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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0화 (10/222)

10화

고요한 아침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이른 아침.

독안개가 자욱하고 시뻘건 간헐천이 폭발하던 옛 세상에 비하면 천국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왜 이리 가슴 한구석이 찝찝한 걸까.

“흐으…….”

이게 다 이안 때문이다. 아니, 하필이면 골라도 이딴 쓰레기 새끼 몸뚱이로 들어와 버린 탓이다.

누가 왜 이런 그지 같은 짓거릴 꾸몄는지 여전히 알 길이 없다.

짝!

두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하얀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세게 쳐서 그런지 조금은 잡생각이 날아간 기분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눈앞에 급한 불은 끈 거잖아?

결투 재판에선 약속대로 크로드가 나와 줄 테고, 에이먼이 블랭크가 돼 버리는 급행열차는 일단 막았다.

하지만 그것 하나로 거지 백작가가 되살아나길 기대하기는 어렵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

이안은 너무나도 약해빠졌다. 강해져야 한다.

“그러니까 이른 아침부터 이렇게 일어난 거 아니겠어?”

랭크를 올려서 그런지 뿔돼지와 싸움 도중 얻었던 상처는 대부분 치료됐다.

사흘간 익힌 ‘힐’ 덕분에 몸은 대부분 치료가 되었다.

확실히 랭크 2가 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으응……. 공자님……. 말씀하셨던 대로 준비했어요.”

일레느는 졸린 눈을 부비적거리며 우묵하게 파인 그릇을 가져왔다.

고기를 가져온 날에 지시한 것 때문에 요 며칠 고생한 듯 보였다.

“그래. 한 번 보자.”

우묵하게 파인 그릇에선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향이 솔솔 피어올랐다.

뭐랄까……. 김치에 피자랑 탕수육을 섞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뭐 그런 대로 먹을 만한 비쥬얼인 건 괜찮았다.

“넓적다리로 푹 우린 국물에 보리랑 채소를 넣으라니……. 이걸로 괜찮으시겠어요?”

“먹어 봤나?”

“간 보면서 먹어 보긴 했는데……. 잘 모르겠네요. 알갱이가 까끌까끌하게 씹히는 것도 좀 그렇고.”

“…됐다. 나 혼자 먹고 말지.”

그릇엔 국밥 비스무리한게 담겨 있었다.

[└소고기 국밥 레시피. 1. 먼저 사태살에 핏물을 제거하고…….]

‘랭크빨로 세계정복!’에 줄기차게 레시피 댓글을 달던 미친 놈. 고맙게도 그 녀석 덕분에 요리 레시피는 대강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재료까지 완벽하게 구할 순 없어서 뿔돼지 고기로 비슷하게나마 흉내만 내봤다.

소고기 대신 뿔돼지 고기로, 하얀 쌀밥 대린 보리로.

“후릅.”

한술 뜨자 진한 고기 육수 냄새가 입 안에 짭짤하게 퍼졌다.

이게 얼마 만에 먹어 보는 국밥이냐. 돼지 누린내가 좀 나긴 했지만 워낙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지 오히려 반가웠다.

“크허……. 이거지.”

“말씀하신 대로 고기의 반은 육포로 만들고 있어요. 아마 며칠 후면 완성될 거예요.”

“으흠. 아주 좋아.”

벌크업에 국밥만 한 게 없다.

뜨끈한 국물에 고기도 넉넉하게 넣고, 쌀밥이 아닌 게 좀 아쉽지만 보리로 비슷하게나마 맛이 났다.

맛도 좋으면서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삼박자가 고루 갖추어진 음식. 이게 완전식품이지.

“정말이지. 공자님 들어오셨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음?”

일레느는 며칠 동안 막노동에 시달린 게 억울한지 볼멘소릴 늘어놨다.

“온몸에 피까지 두르시고. 게다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살점까지 가져오시고! 정말 무슨 일 나는 줄 알았다니까요.”

“…내가 사람도 막 죽일 놈으로 보이나?”

“으음……. 헤헤.”

가만 보면 못하는 말이 없네.

뭐 이 정도는 고생했으니 넘어가 주자.

“앞으로 식사는 이걸로 내어 와라. 아버지께는 다른 걸 해 드리고. 나중에는 육포로 해도 비슷한 맛이 날 거야.”

“네! 그런데 이거……. 이름이 뭐예요?”

“이름? 음……. 그냥 영양식이라 하지.”

“영양식……. 맞네요! 영양 넘치게 생겼으니까.”

일레느가 봤을 때도 영양 넘쳐 보이긴 했나 보다.

