴 태가 났다.
“이건가?”
“네! 에러벨 마을의 명물. 레드핀입니다요.”
“레드핀.”
희한한 이름이다. 겉은 빨간데 속은 물컹거리는 걸 보면 사과 같지는 않고…….
“먹어 봐도 되는 건가?”
“예? 그야… 당연히 됩니다. 이 땅은 공자님의 것이니까요. 아하하…….”
뭔가 잘못 이해한 듯싶었지만 넘어가자.
꽈즙!
레드핀을 껍질째 한입 베어 물자 향긋한 과즙이 터져 나왔다.
혀가 짜릿할 만큼 새콤하면서 달달한 게, 오렌지 비슷한 맛이지 싶다.
‘이야……. 이거 맛나네.’
국밥도 맛있긴 하다만 매일 먹어서 그런지 좀 질린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다 상큼한 과일이 한입 들어오니 혀끝뿐만 아니라 기분까지 상쾌해지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통과다.
세금으로 돈 대신 받기에 말이다.
‘에이먼이 허락해 줄지가 문제긴 하지만…….’
아마 해 줄 거다. 어차피 세금도 몇 푼 되지도 않는 돈이고.
“이 안쪽으로 주욱 레드핀이 열리는 건가?”
“실은…….”
“뭐지?”
“여기서 좀 더 들어가면 블루핀이 자랍니다. 레드핀보다 더 달고 향도 진하지요. 하지만 이 안쪽은 놈들이 수시로 나타나는 터라…….”
“놈들이라면…….”
람은 착잡한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아무 힘도 없는 그들에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한테는 달랐다.
레드핀으로도 충분히 맛있는데 더 맛있는 거라면…….
“가자고.”
“예?”
“가자니까. 그 블루핀이란 놈 맛 좀 보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