아무튼 아침부터 국밥으로 속을 든든하게 채우고 나니 찝찝했던 기분이 한결 개운해졌다.

식사를 마치고 일레느는 빈 그릇을 챙겨 갔다.

지금 이곳은 임페라 백작가 소유의 연무장. 덕분에 아침부터 에이먼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껄끄럽단 말이지. 남의 자식 몸을 뺏었단 기분도 들고 말이야.

“끄윽.”

가볍게 트림 한 번 해 주고 연무장 주윌 둘러봤다.

대저택의 뒤뜰에 마련된 연무장은 상당히 낡아 있었다.

모래로 덮여 있어야 할 바닥은 잡초가 무성히 자라 수풀이라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목각 인형이랄 것도 없고 이래서야 그냥 버려진 공터 수준이다.

“하긴, 에이먼은 검술이 아니라 마법 쪽이니.”

이곳 연무장이 만들어진 건 이안의 할아버지 때다.

에이먼은 검술보단 마법 랭크에 치중했던 터라, 가끔씩 스킬을 난사할 때 아니곤 들를 일이 없었다. 그마저도 가주의 자리에 오르고 나선 거의 들르지 않게 되었고.

그다음 순번이 이안 이 개망나니 X끼였으니 수년간 발길조차 오지 않았었다.

“흠.”

가문의 보고에 굴러다니던 목검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아티팩트는 아니었다. 갑옷 옆에 구색이나 맞추려고 세워 둔 날 없는 평범한 목검이다.

물론 돈이 되는 것들은 이안이 팔아 치워 텅 빈 상태다.

목검은 날도 없고 값도 안 나가 팔 수 없었던 것이다.

“스읍…….”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검을 곧게 세웠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각이다. 곧게 뻗은 검신을 마주한다는 건.

과거 이진수였던 시절에 비하면 팔의 근육도 볼품없고 체내의 마나도 보잘것없다.

하지만 그때에 비하면 배 속만큼은 든든했다.

결투 재판은 크로드가 나선다면 해결된다.

하지만 그다음은?

크로드는 영겁의 기사단이다. 그것도 뼛속까지 제국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미친 놈 중에 미친 놈.

그런 놈을 내 편으로 회유하는 건 불가능 그 자체였다.

어찌어찌 결투 재판을 이긴다 해도 베네르 백작은 다음 수를 꺼낼 거다.

그리고 베네르 백작을 저지한다 하더라도 랭크가 전부인 이 세상에서 랭크도 없이 살아남을 순 없다.

뿐만 아니라 솔직한 심정으로 말하자면. 결투 재판에 크로드를 세우는 것부터 껄끄러웠다.

괜히 재수 없게 이 소설의 주인공과 대척점에 설 순 없으니까.

“뭐가 됐건 내가 강해져야 해. 남의 힘이 아니라 내 힘.”

할 수 있다.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이 있다면.

우선 가볍게 목검을 휘둘렀다.

…서걱!

허리춤까지 자란 잡초가 몇 가닥 잘렸을 뿐, 뒤에 것들은 고개만 꺾었다.

아무리 목검이라 해도 잡초조차 많이 못 베는 육체. 그게 지금 내 수준이다.

“후.”

눈을 감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살기 위해 검을 휘두르고 괴수들을 처치하던 나날. 하루하루가 살아남기 위한 지옥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 세상 사람들의 검술이 겹쳐서 떠올랐다.

이진수의 기억 속 검술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검술. 둘 사이엔 근본이란 게 달랐다.

오랜 세월 가문의 이름 아래 이어져 온 검법. 그와는 반대로 살아남기 위해 무작정 휘두르던 검법.

이따금 ‘탑’을 오르면 보상으로 검법서가 주어지긴 했다만, 어디까지나 아티팩트로 쓰이던 놈들이다.

기사 가문의 전수를 받아 쌓이고 쌓인 세월의 흔적이랄 게 전혀 없었다.

애초에 세월이고 자시고 따질 때가 아니었다.

첫 번째 대격변 이래로 십 년 만에 모조리 죽어 버렸으니까.

“일단은 검 휘두르는 것부터 몸에 익혀야지.”

검을 휘두르는 데 쓰이는 근육은 따로 있다. 단순히 어깨만 두껍다고 될 게 아니라 속에 자리 잡은 근육을 길러야 했다.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많이 휘두를수록 익숙해지고 강해진다.

“오늘은 가볍게 천 번 정도만 해 볼까?”

후웅!

랭크를 올리기 위한 첫 번째 걸음마가 시작됐다.

* * *

“…끄아악!”

마지막 천 번째 검을 휘두르자마자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았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고 사위가 핑핑 돌았다.

해가 막 뜰 때 시작했는데 벌써 해는 저물어 보이지도 않았다.

죽을 만큼 힘들긴 했지만 난 알고 있다. 이런 걸로 사람은 죽지 않는다.

“으…….”

“공자님!”

저녁을 가져다주러 온 일레느가 허둥지둥 달려왔다.

양손에 들려 있던 국밥을 가지런히 내려놓고 날 부축했다.

그래. 먹을 건 소중히 다뤄야지.

“괜찮으세요?!”

“으윽……. 죽을 맛이군…….”

“그러게 왜 안 하던 일을 하셔서!”

꼬르륵!

이 상황에도 배는 고팠다. 하루 종일 검만 휘둘렀으니 체력 소모가 어마어마했다.

“일레느.”

“…네. 공자님. 말씀하세요.”

“부탁 하나만 하지.”

“이번엔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국… 아니, 영양식 좀 먹여 줘. 내 팔이 이래서 숟가락을 못 들겠네.”

“으이구……. 알겠어요.”

일레느는 고갤 절레절레 젓더니 잠자코 내 말에 따라 줬다.

반쯤 누운 자세로 있자 일레느가 국밥을 한술 떠 입에 넣어 줬다.

하루 종일 일하면서 날 챙기느라 귀찮을 텐데. 착한 녀석이다.

“음……. 맛있군.”

“다행이네요.”

“저기 고기 좀 더 얹어서 주고.”

“여기요.”

고기까지 한 점 얹어 우물우물 씹어 먹었다.

“…이 고기. 뿔돼지 고기 맞죠?”

“사람 고기는 아니다.”

“탄원서는 왜 필요하신가 했는데. 이것 때문에 필요하셨군요.”

“…….”

“다행이에요. 무사하셔서.”

“말하지 않았나? 아직까진 죽고 싶은 마음 없다고.”

“네. 그러셨죠.”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게, 얼른 화제를 돌려야 하지 싶었다.

“쩝쩝……. 힘든 일은 없나?”

“힘들다뇨? 백작님께서 거둬 주신 이래로 한 번도 그런 적 없어요!”

“그래도 한 두 개 정도는 있을 거 아냐.”

“하핫. 정말 없어요. 공자님은 숨 쉬는 게 힘들다 생각하신 적 있으세요?”

“으음……. 없지.”

“저한테 백작가는 그런 곳이에요. 숨 쉬는 것처럼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쩝쩝.”

이거 괜한 얘길 꺼냈나. 분위기가 묘해지는데.

“게다가 공자님도 이렇게 애쓰시는데. 제가 힘들다 해서 되겠어요?”

“쩝쩝.”

“그러니 공자님은 공자님 하실 일에 집중하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릴 테니까요.”

“쩝.”

다행히 국밥 한 그릇이 깨끗하게 바닥을 드러냈다.

오늘 하루 동안 허연 돼지 국밥만 먹으니 살짝 질리는 감이 없지 않다. 내일은 고춧가루라도 타 먹어 볼까.

“다 드셨나요?”

“으음. 그래.”

“또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불러 주세요!”

일레느는 지금껏 그래 왔듯 빈 그릇을 챙겨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참으로 충성스런 시녀가 아닐 수 없다. 내 앞이라고 번드르르한 말만 늘어놓는 건 아니다.

이안이 흑마법의 제물로 바치는 순간까지도 일레느는 여기 남아 있으니까.

“후아.”

밥도 먹었겠다. 운동도 빡세게 했겠다. 이젠 회복 시간이다.

이진수로 살던 시절 어떻게서든 살아남기 위해 강해지려 애썼다. 그러면서 얻은 한 가지 편법 같은 게 존재했다.

근육은 찢어지고 재생되는 과정에서 불어난다. 자잘한 원리까진 몰라도 경험상 그랬다.

근육을 찢는 거야 금방이지만 문제는 재생이다. 회복하는 데에는 반드시 시간이 필요했다.

검에 문외한인 녀석이 하루에 천 번을 휘두른다? 회복하는 데만 며칠을 소모해야 한다.

마나란 게 없는 세상이었다면.

“힐.”

녹초가 된 양팔에 회복 마법을 시전 했다. 단순히 한 번 쓰고 끝내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퍼부었다.

지지직!

회복되는 과정에서 피부 너머로 요란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팔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으음…….”

아프긴 했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한 번 겪어 본 거라 그런지 익숙했다.

이대로 매일 근육을 찢고 회복시키길 반복한다. 간단하면서도 무식한 수련법.

영약도 뭣도 없는 거지 백작가의 공자가 쓰기엔 더할 나위 없이 적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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